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휴대폰을 들어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야?” 유남준이 묻자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들... 당신이 데려간 거예요? 신생아실에 왔는데 아이들이 없어요. 지금 어디 있나요?”유남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민정아, 일단 진정해.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아이들은 괜찮아.”“정말 괜찮은 거예요? 왜 다들 아이들이 없어졌다고 해요?” 박민정이 재차 물었다.유남준은 가슴이 조여왔지만 박민정이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이미 본가로 보냈어. 내가 지금 병원으로 갈게. 우리 같이 아이들을 보러 가자.”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순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는 전화를 끊고 윤소현을 보며 침착한 척했다. “남준 씨가 아이들을 본가로 데려갔대요.”윤소현은 유남준이 거짓말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 “그래? 그럼 본가에 가서 아이들을 봐. 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분명 거기 없을 거야.”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윤소현은 핏기 하나 없는 박민정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보며 자리를 떴다.박민정은 혼자 신생아실에 오랫동안 서 있었고 유남준이 언제 왔는지도 몰랐다.그가 도착하자마자 박민정은 온몸에 힘이 빠져 쓰러질 뻔했다.유남준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말했잖아. 지금 몸이 매우 약해서 나오면 안 된다고.”“남준 씨, 우리 아이들을 보고 싶어요. 나 데려다 줘요. 아이들을 보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쉴 수도 없어요.” 박민정의 눈가가 붉어졌다.유남준은 대답 대신 그녀를 안아 들어 병실로 향했다.병상에 박민정을 눕히고 난 후,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우선 잘 쉬어. 약속할게. 사흘 안에 반드시 아이들을 데려와서 보여줄게, 어때?”이 말을 듣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졌고 결국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요...”유남준은 이런 그녀의 모
박민정은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조하랑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박민정은 그 사람의 지시에 따라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박민정 역시 자신이 간다고 해도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에 정민기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하지만 그 사람은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이라도 하는 듯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왜 말을 안 듣지, 박민정 씨?”곧이어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아이는 건드리지 마요!”박민정이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출산으로 인해 생긴 상처가 다시금 벌어지며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박민정은 순간적인 아픔에 헛숨을 들이키며 입으로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수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 뒤로 계속해서 누군가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제가 얘기했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알릴 생각 하지 말라고. 이건 경고예요. 한 번만 더 허튼수작 부렸다간 그땐 저도 봐줄 생각 없어요.”“알았어요. 다른 사람들한텐 연락 안 할 테니까, 제발 아이한테 손대지 마세요.”박민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제야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는 만족스러운 듯 말을 이어나갔다.“진작 그랬어야죠. 이제 제가 말해주는 장소로 오세요.”박민정은 수화기 너머의 지시에 따라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그녀 역시 자신이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어떠한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본능적인 모성애가 그 모든 두려움과 위험을 잊게 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아이를 구할 생각뿐이었다.차에 올라탄 박민정은 택시 기사에게 한 장소를 얘기해 주었다.뒤이어 차를 여러 번 더 갈아타며 수화기 너머의 인간이 얘기해 준 장소로 향했다.끔찍할 정도로 치밀했던 그 인간은 박민정에게 다른 사람과 접촉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박민정 역시 최대한 기지를 발휘해 자신의 두 귀걸이를 각각 다른 택시에 놓고 내렸다. 이렇게라도 해놓
