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석 당신 진짜 염치없네요. 민정이도 모자라서 이제는 성원이 아내까지 건드려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 아니에요? 대체 왜 남의 여자만 찾는 건데요? 싱글은 아예 안 보이나 보죠?”김인우는 폭언을 쏟아내기 직전이었다.연지석은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였고 갑자기 얻어맞은 탓에 제대로 대응할 새도 없었다.김인우가 다시 주먹을 날리려 하자 연지석도 정신이 번쩍 들어 재빨리 몸을 피했다.“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네요. 오해한 거 아니에요?” 연지석이 묻자 김인우는 주먹을 쥔 채 이를 악물었다.“오해고 뭐고 할 것도 없어요! 당신 같은 놈은 정말 역겹네요! 제대로 맞아야 정신 차리죠!”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째로 김인우가 또다시 주먹을 날리려 하자 연지석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그대로 반격하며 정확하게 한 방을 꽂아 넣었다.연지석은 어릴 때부터 몸 단련에 열중했고 살아오면서 겪어온 것들이 온실 속에서 자란 김인우와는 차원이 달랐다.김인우는 한순간에 나가떨어졌고 땅에 쓰러진 채 이마를 찡그렸다. 그도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다시 일어나 덤비려 했으나 연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랑 설인하 씨는 그냥 직장 동료일 뿐이에요. 김인우 씨랑 방성원 씨가 오해한 겁니다.”그 말을 듣자 김인우는 멈칫했다.“맹세할 수 있어요? 설인하한테 관심 없다고?”“당연하죠.”연지석의 목소리는 확고했다.그가 박민정을 좋아했던 건 박민정이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인하는 그냥 동료일 뿐, 좋아한다는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그럼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닙니까?”“네, 아닙니다.”연지석의 대답은 단호했다.“오늘 같이 식사한 건, 내가 설인하 씨 업무를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어요.”그제야 김인우는 자신이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쪽 말이 사실이라면... 미안했습니다.”“앞으로는 제대로 알아보고 행동해요.”연지석은 돌아서려다 한 마디 덧붙였다.“그리고 잊지 마요. 김인우 씨가 전에 누가 본인을 구했는
설인하는 순간 멍해졌다가 곧바로 몸을 피했다.움직임이 빨랐지만 그래도 방성원의 토사물이 옷에 묻고 말았다.누군가를 이렇게까지 돌봐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화장실로 달려가 몸을 깨끗이 씻어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쉴 생각이었으나 거실을 지나치다 문득 방성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힘없이 축 늘어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어딘가 안쓰러웠다.그 순간, 설인하는 몇 년 전을 떠올렸다. 금방 결혼하고 친정이 어려움을 겪던 시절, 그녀도 술에 의지하던 때가 있었다.매번 이렇게 취해 정신을 잃곤 했는데 다음 날 눈을 뜨면 언제나 깨끗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옆에는 방성원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 기억이 떠오르자 설인하는 조용히 다가가 깨끗한 옷을 꺼내 들었다.그의 옷을 갈아입혀야 했다. 하지만 성인 남자의 옷을 갈아입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방성원은 키도 크고 덩치도 컸으며 취해 있는 탓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한참을 씨름한 끝에 겨우 외투만 벗길 수 있었다. 속옷까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그냥 두기로 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후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서야 안심하고 방으로 돌아갔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 시간에 대체 누구야?’짜증 섞인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더니 김인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는데 누가 봐도 얻어맞은 흔적이었다.“인우 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설인하의 질문에도 김인우는 그녀를 보지 않고 거실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여전히 취한 채 소파에 쓰러져 있는 방성원이 있었다.그제야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은 김인우가 설인하를 바라보았다.“인하 씨, 성원이랑...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성원이가 다 설명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일, 성원이랑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고.”김인우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설인하는 김인우가 한밤중에 찾아와 이 일로 자신을 추궁할 줄은
