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할아버지께서 건강검진 받으셨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대.”조하랑도 병원 의사한테서 들은 얘기였지만 김훈이 미리 시켰단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박예찬은 당장에라도 조하랑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너무 답답해서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저는 그래도 이모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순간 조하랑은 깜짝 놀라 단번에 박예찬의 입을 막았다.“예찬아, 이 일은 이모랑도 약속했지? 절대로 할아버지랑 인우 삼촌한테 말하면 안 돼. 알겠지?”그러자 박예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말하려면 진작에 말했어요.”‘하긴.’조하랑은 이미 어른이랑 별다를 게 없는 박예찬이 너무 든든했다.“그러면 다행이고. 어른들의 일은 어른이 해결할 테니까 넌 빨리 학교 가.” 박예찬은 자신의 설득에도 조하랑이 고집을 부리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다른 한편, 김인우는 그제야 박민정의 난청 수술에 관한 일이 떠올라 수술 시간을 확인차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박민정은 서주에 갔다 와서 다시 수술 날짜를 잡겠다고 말했다.순간 오늘 갑자기 서주로 가겠다던 조하랑이 떠올랐는데 사실 지금 그녀가 하는 업무는 온라인 마케팅 부분이라 굳이 출장 갈 필요가 없었다.설령 필요하다고 해도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요 며칠 하랑 씨가 뭐 하고 다니는지 잘 지켜봐 봐.”김인우는 모든 일을 안배한 뒤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방성원, 설인하 부부와 딸 방은정의 모습이 보였다.“성원아, 병원엔 웬일이야?”“아기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검사하러 왔어.”“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더 얘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그러다가 김인우는 다시 뒤돌아 방성원네 세 식구의 모습을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은 언제쯤 아이가 있을지, 언제쯤 조하랑과 아이와
방성원도 방은정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고 나서야 그녀는 안심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설인하는 왠지 모르게 씁쓸한 감정이 몰려왔다.그러다가 문득 이혼도 먼저 제안하고 거기에 아이 양육권까지 달라고 한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이도 아빠를 너무 잘 따랐고 방성원도 아이를 많이 예뻐했다.이때, 차가 갑자기 급정거하게 되었는데 설인하가 채 반응도 하기 전에 방성원은 그녀와 방은정을 자기 품에 꼭 안았다.그리고 살벌한 얼굴로 운전 기사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대표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앞에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연신 사과하는 운전기사를 보고 방성원이 다시 차분하게 답했다.“천천히 몰아요.”“네.”이 시각 설인하는 여전히 딸과 함께 방성원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다가 문득 그의 두 눈과 마주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그 상태로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이때, 방은정이 방성원의 옷자락을 잡고 그를 불렀다.“아빠...”방성원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그 뒤로 차는 도로 위를 아주 천천히 달리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설인하는 아까부터 심장이 계속 두근거려 창밖을 바라보면서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성원은 방은정을 안은 채 앞에서 걸었고 설인하는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도우미는 세 사람이 같이 돌아온 모습을 보고 살짝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은정이는 괜찮나요?” “그저 보통 감기래요.”방성원은 아이를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너무 다행이네요.”여태껏 도우미가 방은정을 계속 돌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예쁜 아이가 아프다고 하니 자신도 걱정되었다.그렇게 도우미는 방은정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이때, 방성원은 한창 출근 준비 중인 설인하를 불러세웠다. “얘기 좀 해.”“뭐?”두 사람은 나란히 집을 나섰고 방성원이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정말 나랑 이혼하고 싶어?”
“왜 아직도 안 갔어요?”연지석의 물음에 설인하는 벌떡 일어서서 답했다.“부사장님, 아직 업무가 조금 남아서 다 끝내면 가려고요.”그러자 연지석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무엇보다도 건강이 제일 중요한데 이만 돌아가서 쉬어요.”설인하는 살짝 고민해 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연지석은 원래 쓸데없는 참견을 잘 안 하는 사람인데 설인하와는 오랫동안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로 지냈기에 이제는 거의 친구나 다름없었다.하여 그는 돌아가려다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지난번에 방성원이 아이를 억지로 데려갔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무슨 짓을 했나 싶었다.그러자 설인하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요. 집안일은 이미 다 해결되었습니다.”그러다가 뭔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맞다, 지난번에 부사장님께서 제 그 불미스러운 일을 처리해 주셨는데 제가 계속 밥 한번 사드리고 싶었거든요. 말이 나왔던 참에 바로 오늘 갈까요?”연지석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래요.”그의 대답에 설인하는 즉시 가방을 정리한 뒤 연지석과 같이 회사에서 나왔다.이때, 회사 입구에 마이바흐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차 안의 남자는 설인하와 연지석이 웃고 떠들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과 백화점 안에 들어가서 밥까지 먹는 걸 보고 말없이 담배만 태웠다.연기가 자욱해질수록 차 안에 있던 방성원의 눈가도 어느새 빨개졌다.그냥 못 본 척 가려고 했는데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이 너무 떨려서 차에 시동조차 걸기 힘들었다.두 사람이 밥을 다 먹고 나와보니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설인하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방은정이 이미 자고 있었고 거실 소파에 방성원이 혼자 앉아 있었다.그는 마침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녀가 돌아온 걸 뻔히 알면서도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뻘쭘해진 설인하가 먼저 입을 뗐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방성원이 찻잔을 내려놓더니 시선은 여전히 딴 곳에 둔 채, 차갑게 답했다.“너도
