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문 앞에서 은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이 깼어? 아줌마가 우리 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만두 빚었어. 식기 전에 얼른 먹어.”은정숙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서서히 기억났다.두원 별장에서 나오고 병원 가서 병 보인 후 마지막으로 아줌마 보러 왔었지.그녀는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기억력은 왜 또 이렇게 나빠진 거야?’이제 막 당혹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잔꽃 무늬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큼지막하게 나 있었다.오른쪽 귀를 만졌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고 손을 펼쳐보니 피로 흥건했다.보청기도 빨갛게 물들었다...박민정은 서둘러 티슈로 귀를 닦고 침대 시트도 전부 거둬냈다. 은정숙은 그녀가 내려올 기미가 없자 베란다로 올라갔다가 시트를 씻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왜 그래?”“생리 왔어요. 조심하지 않아 시트에 묻혔더라고.”박민정이 웃으며 해명했다.침대 시트를 다 씻고 아줌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잠시만의 평온함을 만끽했다.은정숙의 목소리는 때론 똑똑히, 때론 어렴풋이 들렸다.박민정은 너무 두려웠다. 앞으로 이 목소리도 못 들으면 어떡하지?아줌마가 알고 나서 속상해하시면 어떡하지?그녀는 이곳에서 반나절 더 있다가 저축한 돈 일부를 몰래 침대 머리맡에 숨겨두고 나서야 아줌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떠나갈 때 은정숙은 그녀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며 아쉬운 눈길로 손 흔들었다.박민정이 떠나간 후에야 은정숙도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문득 앙상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유앤케이의 내선전화에 연락했다.대표이사 사무실의 비서는 박민정 씨 가정부가 대표님을 찾으신다고 그대로 알려주었다.오늘은 그녀가 집 나간 지 3일째 되는 날이고 유남준이 그녀에 관한 전화를 받은 첫날이다.유남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역시 3일을 못 버틴다니까.’은정숙의 늙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유 대표님, 저는 민정이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가정부 은정숙이라고 해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더는 우리 민정이 다치지 않도록 너그
정수미는 윤소현의 말에 크게 놀랐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다혜는 네 친딸이잖아!”사람마다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정수미는 친딸을 찾기 위해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그런데 양딸은 자신의 친딸을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정수미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고 윤소현을 정신 차리게 하고 싶은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여전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게 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 때문이에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숨이 막혀 잠시 호흡조차 가다듬기 힘들었다.“소현아, 그렇게 싫었으면 애초에 다혜를 낳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낳았다면 책임져야 한다는 걸 모르니?”그러나 윤소현은 요지부동이었다.“엄마,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제가 만약 다혜를 데리고 정씨 가문으로 돌아가면요? 앞으로 제가 재혼이라도 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이유가 이거라니... 이렇게 이기적인 양딸을 둔 게 놀라울 정도였다.“어떻게 됐든 분명히 말해두지만 아이를 버리는 일은 절대 안 돼. 만약 네가 다혜를 버린다면 나도 너와의 인연을 끊을 거야.”정수미의 말은 단호했다.자신의 친딸조차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자신에게 잘해줄 거라는 기대도 가질 수 없었다.윤소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며 외쳤다.“엄마, 저를 협박하시는 거예요?”정수미는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만 가서 잘 생각해봐. 더 이상 너랑 말하고 싶지 않다.”하지만 윤소현은 비웃으며 말했다.“알아요. 이제 엄마에겐 친딸이 생겼으니 저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죠. 차라리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왜 저를 입양하셨어요? 저를 입양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그녀는 똑같은 논리로 정수미에게 반박한 뒤 화난 얼굴로 방을 나섰다.문 밖에서 비서가 이 모든 대화를 똑똑히 들었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아가씨 정말 너무하시네요.”윤소현이 자신의 친딸을 버리겠다는 것과 정수미가 그녀와 인연을 끊겠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어떻게 책임을 회피하는 걸
박민정은 어떻게 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을 걱정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괜찮아요. 다들 저한테 정말 잘해주고 있어요.”그녀는 지금 발코니에 서서 뒤를 돌아보며 진서연과 친구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장면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그래,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야. 혹시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꼭 나한테 말해.”유남우의 말에 박민정은 휴대폰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저한테 솔직히 말해줘요. 제가 기억을 잃고 있던 이 1년 동안, 대체 무슨 약을 먹였어요? 그리고 어떤 치료를 했는지 다 말해줘요.”유남준이 그녀를 데리고 의사를 찾아갔을 때 김인우가 말했다.현재 박민정의 상태로는 회복이 어렵다고.