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다행인 것은 박예찬 납치 사건이 인기 검색어에 오른 후로 박예찬은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많은 네티즌들이 이 아이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는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사람들은 의아해했다.[아이가 너무 차분해서 마음이 가네요. 이름이 뭐예요? 이 아이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저도요. 아이의 외모가 연예인 같아요.][연예인들보다 더 잘생겼네요. 이제 크면 엄청나겠는데요.]...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 덕분에 박예찬의 이름은 또 한번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조하랑은 일할 때 박예찬에 관한 기사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내가 예찬이 얼굴 먹힐 거라고 했지.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관심 가질 줄은 몰랐네. 슈퍼 스타 에리가 귀국한 기사보다 반응이 더 뜨거워?! 대박!”조하랑은 점심에 집으로 돌아가 박예찬에게 보여주었다.그러나 박예찬은 뉴스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하랑 이모, 이런 거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차라리 어떻게 해야 더 높은 월급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봐요.”박예찬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물가 높은 진주시에서 고작 그 정도 월급으로 어떻게 살아가요?”말을 마친 박예찬은 조하랑의 어깨를 토닥이며 덧붙였다.“지금 아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정말 김씨 가문 돈만 쓸 거예요?”조하랑은 어린아이에게 혼이 난 기분이 들었다.박예찬은 전혀 어제 납치당했던 아이 같지 않고 어린 악마 같았다.보통 아이들은 어제의 상황을 겪고 아직까지 겁에 떨며 울었을 것이다.그런데 오히려 어젯밤에 악몽을 꾼 사람은 조하랑이었고 잠에 서 깨 박예찬의 방으로 뛰어갔을 때 박예찬이 조하랑을 안심시켰다.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지, 죽으면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만난다는지 하면서 말이다.“나도 열심히 일하고 싶어. 그런데 공무원이 어떻게 큰 돈을 벌어. 내가 네 엄마처럼 작곡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조하랑은 자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했고 주목받는 사람이 아닌 그럭저럭 살기만을 바랐다.하지만 박예찬은 조하랑처럼 의미
다음 날, 공항에서.에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정아, 나 왔어. 두 아이 데리고 나와서 나를 위해 환영식 해 주지 않을래?”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 만약 두 아이를 데리고 에리를 마중하러 공항으로 가면 에리는 악플을 받을 것이다.게다가 에리에게는 많은 여자 팬이 있는데 자신도 그 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이다.“너 오면 다시 보자.”박민정은 전화를 끊었다....유남준이 새로 설립한 IM 그룹에서.서다희는 에리에 관한 자료를 유남준에게 건넸다.“대표님, 에리라는 분은 혼혈입니다. 국내와 해외에서 엄청난 팬덤을 보유하고 있더라고요. 남자 여자 팬 비례가 균등해서 저희 회사 제품 모델로 적합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에리 씨를 있으면 진주시의 많은 사람들이 저희 IM 그룹을 알게 될 겁니다.”유남준은 서다희의 말에 동의하며 그더러 에리를 설득하여 계약을 맺을 방법을 생각하라고 했다.그리고 한참 있다가 유남준이 서다희에게 물었다.“그때 친자 확인 검사할 때 확실히 다른 사람이 개입한 적 없지?”서다희는 그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유일하게 조작 가능한 건 윤우의 칫솔밖에 없습니다.”“그럼 다른 사람이 칫솔을 바꿨을 가능성은 없어?”“윤우가 직접 바꾸지 않는 한 도우미들은 과거가 깨끗한 사람들이라 그런 짓은 안 할 겁니다.”이 한 마디에 서다희조차도 의심이 생겼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엔 절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제가 세 개나 준비해서 각기 다른 병원에 검사를 맡겼거든요.”그제야 유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다희는 유남준의 사무실에서 나온 후 부하 직원을 시켜 에리를 회사 모델로 요청하게 했다.원래 돈으로 해결 못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상치 못 하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서 비서님, 에리는 귀국하자마자 저희 회사뿐만 아니라 많은 회사의 러브콜을 받았는데 다 거절했다고 합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주의라 어느 회사와도 계약을 체결하고 싶지 않고 아무리 돈을 많이 줘