이지원은 불만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왜?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뭔데?”박민정은 그런 이지원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거라면 날 원망하지 말고 하늘을 원망했어야지.”그 말에 완전히 이성을 잃은 이지원은 박민정의 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내가 널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가 단순히 이런 대화나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내가 정말 너 따위를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하냐고.”박민정은 그런 이지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정말 날 죽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죽여버리지 그래.”박민정의 목을 움켜쥔 이지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 순간, 문가에서 어떤 남자의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이지원은 뭔가가 떠오른 듯 천천히 손에 힘을 풀고는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살게 해줄 생각이야.”박민정은 이지원이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가 제일 궁금한 것은 아이의 안위였다.“이지원, 화풀이할 거면 나한테만 해.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알고 싶어? 그럼 협조 잘해야 할 텐데?”이지원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협조라고?박민정은 이지원이 말하는 협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뭘 하려는 거야?”이지원은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손뼉만 두어 번 쳤다. 뒤이어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우르르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제일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이지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이 사람 맞죠?”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이제 부탁 좀 할게요.”“네.”대답을 마친 그 사람은 천천히 박민정의 앞으로 다가왔다.“너무 겁먹지는 마시죠. 저희는 심리상담 교수입니다. 민정 씨를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박민정은 이지원이 왜 생뚱맞게 심리상담 교수들을 불러들였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그땐 내가 직접 이 애새끼 목을 졸라 죽여버릴 거니까!”이지원은 아이의 여린 목덜미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솔직히 얘도 참 귀엽게 생겼어. 네 어릴 때처럼 말이야.”순간 당황한 박민정이 외쳤다.“애한테 손대지마! 네가 원하는 게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게.”이지원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아이의 목에서 손을 뗐다.“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나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이렇게 어린 애한테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단 말이야.”말을 마친 이지원은 다시 아이를 여자에게 넘겨주었다.혹시라도 박민정이 다시 반항할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이지원은 두 여자에게 아이를 이곳에 두고 가게 했다.뒤이어 누군가가 박민정의 결박을 풀고는 그녀를 의료용 침대 위로 눕혔다.앞서 나섰던 흰 가운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이제 눈을 감으시고, 제가 하는 말에 무조건 따르셔야 합니다. 아시겠죠?”“네.”박민정은 그렇게 천천히 눈을 감았다.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박민정은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그 남자의 말에 따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봤지만 결국엔 그가 유도하는 무의식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몸이 지나치게 허약해졌던 박민정은 의사에 유도대로 무의식 속에서 양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그리고 뒤이어 친모인 정수미가 했던 말들도 떠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더니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흰 가운의 남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런 치료는 하루 이틀만으로는 안 됩니다. 꾸준히 받아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의사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이지원은 이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이쪽 준비는 끝났어요. 약속하신 거 꼭 지키셔야 해요.”“걱정 마세요, 제가 지원 씨를 속일 리가 없잖아요.”그 한 마디에 이지원은 청심환이라도 삼킨 듯 마음이 놓
윤소현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내랑 아이를 못 지킨 건 아주버님인데, 왜 그걸 저한테서 찾아요? 웃겨, 정말.”유남준의 인내심이 결국 바닥나 버렸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유남준은 곧장 CCTV를 통해 박민정이 스스로 병원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장 부하직원들에게 박민정이 병원을 벗어난 후의 행방을 추적하도록 지시했다.한편, 윤소현은 여전히 곁에서 비아냥거렸다.“아주버님, 제가 봤을 땐 굳이 찾을 필요도 없어 보여요. 분명 바람 나서 다른 남자랑 도망간 게 분명해요. 애도 있으면서 참... 그냥 조용히 살지...”윤소현은 끝을 모르고 혼자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비아냥거렸다. 그 순간, 유남준의 마음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윤소현에게 다가간 유남준은 조금 전의 신사다운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는 손을 뻗어 윤소현의 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네 애새끼가 20주쯤 됐다고 했지? 내가 지금 너 죽이고, 의사 찾아가서 애 꺼내라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우리 가문 재력 정도면 조산아 살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거든.”