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우는 차 안에서 홍주영이 낯선 남자와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사람을 시켜 사진을 찍게 한 후 그 남자의 신원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원이 전화를 걸어왔다.“도련님, 저 남자는 하민재라고 합니다. 하씨 집안의 장남이자 연지석의 친구입니다.”하민재?유남우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깨달았다.‘어쩐지 어디선가 본 얼굴 같더니 정말 아는 사람이었군.’홍주영의 가정환경을 이미 알고 있던 유남우는 그녀가 하씨 집안 사람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녀의 집안은 그저 평범한 가정이었으니까.유남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문득 홍주영이 하민재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그는 차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려 할 때쯤 운전기사에게 차를 몰고 떠나라고 지시했다.식사 후 홍주영은 원래 식사 값을 내려고 했으나 하민재가 이미 계산을 끝낸 상태인 것을 발견하고는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얼마였어요? 제가 송금할게요.”비서의 월급으로 식사비를 감당할 수는 있었지만 오늘 식사는 그녀의 한 달 월급에 가까운 금액이었다.하민재는 그녀의 솔직한 태도에 약간 놀라며 미소 지었다.“괜찮아요. 다음에 밥 먹을 때 사면 돼요. 이제 나한테 두 끼 빚진 거네요.”홍주영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애 경험이 전무한 그녀는 하민재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 다음번엔 꼭 제가 살게요.”“좋아요.”하민재는 그녀가 이렇게 진지하게 답하는 모습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는 그녀를 차에 태워 보낸 후에야 자신의 전용 차량을 불렀다.하민재는 결혼할 나이에 접어들었고 그의 할머니가 추천한 사람이 바로 홍주영이었다.“이 여자는 참 괜찮다. 전혀 속물적이지 않아.”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하민재는 오늘 평범한 옷차림으로 나왔는데 그녀를 테스트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이 간단한 테스트는
에리는 연지석을 노려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당장 쫓아내고 악보를 되찾아야겠어.’“연 사장님이 곡을 쓴 적이 있던가요?”에리가 비꼬듯 물었으나 연지석은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곡을 쓸 줄 몰라도 볼 줄은 알지 않을까요?”그는 에리의 악보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내가 보기에 이 곡은 엉망이네요. 민정이 시간 좀 낭비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그 말에 이어 연지석은 박민정에게 부드럽게 말했다.“민정아, 인하 씨도 이제 퇴근할 시간이 됐을 거야. 찾아가 봐.”뜻밖의 구원에 박민정은 감사한 눈길을 연지석에게 보냈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사실 박민정은 에리의 과한 열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악보를 보여주겠다며 다가오더니 갑자기 자신의 복근 여덟 개를 자랑하겠다고 나섰던 그였다.‘내가 이런 활기 넘치는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박민정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에리는 얼굴에서 웃음을 싹 거둔 채 연지석을 노려보았다.“뭐예요, 사장님은 유 대표한테 직접 맞서지도 못하면서 저까지 막으려는 거예요?”과거 같았으면 연지석은 그의 도발에 휘둘렸을 것이지만 이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난 내 얼굴이 이미 충분히 두껍다고 생각했는데 에리 씨가 더하군요.”연지석이 태연하게 말하자 에리는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쳤다.“이건 얼굴이 두꺼운 게 아니라 내 행복을 추구하는 거예요. 뭐가 문제인데요? 난 민정이를 좋아해요. 예전부터 좋아했고요. 사장님처럼 좋아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요.”에리는 연지석을 경쟁 상대로 여겨왔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연지석은 그의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가 퇴근 준비를 했다.설인하는 그의 옆에서 퇴근을 도왔다.“사장님, 이번 계약도 성공적으로 성사되었습니다.”“잘했어요.”연지석이 칭찬하자 설인하는 머쓱한 듯 말했다.“다 사장님의 훌륭한 지도 덕분이에요.”연지석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처럼 혼자서 일을 잘 해내지 못
방성원이 별장에 도착하자 집 안은 더더욱 활기가 넘쳤다.그는 유남준 앞에서 자신의 아이를 자랑하기 바빴다. 오늘은 김인우도 찾아와 두 친구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 한 명은 아들이 있고 다른 한 명은 딸이 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없었다.김인우는 문득 할아버지가 말했던 ‘고독한 인생’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조하랑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하지만 김인우는 곧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딩크족으로 사는 게 나은 거지.”유남준은 그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채 서류를 한 장 꺼내 김인우에게 건넸다.“이 안에 있는 걸 철저히 조사해 봐.”그것은 몇 가지 약물 목록이었다.김인우는 즉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이게 민정이가 복용했던 약이야?”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래. 바로 조사할게.”이 약물 리스트는 유남준이 박민정을 몰래 다른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 따로 사람을 시켜 확인한 결과였다.김인우는 약물 목록을 사진으로 찍어 부하에게 전송했다.“민정이는 요즘 상태가 좀 나아졌어?” 친구의 물음에 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박민정은 여전히 기억을 되찾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을 피하고 화를 내는 상황이었다.오늘도 함께 식사를 마친 뒤 그녀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완전히 외면했다.김인우는 그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위로했다.“인생사 뜻대로 되는 일이 몇이나 있겠어. 너무 마음 쓰지 마.”그러나 유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박민정이 기억을 되찾고 무엇보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시간이 늦어졌지만 김인우와 방성원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유남준은 차갑게 말했다.“이제 밤도 깊었으니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대답했다.“아니, 이제 겨우 열 시인데 뭘. 천천히 가도 돼.”열 시인데도 느긋하다니, 유남준은 점점 인내심