에리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확실히 좋은 사람이었다. 그때 박민정의 응원과 곡이 없었다면 에리는 아직도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매니저가 나간 후 에리는 서둘러 아버지에게 한수민 암 진단서 위조 사건에 대해 물었다.에리의 아버지는 이미 사람을 통해 한수민의 진단서가 실제로 본인의 진단서가 아니란 것을 알아냈다고 했다.“잘됐네요. 그 증거들을 저에게 보내주세요.”“너한테 줄 수는 있는데, 넌 언제 며느리를 데려올 거냐?”에리의 아버지가 물었다.그러자 에리는 갑자기 풀이 죽었다.어머니는 요리를 식탁으로 옮기며 웃었다.“인터넷에 우리 에리에게 시집오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많던데 사실은 한 명도 집에 못 데려올 줄은 누가 알았을까.”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엄마, 연예인은 연애 안 해요.”에리가 웃으며 말했다.그러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에리의 아버지는 그에게 증거를 보내주었다.그 날 밤, 에리는 바로 그 증거들을 박민정에게 보냈고 박민정은 연신 고맙다고 했다.“말로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밥 사.”“좋아. 내일 살게. 시간 괜찮아?”“당연히 괜찮지.”박민정은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옆에 있는 유남준은 그녀가 누구와 통화했길래 이렇게 기뻐하는지 궁금했다.“하랑 씨랑 통화했어?”유남준이 물었다.“아니요. 다른 친구예요.”박민정은 유남준의 물음에 대답하고 박윤우에게 당부했다.“윤우야, 내일 엄마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갈 거야. 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 있어, 알겠지?”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박민정은 변호사에게 증거를 보낸 후 일찍 잠들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잠을 자지 못 했다.조금 전에 박민정과 통화한 사람의 목소리가 여자 같지는 않아서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사했다가 박민정이 알면 화를 낼 것 같았다.이튿 날 아침 일찍 박민정은 집을 나섰고 정민기가 차를 몰고 그녀를 데려다 주었다.유남준은 찝찝한 마음으로 회사에
박민정은 에리에게 자신의 근황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 다른 것들은 말하지 않았다.식사 후 에리는 박민정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나 혼자 갈 수 있어. 네 팬이 보면 어떻게 하려고?”박민정은 바로 거절했다.박민정은 연예인의 친구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걱정하지 마. 내가 꽁꽁 싸매서 누구도 날 알아보지 못 할 거야.”에리는 박민정이 지금 어디서 지내느지 알고 싶었다.박민정은 몇 번이나 거절해도 에리가 고집을 굽히지 않자 할 수 없이 받아들였다.“그럼 그렇게 해.”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에리는 서둘러 박민정의 앞에 섰고 눈보라가 그에게만 닥쳤다.에리는 웃으며 말했다.“진주에 이렇게 큰 눈이 내릴 줄은 몰랐네. 나 돌아오기 전에 바닷가에 갔었는데 거긴 엄청 따뜻했어.”에리는 아주 밝은 사람이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가끔씩 대답하곤 했다.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 탔다. 하지만 박민정은 내리는 눈 속에 검은색 마이바흐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정민기가 차를 몰면서 그들 뒤를 따랐고 마이바흐에 앉아 있는 유남준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저 남자 어떻게 생겼어?”“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젊은 사람 같습니다.”서다희가 말했다.유남준의 기분이 매우 안 좋다고 생각한 서다희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잘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선글라스랑 마스크를 썼을까요.”그러자 유남준의 기분이 살짝 나아졌다. 아주 살짝 말이다.“민정이에게 국내에 연지석 말고 다른 남자 없었다며?”서다희는 다소 억울했다.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조사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유남준의 뜻은 박민정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남자를 다 조사해야 한다는 말인가?‘어휴.’서다희는 유남준 몰래 한숨을 쉬었다.“대표님, 사실 여자들에게 남사친이 한 두 명 있는 건 이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 여자 친구한테도 남자 절친이 있거든요.”하지만 그 남자 절친을 언급하자 서다희는 이를
