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 씨, 내가 충고하는데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못 본 척을 하든 못 들은 척을 하든 기억상실을 했다 해도 남준 오빠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박민정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듣고 있었다.“다 말했나요?”이지원의 어안이 벙벙해하는 모습에 박민정은 일어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그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확신하면서 이민정 대스타님께서는 왜 원한이 가득한 얼굴로 저를 찾아왔을까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냉소를 흘리고는 자리를 떠났다.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지원은 예전의 도도하던 박씨 가문 아가씨일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박씨 가문의 후원을 받기 위해 박민정에게 잘 보이려 애쓰던 일을 생각하니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지금 박씨 가문은 이미 몰락했는데도 박민정은 뭘 믿고 아직도 이렇게 도도한 척한단 말인가? 이지원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이때 매니저 윤재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원 씨, 전에 가지고 싶다던 곡 말인데요, 희망이 보여요.”“정말?”“다만...”매니저가 조금 머뭇거리자, 이지원이 말했다.“뭐가 문제야? 말해 봐.”“민 선생이 해외의 마이너 플랫폼에 올린 곡이 하나 있는데 아직 저작권을 신청하지 않았어요. 제가 이 곡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분명 히트할 거예요. 우리가 조금만 편곡하면 돼요...” 매니저의 말은 그냥 표절하자는 뜻이었고 이지원은 물론 알아들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말했다.“저작권이 없다면 그 사람의 작품이라 할 수 없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이지원의 동의를 구한 매니저는 그제야 마음 놓고 작업에 들어갔다.한편 전화를 끊은 이지원은 어떻게 박민정을 상대할지 고민했다....박민정은 집으로 가지 않고 예전에 살던 하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박민정의 어머니 한수민과 동생 박민호는 하씨 가문을 말아먹은 뒤 저택까지 저당 잡혔고 그곳에는 지금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박민정은 죽음으로 위
“난 왜 본 적이 없지?”그러자 박예찬이 입을 열었다.“민기 아저씨의 신분은 아주 비밀스러워 엄마가 위험에 처하지 않은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아.”“그래서 해외에 있었을 때도 주변에 보디가드가 있단 말만 들었지, 본 적이 없었구나.”조하랑은 찹쌀떡을 먹으며 말했다. 그녀의 곁에도 전문 경호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몸을 숨기지 않고 항상 그녀와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어 한눈에 찾아볼 수 있었다.연지석은 해외에서의 신분이 특수해 그의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경호원을 보내 박민정의 가족을 지키게 했다. 십분 후, 정민기가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꼿꼿한 정장 차림으로 다른 사람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조하랑은 그를 보자마자 두 눈이 반짝거렸다.“미남이시네...”박예찬은 센스 있게 그녀에게 티슈를 건네줬다.“입 좀 닦아, 이모.”조하랑은 침을 꿀꺽 삼켰다.박민정은 자기 절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얼빠였지만 마음속 깊이 숨겨둔 사람이 있었다. 그 남자를 위해 조하랑은 27살이 될 때까지 결혼은 물론 연애도 해보지 못했다.“들어와요. 이분은 제 친구 조하랑이예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박민정의 말에 정민기는 방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이때 박예찬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말했다.“아저씨, 내일이면 단오잖아요. 들어와서 찹쌀떡 드세요.”정민기의 차갑고 딱딱한 얼굴선이 한결 부드러워졌다.“괜찮아, 고마워.”박민정은 그가 혼자 있기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찹쌀떡을 조금 담아서 그에게 건네줬다.“미리 명절 축하드려요.”“네, 고마워요.”정민기는 찹쌀떡을 받고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나간 후 조하랑은 궁금해서 물었다.“이 자식 왠지 느낌상 보디가드 같지 않은데?”“무슨 뜻이야?”“뭐랄까... 딱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느낌이 그래...”정민기가 박민정에게 주는 느낌도 보통 경호원이랑은 차이가 있었다.비록 정민기가 박민정을