약물이 신경을 망가뜨린 탓이라는 이야기에 박민정은 유남우가 자신을 정말 사랑한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유남우는 잠시 침묵했다.박민정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그는 입을 열었다.“조금 있다가 1년 동안 네게 했던 치료 기록들을 보내줄게.”“좋아요.”박민정은 본능적으로 ‘고맙다’고 말하려다 멈췄다.생각해보니 굳이 고마워할 필요가 없었다.전화를 끊자 곧 유남우가 보낸 여러 치료 기록들이 휴대폰 화면에 나타났다.그 순간, 뒤에서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혼자서 밖에 서 있으면 춥지 않나?”박민정은 깜짝 놀라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사실 그녀는 유남준을 믿고 싶었지만 유남우가 남긴 상처 때문인지 여전히 타인을 쉽게 신뢰할 수 없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바람 쐬고 있었어요.”박민정은 담담히 대답했다.유남준은 그녀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저녁 준비 다 됐어. 이제 네가 오기만 하면 돼.”“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모두와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박민정은 오랜만에 따뜻한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식사 중에 진서연이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내일도 회사에 오실 건가요?”박민정이
“몸을 저렇게 드러내는 걸 보니 딱 봐도 좋은 남자는 아니야. 앞으로는 그 사람하고 거리 좀 둬.”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그녀는 이런 표현이 남자에게도 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다시 한번 무대 위의 에리를 바라보던 박민정은 이상하게 몇몇 여자를 떠올리고 말았다.그런 자신이 어색해진 그녀는 시선을 서둘러 돌리며 더는 에리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계속 보면 괜히 쓸데없는 생각만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촬영이 끝난 에리가 서둘러 박민정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유남준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물었다.“민정아, 나 어때?”박민정은 여전히 아까 유남준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다소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괜찮았어.”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남준이 차갑게 끼어들었다.“뭐가 괜찮다는 거야?”“이 광고 다시 찍어요.”에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대표님도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죠? 혹시 유남준 씨 센스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유남준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내 아내가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회사를 맡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회사의 결정권자는 나에요. 다시 찍어요.”이어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싫으면 그만둬도 좋아요.”그 말이 끝나고 그는 박민정을 향해 돌아섰다.“가자, 여보.”박민정을 부를 때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보’라는 말을 연달아 내뱉었다.에리의 눈에는 차가운 빛이 서렸고 그는 주먹을 천천히 쥐며 속으로 분노를 삭였다.이때 감독이 다가와 물었다.“이 광고 정말 다시 찍을까요?”유남준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다시 찍어요!”에리는 유남준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결정을 흐리지 않는 그의 방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유남준은 박민정의 손을 잡고 회사 밖으로 나섰고 박민정은 그의 손을 빼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남준 씨, 손 좀 놔줘요.”그러나 유남준은 손을 놓
PMJ 회사.박민정은 유남준과 함께 회사에 도착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회사의 규모에 순간 멍해졌다.그녀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의 대표실로 올라갔다.문을 열기도 전에 어디서 본 듯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 남자는 여우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배우 뺨치는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연지석이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박민정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가 바로 일어서며 말했다.“민정아.”박민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지석은 이틀 전 박민정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제야 그녀를 직접 보게 되어 마음이 격해졌다.지난 1년 동안 그는 박민정이 정말 사라진 줄 알았기에 더욱 그러했다.곧 설인하가 다가와 연지석에게 말했다.“사장님, 대표님께서 지금 기억을 잃으셔서 아마 사장님을 못 알아보실 거예요.”연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민정에게 다가가 그녀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며 말했다.“어릴 때 ‘뚱보’ 기억나?”“뚱보?”박민정은 어린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잃지 않은 터라 연지석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어릴 적 통통했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네가 이렇게 컸다고?”그 말에 설인하가 웃음을 터뜨렸다.박민정은 자신의 말이 이상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약간 부끄러워하며 사과했다.“미안. 내가 지금 기억을 많이 잃었거든.”연지석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무사한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래도 어릴 적 기억은 남아 있잖아?”한편, 유남준은 자신이 공기 취급당하는 기분이었다.박민정이 연지석은 기억하면서도 자신은 기억하지 못한다니. 그런데 하필 이때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났다.에리는 화장실에서 나와 박민정을 보자마자 반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민정아!”박민정은 밝은 에너지를 가진 에리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결국 설인하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설인하가 그녀에게 설명했다.“이분은 우리
