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두 아이가 자신의 뒤에 숨어버리자 조금 놀랐다.아이들에게 묘한 호감이 생긴 그녀는 진서연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아, 애들이 겁먹었잖아.”진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알겠어요. 그런데 역시 보스는 애들 친엄마라 다르네요. 제가 전에 애들 볼 때마다 볼을 꼬집어도 이렇게까지 도망친 적 없었거든요.”그 말을 들은 박민정의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진서연이 물러간 뒤 그녀는 뒤돌아 두 아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자, 이제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박민정의 온화한 목소리에 두 아이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머쓱하게 형들 쪽으로 달려갔다.박윤우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두 아이를 향해 말했다.“오자마자 엄마한테 잘 보이려고 아부나 하고. 정말 짜증나.”반면 박예찬은 큰형다운 태도를 보이며 답했다.“아직 애들이잖아. 무슨 아부를 한다는 거야?”박윤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형은 몰라. 난 딱 보면 알아. 저 애들의 속셈이 뭐였는지 말이야. 참나.”형제들의 장난스러운 대화에 이어 아이들은 서로 어울려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설인하의 딸도 합류해 아이들 방이 금세 북적였다.한편, 서재에서는 고영란과 정수미가 박민정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듣고 있었다.“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기억을 잃은 거야?” 고영란이 물었다.유남준은 가정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유남우와 관련된 이야기는 빼고 둘러대며 질문을 막아냈다.고영란은 더는 묻지 않았지만 정수미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기억 상실이 과연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서재를 나선 고영란과 정수미는 박민정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고영란은 박민정에게 유난히 다정한 태도로 손을 잡고 집안 이야기를 나누며 말했다.“기억을 잃었더라도 괜찮아. 천천히 다시 떠올리면 돼. 돌아온 이상 이제 푹 쉬면서 건강부터 챙겨야지.”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그렇게 할게요.”반면 정수미는 옆에서 몇 번이고 무언가를 말하려다 망설였다. 그녀의
정수미의 손이 공중에서 굳어버렸다.옆에 있던 윤소현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혼자 사겠다니, 그럼 네가 직접 사는 거야? 아니면 남자가 대신 사주는 거야? 차라리 부모님 돈 쓰는 게 덜 창피하지 않겠어?”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옆에 있던 조하랑은 분노가 치밀어 단호히 반박했다.“윤소현 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남자가 대신 사준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정수미도 눈살을 찌푸리며 나섰다.“소현아, 말이란 건 가려서 해야 해. 할 말 없으면 그냥 조용히 있어.”윤소현은 마치 실수한 척하며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미안해요, 엄마. 알잖아요, 제가 원래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성격이라... 나쁜 뜻은 없었어요. 어제 외국에서 민정이랑 남우 씨가 같이 있는 걸 봤는데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전부 남우 씨가 돈을 쓰더라고요. 그래서... 어머, 이걸 말해버렸네.”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조하랑도 순간 입을 다물었고 박민정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만약 유남우가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았다면? 그에게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그랬다면 절대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소용없었다.정수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윤소현은 더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유남준의 큰 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윤소현 씨, 당신 생각에 우리 민정이가 다른 남자의 돈을 써야 할 만큼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는 겁니까?”윤소현은 말문이 막혔지만 억지로 목을 세우며 응수했다.“그럼 아니에요? 어제 민정이를 찾아갔을 때 그 장면을 똑똑히 봤잖아요?”유남준은 냉정히 되물었다.“그럼 왜 유남우가 쓴 돈이 전부 내 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유남우가 어떻게 호산 그룹의 대표 자리에 올랐을 것 같아요?”윤소현은 빈정거리며 대꾸했다.“남우 씨는 자기 능력으로 성공한 사람이에요. 아
정수미에게 ‘교양 없다’는 꾸지람을 들은 윤소현의 얼굴은 단숨에 붉어졌다.“엄마,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이제 민정이를 찾으니까 저 같은 양녀는 아예 포기하는 거예요? 너무하세요.”윤소현은 화가 난 채로 방을 박차고 나갔고 정수미는 분노로 가슴이 요동쳤다.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쫓아가 볼까요?”정수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쫓아가서 뭐 하게? 저 아이는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버릇이 없어진 거야.”사실 윤소현의 끝없는 이간질만 아니었다면 정수미가 박민정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친딸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긴 세월의 정 때문에 참고는 있지만 정수미는 가끔 윤소현과 양모녀 관계를 끊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다.고영란도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사돈어른, 정말 너무하셨네요. 제 앞에서 제 아들을 그렇게 깎아내리다니 참 어이가 없네요.”정수미는 딸을 대신해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사돈어른, 정말 죄송합니다.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저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겠습니다.”고영란은 그제야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이 방에는 진서연, 민수아, 설인하 같은 이들도 있었는데 모두가 한바탕 드라마를 관람한 기분이었다.정수미는 원래 박민정을 한 번 보려 했으나 지금 상황으로는 어려워 보였다. 대신 그녀는 네 명의 외손주를 찾아갔다.작은 아이들은 그녀를 반겼지만 박예찬과 박윤우 두 아이는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정수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앞으로의 인생을 이 아이들에게 속죄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했다.“외할머니...” 어린 아이들은 정수미가 떠나려 하자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정수미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서 그녀를 붙잡아주는 사람은 이 두 아이밖에 없었기에 결국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외할머니가 곧 다시 너희를 보러 올게.”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하자 아이들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 했으나 박윤우가 그들을 막았다.“너희 둘, 정말 철이 없네. 우리 엄마가 누구 때문에 상처받았는