박예찬은 박민정이 힘들게 자신을 돌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아무리 연지석이 괜찮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주변은 너무 위험하므로 박예찬은 엄마가 안전한 남자 곁에 있기를 바랐다.조하랑은 박예찬이 이런 궁리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녀도 옆에서 거들었다.“우리 아빠는 비록 내가 비즈니스 관계의 결혼을 하길 바라지만 소개해 준 재벌집 자제들은 다 괜찮게 생겼어.”박민정은 두 사람의 말에 당해내지 못하고 박예찬을 바라보며 말했다.“좋아.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랑이 이모를 대신해서 나가는 것뿐이지, 너에게 아빠를 찾아 주려고 나가는 건 아니야.”“알았어.”박예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TV에서 방영하던 로맨스 드라마를 떠올렸다. 사랑은 보통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며 이런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야말로 가장 쉽게 사랑이 싹틀 수 있었다. 박예찬과 박윤우는 아직 너무 어려서 엄마를 지킬 힘이 없었고 만약 국내에 있는 동안 괜찮은 남자를 찾아 엄마를 보살피게 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박민정은 이런 박예찬의 속궁리를 알 길이 없었다.밤이 되자 박예찬을 다독여 재운 뒤 박민정은 조하랑과 앉아서 대화를 나눴다. “너 내일 강연우를 찾으러 가려고?”조하랑은 부정하지 않았다.“그래, 다른 사람한테서 들었는데 내일 본가로 돌아온대. 민정아, 나 대신 선 자리에 나가줘서 고마워. 만약 이번 일로 강연우를 만나지 못한다면 난 아마 평생 후회할 거야.”박민정은 그녀를 안아줬다.“우리 사이에 굳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조하랑은 약간 목이 메어왔다.“너와 유남준은 지금 어떻게 돼가고 있어?”“그냥 그대로지 뭐...”그 말을 듣고 조하랑은 박민정을 꼭 끌어안았다.“하랑아, 나 갑자기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빚을 지는 거라는 말이 정말 맞다고 느껴져.”박민정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너와 강연우는 서로 사랑하니까. 꼭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야.”조하랑을 위로하고 박민정은 쉬러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 다섯 시에 박민정은 조하랑을 문 앞까지 바래다줬다.나가기 전 조하랑은 몹시 긴장해 있었다.“민정아, 나 오늘 어때?”조하랑은 본바탕이 아주 좋았다. 둥글고 커다란 두 눈과 계란형 얼굴에 부드러우면서도 귀여움까지 겸비하고 있었다.“너무 예뻐.”“그럼 됐어. 너 그거 알아? 난 연우를 만난다는 생각에 너무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긴장돼. 연우가 혹시라도 나를 싫어할까 봐...”“아냐, 그럴 리가 없어.”“우리 하랑이가 이렇게 예쁜데, 누가 싫어한단 말이야.”박민정이 조하랑을 안심시키자, 조하랑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문을 나섰다. 박민정은 그녀를 바래다주고 방으로 돌아갔다.“엄마.”박예찬은 왠지 벌써 깨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하랑은 새벽 3, 4시 때부터 깨나서 준비했다.“우리가 너무 떠들어서 깬 거야?”박민정이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고 물어보자, 박예찬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엄마, 하랑이 이모가 만나려고 하는 아저씨 좋은 사람이야?”박민정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래, 하랑이 이모한테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그녀는 대학교 때 강연우를 만난 적이 있었다.그는 그들 동기 중 가장 잘생긴 남학생이었지만 아쉽게도 가정형편이 별로였다.조하랑과 강연우가 같이 있으면 외모는 진짜 잘 어울렸지만, 집안 조건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엄마에게는 연지석 삼촌이 좋은 사람이야?”박민정은 멈칫하더니 아무런 고민 없이 대답했다.“물론이지. 지석이 삼촌은 우리에게 엄청 잘해주잖아.”“그럼, 우리 돌아가면 지석이 삼촌 받아주면 안 돼? 주변에 예쁜 여자가 많긴 해도 다 엄마보다 별로야. 그리고 위험하기는 하지만 엄마를 지켜줄 거라고 믿어.”박민정은 또 한 번 놀랐다.유남준의 미니 버전 같은 아들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며 박민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윽고 그는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너 어제 엄마 보고 선보러 가라며?”“내가 확률 계산을 해봤는데 엄마가 성공적으로