그 말에 윤소현의 동공이 커지더니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녀는 최대한 유남준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조금 전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건지 점점 땅에서 발이 떨어지더니 숨쉬기가 어려워졌다.이 미친놈은 지금 마음만 먹으면 정말 윤소현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윤소현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발버둥 쳐봤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목을 움켜쥔 유남준의 힘은 점점 강해지기만 할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제야 윤소현은 처음으로 진정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유남준을 향해 눈빛으로 용서를 구했다.그녀의 의식이 점점 흐려져 갈 때쯤, 남자는 마침내 손에서 힘을 풀었다.윤소현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목을 감싸고 거친 숨과 기침을 내뱉었다.“이제 말할 수 있겠지? 민정이랑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그 말을 하는
하지만 유남준은 그런 윤소현의 말을 전부 믿을 정도의 바보가 아니었다.“우선 이 여자 가둬요.”그는 부하에게 명령했다.“네.”그 말에 당황한 윤소현이 말했다.“아주버님, 남우 씨를 봐서라도, 제 배 속의 아이를 봐서라고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하지만 유남준은 그런 윤소현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한 마디만 남겼다.“민정이를 찾았을 때, 민정이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온다면 그때 풀어드리죠.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소현 씨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그렇게 윤소현은 가차 없이 차에 태워졌다. 혼자 남겨진 그녀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만 갔다.후회가 물 밀듯 밀려왔다. 자신이 왜 박민정을 찾아갔었는지, 왜 그 일을 인정했던 건지.이제 윤소현은 더 도망갈 곳이 없었다.남준은 계속해서 인력을 충원해가며 박민정을 찾는 게 총력을 기울였다.마침내 유남준은 서다희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사모님께서 택시에 남기신 귀걸이를 찾았습니다. 택시 안에 내장된 블랙박스 영상으로 사모님의 이동 경로까지 모두 파악했습니다.”“알겠어, 그 영상 나한테 보내줘. 그 경로대로 찾아봐야 하니까.”“네.”수색 범위가 좁아지자 유남준은 김인우와 방성원의 인력까지 동원해 박민정을 찾기 시작했다.한편, 이지원은 유남우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장소 바꿔요. 유남준이 추적 중인 모양이니까.”“네.”이지원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유남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두 아이는 남겨놓고 가요.”두 아이가 작전을 방해할지도 몰랐다.이지원은 딱히 내키지 않았지만 유남우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남우 씨가 어떻게 저를 유남준한테서 구해준다는 거죠? 유남준 그 냉혈한이 작정하고 저를 공격하면 어쩔 건데요?”이지원은 윤소현 같은 그 바보가 유남준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지원 씨가 비밀만 지켜준다면, 제가 책임지고 지켜드리죠.”유남우가 약속했다.“좋아요.
하지만 이 세상은 생각보다 컸고, 유남우가 박민정의 모든 인간관계를 전부 끊어버린 지금, 유남준은 어쩌면 평생 박민정을 찾지 못할 지도 몰랐다.“신경 쓸 필요 없어요.”유남우가 대답했다.“네.”이지원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럼 약속한 건 어떻게 된 건가요?”“아직 일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자꾸 서두르는 거죠?”유남우가 다시 말했다.유남우를 이미 따르기로 한 이지원은 지금 모든 것을 그의 말에 따라야만 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죄송합니다.”“이제 마지막까지 딱 한 단계 남았어요. 유남준한테 박민정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되거든요.”유남우가 입을 열었다.이지원은 그런 유남우를 보면서 보통 미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 한 명을 위해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알겠습니다, 지금 가서 준비하죠.”“그래요.”이지원이 자리를 뜨자 유남우는 다시 코트를 입고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하자 홍주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남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도련님, 요즘 안색이 안 좋아보이시는데, 따로 주치의라도 불러드릴까요?”“필요없어.”유남우는 단호히 홍주영의 말을 거절했다.“주영아, 난 요즘 하루하루가 정말 기쁘거든. 나쁜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네가 괜한 걱정 하는 거야.”그 말에 홍주영도 더는 권하려 하지 않았다.유남우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더미를 한아름 안고 온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도련님, 실례가 안 된다면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요 며칠 동안 어디 다녀오신 건가요?”유남우는 퇴근 들어 계속 외출을 하는 것 같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서류 위로 사인 하던 남자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실례되는 질문인 것 같은데, 묻지 말아야 할 질문 아닌가?”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냉기가 스며있었다.유남우의 이런 말투는 처음 들어보는 홍주영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사과를 건넸다.
