“민정 씨, 내가 충고하는데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못 본 척을 하든 못 들은 척을 하든 기억상실을 했다 해도 남준 오빠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박민정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듣고 있었다.“다 말했나요?”이지원의 어안이 벙벙해하는 모습에 박민정은 일어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그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확신하면서 이민정 대스타님께서는 왜 원한이 가득한 얼굴로 저를 찾아왔을까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냉소를 흘리고는 자리를 떠났다.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지원은 예전의 도도하던 박씨 가문 아가씨일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박씨 가문의 후원을 받기 위해 박민정에게 잘 보이려 애쓰던 일을 생각하니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지금 박씨 가문은 이미 몰락했는데도 박민정은 뭘 믿고 아직도 이렇게 도도한 척한단 말인가? 이지원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이때 매니저 윤재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원 씨, 전에 가지고 싶다던 곡 말인데요, 희망이 보여요.”“정말?”“다만...”매니저가 조금 머뭇거리자, 이지원이 말했다.“뭐가 문제야? 말해 봐.”“민 선생이 해외의 마이너 플랫폼에 올린 곡이 하나 있는데 아직 저작권을 신청하지 않았어요. 제가 이 곡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분명 히트할 거예요. 우리가 조금만 편곡하면 돼요...” 매니저의 말은 그냥 표절하자는 뜻이었고 이지원은 물론 알아들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말했다.“저작권이 없다면 그 사람의 작품이라 할 수 없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이지원의 동의를 구한 매니저는 그제야 마음 놓고 작업에 들어갔다.한편 전화를 끊은 이지원은 어떻게 박민정을 상대할지 고민했다....박민정은 집으로 가지 않고 예전에 살던 하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박민정의 어머니 한수민과 동생 박민호는 하씨 가문을 말아먹은 뒤 저택까지 저당 잡혔고 그곳에는 지금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박민정은 죽음으로 위
“난 왜 본 적이 없지?”그러자 박예찬이 입을 열었다.“민기 아저씨의 신분은 아주 비밀스러워 엄마가 위험에 처하지 않은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아.”“그래서 해외에 있었을 때도 주변에 보디가드가 있단 말만 들었지, 본 적이 없었구나.”조하랑은 찹쌀떡을 먹으며 말했다. 그녀의 곁에도 전문 경호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몸을 숨기지 않고 항상 그녀와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어 한눈에 찾아볼 수 있었다.연지석은 해외에서의 신분이 특수해 그의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경호원을 보내 박민정의 가족을 지키게 했다. 십분 후, 정민기가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꼿꼿한 정장 차림으로 다른 사람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조하랑은 그를 보자마자 두 눈이 반짝거렸다.“미남이시네...”박예찬은 센스 있게 그녀에게 티슈를 건네줬다.“입 좀 닦아, 이모.”조하랑은 침을 꿀꺽 삼켰다.박민정은 자기 절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얼빠였지만 마음속 깊이 숨겨둔 사람이 있었다. 그 남자를 위해 조하랑은 27살이 될 때까지 결혼은 물론 연애도 해보지 못했다.“들어와요. 이분은 제 친구 조하랑이예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박민정의 말에 정민기는 방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이때 박예찬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말했다.“아저씨, 내일이면 단오잖아요. 들어와서 찹쌀떡 드세요.”정민기의 차갑고 딱딱한 얼굴선이 한결 부드러워졌다.“괜찮아, 고마워.”박민정은 그가 혼자 있기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찹쌀떡을 조금 담아서 그에게 건네줬다.“미리 명절 축하드려요.”“네, 고마워요.”정민기는 찹쌀떡을 받고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나간 후 조하랑은 궁금해서 물었다.“이 자식 왠지 느낌상 보디가드 같지 않은데?”“무슨 뜻이야?”“뭐랄까... 딱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느낌이 그래...”정민기가 박민정에게 주는 느낌도 보통 경호원이랑은 차이가 있었다.비록 정민기가 박민정을