“아까 그 뭐야 최씨 집안 따님인가 뚱뚱한 게 꼭 돼지 같지 않아? 그러고도 무슨 자신감으로 선보러 온 걸까?”“하하하, 그냥 공룡 같던데 걸을 때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잖아.”“그리고 전에 서씨 집안 따님은 새빨간 입술이 꼭 귀신같았지...”“이번에는 누구야?”“아마 조씨 가문 따님일걸, 듣기로 해외에서 연수하고 금방 돌아왔다고 하던데...” “해외에서 돌아왔으면 분명 개방적이고 방탕할 거야.”“조금 있다 우리 앞에서 춤을 추라고 하고 잘 추면 후보 자리에 올려준다고 할까. 하하하...”안에서 들려오는 저속한 말소리에 박민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녀는 이제야 왜 교양이 있고 품위가 있는 부잣집 따님들이 맞선을 마친 후 하나같이 화내고 욕설을 퍼부으며 떠났는지 알았다.이 사람은 애초에 맞선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친구들에게 유흥을 즐기게 하고 있었다.박민정은 조하랑이 이곳에 오지 않은 걸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조하랑의 성격상 오래도록 속상해할 게 뻔했다.안내원을 따라 들어선 그곳은 원래대로라면 점잖고 품위 있는 장소여야 했지만 지금은 더없이 더럽고 지저분했다.그들은 일부러 부잣집 딸들을 자극하기 위해 품에 몇 명의 예쁘장한 술집 아가씨를 껴안고 있었다.박민정이 나타나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오우, 마스크를 쓰고 왔네.”“너무 못생겨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걸까요?”그들의 비웃음 소리가 귀를 찔렀지만 박민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시선을 혼자서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하는 메인석에 앉아있는 김인우에게로 돌렸다.누가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에 진주의 부잣집 딸들을 다 불러와 혼자서 고르고 있나 했더니 다름 아닌 진주의 황태자였다.만약 유남준이 진주의 폭군이라면 김인우는 진주의 황태자였다.한 사람은 진주 전체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진주 사람들의 생명줄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김인우는 아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기에 당연히 이번에 들어온 사람이 조
박민정의 맑은 눈과 마주친 순간, 김인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닮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박민정이었다.김인우는 그녀가 왜 맞선 자리에 나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말했다.“갑시다.”정민기는 박민정을 데리고 떠났다.땅바닥에 엎어진 그 남자는 입으로는 욕을 하며 웅얼거렸다. “가지 마! 너희는 나한테 찍혔어. 딱 기다려!”다른 재벌 집 자제들이 비아냥거리며 그를 자극했다.“장 씨, 너무 약해빠졌어. 잘났으면 복수하던가!”“그래, 소리만 지르지 말고!”그 남자도 정민기에게 손을 대려고 했지만 방금 걷어차인 고통으로 일어서지도 못했다.어려서부터 받들어 자랐기에 이런 억울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그는 기어서 일어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 혼쭐을 내주겠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인우가 그 남자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는 차가웠다.“아까 무슨 짓을 한 거야?”“그년...”경호원 몇 명은 눈치가 없는 장 씨에게 주먹을 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땅에 엎어져 피를 토했다.장 씨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직도 몰랐다.주위의 다른 재벌 집 자제들도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김인우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비서에게 물었다. “얘가 방금 무슨 짓을 했었어?”비서는 남자가 박민정을 모욕하려고 한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이 놈의 손을 남겨둘 필요가 없어.”김인우는 더 이상 선을 볼 기분이 나지 않아 박민정을 찾으러 갔다.등 뒤로 재벌 집 자제들이 애원하며 용서를 빌었다.그들은 끊임없이 흐느낄 뿐, 조하랑이 어떤 인물이며, 김인우가 왜 그녀를 위해 화를 내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아마 장 씨는 오늘 여기에서 죽어나갈게 분명했다.김인우가 파라다이스에서 나올 때 박민정은 이미 사라졌다.그는 축 처진 손을 조이며 아까 현장에 온 사람들을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원래 김 어르신께 선을 보는 모양새만 보여 드리고,