“내가 연지석이랑 경쟁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냐?”방성원이 김인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물었다.이게 대체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김인우는 순간 멍해졌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연씨 가문의 재력은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내 생각엔...”“여자를 찾는 면에서 말이야.”방성원이 말을 끊었다.김인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는데 그는 순간 또 다른 유남준을 본 것만 같았다.“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너로선 연지석을 이기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쨌든 연지석은 결혼도 안 했고 애도 없잖아. 게다가 외모도 여자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이고.”김인우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은 마치 비수가 되어 방성원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방성원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아이가 있는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그걸 말이라고 하냐? 민정이가 전에 아들 둘을 데리고 있었는데도 받아들였잖아. 그럼 뭐든 가능하지.”김인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이건 정말 뼈아픈 현실이었다. 이제 자신의 딸, 은정이도 연지석을 아빠라고 부르게 되는 걸까?“그나저나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거야? 연지석이 또 민정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거야?”김인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는 연지석이 정말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박민정은 이미 유남준과 오래도록 함께했고 아이도 넷이나 뒀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는 건 인간이길 포기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아니.”방성원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아마도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일까. 그는 더 이상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인하야...”인하? 설인하?김인우는 처음엔 잘 이해하지 못했다가 곰곰이 되새기고는 경악했다.“너 지금, 연지석이 네 아내한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거야?”그의 목소리가 다소 커졌고 주변 사람들이 흘깃 바라보자 김인우는 싸늘하게 쏘아붙였다.“뭘 봐요?”그제야 몇몇 사람들이 그가 김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말려들
“연지석 당신 진짜 염치없네요. 민정이도 모자라서 이제는 성원이 아내까지 건드려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 아니에요? 대체 왜 남의 여자만 찾는 건데요? 싱글은 아예 안 보이나 보죠?”김인우는 폭언을 쏟아내기 직전이었다.연지석은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였고 갑자기 얻어맞은 탓에 제대로 대응할 새도 없었다.김인우가 다시 주먹을 날리려 하자 연지석도 정신이 번쩍 들어 재빨리 몸을 피했다.“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네요. 오해한 거 아니에요?” 연지석이 묻자 김인우는 주먹을 쥔 채 이를 악물었다.“오해고 뭐고 할 것도 없어요! 당신 같은 놈은 정말 역겹네요! 제대로 맞아야 정신 차리죠!”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째로 김인우가 또다시 주먹을 날리려 하자 연지석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그대로 반격하며 정확하게 한 방을 꽂아 넣었다.연지석은 어릴 때부터 몸 단련에 열중했고 살아오면서 겪어온 것들이 온실 속에서 자란 김인우와는 차원이 달랐다.김인우는 한순간에 나가떨어졌고 땅에 쓰러진 채 이마를 찡그렸다. 그도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다시 일어나 덤비려 했으나 연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랑 설인하 씨는 그냥 직장 동료일 뿐이에요. 김인우 씨랑 방성원 씨가 오해한 겁니다.”그 말을 듣자 김인우는 멈칫했다.“맹세할 수 있어요? 설인하한테 관심 없다고?”“당연하죠.”연지석의 목소리는 확고했다.그가 박민정을 좋아했던 건 박민정이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인하는 그냥 동료일 뿐, 좋아한다는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그럼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닙니까?”“네, 아닙니다.”연지석의 대답은 단호했다.“오늘 같이 식사한 건, 내가 설인하 씨 업무를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어요.”그제야 김인우는 자신이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쪽 말이 사실이라면... 미안했습니다.”“앞으로는 제대로 알아보고 행동해요.”연지석은 돌아서려다 한 마디 덧붙였다.“그리고 잊지 마요. 김인우 씨가 전에 누가 본인을 구했는