박예찬은 박민정이 힘들게 자신을 돌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아무리 연지석이 괜찮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주변은 너무 위험하므로 박예찬은 엄마가 안전한 남자 곁에 있기를 바랐다.조하랑은 박예찬이 이런 궁리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녀도 옆에서 거들었다.“우리 아빠는 비록 내가 비즈니스 관계의 결혼을 하길 바라지만 소개해 준 재벌집 자제들은 다 괜찮게 생겼어.”박민정은 두 사람의 말에 당해내지 못하고 박예찬을 바라보며 말했다.“좋아.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랑이 이모를 대신해서 나가는 것뿐이지, 너에게 아빠를 찾아 주려고 나가는 건 아니야.”“알았어.”박예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TV에서 방영하던 로맨스 드라마를 떠올렸다. 사랑은 보통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며 이런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야말로 가장 쉽게 사랑이 싹틀 수 있었다. 박예찬과 박윤우는 아직 너무 어려서 엄마를 지킬 힘이 없었고 만약 국내에 있는 동안 괜찮은 남자를 찾아 엄마를 보살피게 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박민정은 이런 박예찬의 속궁리를 알 길이 없었다.밤이 되자 박예찬을 다독여 재운 뒤 박민정은 조하랑과 앉아서 대화를 나눴다. “너 내일 강연우를 찾으러 가려고?”조하랑은 부정하지 않았다.“그래, 다른 사람한테서 들었는데 내일 본가로 돌아온대. 민정아, 나 대신 선 자리에 나가줘서 고마워. 만약 이번 일로 강연우를 만나지 못한다면 난 아마 평생 후회할 거야.”박민정은 그녀를 안아줬다.“우리 사이에 굳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조하랑은 약간 목이 메어왔다.“너와 유남준은 지금 어떻게 돼가고 있어?”“그냥 그대로지 뭐...”그 말을 듣고 조하랑은 박민정을 꼭 끌어안았다.“하랑아, 나 갑자기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빚을 지는 거라는 말이 정말 맞다고 느껴져.”박민정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너와 강연우는 서로 사랑하니까. 꼭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야.”조하랑을 위로하고 박민정은 쉬러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 다섯 시에 박민정은 조하랑을 문 앞까지 바래다줬다.나가기 전 조하랑은 몹시 긴장해 있었다.“민정아, 나 오늘 어때?”조하랑은 본바탕이 아주 좋았다. 둥글고 커다란 두 눈과 계란형 얼굴에 부드러우면서도 귀여움까지 겸비하고 있었다.“너무 예뻐.”“그럼 됐어. 너 그거 알아? 난 연우를 만난다는 생각에 너무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긴장돼. 연우가 혹시라도 나를 싫어할까 봐...”“아냐, 그럴 리가 없어.”“우리 하랑이가 이렇게 예쁜데, 누가 싫어한단 말이야.”박민정이 조하랑을 안심시키자, 조하랑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문을 나섰다. 박민정은 그녀를 바래다주고 방으로 돌아갔다.“엄마.”박예찬은 왠지 벌써 깨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하랑은 새벽 3, 4시 때부터 깨나서 준비했다.“우리가 너무 떠들어서 깬 거야?”박민정이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고 물어보자, 박예찬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엄마, 하랑이 이모가 만나려고 하는 아저씨 좋은 사람이야?”박민정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래, 하랑이 이모한테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그녀는 대학교 때 강연우를 만난 적이 있었다.그는 그들 동기 중 가장 잘생긴 남학생이었지만 아쉽게도 가정형편이 별로였다.조하랑과 강연우가 같이 있으면 외모는 진짜 잘 어울렸지만, 집안 조건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엄마에게는 연지석 삼촌이 좋은 사람이야?”박민정은 멈칫하더니 아무런 고민 없이 대답했다.“물론이지. 지석이 삼촌은 우리에게 엄청 잘해주잖아.”“그럼, 우리 돌아가면 지석이 삼촌 받아주면 안 돼? 주변에 예쁜 여자가 많긴 해도 다 엄마보다 별로야. 그리고 위험하기는 하지만 엄마를 지켜줄 거라고 믿어.”박민정은 또 한 번 놀랐다.유남준의 미니 버전 같은 아들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며 박민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윽고 그는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너 어제 엄마 보고 선보러 가라며?”“내가 확률 계산을 해봤는데 엄마가 성공적으로
“아까 그 뭐야 최씨 집안 따님인가 뚱뚱한 게 꼭 돼지 같지 않아? 그러고도 무슨 자신감으로 선보러 온 걸까?”“하하하, 그냥 공룡 같던데 걸을 때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잖아.”“그리고 전에 서씨 집안 따님은 새빨간 입술이 꼭 귀신같았지...”“이번에는 누구야?”“아마 조씨 가문 따님일걸, 듣기로 해외에서 연수하고 금방 돌아왔다고 하던데...” “해외에서 돌아왔으면 분명 개방적이고 방탕할 거야.”“조금 있다 우리 앞에서 춤을 추라고 하고 잘 추면 후보 자리에 올려준다고 할까. 하하하...”안에서 들려오는 저속한 말소리에 박민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녀는 이제야 왜 교양이 있고 품위가 있는 부잣집 따님들이 맞선을 마친 후 하나같이 화내고 욕설을 퍼부으며 떠났는지 알았다.이 사람은 애초에 맞선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친구들에게 유흥을 즐기게 하고 있었다.박민정은 조하랑이 이곳에 오지 않은 걸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조하랑의 성격상 오래도록 속상해할 게 뻔했다.안내원을 따라 들어선 그곳은 원래대로라면 점잖고 품위 있는 장소여야 했지만 지금은 더없이 더럽고 지저분했다.그들은 일부러 부잣집 딸들을 자극하기 위해 품에 몇 명의 예쁘장한 술집 아가씨를 껴안고 있었다.박민정이 나타나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오우, 마스크를 쓰고 왔네.”