“우리 사이는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야.”박민정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에리도 더는 캐물을 수가 없었다.“괜찮아.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응.”“그럼 나 먼저 간다. 다음엔 예찬이랑 윤우도 꼭 데려와.”박예찬과 박윤우도 에리를 참 좋아했고 에리도 두 아이를 좋아했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에리가 가고 정민기가 차에서 내려 박민정을 향해 걸어오더니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내가 얻은 정보가 맞다면 예찬이를 납치한 사람 윤소현과 관련될 가능성이 많아요.”“윤소현이요?”박민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윤소현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윤소현은 박민정과 혈연관계가 있었다. 윤소현이 박민정을 미워한다면 아마도 그녀가 유남우와 몇 번 만난 것밖에 없을 것이다.“확실해요?”박민정이 되물었다.“내가 조사한 바로는 예찬이가 그린 그림에 정호철이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 정수미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이미 해외로 도주한 상태고요.”정민기가 대답했다.정수미.박민정은 전에 정수미가 그녀를 협박했던 게 떠올랐다.“알았어요. 일단 이 일은 비밀로 해요.”정씨 집안은 확실히 실력이 있었다. 아이를 데려간 후로 김씨 가문에서 밤새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정수미는 박민정이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정수미가 범인이라는 걸 알아도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네.”정민기도 이를 꿰뚫고 있었다.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모든 걸 드러내기보다는 일단 상대가 모르게 숨기는 게 낫다....유씨 가문과 김씨 가문도 이내 정씨 가문이 한 짓임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정씨 가문과 유씨 가문은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기에 대놓고 싸울 수는 없었다. 아이만 괜찮으면 정씨 집안을 문제 삼기가 애매했다.유명훈도 유남준에게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정수미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러면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다.유남준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박윤우는 잠깐 고민하더니 유남준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간단해요. 아저씨가 새로 세운 회사로 데려가 줘요.”유남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회사 가서 뭐하게?”“그냥요. 아저씨 회사가 얼마나 큰지 보게.”박윤우가 관찰한 데 의하면 박민정이 유남준을 받아줄 가능성이 커 보였다. 만약 유남준과 같이 살아야 한다면 먼저 유남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력이 그저 그렇다면 그는 박민정이 유남준을 만나는 걸 반대할 생각이었다.“그래, 내일 데려가 줄게. 말해봐.”유남준은 박윤우가 무슨 꿍꿍이인지 몰랐다.박윤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오늘 엄마랑 만난 사람 에리 삼촌이에요. 엄마가 외국에서 구제해 준 가수였는데 지금은 엄청 핫한 글로벌 스타가 됐죠.”글로벌 스타? 에리?유남준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낮에 서다희가 알려주긴 했지만 연예인 이름이라 따로 기억하지는 않았다.“아저씨, 에리 삼촌 진짜 잘생겼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혼혈이래요. 혼혈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외국인과 내국인이 같이 아이를 낳으면 되게 예쁜 애가 나온다고 티브이에서 그랬어요.”유남준이 이를 듣더니 코웃음 쳤다.“티브이에서 하는 말 다 믿으면 안 돼. 노새가 뭔지 알아?”박윤우는 의문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동물 아니에요?”“노새가 바로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나온 동물이야. 당나귀보다 크고 말보다는 착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그게 뭔데요?”박윤우가 궁금해했다.“아기 노새를 낳지 못한다는 거지.”박윤우는 똘똘한 편이었기에 유남준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에리는 예쁜 아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박윤우는 유남준이 이런 독설을 하고도 벌받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기적이라고 생각했다.유남준이 다시 걸음을 옮기다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에리랑 나랑 누가 더 잘생겼어?”박윤우가 한참 멍해 있더니 끝없이 쫑알거리기 시작했다.“아저씨랑 에리 삼촌은 다 잘생겼는데 잘생긴 포인트가 달라