방성원은 김인우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웃어넘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는 다가서며 약간은 도도하게 말했다.“무슨 억울함? 너 혹시 착각한 거 아니야?”어젯밤, 방성원은 만취한 상태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김인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간단히 말했다.“어제 연지석에게 직접 물어봤어. 걔랑 인하 씨는 아무 관계도 아니야. 어제저녁에 같이 밥 먹은 것도 그냥 인하 씨가 도움받은 거에 대한 감사 인사였을 뿐, 다른 의미는 없었대.”방성원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무언가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곧 의문이 떠올랐다.“근데 넌 이걸 어떻게 안 거야? 어떻게 연지석을 찾아가서 물어볼 생각을 했냐?”김인우는 방성원의 체면을 고려해 어젯밤의 취중 난동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태연하게 말했다.“그야, 그냥 짐작한 거지. 내 촉이 정확했잖아.”그러고는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아, 배고프다. 빨리 가정부한테 아침밥 좀 차리라고 해.”그렇게 말한 뒤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방성원은 그가 사라진 후 피식 웃고는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겉옷은 언제 바뀌었는지 몰라도 속옷은 그대로였다. 온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고 구토로 얼룩진 흔적도 남아 있었다.그는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아마 어젯밤 김인우가 자신을 챙겨준 모양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김인우는 이미 가정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있었다.방성원이 다가가며 툭 던졌다.“고맙다.”“에이, 별말을 다 하네. 우리 사이에 그게 무슨 인사야? 친구끼리 이 정도야 당연한 거지.”김인우는 만두를 베어 물며 중얼거렸고 방성원은 한참을 지켜보다가 다시 물었다.“내 옷도 네가 갈아입혀 준 거냐?”김인우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방성원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뭐? 내가 네 옷을 갈아입혔다고? 지금 제정신이야?”김인우가 아니라면...?방성원이 더 캐묻기 전에 가정부가 다가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여장부를 좋아할 리가 있겠어?” 김인우는 단호하게 부정했다.“게다가 폭력적인 여자잖아. 난 절대 하랑 씨를 좋아할 리 없어. 난 그저 하랑 씨가 낯선 곳에 혼자 가서 위험한 일을 겪을까 봐 걱정되는 것뿐이야.”“어쨌든 내 아내인데 어떻게 남한테 괴롭힘을 당하게 놔둘 수 있겠어?”박예찬은 김인우의 뻔한 거짓말을 조용히 바라보며 굳이 들추지 않았다.“아, 그렇다면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듣자 하니 에리 아저씨도 같이 갔다던데요.”“에리?”김인우의 동공이 순간 수축했다. “그 배우 말이야?”“네, 맞아요. 요즘 완전 핫한 국민 배우죠.”박예찬이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둘이 어떻게 같이 가게 된 거야? 하랑 씨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아는데?”“에리 아저씨는 우리 엄마 회사의 전속 모델이에요. 하랑 아줌마가 아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죠. 게다가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하랑 아줌마는 원래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잖아요.”박예찬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하랑 아줌마가 에리 아저씨가 베이징에서 홍보 촬영을 한다는 얘길 듣고 같이 가겠다고 하셨대요.”“에리 아저씨는 얼굴은 곱상해도 몸은 탄탄하고 싸움도 잘한대요. 게다가 경호원도 많아서 하랑 아줌마가 위험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안심하세요.”안심이라니... 이 말을 듣고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김인우는 주저 없이 휴대폰을 들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전용기를 준비해. 바로 떠날 거야.”박예찬은 그런 김인우를 바라보며 장난을 이어갔다.“아저씨, 그렇게 서두르시면 하랑 아줌마가 싫어하실 텐데요? 아줌마랑 에리 아저씨의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거잖아요.”“뭐? 둘만의 시간이라니?”김인우는 언짢은 표정으로 받아쳤다.“내 아내라고! 내 아내가 누구랑 둘만의 시간을 보내?”그는 불쾌한 듯 말하고 나서 다시 한 번 당부했다.“예찬아, 할아버지께 내가 하랑 아줌마 찾으러 갔다고 전해 줘.”“네.”박예찬은 순순히 대답했다.김인