“너무 못생겨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걸까요?”그들의 비웃음 소리가 귀를 찔렀지만 박민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시선을 혼자서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하는 메인석에 앉아있는 김인우에게로 돌렸다.누가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에 진주의 부잣집 딸들을 다 불러와 혼자서 고르고 있나 했더니 다름 아닌 진주의 황태자였다.만약 유남준이 진주의 폭군이라면 김인우는 진주의 황태자였다.한 사람은 진주 전체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진주 사람들의 생명줄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김인우는 아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기에 당연히 이번에 들어온 사람이 조
박민정의 맑은 눈과 마주친 순간, 김인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닮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박민정이었다.김인우는 그녀가 왜 맞선 자리에 나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말했다.“갑시다.”정민기는 박민정을 데리고 떠났다.땅바닥에 엎어진 그 남자는 입으로는 욕을 하며 웅얼거렸다. “가지 마! 너희는 나한테 찍혔어. 딱 기다려!”다른 재벌 집 자제들이 비아냥거리며 그를 자극했다.“장 씨, 너무 약해빠졌어. 잘났으면 복수하던가!”“그래, 소리만 지르지 말고!”그 남자도 정민기에게 손을 대려고 했지만 방금 걷어차인 고통으로 일어서지도 못했다.어려서부터 받들어 자랐기에 이런 억울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그는 기어서 일어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 혼쭐을 내주겠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인우가 그 남자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는 차가웠다.“아까 무슨 짓을 한 거야?”“그년...”경호원 몇 명은 눈치가 없는 장 씨에게 주먹을 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땅에 엎어져 피를 토했다.장 씨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직도 몰랐다.주위의 다른 재벌 집 자제들도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김인우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비서에게 물었다. “얘가 방금 무슨 짓을 했었어?”비서는 남자가 박민정을 모욕하려고 한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이 놈의 손을 남겨둘 필요가 없어.”김인우는 더 이상 선을 볼 기분이 나지 않아 박민정을 찾으러 갔다.등 뒤로 재벌 집 자제들이 애원하며 용서를 빌었다.그들은 끊임없이 흐느낄 뿐, 조하랑이 어떤 인물이며, 김인우가 왜 그녀를 위해 화를 내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아마 장 씨는 오늘 여기에서 죽어나갈게 분명했다.김인우가 파라다이스에서 나올 때 박민정은 이미 사라졌다.그는 축 처진 손을 조이며 아까 현장에 온 사람들을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원래 김 어르신께 선을 보는 모양새만 보여 드리고,
아침 일찍 유남준은 보디가드한테 박민정이 오늘 오전에 파라다이스에 갔다고 전해 들었다.“박민정이 파라다이스에는 왜 간 거야?”유남준이 아는 바에 따르면, 파라다이스는 재벌 집 자제들이 술을 마시는 장소이며, 내막은 더할 나위 없이 더러웠다.보디가드는 잠시 머뭇거렸다.“맞선 자리인 것 같습니다.”유남준이 눈매를 가늘게 뜨자 주위의 기압마저 가라앉았다.그녀가 볼일이 있다던 것이 맞선 보러 가는 것일 줄이야...유남준은 박민정을 다시 보게 되었다.그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보디가드는 유남준의 성격을 알기에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사무실을 나왔다.오후 두 시,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유 대표님.”박민정이 들어오자마자 유남준 주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그는 음험한 눈동자를 치켜들고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차갑게 물었다.“왔어?”유남준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박민정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네, 저랑 같이 갈 곳이 있다고 어제 얘기 하셨잖아요.”유남준은 대답 없이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오늘 오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어?”그는 박민정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유남준은 이미 알고 있기에 이런 물음을 물어본 것이다.그의 심문하는 듯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박민정은 한 치의 숨김이 없이 말했다. “소개팅 했어요.”유남준은 화가 나 헛웃음만 지었다.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할 줄 몰랐다.그는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고 말했다. “왜? 그렇게 공허하고 쓸쓸했어? 남자 둘로는 부족해?”공허하고 외롭다니? 그리고 무슨 두 남자?