사실 유남준은 박민정이 외국에서 전문적인 작곡가로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박민정은 유남준이 아직 눈치챘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실 박민정이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 유남준이 꾹 참고 물어보지 않는 것이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이 두 번이나 거절하자 정말 그 연하남에게 홀린 게 아닌지 걱정했다.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에 유남준은 회사로 나가 서다희에게 에리라는 연예인을 조사하라고 했다. 그렇게 유남준은 박윤우를 회사에 데리고 오겠다는 약속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서다희는 어안이 벙벙했다.“대표님, 에리 최근에 귀국한 스타예요. 우리 회사로 초대할 예정이었는데?”유남준은 그제야 왜 에리라는 이름이 그렇게 익숙했는지 떠올랐다.“진척은 있어?”서다희가 솔직하게 대답했다.“에리는 다른 남자 연예인과 달랐어요. 아직 뭘 원하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걸 좋아하고 속박받기 싫다면서 거절하더라고요. 하지만 이미 사람을 보내 조사하고 있으니 취미 생활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유남준은 에리를 데려올 수 있는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서다희가 멈칫하더니 에리의 근황을 줄줄 읊었다.“현재 남녀를 막론하고 SNS 팬만 5,000만이 넘어요. 트위터는 거의 억이 넘는 팔로워가 있고요. 데이터가 조금 진실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같은 연령대의 다른 남자 연예인들과 비겨도 에리처럼 팬덤이 막강한 사람은 없어요.”유남준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회사에서 직접 에리와 같은 영향력을 가진 연예인을 만들어내려면 얼마나 걸릴까요?”“최소 3년은 걸릴걸요? 근데 시간과 정력이 너무 많이 걸려요.”서다희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대표님이 언제부터 연예인을 만드는 데에 신경 쓰기 시작한 거지?’유남준은 일할 때 효율을 따지는 편이었다. 어느 연예인의 가치가 높으면 바로 데려오는 식으로 말이다.“생긴 건 어때요?”유남준이 물었다.“빼어나죠. 개인적으로 국내의 그 어떤
유남준은 부하에게 엄격한 편이었지만 인색하지는 않았다. 강연우의 직급을 한 단계 올려주었고 월급도 따블로 올려주었다.강연우의 차가운 얼굴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방을 나서기 전 끝내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대표님, 하랑이 혹시 김씨 집안으로 시집 가나요?”강연우는 유남준이 김인우와 절친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유남준도 강연우에게 비밀로 할 생각이 없었다.“네, 이미 약혼했어요.”이를 들은 강연우의 눈빛이 살짝 이상해졌다.“대표님, 하랑이 사모님과 친구 사이인 거 아시죠?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김인우 씨한테 조하랑과 결혼하지 말아 달라고 말씀해 주세요.”유남준은 강연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원인은 딱히 물어보지 않았고 그저 차갑게 쏘아붙였다.“강 변호사, 우리는 그저 상하급 관계일 뿐이에요.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관여할 생각이 없어요.”“조하랑 씨가 김인우와 결혼하는 게 싫다면 둘이 직접 얘기하세요.”유남준이 제일 극혐하는게 다른 사람의 감정에 끼어드는 일이었다.이를 들은 강연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사무실에서 나갔다. 강연우가 가자마자 서다희가 불만을 늘어놓았다.“대표님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생각하나?”“요즘 너무 한가하지? 응?”유남준이 이렇게 물었다.서다희가 바로 입을 다물더니 계속 업무를 이어갔다.유남준도 고개를 숙인 채 업무에 매진했다. 집에서 박윤우가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 채 말이다.“흥, 나빴어. 사기꾼이야!”박윤우는 화가 단단히 난 상태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도우미가 유남준은 이미 회사에 갔다고 알려줬다.도우미는 전에 정림원에서 박윤우를 챙기던 통통한 여자였다.“윤우야, 왜 그래?”박민정은 곡을 쓰러 가고 없었다. 도우미가 약이 잔뜩 오른 박윤우를 보며 물었다.박윤우는 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어떤 사람한테 사기를 좀 당해서 그래요.”“누가 감히 윤우한테 사기를 쳐? 누군지 말해주면 내가 바로 응징해 줄게.”