아침 일찍 유남준은 보디가드한테 박민정이 오늘 오전에 파라다이스에 갔다고 전해 들었다.“박민정이 파라다이스에는 왜 간 거야?”유남준이 아는 바에 따르면, 파라다이스는 재벌 집 자제들이 술을 마시는 장소이며, 내막은 더할 나위 없이 더러웠다.보디가드는 잠시 머뭇거렸다.“맞선 자리인 것 같습니다.”유남준이 눈매를 가늘게 뜨자 주위의 기압마저 가라앉았다.그녀가 볼일이 있다던 것이 맞선 보러 가는 것일 줄이야...유남준은 박민정을 다시 보게 되었다.그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보디가드는 유남준의 성격을 알기에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사무실을 나왔다.오후 두 시,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유 대표님.”박민정이 들어오자마자 유남준 주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그는 음험한 눈동자를 치켜들고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차갑게 물었다.“왔어?”유남준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박민정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네, 저랑 같이 갈 곳이 있다고 어제 얘기 하셨잖아요.”유남준은 대답 없이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오늘 오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어?”그는 박민정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유남준은 이미 알고 있기에 이런 물음을 물어본 것이다.그의 심문하는 듯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박민정은 한 치의 숨김이 없이 말했다. “소개팅 했어요.”유남준은 화가 나 헛웃음만 지었다.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할 줄 몰랐다.그는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고 말했다. “왜? 그렇게 공허하고 쓸쓸했어? 남자 둘로는 부족해?”공허하고 외롭다니? 그리고 무슨 두 남자?박민정은 화가 났다.유남준은 자신이 뭐라도 된 줄 아나 싶다.그녀는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유 대표님,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저는 싱글인데 왜 선을 못 보나요?”“싱글?”유남준은 더 이상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어두운 얼굴로 박민정의 팔을 휘어잡고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싱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밟아놓는 것은 참 무정한 짓이다.박민정은 입술을 꼭 오므렸고 손바닥은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바움 그룹이 박민호 손에 있을 때, 비록 적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살아남았었다.하지만 이제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황무지가 된 곳을 바라보았다. 목이 시큰거리며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법이죠. 유앤케이 그룹 대표인 당신의 결정에 따를게요.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쉬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어도 박민정은 여전히 기억을 잃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유남준은 그녀가 사태를 파악한 후, 자신에게 따지고, 울고, 소란을 피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 반응도 없었다.예전에 그녀가 유남준을 보던 시선은 지금처럼 담담한 것이 아니라 빛이 났었다.유남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아팠다. 훤칠한 손이 그녀의 목을 잡았다.“너도 박씨 가문을 나한테 팔아버린 거잖아! 잊어버렸다고 하면 없던 일이 되는 거야?”“나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 너도 평생 남에게 시집갈 생각 마!”그는 눈꼬리가 빨개지고 이성을 잃었다.박민정은 창백한 채 입을 열었다.“하지만 제 기억엔 당신이 없어요.”“당신이 원하는 아내는 이미 죽었어요!”그녀의 말은 유남준을 철저히 격노시켰다.“잊어버렸으면 기억해 내! 죽었더라도 내 앞에 살아 돌아와!”그는 박민정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놔줘요, 안 그러면 고소할 거예요!”유남준이 박민정의 말을 상대하지 않고 그녀의 옷깃을 덥석 찢었다.“나를 잊었다며. 내가 기억나게 도와줄게!”그는 박민정의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우으으,유남준씨,으아아...”그때 전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유남준의 어머니인 고영란이 전화한 것이다.그는 그제야 박민정을 놓아주고 전화를 받으러 갔다.“남준아, 왔어? 빨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