박민정은 화가 났다.유남준은 자신이 뭐라도 된 줄 아나 싶다.그녀는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유 대표님,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저는 싱글인데 왜 선을 못 보나요?”“싱글?”유남준은 더 이상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어두운 얼굴로 박민정의 팔을 휘어잡고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싱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밟아놓는 것은 참 무정한 짓이다.박민정은 입술을 꼭 오므렸고 손바닥은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바움 그룹이 박민호 손에 있을 때, 비록 적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살아남았었다.하지만 이제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황무지가 된 곳을 바라보았다. 목이 시큰거리며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법이죠. 유앤케이 그룹 대표인 당신의 결정에 따를게요.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쉬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어도 박민정은 여전히 기억을 잃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유남준은 그녀가 사태를 파악한 후, 자신에게 따지고, 울고, 소란을 피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 반응도 없었다.예전에 그녀가 유남준을 보던 시선은 지금처럼 담담한 것이 아니라 빛이 났었다.유남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아팠다. 훤칠한 손이 그녀의 목을 잡았다.“너도 박씨 가문을 나한테 팔아버린 거잖아! 잊어버렸다고 하면 없던 일이 되는 거야?”“나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 너도 평생 남에게 시집갈 생각 마!”그는 눈꼬리가 빨개지고 이성을 잃었다.박민정은 창백한 채 입을 열었다.“하지만 제 기억엔 당신이 없어요.”“당신이 원하는 아내는 이미 죽었어요!”그녀의 말은 유남준을 철저히 격노시켰다.“잊어버렸으면 기억해 내! 죽었더라도 내 앞에 살아 돌아와!”그는 박민정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놔줘요, 안 그러면 고소할 거예요!”유남준이 박민정의 말을 상대하지 않고 그녀의 옷깃을 덥석 찢었다.“나를 잊었다며. 내가 기억나게 도와줄게!”그는 박민정의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우으으,유남준씨,으아아...”그때 전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유남준의 어머니인 고영란이 전화한 것이다.그는 그제야 박민정을 놓아주고 전화를 받으러 갔다.“남준아, 왔어? 빨
방 안에서는 이미 유성혁이 상의를 벗은 채 박민정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그때, 최현아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여보!”“뭐야?” 유성혁은 갑작스러운 방해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유남준이 돌아왔어요.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까 얼른 옷부터 입어요!” 최현아가 다급하게 외쳤다.유성혁은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어떡하지? 어떡하지? 유남준이 내가 박민정과 함께 있는 걸 알게 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에요. 얼른 옷 다 입고 숨어요. 여기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최현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유성혁은 허겁지겁 옷을 걸쳐 입으며 당부했다.“꼭 나랑 관련 없는 일처럼 해줘. 아직 아무것도 못 했다고!”“알았어.” 최현아는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를 방에서 밀어내고 나서야 최현아는 박민정 쪽으로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동서.” 그녀는 살며시 불렀다.박민정은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최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유남준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기를.그녀는 박민정의 몸을 가볍게 감싸 이불을 덮어준 후,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잠시 후, 약효가 다소 풀렸는지 박민정은 흐릿한 눈빛으로 천천히 눈을 떴는데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웠다.그때였다.쿵!문이 거칠게 열리며 유남준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민정이는 어디 있어요?”최현아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을 막아섰다.“남준 씨! 갑자기 웬일이에요? 마침 남준 씨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유남준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민정이는요?”“아마 술을 잘 못 마셔서 그런가 봐요. 지금 쉬고 있어요. 원래 남준 씨 방으로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전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최현아가 태연한 척 대답했다.분명 박민정은 오늘 칵테일을 한 모금 정도 마셨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냥 음료나