그녀가 쥔 친자 확인 감정서에는 두 사람이 모녀 관계라고 적혀 있었다.비서는 다른 병원에서도 받아온 서류들을 건네며 말했다.“이번엔 틀림없습니다, 대표님. 박민정 씨는 대표님의 친딸이 확실합니다. 지난번엔 저희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친자 확인 감정서를 쥔 정수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어떻게... 그 걔가 어떻게 내 딸이야?”박민정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수미는 너무 갑작스러운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그녀 역시 자신이 친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 짓들이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제 어떡해야 하지?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어떻게 날 이런 식으로 갖고 놀아?”정수미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친자 확인 감정서를 손에 꼭 쥐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만큼 괴로웠다.“내가, 내가 그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라는 작자가 딸한테 오히려 모욕감만 잔뜩 줬으니...”정수미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오랫동안 찾고 있던 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다.더군다나 친딸을 괴롭히는 자신의 양딸을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다.비서 역시 이런 운명의 장난에 착잡함을 느끼고 있었다.“대표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잖아요. 조금 더 일찍 아셨더라면 민정 씨를 해치지 않으셨을 겁니다.”정수미는 비서의 위로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책을 멈추지 않았다.“그 아이가 날 찾아왔을 때도 난 상처만 잔뜩 줘버렸어. 얼마나 아팠을까.”오랜 세월 동안 눈물이라는 것을 거의 흘려보지 않았던 정수미였지만 하늘의 장난과도 같은 이 상황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난 정말 나쁜 년이야! 어떻게 친딸한테 그럴 수가 있어!”만약 이 세상에 후회 약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전 재산을 내걸고서라도 얻고 싶을 지경이었다.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정신 차리라며 자신의 뺨을 수차례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가야
문밖에 갇힌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유남준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서렸다.그는 대체 언제쯤 아내와 제대로 함께 지낼 수 있을까?두 사람은 이미 오래된 부부나 다름없건만 정작 함께하는 모습은 연애 초기보다도 못했다.오전 아홉 시가 넘어서야 윤소현은 정수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장 병실로 향했다.그곳에서 정수미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엄마, 깨어나셨어요? 왜 비서에게 미리 연락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정수미는 차가운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리더니 먼저 의사에게 나가달라고 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비서에게 들었어. 너랑 민정이가 밤새 나를 지켰다고. 괜히 너희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긴장된 마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며 윤소현이 말했다.“엄마, 전 엄마 딸이에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어요?”이어서 그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지금 몸은 좀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많이 나아졌어.”정수미가 잠시 말을 멈춘 뒤 덧붙였다.“의사 말로는 아마도 상한 음식을 먹은 탓일 거라고 하더구나.”“어제 저희가 요리사에게 같은 음식을 다시 만들게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무언가 찾아내셨나요?” 윤소현은 다급히 물었는데 혹여 정수미가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그러나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의사는 음식에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어. 아마도 고객과 외식하는 자리에서 뭔가 잘못된 걸 먹었을 거라고 하더구나.”그 말을 듣고서야 윤소현은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앞으로는 꼭 조심하셔야 해요.”“그래야겠지.” 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가 윤소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묘하게 의미심장했다.“엄마, 민정이는 어디 갔어요?”주위를 둘러보던 윤소현은 박민정이 보이지 않자 자연스레 물었다.“이제 난 괜찮으니 민정이에게 돌아가 쉬라고 했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만약 엄마께
박민정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그렇게 정수미는 드디어 박민정의 얼굴을 만져볼 수 있었고 뜨거운 촉감은 그녀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줬다.그리고 어느새 누가가 빨개진 채 계속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민정아, 민정아...”“네, 저 여기 있어요.”“내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니라 진짜 우리 민정이구나. 난 네가 또, 또 사라지는 줄 알았어.”정수미는 아주 기나긴 악몽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자기 딸을 데려갔고, 또 나중에 박민정을 만났는데 꿈속의 그녀는 절대 정수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차갑게 말했다.박민정은 그런 정수미의 모습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유남준이 마침 마실 물을 가져왔고 박민정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먹여줬다.의사도 와서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해줬다.모든 검사가 끝난 뒤 의사는 병실 밖에서 그들에게 결과를 말해줬다.