박민정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화장실 좀 다녀오려고요.”“그럼 왜 불은 안 켜?”유남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배려해 불을 켰다.은은한 조명 아래 박민정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감기 걸린 거 아니야?”사실 박민정은 단순히 참기 힘든 것 외에도 팬티 조각 하나만 달랑 걸친 눈 앞의 남자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그녀는 재빨리 화장실로 향했지만 문에 부딪힐 뻔했다.화장실에 들어간 박민정은 소음이 새어나갈까 봐 한층 더 조심스러웠다.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일은 꼭 객실 준비를 해야겠어.”한편, 유남준은 소파에 앉아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지금 그는 박민정을 잠시라도 시야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또다시 사라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반대로 박민정은 화장실에서 나가기 싫었다. 유남준과 불필요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안에 머물 수는 없었기에 결국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어디 아픈 건 아니야? 화장실에서 오래 있었잖아.”“아니에요. 괜찮아요.”잠을 못 자서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박민정은 힘없이 대답했다.“저는 괜찮으니까 남준 씨는 얼른 자요. 신경 쓰지 말고요.”유남준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더욱 걱정스러웠다.“어딘가 불편하면 병원에 가자. 아니면 내가 개인 주치의를 부를게.”“정말 괜찮아요!”박민정은 황급히 부인했다.실은 너무 오래 참다보니 생긴 문제라는 걸 그는 알 리 없었다.침대로 돌아가 누운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려 잠들 수가 없었다.그녀가 또 일어날까 봐 유남준은 불을 끄지 않았고 박민정 역시 불을 끄지 않은 채 어쩔 수 없이 뒤척이며 반쯤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박윤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녀를 깨웠다.“엄마, 그리고 나쁜 아빠! 일어나서 아침 드세요!”박윤우
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조금 머쓱해졌다.“그건 좀 곤란한데요.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지금 그녀의 감각으로는 유남준에게서 친구 이상의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하지만 유남준은 그녀와 예의를 차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박민정 곁을 지나 이불을 들고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괜찮아. 예전에 우리가 싸울 때도 내가 소파에서 잤잖아.”어딘가 억울함이 배어 있는 말투에 박민정은 점점 미안해졌다.“그래도 제가 소파에서 자는 게 맞는 것 같아요.”그녀는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여기가 원래 그녀의 집이라지만 지금은 왠지 낯설었다.사실 원래는 동생 박민호가 이 집을 물려받았어야 했지만 조하랑의 말에 따르면 박민호가 이 집을 탕진했고 유남준이 나중에 다시 사들여 그녀에게 준 것이었다.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하면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빚진 것이 많았다.그런데도 자신이 침대를 차지하고 그를 소파에서 자게 한다니, 그녀로서는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박민정은 유남준과 소파에서 자겠다고 다투기 시작했다.서로 이불을 잡아당기며 실랑이를 벌이던 중 박민정이 중심을 잃고 그만 유남준의 품으로 넘어졌다.유남준은 순간 숨을 멈추고 온몸이 뜨거워졌다.반면 박민정은 얼굴이 화끈거리며 땅이라도 있으면 파고들고 싶었다. 당황한 그녀는 손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만 실수로 그의 가슴 어디쯤을 스치고 말았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박민정의 얼굴은 지금 붉을 대로 붉어져 있었다.유남준은 목울대를 살짝 움직이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이제 그만해. 많이 피곤할 텐데 얼른 자.”그는 그녀가 계속 곁에 있으면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박민정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조용히 수긍했다.“네.”그녀는 내일 아침 진서연과 민수아를 찾아가 다른 방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어릴 적 기억으로는 박씨 가문의 저택은 스무 명 넘게 살아도 충분히 넉넉했으니 분명 방이 있을 터였다.박민정은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잘 지낼 수 있다고?’다음 순간, 박윤우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유남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꼬맹이 박윤우가 아직 잠들지 않고 구석에 숨어 자신과 박민정의 대화를 엿보고 있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는 먼저 박민정에게 부드럽게 말했다.“잠깐만 기다려.”“네.”박민정은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몰랐지만 이내 박윤우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아아! 아빠, 진짜 내 친아빠 맞아요? 어떻게 애를 때릴 수 있어요?”박민정은 순간 멍해졌다. 놀랍게도 곧 박윤우의 태도가 바뀌었다.“흑흑흑... 사랑하는 아빠, 방금 농담한 거였어요. 아빠가 최고예요! 애를 때릴 리가 없죠. 다 저를 위한 거라는 거 알아요. 지금 바로 잘게요, 알았죠?”‘이게 무슨 상황이지?’‘어떻게 한 아이가 이렇게 빨리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거지?’유남준이 박윤우의 방에서 나온 후 집안은 금세 조용해졌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수아와 진서연이 소곤소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유남준은 핸드폰을 들어 명령했다.