박민정은 홀로 홀 대각에 앉아 있다가 어딘가 불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이 감각... 낯설지 않았다.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현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동서, 벌써 가려고?”“네.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요.”최현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내가 바래다줄까? 어차피 나도 딱히 할 일 없는데.”“아니에요, 괜찮아요.”박민정이 정중히 거절하자 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물었다.“그런데 남준 씨는? 어디 갔어?”“일이 있어서 나갔어요.”그 말을 듣자 최현아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그래? 그럼 다행이네. 내가 데려다줄게, 길을 잃으면 곤란하잖아.”“괜찮아요. 길은 기억하고 있어요.”설령 잊는다 해도 하인들에게 물으면 될 일이었다.박민정은 가볍게 웃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걸음을 옮길수록 몸이 이상했는데 발이 휘청이고 머리가 묘하게 어지러웠다.최현아는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다가왔다. 이대로 그녀를 그냥 보낼 리 없었으니까.“괜히 사양하지 마.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최현아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지금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하지만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다.혹시 몸에 다시 문제가 생긴 걸까? 머릿속이 어지럽고 다리가 힘없이 풀렸다.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뗐다.“...구급... 구급차를 불러줘요...”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 최현아가 그녀를 붙잡았는데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구급차? 정말 순진하기도 하지.”최현아는 비웃듯 말하며 박민정을 외딴 곳으로 끌고 갔다. 곧 어둠 속에서 몇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최현아가 지시한 대로 움직였다.박민정은 서쪽에 있는 빈집으로 실려 갔다.최현아는 남자들을 향해 싸늘하게 경고했다.“오늘 일
박민정이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기색이 어린 최현아의 시선과 마주쳤다.“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저쪽에서 사촌 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같이 갈래?”최현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아요, 전 혼자가 좋아서요.”박민정은 조용히 거절했다.최현아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했다.“그래? 알겠어.”박민정은 그녀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최현아는 곁에 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최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나도 시끄러운 분위기는 별로야. 어차피 동서도 혼자고, 나도 혼잔데, 같이 있어도 괜찮잖아?”이렇게 나오니 박민정은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여기는 유씨 가문 안이었기에 자신이 뭐라고 그녀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박민정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유씨 가문의 젊은 친척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 사이, 최현아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슬쩍 박민정의 잔을 힐끔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교활한 빛이 스쳤고 이내 일부러 놀란 척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동서, 이것 좀 봐.”그녀가 화면을 내밀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화면에는 에릭에 대한 연예 뉴스가 떠 있었다.박민정이 그 기사를 읽는 사이, 최현아는 잽싸게 손을 뻗어 박민정의 잔을 건드렸다. 긴장한 듯한 그녀의 손길이 빠르게 움직였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에릭 씨, 동서네 회사 직원 맞지? 설마 남자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가십 뉴스잖아요. 아마 거짓일걸요.”박민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에릭이 그런 취향이라면 연지석과 그렇게 티격태격할 리가 없었다. 연지석처럼 잘생긴 남자가 앞에 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건 정말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그렇지? 요즘 매체들은 자극적인 소문을 너무 많이 퍼뜨려.”최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문득 박민정에게 물었다.“오늘 밤엔 안 돌아가겠네?”