유남준은 방성원의 말을 듣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동생은 정말 한시도 조용히 있질 못했다.유남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알겠어. 계속 철저히 감시해.”“그래.”방성원과 유남준은 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뒤 자연스레 집안 사정을 화제로 삼았다.방성원의 상황은 유남준보다 훨씬 심각했다.설인하가 이혼을 요구하며 딸까지 데려가겠다고 나선 상태였다.“남준아, 정말 모르겠어. 내가 인하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떠나려고 하는 걸까?”유남준은 그의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결국 간단히 말했다.“무슨 일이든 분명히 설명하고 넘어가. 후회만 남기지 않도록 해.”유남준은 과거 자신과 박민정 사이의 오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갈등과 상처가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때 미리 솔직히 대화했더라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한편, 객실에서는 박민정과 조하랑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조하랑은 참지 못하고 박민정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민정아, 네가 돌아와서 얼마나 좋은지 알아? 계속 돌아오지 않았다면 난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거야.”그녀가 말하는 죄책감은 예전에 병원에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박민정이 실종된 일을 가리켰다.박민정은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바보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박민정이 그렇게 말했지만 조하랑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아리며 지난 1년 동안의 괴로움을 떠올렸다.“응, 이제부터는 정말 무사하게 지내야 해.”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하랑아, 넌 내가 남준 씨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조하랑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해?”“그냥... 예전에 속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쉽게 믿기가 힘들어졌어.”박민정은 쓴웃음을 지었고 조하랑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솔직히 나도 네가 남준 씨를 믿어야 할지 확신은 없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어. 만약 네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네 선택은 분명 그 사람을 믿는 거였을 거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유남준은 방성원의 말을 듣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동생은 정말 한시도 조용히 있질 못했다.유남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알겠어. 계속 철저히 감시해.”“그래.”방성원과 유남준은 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뒤 자연스레 집안 사정을 화제로 삼았다.방성원의 상황은 유남준보다 훨씬 심각했다.설인하가 이혼을 요구하며 딸까지 데려가겠다고 나선 상태였다.“남준아, 정말 모르겠어. 내가 인하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떠나려고 하는 걸까?”유남준은 그의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결국 간단히 말했다.“무슨 일이든 분명히 설명하고 넘어가. 후회만 남기지 않도록 해.”유남준은 과거 자신과 박민정 사이의 오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갈등과 상처가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때 미리 솔직히 대화했더라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한편, 객실에서는 박민정과 조하랑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조하랑은 참지 못하고 박민정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민정아, 네가 돌아와서 얼마나 좋은지 알아? 계속 돌아오지 않았다면 난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거야.”그녀가 말하는 죄책감은 예전에 병원에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박민정이 실종된 일을 가리켰다.박민정은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바보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박민정이 그렇게 말했지만 조하랑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아리며 지난 1년 동안의 괴로움을 떠올렸다.“응, 이제부터는 정말 무사하게 지내야 해.”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하랑아, 넌 내가 남준 씨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조하랑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해?”“그냥... 예전에 속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제는 쉽게 믿기가 힘들어졌어.”박민정은 쓴웃음을 지었고 조하랑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솔직히 나도 네가 남준 씨를 믿어야 할지 확신은 없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어. 만약 네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네 선택은 분명 그 사람을 믿는 거였을 거