김인우는 이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 이성과 충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조하랑 역시 불편했다. 수년간 솔로로 지낸 그녀도 결코 무감정한 사람이 아니었다.“인우 씨... 지금... ”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머뭇리자 김인우는 뭔가를 깨닫고는 얼른 그녀를 놓았다.“다른 방 좀 살펴보고 올게요.”“그래요.”조하랑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김인우와 거리를 두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조하랑은 점점 더 참기 힘들어졌다.김인우 역시 괴로웠다. 다른 방들을 확인해 보았지만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지친 발걸음으로 다시 거실로 돌아온 김인우는 조하랑과 마주 앉았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말을 건네는 것조차 어려워했다.“구조 요청이라도 할까요?” 조하랑이 드물게 기지를 발휘하자 김인우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요. 아까 확인했는데 핸드폰들이 다 사라졌어요.”“뭐라고요?” 조하랑은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몸의 열기는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고 김인우를 바라볼 때마다 그의 모든 것이 탐나기 시작했다.김인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상황을 잊기 위해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그럼, 우리 뭐라도 얘기할까요?”“좋아요. 무슨 얘기할까요?”김인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하랑 씨, 강연우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강연우의 이름이 나오자 조하랑의 마음은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금 진정됐다.“학교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 그 사람이 참 잘생겼고 법학과였거든요. 연애 경험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먼저 쫒아다녔어요.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사귀게 됐지 뭐예요.”과거를 떠올리는 조하랑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부드러워졌다.이를 본 김인우는 괜히 질투가 일었다. “그리고 나서는요?”“그냥 연애했죠.” 조하랑은 짧게 답한 뒤 김인우를 바라봤다. “인우 씨는요? 뉴스에서 여자들이랑 많이 엮였던데, 혹시 첫사랑한테 상처라도 받았어요?”김인우는 비웃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요. 내가 여
김인우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그야 당연하죠. 내가 하랑 씨가 좋아했던 그 녀석보다 훨씬 잘생겼거든요.”“그 녀석이요?” 조하랑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강연우 말이에요.” 김인우는 여전히 그를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다.이 말에 조하랑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나 그 사람 안 좋아한지 꽤 됐거든요.”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김인우는 그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정말 신경 안 써요?” 김인우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조하랑은 왠지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네, 신경 안 써요.”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할수록 김인우는 더 의심스러웠다.김인우는 이미 조하랑과 강연우의 과거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당시 조하랑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려 했고 강연우 역시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걸 뻔했다.그런 뜨거운 사랑, 그런 소중한 기억을 과연 쉽게 잊을 수 있을까?김인우는 생각할수록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조하랑은 그의 침묵에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늘따라 몸이 이상했다. 김인우 곁에 있으니 더더욱 불편했고 머릿속에는 온갖 이상한 생각들이 스쳤다. 그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몸매도 좋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까지 들 정도로.김인우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그래요, 병원 가요.”그는 조하랑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하지만 문에 도착한 순간 잠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문 열어요!” 김인우는 화가 나서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인들 역시 모두 사라진 듯했다.조하랑은 문에 기대며 말했다.“누가 문을 잠갔죠? 할아버지는 어떻게 들어오시려고요?”“그 양반이 들어온다면 완전 변태인 거예요.” 김인우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자 조하랑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 그런 말 하지 마요.”김인우는 그녀가 아직도 김훈을 두둔하는 걸 보며 답답해했다.‘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나중에