길연서도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정 대표님께서 혹시 깨어나셨나요?” 그녀가 묻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방금 깨어나셨어요.”길연서는 빠르게 핸드폰을 꺼냈다.“지금 당장 큰 아가씨한테 알릴게요.”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의사가 길연서 더러 먼저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전했다.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던 정수미는 그녀를 보자마자 귓가에 무언가 말해줬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길연서는 다시 핸드폰을 끄더니 이후에도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길연서의 부름에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정수미가 한껏 기운 없는 목소리로 박민정을 불렀고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갔다.그러자 정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정아, 괜히 나 때문에 온 밤 고생했어. 이제 괜찮으니까 너도 빨리 돌아가서 쉬어.”“네.”박민정은 가볍게 대답만 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두 사람을 떠나보내자마자 정수미는 갑자기 침대에 털썩하고 쓰러지더니
기다린 지 벌써 세 시간이 넘었으나 정수미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길연서는 야식을 배달시켰다. “두 분은 이것 좀 드시고 가서 쉬어요. 여기는 제가 있을게요.”윤소현은 진작에 졸려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녀의 말에 음식을 힐끗 보더니 손을 저으며 답했다.“저는 안 먹을래요. 시간도 늦었고 지금 먹으면 살도 찌고 건강에도 안 좋아요.”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지개를 켰다.“그럼 전 이만 쉬러 갈 테니까 제 동생이랑 지키고 있어요. 혼자서 지키면 제가 마음이 안 놓여서요.”사실 윤소현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졸리지도 않았고 이따 유남준이 오기에 그를 기다려야 했다.윤소현이 떠나가자마자 길연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20년 넘게 키운 수양딸이라고 해도 어떻게 지금껏 헤어져 있었던 친딸보다 더 정이 없는지, 길연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둘째 아가씨, 아니면 저기 간병인 침대에서 잠깐만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그러나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안 졸려요.”“그럼 뭐라도 좀 드세요.”박민정은 그녀의 말대로 음식을 조금 가져와서 먹은 뒤 계속 앉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이 찾아왔는데 가녀린 몸으로 정수미 곁을 지키고 있는 박미정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민정아.”박민정은 지금 유남준을 보기만 해도 무섭고 떨렸다.“왔어요?”원래 유남준에게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기어코 아이들을 재우고 이쪽으로 달려왔다.길연서는 정수미의 사위가 온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다.“유 대표님.”“안녕하세요.”“그럼 말씀 나누세요.”굳이 부부 사이에 끼기 싫어 길연서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박민정은 원래 그녀를 불러세우려고 했으나 한발 늦은 것 같았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유남준과 박민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이때, 박민정이 어색함을 깨려고 먼저 말을 걸었다.“이만 돌아가서 쉬어요. 시간도 늦었고 내일 출근해야 하
어쨌든 정수미는 박민정의 친엄마다.길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나서야 안심되었다.그러나 윤소현은 계획이 틀어지자 박민정에게 한껏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민정아, 설마 엄마 유산을 네가 못 받을까 봐 걱정돼서 여기 남겠다는 건 아니지?”박민정은 원래 그녀와 입씨름하기 싫어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자꾸 자극하는 윤소현을 더는 봐주기 힘들어 이참에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맞아요. 정 대표님은 제 친엄마인데 당연히 제가 유산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더구나 유언장에도 제가 유산 절반을 상속받는다고 되어있고요.”박민정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만약 정 대표님께서 진짜 돌아가셨는데 제가 없는 틈에 누군가가 유언장에 손을 대면 어떡해요?”“너!”윤소현이 박민정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높게 들자 옆에 서 있던 정민기가 단번에 그녀의 팔목을 잡고 내팽개쳤다.그러다가 윤소현은 뒤로 몇 발짝 휘청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박민정, 엄마가 죽길 바라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윤소현이 불같은 화를 냈지만 박민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수술실 문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정수미가 밀려 나오자 윤소현이 빠르게 달려가 의사한테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는 괜찮나요?”그러자 의사가 대뜸 엄숙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혹시 환자분께서 어제저녁이랑 오늘 아침에 뭘 드셨을까요?”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늘 드시던 음식이었어요.”자신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한 분이 대표로 가서 혹시 환자분이 먹다 남은 음식이 있으면 싸 오세요.”의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길연서는 곧바로 집안 도우미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윤소현이 그녀를 말렸다.“매일 먹다 남긴 음식은 모두 음식물 쓰레기 통에 버리는데 그걸 어떻게 갖고 와요? 의사 선생님, 우리 엄마는 대체 왜 저렇게 된 걸까요?”“일단 응급처치해서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여