최현아는 또다시 착한 척하며 말했다.“동서, 걱정하지 마. 우리가 절대 동서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야. 정씨 가문과도 잘 협력할 거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호하게 말했다.“더 이상 얘기할 필요 없어요. 법정에서 보죠.”그녀는 문을 나서며 두 사람을 돌아봤다.“지엔 그룹 법무팀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그 말을 남기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회의실 안은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유석진과 최현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그들은 박민정을 협박하면 쉽게 굴복할 거로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강하게 맞서고 있었다.“아버지, 이제 어떻게 하죠?”“어떻게 하긴. 이 계약들은 전부 물 건너갔다.”유석진은 주먹을 꽉 쥐고 탁자를 내리쳤다.“내가 저 여자를 너무 얕봤어.”정수미가 아파서 자리를 비운 사이, 박민정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우리도 맞서서 소송을 진행하면 되잖아요?”최현아가 의아해하며 말했다.그러자 유석진이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봤다.“너 바보야? 지금 우리 상황에서 지엔 그룹 법무팀을 이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해?”호되게 핀잔을 들은 최현아는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입을 꾹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이 늙은이가 빨리 죽어주기를 바랐다.이 늙은이의 무능력한 친아들 때문에 결국 며느리인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인데도 그 와중에 자신을 탓하고 있다.집으로 돌아온 최현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유성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네 놈을 처리한다더니 여태껏 아무것도 못 한 거예요? 지금 박민정이 지엔 그룹의 대표 자리에 앉았어요. 박민정의 아들이 유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생각이에요?”유성혁도 계속해서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자신의 배짱으로는 유남준의 아이들을 해칠 용기가 없었다.“현아야, 그냥 포기하는 게 어때?”유성혁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최현아는 그 말에 더 화가 나서 헛웃음을 터뜨렸다.“성혁 씨, 정신 좀 차
박윤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박예찬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그러자 박예찬은 그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쌍둥이끼리 무언가 통하는 게 있는 듯 박윤우는 형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유성혁을 바라봤다.“큰아버지, 저도 같이 갈래요.”뜻밖의 전개에 유성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얼굴에는 숨길 생각도 없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그래! 그럼 너희 동생들도 같이 데려가자. 다 함께 가는 게 더 재미있잖아.”“안 돼요. 동생들은 아직 어려서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돼요.”박예찬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유성혁은 미간을 찌푸렸다.“괜찮지 않아? 이제 한 살이 넘었으니까 괜찮을 텐데.”“그래도 안 돼요.”박예찬은 한층 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동생들을 데려갔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엄마가 우리를 혼낼 거예요.”박예찬은 유성혁의 속셈을 알기에 일부러 튕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꼭 동생들을 데려가야 한다면 엄마한테 먼저 물어볼게요. 엄마가 허락하면 같이 가요.”“아, 아니야!”유성혁은 당황한 나머지 순간 본색을 드러낼 뻔했지만, 급히 입을 닫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너희만 오면 될 것 같아. 그래, 나도 생각해 보니까 애들이 너무 어려서 아이스크림은 안 좋을 것 같네.”“알겠어요.”두 형제는 동시에 대답했다.그렇게 해서 박예찬과 박윤우는 유성혁을 따라나섰다. 출발하기 전, 박예찬이 일부러 물었다.“큰아버지, 우리 가정부 이모님한테 말하고 가야 하지 않아요?”“그럴 필요 없어. 너희는 큰아버지 집에 가는 거잖아. 위험한 일도 아닌데 굳이 말할 필요 없어.”“네, 알겠어요.”유성혁은 비록 동생들까지 데려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두 형제를 데려가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나머지 둘은 나중에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그는 최대한 CCTV에 띄지 않도록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이동했다.박예찬과 박윤우는 그를 따라가면서 손목에 찬 전화 시계를 이용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형, 큰아버지가 아무래도 수상