하인은 김훈의 뜻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주방으로 가더니 국 한 냄비를 들고 왔다.“국 좀 마셔라.” 김훈은 두 사람에게 국을 권했다.김인우는 거절하려다 김훈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멈칫했다.“왜? 할아버지가 증손주를 보고 싶다는데 안 되겠냐? 국 한 그릇 마시라는 것도 거부하는 거냐?”이 말을 듣고 나니 김인우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할아버지, 앞으로 재촉만 안 하신다면 국 한 그릇이 아니라 열 그릇도 마시겠습니다.”조하랑도 분위기에 따라 국을 한 그릇 들이켰다.“할아버지, 이 국 정말 맛있어요.”김훈은 인자한 표정을 지었으나 눈빛에는 슬쩍 장난기가 스쳤다.“맛있으면 더 마셔라.”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하랑아, 인우야, 이 할애비를 원망하지 말아라. 나도 너희 둘의 감정에 불 좀 지펴주려는 거니까.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겠니?'김인우와 조하랑은 김훈이 뭔가 꾸미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국 한 냄비를 모두 비워버렸고 거기에 밥과 반찬도 푸짐하게 먹었다.김인우는 심지어 겉옷까지 벗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이 국 정말 보양에 좋은가 봐요. 몸이 엄청 뜨겁고 힘이 넘칩니다.”김훈은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렇지. 내가 좋은 재료를 듬뿍 넣었거든.”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앞으로 이렇게 몸에 좋은 건 밤에 먹지 말아야겠어요. 너무 덥네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이때 김훈이 그를 불러 세웠다.“어디 가려고?”“너무 더워서 바람 좀 쐬려고요.”김인우가 문으로 향하자 김훈은 단호하게 말했다.“나가지 마. 예찬이도 아직 안 돌아왔고 너희 둘 다 이 늙은이와 함께 있어야지.”김훈의 강한 말에 두 사람은 거절할 수 없어 그대로 남았고 결국 가족 셋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았다.오늘따라 김훈은 평소 즐겨보던 뉴스 대신 로맨스 드라마를 틀었다.이를 본 김인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할아버지, 이런 거 좋
설인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문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며 결국 방성원의 모습은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머리가 지끈거렸고 손에 쥔 휴대폰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휴대폰 화면 속에는 과거 설씨 집안이 어떻게 경쟁자에게 모함당하고 함정에 빠졌는지, 그 모든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방씨 집안의 이름은 없었다.설인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아빠, 설마... 아빠가 잘못 알고 계셨던 거예요?”하지만 허공은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고 텅 빈 방안엔 그녀의 메마른 목소리만 메아리쳤다.설인하는 너무 지쳐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수년간 품어왔던 증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을 단 하루 만에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그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한편, 방성원은 당시 설인하의 아버지가 누구를 만났는지 조사하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버린 탓에 많은 것들이 이미 사라지고 희미해져 있었다.방성원은 담배를 연달아 피웠다. 한 개비, 또 한 개비. 하지만 짙은 연기가 그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도 풀어주지 못했다.그때, 아이의 작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방성원은 화들짝 놀라 담배를 급히 비벼 끄고 창문을 활짝 열고는 소리쳤다.“아주머니!”보모가 재빨리 방에서 나왔다.“대표님!”방성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애가 어떻게 나왔어요?”보모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은정이가 계속 울면서 엄마, 아빠를 찾길래... 제가 잠깐 데리고 나왔어요.”방성원은 혹여나 딸이 자신의 담배 냄새를 맡을까 걱정이 앞섰다.“애 데리고 가서 설인하랑 놀게 해요. 다만, 설인하가 애를 데리고 도망치진 못하게 조심하고.”“네.”보모는 활짝 웃으며 아이를 안고 설인하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둘이 사라지자 방성원은 욕실로 향했다. 그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후 설인하의 방 앞에 섰는데 멀리서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설인하와
방성원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설인하 앞에 섰고 차가운 눈빛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은정아, 아빠한테 와.”방은정은 방성원의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작은 두 눈 가득 망설임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설인하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더 꽉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뒤쪽 문이 쾅 하고 닫혔고 설인하는 당황해 외쳤다.“방성원, 당장 문 열어! 날 내보내!”방성원은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겨우 이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다시 나가게 해달라고?“만약 내가 안 열어주면?”설인하는 한 손으로 방은정을 안고 다른 손으로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그러나 방성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품에서 아이를 낚아챘다.아직 어린 방은정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단순한 놀이로 착각하고 까르르 웃었다.설인하의 품이 텅 비자 그녀는 휴대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성원의 팔에서 아이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 여자가 성인 남성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방성원은 한 손으로 설인하를 가볍게 제압한 채 다른 손으로 아이를 보모에게 넘겼다.