방성원이 별장에 도착하자 집 안은 더더욱 활기가 넘쳤다.그는 유남준 앞에서 자신의 아이를 자랑하기 바빴다. 오늘은 김인우도 찾아와 두 친구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 한 명은 아들이 있고 다른 한 명은 딸이 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없었다.김인우는 문득 할아버지가 말했던 ‘고독한 인생’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조하랑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하지만 김인우는 곧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딩크족으로 사는 게 나은 거지.”유남준은 그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채 서류를 한 장 꺼내 김인우에게 건넸다.“이 안에 있는 걸 철저히 조사해 봐.”그것은 몇 가지 약물 목록이었다.김인우는 즉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이게 민정이가 복용했던 약이야?”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래. 바로 조사할게.”이 약물 리스트는 유남준이 박민정을 몰래 다른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 따로 사람을 시켜 확인한 결과였다.김인우는 약물 목록을 사진으로 찍어 부하에게 전송했다.“민정이는 요즘 상태가 좀 나아졌어?” 친구의 물음에 유남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박민정은 여전히 기억을 되찾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을 피하고 화를 내는 상황이었다.오늘도 함께 식사를 마친 뒤 그녀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완전히 외면했다.김인우는 그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위로했다.“인생사 뜻대로 되는 일이 몇이나 있겠어. 너무 마음 쓰지 마.”그러나 유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박민정이 기억을 되찾고 무엇보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시간이 늦어졌지만 김인우와 방성원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유남준은 차갑게 말했다.“이제 밤도 깊었으니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대답했다.“아니, 이제 겨우 열 시인데 뭘. 천천히 가도 돼.”열 시인데도 느긋하다니, 유남준은 점점 인내심
에리는 연지석을 노려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당장 쫓아내고 악보를 되찾아야겠어.’“연 사장님이 곡을 쓴 적이 있던가요?”에리가 비꼬듯 물었으나 연지석은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곡을 쓸 줄 몰라도 볼 줄은 알지 않을까요?”그는 에리의 악보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내가 보기에 이 곡은 엉망이네요. 민정이 시간 좀 낭비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그 말에 이어 연지석은 박민정에게 부드럽게 말했다.“민정아, 인하 씨도 이제 퇴근할 시간이 됐을 거야. 찾아가 봐.”뜻밖의 구원에 박민정은 감사한 눈길을 연지석에게 보냈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사실 박민정은 에리의 과한 열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악보를 보여주겠다며 다가오더니 갑자기 자신의 복근 여덟 개를 자랑하겠다고 나섰던 그였다.‘내가 이런 활기 넘치는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박민정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에리는 얼굴에서 웃음을 싹 거둔 채 연지석을 노려보았다.“뭐예요, 사장님은 유 대표한테 직접 맞서지도 못하면서 저까지 막으려는 거예요?”과거 같았으면 연지석은 그의 도발에 휘둘렸을 것이지만 이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난 내 얼굴이 이미 충분히 두껍다고 생각했는데 에리 씨가 더하군요.”연지석이 태연하게 말하자 에리는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쳤다.“이건 얼굴이 두꺼운 게 아니라 내 행복을 추구하는 거예요. 뭐가 문제인데요? 난 민정이를 좋아해요. 예전부터 좋아했고요. 사장님처럼 좋아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요.”에리는 연지석을 경쟁 상대로 여겨왔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연지석은 그의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가 퇴근 준비를 했다.설인하는 그의 옆에서 퇴근을 도왔다.“사장님, 이번 계약도 성공적으로 성사되었습니다.”“잘했어요.”연지석이 칭찬하자 설인하는 머쓱한 듯 말했다.“다 사장님의 훌륭한 지도 덕분이에요.”연지석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처럼 혼자서 일을 잘 해내지 못
유남우는 차 안에서 홍주영이 낯선 남자와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사람을 시켜 사진을 찍게 한 후 그 남자의 신원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원이 전화를 걸어왔다.“도련님, 저 남자는 하민재라고 합니다. 하씨 집안의 장남이자 연지석의 친구입니다.”하민재?유남우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깨달았다.‘어쩐지 어디선가 본 얼굴 같더니 정말 아는 사람이었군.’홍주영의 가정환경을 이미 알고 있던 유남우는 그녀가 하씨 집안 사람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녀의 집안은 그저 평범한 가정이었으니까.유남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문득 홍주영이 하민재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그는 차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려 할 때쯤 운전기사에게 차를 몰고 떠나라고 지시했다.식사 후 홍주영은 원래 식사 값을 내려고 했으나 하민재가 이미 계산을 끝낸 상태인 것을 발견하고는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얼마였어요? 