마침 윤소현도 회사에 갔다니...유남준은 전화를 끊고 운전기사에게 속도를 내라고 지시했다.현재, 호산 그룹 본사에서 유석진과 그의 아들 유성혁 그리고 며느리인 최현아는 유남우에게 대표 자리를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남우야, 우리 이미 얘기했잖아. 너한테 회사를 맡겼는데 회사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됐어. 주식은 폭락하고 말이야. 이제는 자리를 비워줘야 할 때 아니겠어?”유남우는 회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차분히 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고위직들과 주주들에게 물었다.“다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유남우는 다시 물었다.“제가 대표직에서 물러난다면 누가 이 자리에 앉을 건가요?”유성혁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 아버지가 이 자리에 앉는 게 가장 적합하지 않겠어?”유성혁은 올해 초 병원에서 퇴원한 뒤, 유남준이 회사를 돌보지 않는 틈을 타 다시 설치기 시작했다.유남우 자신도 사실 회사를 잘 운영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단지 형에게서 회사를 빼앗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큰아버지 가족의 압박에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유남우는 속으로 박민정을 떠올리며 손을 꽉 움켜쥐었다.“그렇다면 주주총회를 다시 열어 투표로 결정합시다. 전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최현아가 비웃으며 말했다.“왜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려요? 다들 당신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에요.”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윤소현이 들어왔다.“누가 내 남편을 몰아내려는 거예요? 내 남편이 물러나면 우리 정씨 가문은 유씨 가문과 더 이상 협력하지 않을 거예요. 잘 생각해 보라고요!”익숙한 협박이었다. 회의실의 고위직들과 주주들은 이미 이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최현아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쏘아붙였다.“동서, 우리 유씨 가문은 정씨 가문과 협력하기 전에도 잘만 운영됐어. 그런데 협력한 이후로 오히려 회사
유석진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답했다.“궁금해할 필요 없어. 곧 직접 오실 거야.”사실 그도 IM 그룹의 대표가 누구인지 몰랐다. 아마 외국인일 것이다. 아니면 어떻게 그런 대단한 능력과 자본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나이 든 사업가일 가능성도 제법 클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던 유석진의 눈앞에서 사무실 문이 밖에서 열렸고 비서가 들어와 공지했다.“여러분, IM 그룹의 대표님이 도착하셨습니다.”유남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새로운 대표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내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유남준과 박민정이었기 때문이다.유석진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의 아들과 며느리 역시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유남준?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비서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이사님, 이분이 바로 IM 그룹의 대표며 호산 그룹의 전 대표님이십니다.”유석진은 그 말을 듣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가슴이 벌렁거렸다.옆에 있던 유성혁은 두 다리가 떨렸고 그의 아내 최현아는 더욱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억울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리고 회의실 한쪽에 있던 유남우와 윤소현 역시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그들과 경쟁했던 IM 그룹이 유남준의 소유였다니... 그래서 호산의 약점을 이렇게 정확히 알아냈던 거였다.최현아는 유남우의 옷자락을 슬쩍 당기며 속삭였다.“도련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하지만 유남우는 아무 말 없이 박민정을 바라보았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민정아, 넌 이미 선택을 끝낸 거야?”그의 말은, 기억을 잃은 그녀가 여전히 유남준을 택했느냐는 뜻이었다.박민정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조금 있다가 따로 얘기해요.”“그래.”유남우의 목소리는 한층 잠긴 듯했다.유남준은 자리 앞으로 걸어나와 입을 열었다.“제가 바로 IM 그룹의 대표입니다. 못 믿겠다면 증거를 보여주죠.”그가 옆에 있던 서다희에게 눈짓하자 서다희는 관련된 증명 자료를 꺼내
김인우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유를 알게 된 후에야 일단 이지원을 그냥 두기로 했다.한편, 윤소현은 유남준의 위협적인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우리 엄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애써 자신을 다잡으려 했다.그러나 유남준은 비웃듯 가볍게 웃고는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윤소현은 의자에 앉았지만 속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예전 같았으면 정수미가 절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 믿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박민정 역시 정수미의 딸이었고 그것도 친딸이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응접실에서 유남우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눈 밑이 검게 그늘져 있었는데 아마도 전날 밤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이었다.