그렇더라도 이상하게 이번이랑 지난번이랑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무 미련없이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자꾸만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이게 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는 거랑 없는 것 차이일 것이다.오후가 되어서야 박민정은 진서연과 에리가 가짜 연인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그녀의 물음에 진서연이 답했다.“에리 씨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 크게 실망하실까 봐요.”“이러다가 나중에 들통나면 오히려 더 불쾌해하실 거야. 그때 가서 했던 말들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고.”“에리 씨가 요 며칠 시간을 이용해서 최대한 빨리 여자 친구를 찾겠대요. 그러면 저는 슬쩍 빠지면 되거든요.”“그래.”박민정은 더 이상 말하기도 뭐했다.저녁 퇴근길에 그녀는 정민기의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는데 하마터면 앞에 차를 들이받을 뻔했다.정민기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며 그녀에게 연신 사과했다.“정말 죄송합니다.”여태껏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이런 실수를 범했는데 한눈에 봐도 정민기는 지금 온통 진서연과의 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민기 씨, 혹시 서연이랑 무슨 오해가 생긴 건가요?”박민정의 물음에 정민기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아니요.”그가 부정하는 모습에 박민정은 원래 진서연과 에리 사이의 일을 솔직하게 말해주려 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을 보니 정수미 비서인 길연서였다.“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둘째 아가씨,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병원에 한 번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 대표님께서 지금 응급실에 실려 왔거든요.”울먹이면서 말하는 비서의 목소리에 박민정도 순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네, 바로 가겠습니다.”정민기는 그길로 박민정을 병원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응급실 복도에서 윤소현이 안정부절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이모 정주보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
에리는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하늘 아래에 널린 게 남잔데 왜 하필 정민기 씨에요?”그도 정민기를 본 적이 있었는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보고는 분명 평범한 보디가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에리 씨는 아마 모를 거예요. 저 같은 여자가 그런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건 하늘에 별 따기라는 사실을요.”진서연은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정민기는 마치 드라마 속의 여느 멋진 남주처럼 느껴지면서 더욱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에리는 반지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아니에요. 이건 제가 드리는 위로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요.”에리는 항상 씀씀이가 컸고 더구나 아직 여자 친구가 없는 그로서는 반지를 다시 돌려받는다고 해도 줄 사람이 없었다.진서연은 원래 기뻐해야 할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기쁘지 않았다.“싫어요. 이런 반지는 나중에 진짜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한테서 받을래요.”에리는 난생처음으로 여자에게 준 선물을 거절당했는데 순간 자신이 저따위 보디가드보다 매력이 없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지금 헤어진 마당에 그냥 제 가짜 여자 친구가 되는 건 어때요? 당연히 이에 따르는 보상도 있고요.”에리는 잠깐 뭔가를 고민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아직 그 사람이 신경 쓰이잖아요. 그러면 정민기 씨도 서연 씨가 신경 쓰이게 저를 이용해서 한번 자극해 보는 건 어때요?”“정민기 씨는 자기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바로 저 같은 대스타랑 연애한다고 생각하면 분명 배 아파할 겁니다.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오잖아요? 많은 여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남자들한테 자신이 매우 인기가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들잖아요.”진서연은 어느새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 그에게 물었다.“그래도 될까요?”“어차피 헤어졌는데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그렇게 두 바보는 이상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민수아가 지나가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어 박민정의 사무실로 돌
박민정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왜?”그러자 진서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저도 모르겠어요.”어제 집에 돌아간 뒤, 진서연이 막 자려고 누웠는데 정민기가 갑자기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하여 진서연은 두 사람 사이에 드디어 진전이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건 정민기의 이별 선고였다.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 멍한 상태였다.낮에는 별말이 없었다가 왜 저녁에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이유가 뭔지 물어봤어?”“우리 두 사람은 안 어울린대요.”진서연은 어느새 눈가가 빨개져서는 겨우 말을 이었다.“그러면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말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안 어울린다고 할까요? 설마 밖에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니겠죠?”“설마.”박민정은 정민기가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왜 그럴까요? 갑자기 저한테 흥미가 떨어졌을까요?”