제가 송금할게요.”비서의 월급으로 식사비를 감당할 수는 있었지만 오늘 식사는 그녀의 한 달 월급에 가까운 금액이었다.하민재는 그녀의 솔직한 태도에 약간 놀라며 미소 지었다.“괜찮아요. 다음에 밥 먹을 때 사면 돼요. 이제 나한테 두 끼 빚진 거네요.”홍주영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애 경험이 전무한 그녀는 하민재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 다음번엔 꼭 제가 살게요.”“좋아요.”하민재는 그녀가 이렇게 진지하게 답하는 모습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는 그녀를 차에 태워 보낸 후에야 자신의 전용 차량을 불렀다.하민재는 결혼할 나이에 접어들었고 그의 할머니가 추천한 사람이 바로 홍주영이었다.“이 여자는 참 괜찮다. 전혀 속물적이지 않아.”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하민재는 오늘 평범한 옷차림으로 나왔는데 그녀를 테스트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이 간단한 테스트는
유남우는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는 홍주영과 통화 중인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남자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홍 비서, 연애해?”그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지며 약간 놀란 듯 물었고 홍주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멍해졌다.“글쎄요, 연애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냥 소개팅 단계라 서로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네. 만약 확실해지면 꼭 그 사람 데리고 와. 나도 한번 봐야 하지 않겠어? 홍 비서가 좋은 사람을 골랐는지 내가 심사도 해줄게.”홍주영은 그의 가벼운 태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유남우가 조금의 질투도 없이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걸 보니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그녀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달랐다.홍주영은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도련님, 그럴 필요 없어요.”“왜?” 유남우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홍주영은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말했다.“그건 제 개인적인 일이잖아요. 그렇죠?”유남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홍주영은 이어서 말했다.“도련님은 저한테 단 한 번도 도련님의 사적인 일에 관여할 기회를 준 적이 없었잖아요. 그러니 제 일에도 간섭하지 말아 주세요. 존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이건 홍주영이 처음으로 유남우를 거절한 순간이었다.유남우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홍주영은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밖에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이번 눈은 언제쯤 멈추려나...”홍주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받아 화제를 돌렸다.“그러게.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오네.”그 후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회사에 도착한 뒤, 퇴근 시간이 되자 유남우는 홍주영이 벌써 자리를 비운 것을 발견했다.왠지 모르게 그녀가 어디로 갔
홍주영은 오늘 유남우와 함께 회사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차에서 내리겠다는 유남우의 말에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직접 찾아왔다.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지금 이 끔찍한 장면이었다.홍주영은 여실히 박민정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소리쳤다.“도련님, 빨리 민정 씨를 놓아주세요! 지금 위험해 보여요.”그제야 홍주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유남우는 급히 박민정을 놓았다.하지만 이미 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하고 보랏빛이 돌 정도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민정아!”유남우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박민정은 숨을 헐떡이며 말할 겨를조차 없었고 홍주영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민정 씨, 천천히 숨을 고르세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유남우의 눈빛에는 뚜렷한 죄책감이 어렸고 그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하지만 박민정은 곧바로 몇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나, 방금 거의 죽을 뻔했어요.”그녀는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만약 유남우가 조금이라도 더 심하게 했다면 그녀는 정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유남우의 손은 공중에서 멈춰버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홍주영이 대신 사과하며 말했다.“민정 씨,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홍주영은 누구보다도 유남우가 박민정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방금 들었던 유남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는지라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더는 오빠를 보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유남우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맴돌았다.‘보고 싶지 않아요.’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던 홍주영은 조심스레 말했다.