“뭐?”유성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고 곧이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비웃었다.“그 여자, 가식 떨기는 끝내주더니. 진짜 정절을 지키는 여자인 줄 알았잖아. 그리고 유남준, 그렇게 대단하다면서? 어째서 자기 동생 하나 제대로 손보지도 못하는 거야?”유성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최현아는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는데 그가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와서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여보, 당신이 예전부터 그 여자를 원했던 거, 난 다 알고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요.”유성혁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당신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밖에 없어.”최현아는 그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모습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당신이 날 사랑하는 건 알지만 동시에 여전히 민정 씨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난 다른 여자들처럼 질투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긴 듯했다.유성혁은 원래부터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순간적으로 그의 흥미가 자극되었다.“당신 정말 최고야. 하지만 박민정은 너무 고고한 척하는 년이잖아. 절대 동의하지 않을걸? 그리고 유남준이 알면 난 팔다리가 부러질 거라고.”최현아는 그가 결국 겁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여보, 당신은 참 어리석어요. 민정 씨가 거절하는 건 당신이 어디 가서 이 사실을 떠벌릴까 봐 그런 거죠. 내가 잘 설득하면 오늘 밤엔 당신 것이 될 거예요.”“정말이야?” 유성혁의 눈빛이 반짝였다.“당연하죠. 그러니까 깨끗하게 씻고 기다리고 있어요.” 최현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유성혁은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좋아! 약속한 거다!”그는 들뜬 표정으로 손을 비비며 자리를 떠났다.최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마치 새롭게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남준 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고맙다는 말 하지 마.”둘은 부부였으나 박민정은 늘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이 말에 박민정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깜빡했어요.”“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마.” 유남준이 덧붙이자 박민정은 말문이 막혔고 무슨 말을 해도 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알겠어요.”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본 유남준은 다시금 마음이 아려왔다. “가자, 좀 쉬어야지.”“네.”박민정은 그의 뒤를 따라 두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그곳에 도착하자 유남준은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고 집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이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던 박민정은 소파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맞다, 아이들은요?”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아이들은 본가에서 안전해. 게다가 오늘 가문의 여러 친척들도 모일 건데 아이들이 그 사람들과 친해지면 나중에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를 비우는 게 실례가 되진 않을까요?”“아니.”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어.”그의 말에는 어떠한 허세도 섞여 있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의 능력을 믿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어젯밤 잠을 설친 탓인지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업무를 처리하던 유남준은 가끔씩 시선을 들어 그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예전에는 일할 때 누구도 그의 집중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박민정이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이었다.그가 얼마나 그녀를 바라보고
“아버지, 드세요. 이건 제가 직접 정성 들여 고운 탕이에요. 백세를 넘긴 한의학자의 비법을 배워 만든 거라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꽤 걸렸어요. 드시면 장수하실 거예요.”유석진이 아부하듯 말하자 유명훈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이냐?”“그럼요. 제가 아버지를 속이겠습니까? 제가 해외에서 돌아온 이유도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장수하시게 하려는 거죠.”유석진은 유남준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버지와 달리, 유명훈의 환심을 사는 데 능숙했다.그래서인지 유명훈은 늘 그쪽을 편애했다.“석진아, 우리 집에서는 네가 가장 효심이 깊구나.” 유명훈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물론 이 나이가 되면 누구나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하지만 유명훈은 늙고 싶지 않았고 죽음은 더더욱 두려웠다. 그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에서 수혈을 받기까지 했다.“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동생과 아이들도 다 효심이 깊어요.” 유석진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유남준에게 보냈다. “그렇지, 남준아?”유남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말로 유명훈도 그의 성격을 아는 터라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다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히 있어라.”그렇게 말했지만 모인 이들은 각자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유명훈은 문득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민정아.”“네, 할아버지.” 박민정이 공손하게 대답하자 유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불렀다.이제 모두의 시선이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아, 넌 이제 우리 유씨 가문의 중요한 일원이야. 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냐?”“많이 나아졌어요.” 박민정은 조용히 대답했다.“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완전히 회복되면 가정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회사 일은 남준이에게 맡기고 말이다.”유명훈은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그가 유남준과 박민정의 결혼을 허락한 것도 당시 박민정의 가문이 유씨