“왜 날 속였어요?”박민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유남우는 쓰디쓴 표정을 지었다.“널 곁에 두고 싶었기 때문이야. 우린 원래 함께해야 할 사이였잖아.”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그게 전부에요? 오빠 때문에 난 아이들 네 명이나 버리게 됐고 기억까지 잃었어요!”박민정은 자신이 먹었던 약이 기억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약을 과다 복용하면 신경이 망가질 위험이 있었다.유남우는 박민정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그저 우리 사이에 좋지 않았던 기억들을 지우고 싶었어.”“지우고 싶었다고요?”그 말은 마치 타인의 기억을 없애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벼웠다.박민정은 다시 물었다.“오빠는 정말 날 사랑한 적 있어요?”그녀는 의심스러웠다.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돌아보면 유남우가 그녀를 좋아했던 건 맞을지 몰라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다고 느꼈다.어떤 사랑이 이렇게 집착적일 수 있을까?“물론이야.”유남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민정아, 난 윤소현과 결혼하지 않았어. 그 아이도 내 아이가 아니야. 우리 함께 외국으로 떠나자. 과거의 일은 모두 잊고.”그러나 박민정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싫어요.”그녀는 지금의 유남우가
유남준은 박민정에게 거부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이제 어른이니 고집 좀 그만 부려. 내가 데려가는든 네가 혼자 가든 결국 똑같잖아.”박민정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그에게 내려놓으라고 소리쳤지만 유남준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한편,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윤소현은 질투심을 억누르며 속으로 혀를 찼다.결국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억지로 끌려 나갔다.그 후, 유남우도 피폐한 표정으로 응접실을 나섰다.이를 본 윤소현은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남우 씨, 이제 어쩔 거예요?”그러나 유남우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너는 먼저 돌아가.”그 말만 남긴 채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유남우가 해임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회사 전역에 퍼졌고 이 소식을 들은 홍주영은 그의 사무실 밖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그는 대표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도련님.”홍주영이 안으로 들어오자 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넌 계속 회사에 남을 거야?”홍주영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말했다.“도련님 따라갈 거예요.”그녀의 진심 어린 태도에 유남우는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맙다.”홍주영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그럼 제가 짐을 챙기겠습니다. 저희 같이 나가요.”“그래.”사무실 문 앞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윤소현은 유남우가 자신보다 한낱 부하 직원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내심 질투로 속이 뒤집혔다.결국 그녀는 높은 굽 구두를 신은 채 쿵쿵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홍 비서, 자리에 돌아가서 짐부터 챙겨요.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내가 남우 씨 아내니까요.”홍주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윤소현 옆을 지나쳤다.유남우는 그녀가 짐을 정리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윤소현은 짐을 챙기면서도 속으로 후회했다.‘왜 내가 유남우를 고집했을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유남준에게 항상 밀리기만 했잖아. 같은 형제
윤소현은 이 말에 차갑고 깊은 한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녀는 발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다시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이지원이 비교적 빨리 전화를 받았지만 목소리엔 짜증이 가득했다.“윤소현 씨, 이번엔 또 무슨 일이시죠?”윤소현은 길게 말할 생각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우리 한번 만납시다. 꼭 할 말이 있어요.”지금 이지원은 승승장구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에 윤소현은 더 이상 뜻밖의 사고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그러나 이지원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그만하시죠. 우린 이미 갈 길이 달라졌잖아요. 당신은 유씨 집안 사모님 자리에서 잘 보내시고 전 제 아이돌 생활이나 열심히 할게요. 이제 서로 엮이지 맙시다.”그녀는 유남준이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해 자신에게 복수를 가할까 두려웠다.그러나 윤소현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지원 씨, 당신이 지금 안심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에요. 유남준이 이미 박민정을 찾아내 데리고 왔고 지금 그 여자를 치료 중이에요. 박민정이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어요?”전화기 너머로 한순간 침묵이 일었다. 이지원은 곧바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잠깐 나가 있을게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사실이에요? 유남준이 박민정을 데려갔다고요? 말도 안 돼요. 유남우는 분명 박민정이 이제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믿기 싫다면 그만두죠.”윤소현이 차갑게 말을 끊자 이지원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좋아요. 어디서 만나요?”윤소현은 그녀에게 약속 장소를 메시지로 보냈다.이지원은 오늘의 스케줄을 취소하고 개인 차량을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녀는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유남우 씨, 박민정이 돌아왔어요. 그 여자가 정말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제 일도 들통 나는 거 아니에요? 당신은 그때 제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잖아요!”하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