유성혁이 서둘러 돌아와 짜증 난 표정으로 한 움큼의 휴지를 건넸다.“자, 휴지. 빨리 해결하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네...”박예찬은 힘을 주는 듯한 표정을 지은 뒤 말했다.“알겠어요.”그러면서 박예찬이 휴지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유성혁은 자기 손에 닿는 이상한 촉감을 느꼈다.그러자 이윽고 박예찬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어이구, 큰아버지, 죄송해요. 실수로 제 똥을 큰아버지 손에 묻혔어요.”유성혁은 심각한 결벽증까진 아니었지만, 평생 이런 더러운 걸 직접 만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는 순간 펄쩍 뛰어올라 손을 막 털면서 손에 묻은 것을 털어내려고 애를 썼다.“으악!”비명이 울려 퍼졌다.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박예찬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고 박윤우는 아예 입을 틀어막았다.“큰아버지, 혹시 저한테 화난 거 아니시죠? 죄송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박예찬은 일부러 불쌍한 모습으로 사과를 건넸다.유성혁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이들 앞이라 억지로 화를 참았다.“하, 다음부터 조심해, 알겠지? 얼른 닦아.”그는 손을 치켜든 채 황급히 차로 돌아갔다. 차 안에 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하지만 한참을 찾아도 물이 보이지 않자 결국 다시 돌아와 아이들에게 말했다.“예찬아, 윤우야,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큰아버지가 손 씻고 올게.”“네!”두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큰아버지, 빨리 다녀오세요.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야죠.”“그래.”유성혁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급히 자리를 떠났다.그가 사라지자마자 두 형제는 더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형, 이 방법은 진짜 대박이야!”박윤우가 배를 잡고 웃었다.박예찬도 풀밭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이건 그냥 소소하게 골탕을 먹인 것뿐이야. 엄마를 괴롭힌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그냥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어.”박윤우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박예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유성혁은 그대로 도로 옆 배수로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완전히 겁에 질려 얼이 빠졌다.다행히 차는 고급 모델이라 충격을 흡수해주어 박예찬과 박윤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유성혁은 완전히 망가졌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바지 아래로 뭔가 축축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큰아버지, 괜찮으세요?”박예찬은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갔지만, 눈빛 속에는 짓궂은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유성혁은 단순히 겁만 먹은 게 아니었다. 방금 사고의 충격으로 간신히 치료했던 다리가 다시 부러진 것 같았다.큰 소란에 저택 안의 하인들과 경비원들도 소리를 듣고 곧바로 몰려왔다.제일 먼저 도착한 경비원들은 한눈에 유성혁의 처참한 모습을 확인했다.‘유성혁 도련님이 겁을 먹어 오줌을 싸다니, 세상에!’경비원들은 직업정신으로 간신히 웃음을 참고 달려와 물었다.“성혁 도련님, 괜찮으십니까?”한 경비원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유성혁은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달려오는 경호원들을 보고는 소리쳤다.“눈멀었어? 내가 지금 괜찮아 보여?”경비원들은 속으로 유성혁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어 그가 소리를 지르자 기분이 불쾌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모른 척하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얼른 구급차 안 부르고 거기 서서 뭐 해?”유성혁은 한 번 더 소리를 질렀다.“네, 네!”경비원들은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꼴 좋다고 비웃고 있었다.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박윤우와 박예찬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박민정과 유남준도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해서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옮겨지는 유성혁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박민정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두 아이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뛰어왔다.“윤우야, 예찬아, 너희 괜찮아?”두 아이는 박민정이 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우리 괜찮아, 엄마.”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와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