“방으로 데려가요.”“네”보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고 감히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설인하는 방성원에게 억눌린 채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방성원, 이 개자식아! 은정이를 돌려줘! 은정이는 내가 열 달 동안 품어 키운 내 딸이야! 넌 고작... 고작 삼 초면 끝났잖아! 대체 무슨 권리로 내 아이를 빼앗는 거냐고!”방성원은 그녀의 새로운 욕설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밖에서 안 좋은 것들만 배워온 모양이군.’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좋아, 이제 말발이 꽤나 늘었네?”그는 설인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어딜 데려가는 거야? 놓으라고!”설인하는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어딜 가겠어. 네 정신 좀 차리게 하려는 거지.”방성원은 그녀를 과거 함께 지냈던 방으
박민정이 보낸 사진은 곧바로 단짝 친구들 단톡방에 반응을 불러왔다.민수아가 먼저 메시지를 남겼다.[부럽다, 여긴 어디야? 풍경 진짜 멋지다!]조하랑도 금세 답장을 보냈다.[아마 민정이랑 예찬이랑 캠핑 간 곳일걸?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 살아있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안 간 것 같아.]진서연 역시 대화를 이어갔다.[저 회사 가기 싫어요... 휴가 때 우리도 꼭 놀러 가요. 진짜 오랜만에 나들이하고 싶어요.]친구들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띄웠고 설인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모티콘 몇 개로 답장을 남겼다. 그러고는 곧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의 일상은 순탄치 않았다. 제대로 된 휴식 없이 일에 매달렸고 잠시 한가해지기만 하면 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지금 방은정은 방성원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그녀는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설인하는 이미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었는데 곧 양육권을 반드시 되찾아올 생각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문득 고개를 들자 연지석이 어느새 그녀 앞에 서 있었다.그녀의 멍한 표정을 보며 연지석이 물었다.“요즘 집에 무슨 일 있어요?”설인하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네? 무슨 말씀이시죠?”연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몇 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이 서류들, 전부 오류가 있어요. 확인해봐요.”설인하가 서류를 펼쳐보니 숫자들이 엉망으로 기재돼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실수에 깨달음을 얻었다.“아...”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하지만 연지석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수정은 필요 없고 그냥 오늘은 집에 가서 쉬세요.”설인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그 말이 혹시 해고 통보는 아닐까 싶어 다급히 말했다.“부사장님, 죄송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두 번 다시 이런 실수 안 할게요.”절박함이 담긴 목소리와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
최현아는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눈빛 속으로 차가운 기색이 스쳤다.“다 큰 어른이면서 내 말뜻을 모르겠어?”그녀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아니면...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건가?”박민정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부끄러울 게 뭐가 있죠? 저랑 남우 씨는 줄곧 친구였을 뿐이에요.”최현아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그래? 참 신기하네. 난 아직까지 남녀 사이에 그런 순수한 우정이 존재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그녀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유남준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남준 씨, 그냥 하는 말이에요. 두 사람이야 부부니까 잘 지내면 그만이죠. 제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이 당연히 진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의 마음을 한층 더 편안하게 했다.“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형수님.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랑 민정이는 잘 지낼 거니까요.”유남준은 그렇게 답하며 오히려 최현아에게 은근히 감사함을 느꼈다.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대신해줘서.최현아의 입가가 씁쓸하게 일그러지더니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사라지자 박민정의 얼굴에도 어두운 기색이 드리워졌다.귀국한 뒤로 아무도 그녀와 유남우 사이의 일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 역시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질문을 받으니 마음 한켠이 불편해졌다.박민정은 조용히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나를... 믿어요?”남녀가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믿기란 솔직히 쉽지 않을 것이다.유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민정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괜찮아요. 대답 안 해도 돼요. 당신이 믿든 안 믿든,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유남준은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물론 널 믿지.”유남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아. 네가 그때 날 기억하지 못했던 걸