박민정은 그에게 안긴 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고 가슴 한편이 알 수 없는 먹먹함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가만히 손을 들어 유남준의 등을 두드렸다.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자요.” 유남준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박민정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품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풀어냈다.이제는 그녀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발코니로 나가 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새벽 여섯 시가 되자 유남준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에게 덮여 있는 담요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다.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가 돌아왔을 때 박민정이 곁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간 걸까?혹시 꿈을 꾼 걸까 싶어 그는 2층 방으로 올라가 욕실에서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잠을 청했다.박민정은 그의 움직임을 들었지만 상태가 괜찮아 보이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아침 여덟 시, 유남준은 평소처럼 정시에 일어났고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아한 태도로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는데 박민정은 그의 맞은편에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다가 놀라고 말았다.어젯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오늘은 마치 전혀 취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유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하고는 눈을 들어 그녀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왜?”“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박민정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식사를 이어갔다.두 아이도 식탁 위의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결국 참지 못한 박윤우가 작은 목소리로 여름 박예찬에게 물었다. “형, 나 왜 집이 이상한 것 같지?”“조용히 하고 만두나 먹어.”“아, 응.”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가족들은 청명을 맞아 조상을 기리기 위해 본가로 향했다.차가 본가 대문 앞에 멈추자마자 고영란이 반갑게 달려 나왔다. “윤우야, 예찬아, 어서 할머니한테 오렴.”유남우도 그녀 옆에 서서 서슴없이 박민정을
유남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택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확인했는데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박민정은 다가가기가 너무 부끄러워 멀리서 그 여자 형체랑 똑같이 제작된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마음에 들어요? 저는 상관없긴 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이런 기괴한 물건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박민정에게 물었다.“민정아,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아?”그의 말에 박민정은 깜짝 놀랐다.“왜요?”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구매한 물건이었다.“오해하지 말아요. 사람마다 생리적 욕구가 있기 마련이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희는 부부잖아요. 그렇죠?”유남준은 그녀가 자기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역시나 박민정은 그가 왜 화 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라가며 다시 설명했다.“원래는 다른 여자를 찾아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저희는 현재 부부잖아요. 또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서로 사랑했다고 해서 그렇게 처리하는 건 아닌 것 같았거든요.”유남준은 순간 머리가 아파서 소파에 털썩하고 앉았다.“알겠으니까 그만 말해.”‘날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지?’‘그저 성욕을 못 참아서 안달 난 짐승으로 생각하나?’박민정은 그제야 입을 꾹 닫았는데 순간 거실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진 것 같았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박민정이 그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자러 갈게요. 내일 옛 저택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러나 유남준은 여전히 토라진 말투로 답했다.“응. 마음대로 해.”그러나 박민정은 그가 화 났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기쁜 마음으로 돌아섰다.유남준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멍한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그냥 이대로 가는 거야?”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그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제우스 클럽.방성원과 유남준은 술을 마시며
그리고 침대에 던져지고 나서야 박민정은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재빨리 이불을 몸에 둘렀다.“오지 말아요!”그러나 유남준의 눈빛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그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민정아, 나도 남자야.”시간도 많이 흘렀고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매일 그냥 잠만 자려고 하자니 그도 나름 괴로웠다.그리고 이 상태로 두 사람이 계속 지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병들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유남준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그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또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하여 다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온전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엄마.”박예찬과 박윤우가 학교에서 돌아왔는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박민정을 불렀다.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진서연이랑 설인아, 그리고 민수아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나 두 아이도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있는 힘껏 유남준을 밀쳐냈다.하여 오늘에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멈춰야 했다.박민정이 황급히 방에서 나오니 두 아이가 마침 문 앞에 서 있었다.“엄마, 자고 있었어? 왜 얼굴이 빨개?”박윤우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게...”겨우 설명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유남준이 갑자기 방 안에서 나오더니 한껏 어두운 얼굴로 두 아이에게 물었다.“왜 벌써 왔어?”“추석이라 수업이 일찍 끝났어요.”박예찬은 뭔가 눈치챈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러나 박윤우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엄마, 저 쓰레기 아빠랑 같이 잔 거야?”“아니.”박민정은 단번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저 찾을 물건이 있어서.”“무슨 물건인데?”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질문 공세에 박민정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다가 겨우 답했다.“책.”“무슨 책? 나도 같이 찾아볼게.”“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