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불임 치료...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나 오늘...”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골프장.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남준의 절친으로서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보청기도
문 앞에서 은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정이 깼어? 아줌마가 우리 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만두 빚었어. 식기 전에 얼른 먹어.”은정숙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서서히 기억났다.두원 별장에서 나오고 병원 가서 병 보인 후 마지막으로 아줌마 보러 왔었지.그녀는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기억력은 왜 또 이렇게 나빠진 거야?’이제 막 당혹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잔꽃 무늬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큼지막하게 나 있었다.오른쪽 귀를 만졌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고 손을 펼쳐보니 피로 흥건했다.보청기도 빨갛게 물들었다...박민정은 서둘러 티슈로 귀를 닦고 침대 시트도 전부 거둬냈다. 은정숙은 그녀가 내려올 기미가 없자 베란다로 올라갔다가 시트를 씻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왜 그래?”“생리 왔어요. 조심하지 않아 시트에 묻혔더라고.”박민정이 웃으며 해명했다.침대 시트를 다 씻고 아줌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잠시만의 평온함을 만끽했다.은정숙의 목소리는 때론 똑똑히, 때론 어렴풋이 들렸다.박민정은 너무 두려웠다. 앞으로 이 목소리도 못 들으면 어떡하지?아줌마가 알고 나서 속상해하시면 어떡하지?그녀는 이곳에서 반나절 더 있다가 저축한 돈 일부를 몰래 침대 머리맡에 숨겨두고 나서야 아줌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떠나갈 때 은정숙은 그녀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며 아쉬운 눈길로 손 흔들었다.박민정이 떠나간 후에야 은정숙도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문득 앙상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유앤케이의 내선전화에 연락했다.대표이사 사무실의 비서는 박민정 씨 가정부가 대표님을 찾으신다고 그대로 알려주었다.오늘은 그녀가 집 나간 지 3일째 되는 날이고 유남준이 그녀에 관한 전화를 받은 첫날이다.유남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역시 3일을 못 버틴다니까.’은정숙의 늙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유 대표님, 저는 민정이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가정부 은정숙이라고 해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더는 우리 민정이 다치지 않도록 너그
“그땐 내가 직접 이 애새끼 목을 졸라 죽여버릴 거니까!”이지원은 아이의 여린 목덜미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솔직히 얘도 참 귀엽게 생겼어. 네 어릴 때처럼 말이야.”순간 당황한 박민정이 외쳤다.“애한테 손대지마! 네가 원하는 게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게.”이지원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아이의 목에서 손을 뗐다.“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나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이렇게 어린 애한테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단 말이야.”말을 마친 이지원은 다시 아이를 여자에게 넘겨주었다.혹시라도 박민정이 다시 반항할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이지원은 두 여자에게 아이를 이곳에 두고 가게 했다.뒤이어 누군가가 박민정의 결박을 풀고는 그녀를 의료용 침대 위로 눕혔다.앞서 나섰던 흰 가운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이제 눈을 감으시고, 제가 하는 말에 무조건 따르셔야 합니다. 아시겠죠?”“네.”박민정은 그렇게 천천히 눈을 감았다.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박민정은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그 남자의 말에 따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봤지만 결국엔 그가 유도하는 무의식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몸이 지나치게 허약해졌던 박민정은 의사에 유도대로 무의식 속에서 양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그리고 뒤이어 친모인 정수미가 했던 말들도 떠올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더니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흰 가운의 남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런 치료는 하루 이틀만으로는 안 됩니다. 꾸준히 받아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요.”의사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이지원은 이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이쪽 준비는 끝났어요. 약속하신 거 꼭 지키셔야 해요.”“걱정 마세요, 제가 지원 씨를 속일 리가 없잖아요.”그 한 마디에 이지원은 청심환이라도 삼킨 듯 마음이 놓
이지원은 불만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왜?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뭔데?”박민정은 그런 이지원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거라면 날 원망하지 말고 하늘을 원망했어야지.”그 말에 완전히 이성을 잃은 이지원은 박민정의 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내가 널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가 단순히 이런 대화나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내가 정말 너 따위를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하냐고.”박민정은 그런 이지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정말 날 죽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죽여버리지 그래.”박민정의 목을 움켜쥔 이지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 순간, 문가에서 어떤 남자의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이지원은 뭔가가 떠오른 듯 천천히 손에 힘을 풀고는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살게 해줄 생각이야.”박민정은 이지원이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가 제일 궁금한 것은 아이의 안위였다.“이지원, 화풀이할 거면 나한테만 해.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알고 싶어? 그럼 협조 잘해야 할 텐데?”이지원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었다.협조라고?박민정은 이지원이 말하는 협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뭘 하려는 거야?”이지원은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손뼉만 두어 번 쳤다. 뒤이어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우르르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제일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이지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이 사람 맞죠?”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이제 부탁 좀 할게요.”“네.”대답을 마친 그 사람은 천천히 박민정의 앞으로 다가왔다.“너무 겁먹지는 마시죠. 저희는 심리상담 교수입니다. 민정 씨를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박민정은 이지원이 왜 생뚱맞게 심리상담 교수들을 불러들였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박민정은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조하랑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박민정은 그 사람의 지시에 따라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박민정 역시 자신이 간다고 해도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에 정민기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하지만 그 사람은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이라도 하는 듯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왜 말을 안 듣지, 박민정 씨?”