“옆모습이요?” 박민정이 조용히 물었다.“그건 내가 어렸을 때 우연히 찍은 사진이야. 예뻐 보여서 그냥 간직했지.”유남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러다 어느 날 네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깨달았어. 그 사진 속 소녀가 바로 어린 시절의 너라는 걸.”박민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정말이에요?”“당연하지.”유남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그가 그 사실을 알아챘던 건 해외에 있을 때였다.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 우연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하지만 그날, 그는 박민정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정말 신기한 우연이네요.” 그녀가 나직이 말하자 유남준도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진을 오랫동안 간직해왔지만 정작 그 속의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은 몰랐으니.생각해 보면 박민정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첫눈에 반한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둘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처음의 어색함을 조금씩 지워갔다.잠시 후, 유남준이 물었다.“해외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하루하루 어떻게 지냈던 거야?”박민정이 사라졌던 그 1년, 유남준은 매일같이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며 지낼까.박민정은 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유남우 씨랑 해외에 있으면서 치료도 받고 최면 치료도 했어요. 그 외에는 혼자 별장에 머물렀죠.”그녀는 덤덤히 말했다.“낯선 곳에서 밖에 나가도 늘 혼자였어요.”유남준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죄책감이 밀려왔고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마음이 짙게 스며들었다.“미안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남준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내가 무슨 고생을 한 것도 아닌걸요.”유남우가 비록 끔찍한 짓을 저질렀지만 그녀의 의사는 존중했고 필요한 건 다 채워주었다.둘은 그렇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느새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멀리서 최현아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남준 씨, 드디어 왔네요.“민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박민정은 급하게 말했다.“어머, 또 비가 오네. 우리 우산 안 가져왔잖아요.”산에 오르기 전, 날씨 예보를 확인했을 때는 비 소식이 없었는데...유남준은 서둘러 배낭을 열어 확인했지만 역시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괜찮아. 비가 그치면 다시 올라가면 돼.”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박민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근데 예찬이는 괜찮을까요? 혼자 있는데...”“세 살짜리도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박예찬은 세 살은 아니지만 겨우 다섯, 여섯 살밖에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마침 그녀가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뜻밖에도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박민정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화면을 보니 아이는 이미 우비를 입고 있었다.“엄마, 지금 어디예요? 비가 오고 있어요.”박민정은 주위를 비춰주며 말했다.“우린 아직 여기 정자에서 쉬고 있어. 너희는 산 정상에 도착했어?”박예찬은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더니, 박민정이 있는 곳에서 정상까지는 아직 한 시간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다.“네, 저희는 도착했어요. 선생님이 비옷 나눠 주셨어요. 근데 엄마, 우산은 챙겼어요?”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박민정은 거짓말을 했다.“그럼, 챙겼지.”“다행이네요. 그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올라와요.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고요.”박예찬의 다정한 당부에 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 조심할게.”이렇게 보니 정작 걱정할 필요가 있는 건 박예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괜히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말했다.“우리 가요. 천천히 가면 돼요.”“좋아.”유남준이 일어섰다.박민정도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섰지만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그대로 유남준의 넓은 품속으로 쓰러지듯 안겨 버렸다.박민정은 순간 당황했다.“죄송해요. 그냥 갑자기 일어나서 약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