박민정은 손바닥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오빠는 거짓말쟁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 있겠어요? 오빠가 준 그 약들, 내가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신을 아껴주던 남우 오빠가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까지 해칠 수 있는지.유남우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이 방법밖에 없었어!”그는 박민정을 자기 곁에 완전히 붙잡아 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박민정은 냉소를 흘렸다.“방법이 이것뿐이라니. 오빠는 정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해요. 오빠가 이런 사람이 되어버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박민정의 마지막 말이 유남우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끊어버린 것 같았다.그는 손을 들어 박민정의 팔을 움켜쥐었고 분노와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변했다고? 네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어?”유남우가 박민정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자 그녀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이거 놔요!”하지만 유남우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다.“변한 건 너야! 네가 먼저 변했어! 너 어릴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나를 좋아한다고, 크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그는 목이 메었다.“너는 나랑 유남준도 구별 못 했어.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 인간이랑 결혼하고 그 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유남우의 목소리가 떨렸다.“넌 원래 나만 좋아해야 했어. 네가 변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유남우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내가 헛소리를 하는 건지 아닌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내가 너를 1년 넘게 보살폈어. 그런데 유남준이 나타나자마자 넌 또 유남준한테 가버렸지. 너한테 사랑은 그렇게 쉬운 거야?”박민정은 그가 너무 꽉 끌어안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박예찬 역시 하루빨리 박민정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병세가 계속 나아졌다 악화됐다를 반복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의 마음도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김인우와 조하랑은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다투었고 이 끝없는 싸움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었다.그렇게 매일 부딪히면서도 결국 두 사람이 잘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이런저런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박예찬은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박씨 가문.그날 밤, 박민정은 금세 잠에 들었다.이곳에서의 밤은 신림현에서 지낼 때와 달랐는데 전에 느끼던 두려움 없이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휴식을 방해할까 두려워 결국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그렇게 밤새 뒤척이던 그는 다음 날 아침, 눈 밑에 푸른 기운이 남아 있을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제대로 쉬지 못한 티가 났다.유남준은 아침부터 박민정을 찾았지만 진서연에게 뜻밖의 답을 들었다.“보스는 이미 나가셨어요.”“언제 나간 거야? 어디로 갔는데?” 유남준이 다급히 묻자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민기 씨가 따라갔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준은 그녀가 안전한지 걱정되는 한편, 어제의 감정이 풀렸는지도 알고 싶었다.한편, 박민정은 차에 앉아 어제의 불쾌한 감정을 이미 잊은 듯했다.운전기사가 차를 몰며 앞길을 달리는 동안 박민정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정민기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며 동행자 역할을 했다. 박민정이 묻는 질문에만 간단히 대답했을 뿐,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박민정은 그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릴 정도였다.얼마 후, 두 사람은 한 대학의 정문에 도착했다.이곳은 박민정이 예전에 다녔던 대학교였다.익숙하면서도 낯선 이곳에 발을 내딛으며 그녀는 말했다.“분명 여기서 학교를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박민정은 유남준을 철저히 무시했다.유남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기로 결심했다.식사가 끝난 후 박민정이 소화를 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서자 유남준은 그녀를 따라갔다.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은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유남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민정아, 화 풀어.”유남준이 다가가며 말했으나 박민정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어.” 유남준이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박민정은 그렇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 순간 그녀는 두 사람이 결혼 후 어떻게 지내왔는지 문득 궁금해졌다.“우리가 결혼했을 때에도 평소에 자주 내 일에 간섭했어요?”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그건 유남준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유남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급히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지.”그가 어찌 감히 박민정을 화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는데요?”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유남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직 변명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은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이만 얘기 그만하죠.”“민정아...”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피하며 경계하는 얼굴로 말했다.“유남준 씨, 자중하세요.”유남준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민수아, 설인하, 그리고 진서연은 흥미진진하게 속닥거렸다.“무슨 일이야? 부부싸움 한 건가?”“부부싸움은 개도 안 끼는 법이라더니. 우리 얼른 자러 가자.”“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그들은 수군거리며 한쪽으로 사라졌다.박민정은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더는 산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유남준을 뒤로 하고 거실로 돌아갔다.유남준은 딱딱하게 굳은 발걸음으로 민수아와 두 사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