설인하는 순간 멍해졌다가 곧바로 몸을 피했다.움직임이 빨랐지만 그래도 방성원의 토사물이 옷에 묻고 말았다.누군가를 이렇게까지 돌봐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화장실로 달려가 몸을 깨끗이 씻어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쉴 생각이었으나 거실을 지나치다 문득 방성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힘없이 축 늘어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어딘가 안쓰러웠다.그 순간, 설인하는 몇 년 전을 떠올렸다. 금방 결혼하고 친정이 어려움을 겪던 시절, 그녀도 술에 의지하던 때가 있었다.매번 이렇게 취해 정신을 잃곤 했는데 다음 날 눈을 뜨면 언제나 깨끗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고 옆에는 방성원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 기억이 떠오르자 설인하는 조용히 다가가 깨끗한 옷을 꺼내 들었다.그의 옷을 갈아입혀야 했다. 하지만 성인 남자의 옷을 갈아입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방성원은 키도 크고 덩치도 컸으며 취해 있는 탓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한참을 씨름한 끝에 겨우 외투만 벗길 수 있었다. 속옷까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그냥 두기로 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후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서야 안심하고 방으로 돌아갔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 시간에 대체 누구야?’짜증 섞인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더니 김인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는데 누가 봐도 얻어맞은 흔적이었다.“인우 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설인하의 질문에도 김인우는 그녀를 보지 않고 거실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여전히 취한 채 소파에 쓰러져 있는 방성원이 있었다.그제야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은 김인우가 설인하를 바라보았다.“인하 씨, 성원이랑...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성원이가 다 설명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일, 성원이랑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고.”김인우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설인하는 김인우가 한밤중에 찾아와 이 일로 자신을 추궁할 줄은
방성원은 김인우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웃어넘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는 다가서며 약간은 도도하게 말했다.“무슨 억울함? 너 혹시 착각한 거 아니야?”어젯밤, 방성원은 만취한 상태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김인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간단히 말했다.“어제 연지석에게 직접 물어봤어. 걔랑 인하 씨는 아무 관계도 아니야. 어제저녁에 같이 밥 먹은 것도 그냥 인하 씨가 도움받은 거에 대한 감사 인사였을 뿐, 다른 의미는 없었대.”방성원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무언가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곧 의문이 떠올랐다.“근데 넌 이걸 어떻게 안 거야? 어떻게 연지석을 찾아가서 물어볼 생각을 했냐?”김인우는 방성원의 체면을 고려해 어젯밤의 취중 난동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태연하게 말했다.“그야, 그냥 짐작한 거지. 내 촉이 정확했잖아.”그러고는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아, 배고프다. 빨리 가정부한테 아침밥 좀 차리라고 해.”그렇게 말한 뒤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방성원은 그가 사라진 후 피식 웃고는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겉옷은 언제 바뀌었는지 몰라도 속옷은 그대로였다. 온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고 구토로 얼룩진 흔적도 남아 있었다.그는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아마 어젯밤 김인우가 자신을 챙겨준 모양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김인우는 이미 가정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있었다.방성원이 다가가며 툭 던졌다.“고맙다.”“에이, 별말을 다 하네. 우리 사이에 그게 무슨 인사야? 친구끼리 이 정도야 당연한 거지.”김인우는 만두를 베어 물며 중얼거렸고 방성원은 한참을 지켜보다가 다시 물었다.“내 옷도 네가 갈아입혀 준 거냐?”김인우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방성원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뭐? 내가 네 옷을 갈아입혔다고? 지금 제정신이야?”김인우가 아니라면...?방성원이 더 캐묻기 전에 가정부가 다가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런 여장부를 좋아할 리가 있겠어?” 김인우는 단호하게 부정했다.“게다가 폭력적인 여자잖아. 난 절대 하랑 씨를 좋아할 리 없어. 난 그저 하랑 씨가 낯선 곳에 혼자 가서 위험한 일을 겪을까 봐 걱정되는 것뿐이야.”“어쨌든 내 아내인데 어떻게 남한테 괴롭힘을 당하게 놔둘 수 있겠어?”박예찬은 김인우의 뻔한 거짓말을 조용히 바라보며 굳이 들추지 않았다.“아, 그렇다면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듣자 하니 에리 아저씨도 같이 갔다던데요.”“에리?”김인우의 동공이 순간 수축했다. “그 배우 말이야?”“네, 맞아요. 요즘 완전 핫한 국민 배우죠.”박예찬이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둘이 어떻게 같이 가게 된 거야? 하랑 씨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아는데?”“에리 아저씨는 우리 엄마 회사의 전속 모델이에요. 하랑 아줌마가 아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죠. 게다가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하랑 아줌마는 원래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잖아요.”박예찬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하랑 아줌마가 에리 아저씨가 베이징에서 홍보 촬영을 한다는 얘길 듣고 같이 가겠다고 하셨대요.”“에리 아저씨는 얼굴은 곱상해도 몸은 탄탄하고 싸움도 잘한대요. 게다가 경호원도 많아서 하랑 아줌마가 위험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안심하세요.”안심이라니... 이 말을 듣고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김인우는 주저 없이 휴대폰을 들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전용기를 준비해. 바로 떠날 거야.”박예찬은 그런 김인우를 바라보며 장난을 이어갔다.“아저씨, 그렇게 서두르시면 하랑 아줌마가 싫어하실 텐데요? 아줌마랑 에리 아저씨의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거잖아요.”“뭐? 둘만의 시간이라니?”김인우는 언짢은 표정으로 받아쳤다.“내 아내라고! 내 아내가 누구랑 둘만의 시간을 보내?”그는 불쾌한 듯 말하고 나서 다시 한 번 당부했다.“예찬아, 할아버지께 내가 하랑 아줌마 찾으러 갔다고 전해 줘.”“네.”박예찬은 순순히 대답했다.김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