진서연은 박민정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다시 중얼거렸다.“내가 못 생겨서 질렸나?”진서연은 진심으로 정민기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니 자꾸 이상한 생각만 들면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분명 무슨 오해가 있다고 생각해. 일단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기회를 봐서 민기 씨한테 물어볼게.”“네.”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걱정스레 말했다.“혹시 물어보실 때 절대 제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가볍게 원인만 물어봐 주시면 돼요. 네?”비록 헤어졌지만 자존감은 지키고 싶었고 정민기한테 집착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래, 알겠어.”박민정은 먼저 진서연을 회사로 보낸 뒤 곧바로 씻으러 갔다.“민정아, 왜 날 피해?”유남준이 언제부터 화장실 문 어구에 서 있었는지 박민정은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양치하던 물을 삼킬 뻔했다.“설마요. 제가 왜 남준 씨를 피하겠어요?”유남준은 그녀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진짜 일부러 피한 게 아니라고?”그가 들어오면서 순간 화장실이 좁아졌는데 박민정은 숨을 한번 깊게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진서연은 볼록해진 배와 트림까지 하더니 대뜸 감탄하기 시작했다.“에리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랐을 텐데 너무 행복했겠어요.”“서연 씨는 식성이 좋아서 뭐든 다 맛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요?”그녀의 말대로 에리는 어렸을 때부터 산해진미를 먹고 자라서 오늘 요리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그게 복인 줄도 모르고.”진서연은 투덜거리다가 아까 받았던 돈봉투를 에리에게 돌려줬다.“자, 이건 돌려줄게요.”어차피 가짜 여자 친구인데 밥 한 끼 정도는 먹어줄 수 있어도 이 돈은 받을 수 없었다.그러자 에리가 덤덤하게 답했다.“하루 일당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요.”“맛있는 밥도 얻어먹었는데 돈은 당연히 돌려줘야죠.”“제가 그 돈이 아쉬운 사람처럼 보여요?”에리의 물음에 진서연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사람한테는 이깟 돈이 아무것도 아니다.“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요. 고마워요.”비록 봉투 안에 돈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께를 만져보니 적지 않은 돈인 것 같은데 문득 출근하는 것보다 수입이 짭짤하다고 생각되었다.“별말씀을요. 저희는 친구잖아요.”에리는 그길로 진서연을 박씨 가문 옛 저택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저택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져 있었다.진서연은 차에서 내린 뒤 에리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그러나 누군가가 어두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진서연은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봉투를 열어보았는데 역시나 50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 있었다.이때 갑자기 봉투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는데 줍고 나서야 그게 커다란 다이아몬드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대박, 너무 예뻐!”진서연은 그들이 여기에 다이아몬드까지 넣어줄 줄은 몰랐다.이렇게 큰 사이즈면 분명 몇천만 원도 넘을 것이다.첫 만남에 500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만 이런 다이아몬드는 당연히 받을 수 없었다.하여 진서연은 내일 아침 일찍 회사에 가자마자 에
결국 진서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어줬다.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정민기에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이 시각, 정민기는 문자를 보자마자 혹시나 진서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원래 많이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참고 메시지에 답장했다.“네.”저녁때쯤, 에리는 진서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민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라오던 그의 부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보스, 오늘 형수님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일 있대.”“헐, 저거 엄청 비싼 차인데!”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값비싼 슈퍼 카를 타고 자리를 떴다.부하들은 원래 정민기를 무서워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보스, 형수님은 왜 갑자기 저런 차를 타고 갈까요?”정민기는 원래 몇십억짜리 자동차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지만 부하가 대놓고 물어보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나도 몰라.”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탔다.지금 그가 타고 다는 차는 고작 몇천만짜리였고 길거리에 몰고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안 줄 그런 차였다.그저 박민정의 보디가드로서 너무 좋은 차를 끌고 다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민기가 말없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부하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형수님이랑 다툰 건가?” “아까 그 차는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싼 차일 것 같은데 설마 형수님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어떻게...”“대단하면 뭐 해? 지금 시대는 돈이 제일 쓸모가 있단 걸 몰라?”“하긴 요즘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야.”부하들의 말을 정민기는 차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그러나 지금은 퇴근한 박민정을 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