“오늘 밤 민수아 씨와 진서연 씨에게 업무를 더 맡기죠.”그제야 집안은 완전히 고요해졌다.박민정은 거실 소파에 앉아 놀란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집안이 그렇게 시끌벅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갑자기 조용해졌지?그녀는 지금 민수아와 진서연이 밤샘 근무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옷을 가져다줄게. 씻으러 가.”유남준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말했다.‘옷을?’박민정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아,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제 옛날 옷은 어디 있죠? 그 위치만 알려주세요.”유남준은 그녀가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고 드레스 룸으로 안내했다.드레스 룸에는 박민정의 옷이 계절별로 꽉 차 있었는데 작은 옷가게를 방불케 했다.“제가 전에 옷이 이렇게 많았어요?”박민정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그녀는 어린 시절 한수민이 옷을 거의 사주지 않았던 기억만 떠올랐다.박씨 가문의 딸이었지만 늘 낡은 옷을
김인우는 박민정이 지금은 과거와 관련된 사람들과 일들을 더 많이 접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유남준은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박씨 가문의 본가에 머물렀고 박민정과 시간을 보내며 그는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정민기가 사적으로 유남준에게 물었다.“다른 지인들도 불러볼까요?”“지금은 필요 없어요. 천천히 하죠. 민정이가 감당하기 어려울까 걱정이에요.”유남준은 박민정이 두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그녀가 힘들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정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느덧 밤이 찾아왔을 때 진서연과 다른 사람들도 돌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식사가 끝난 후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말했다.“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며칠 뒤에 다시 오면 돼.”하지만 박민정은 움직이지 않고 소파에 앉아 말했다.“여기서 지내면 안 돼요?”옆에 있던 진서연이 바로 그녀를 껴안으며 말했다.“당연히 되죠! 보스, 예전에는 항상 우리랑 같이 지내셨잖아요.”박민정은 기뻐하며 말했다.“정말? 그럼 여기서 지낼래. 이렇게 하면 내 기억도 더 빨리 돌아오겠지.”그 말을 들은 유남준의 얼굴에는 살짝 어두운 빛이 스쳤다.그는 박민정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원했는데 어째서 늘 누군가 끼어들려는 걸까?낮에는 기억을 찾고 밤에는 자신과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걸까?게다가 자신과 함께 있어도 충분히 기억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은가.“민정아, 윤우가 아직 집에 있어.”그러자 진서연이 눈치 없이 말했다.“그럼 윤우도 여기로 데려오죠!”유남준은 정말로 진서연을 내쫓고 싶었다.결혼하지 않았다고 부부에게 단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박민정은 이 말을 듣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고 유남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좋아, 그럼 나랑 윤우도 같이 이사 올게.”‘같이?’박민정은 살짝 당황했다. 방금 전에는 단지 윤우만 데려오라는 뜻 아니었나?하지만 유남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여기 남아도 되는지 묻는 건 중요하지
“치료 방법은? 있어?” 유남준이 묻자 김인우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당장은 몸을 천천히 회복시키는 것밖에 없어. 완치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어.”그는 이어 조언했다.“몸을 돌보는 동안 익숙한 사람들과 장소를 자주 접하게 해주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될 거야.”유남준은 짧게 알겠다고 대답한 뒤 병실로 향했다.여전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박민정은 자신이 점점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최근 들어 자주 두통을 겪었고 꿈도 많이 꾸었다.처음엔 그저 단순한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야 그 모든 것이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병실에 들어섰을 때 박민정은 여전히 창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민정아, 이제 집으로 가자.”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박민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애틋하게 들리는 그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며칠 전, 유남준이 그녀를 강제로 병원에 데려왔던 일이 떠오르자 그녀는 다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저... 제가 혼자 갈 수 있어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알아. 이번엔 안아주지 않을게. 혼자 걸어가도 돼.”그는 늘 강단 있고 급한 성격이었다.그래서 박민정이 병원에 오기를 꺼릴 때 고민할 틈 없이 그녀를 안고 병원으로 데려왔던 것이다.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가며 유남준을 일부러 피했다.차에 올라타자 유남준은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민정이가 예전에 자주 다녔던 길로 가.”“알겠습니다.”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이 익숙했다.1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거리 곳곳에는 변화가 엿보였다.박민정은 그것들이 낯설지 않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차는 곧 박민정의 옛 집, 박씨 집안의 본가에 도착했다.현재 이곳에는 진서연, 설인하, 민수아 그리고 정민기가 함께 머물고 있었다.정민기는 1년 동안 박민정을 찾기 위해 애썼고 그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박민정이 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