곧이어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아이는 건드리지 마요!”박민정이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출산으로 인해 생긴 상처가 다시금 벌어지며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박민정은 순간적인 아픔에 헛숨을 들이키며 입으로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수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 뒤로 계속해서 누군가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제가 얘기했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알릴 생각 하지 말라고. 이건 경고예요. 한 번만 더 허튼수작 부렸다간 그땐 저도 봐줄 생각 없어요.”“알았어요. 다른 사람들한텐 연락 안 할 테니까, 제발 아이한테 손대지 마세요.”박민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제야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는 만족스러운 듯 말을 이어나갔다.“진작 그랬어야죠. 이제 제가 말해주는 장소로 오세요.”박민정은 수화기 너머의 지시에 따라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그녀 역시 자신이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어떠한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본능적인 모성애가 그 모든 두려움과 위험을 잊게 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아이를 구할 생각뿐이었다.차에 올라탄 박민정은 택시 기사에게 한 장소를 얘기해 주었다.뒤이어 차를 여러 번 더 갈아타며 수화기 너머의 인간이 얘기해 준 장소로 향했다.끔찍할 정도로 치밀했던 그 인간은 박민정에게 다른 사람과 접촉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박민정 역시 최대한 기지를 발휘해 자신의 두 귀걸이를 각각 다른 택시에 놓고 내렸다. 이렇게라도 해놓
박민정은 휴대폰을 들어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야?” 유남준이 묻자 박민정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들... 당신이 데려간 거예요? 신생아실에 왔는데 아이들이 없어요. 지금 어디 있나요?”유남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민정아, 일단 진정해.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아이들은 괜찮아.”“정말 괜찮은 거예요? 왜 다들 아이들이 없어졌다고 해요?” 박민정이 재차 물었다.유남준은 가슴이 조여왔지만 박민정이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이미 본가로 보냈어. 내가 지금 병원으로 갈게. 우리 같이 아이들을 보러 가자.”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순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는 전화를 끊고 윤소현을 보며 침착한 척했다. “남준 씨가 아이들을 본가로 데려갔대요.”윤소현은 유남준이 거짓말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 “그래? 그럼 본가에 가서 아이들을 봐. 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분명 거기 없을 거야.”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윤소현은 핏기 하나 없는 박민정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보며 자리를 떴다.박민정은 혼자 신생아실에 오랫동안 서 있었고 유남준이 언제 왔는지도 몰랐다.그가 도착하자마자 박민정은 온몸에 힘이 빠져 쓰러질 뻔했다.유남준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말했잖아. 지금 몸이 매우 약해서 나오면 안 된다고.”“남준 씨, 우리 아이들을 보고 싶어요. 나 데려다 줘요. 아이들을 보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쉴 수도 없어요.” 박민정의 눈가가 붉어졌다.유남준은 대답 대신 그녀를 안아 들어 병실로 향했다.병상에 박민정을 눕히고 난 후,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우선 잘 쉬어. 약속할게. 사흘 안에 반드시 아이들을 데려와서 보여줄게, 어때?”이 말을 듣자 모든 게 명확해졌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졌고 결국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요...”유남준은 이런 그녀의 모
두 여자는 하나같이 악독했다.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박민정을 찾아가기로 했다.“아이들 잘 지켜봐요.”“걱정 마세요.” 이지원이 대답했다.윤소현은 그제야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유남준이 볼일 보러 나간 후에야 박민정의 병실로 들어갔다.“형수님, 들었어요. 쌍둥이 아들을 낳으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윤소현은 들어오자마자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박민정은 윤소현의 지금까지의 행적을 떠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나가주세요. 여기서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환영하지 않는다고요? 어제 친자 검사 때문인가요?” 윤소현이 일부러 그녀를 자극했다. “박민정, 사실 난 진작 알고 있었어. 네가 정수미의 친딸이라는 걸.”“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정수미가 널 인정하나? 오늘 누가 날 보내왔는지 알아?”박민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윤소현은 의도적으로 모든 죄를 정수미에게 뒤집어씌웠다. “바로 정수미야. 그 여자가 특별히 날 보내서 너한테 확실히 말하라고 했어.”“정수미 말로는 장애가 있는 딸은 있을 수 없대. 설령 친딸이라 해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 헛수고 하지 말라고.”친딸인데도 인정하지 않는다고?박민정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굉장히 아팠다.“그래요? 친딸에게 빚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보상하겠다고도 했는데...”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박민정의 모습에 윤소현이 냉소를 지었다. “그건 남들 보라고 한 거지. 생각해 봐. 정수미가 어떤 사람이고 넌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정이 있겠어? 그저 친딸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딸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장애...장애!박민정은 기분이 매우 얹짢았지만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나요? 정수미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난 알아요. 그분이 진심으로 친딸을 찾고 싶어 한다는 걸요.”박민정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고 윤소현의 말 몇 마디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였지만 겉으로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어서 가서 찾아. 두 아이를 찾지 못하면 진주시에 있을 자격도 없어.”“네, 네, 네.” 경호원들이 즉시 수색에 나섰고 유남준은 휴대폰을 들어 다른 전화를 걸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누가 아이들을 데려갔는지 반드시 찾아내.”소인배들이 그를 만만하게 본 걸 보니, 예전에는 지나치게 너그러웠나보다.“그리고 진주시의 원수들을 하나하나 다 처리해.”“네.”유남준은 모든 지시를 내리고 박민정의 병실로 향하던 중 그만 비틀거리며 한 발짝 휘청거렸다.박민정은 막 깨어난 참이라 아이들이 사라진 사실을 몰랐다.그녀는 유남준을 보자마자 물었다. “남준 씨, 우리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보고 싶어요.”유남준은 다가가서 거짓말을 했다. “두 아이 모두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어. 황달이 조금 있거든”“그래요? 그럼 내가 일어나서 보러 갈게요.” 아이들이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안 돼. 넌 지금 몸이 약해. 의사 말로는 이틀은 더 누워 있어야 한대. 서두르지 말고 몸이 좋아지면 보러 가자.” 유남준이 부드럽게 달래자 박민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그러고는 팔을 뻗었다. “안아줘요.”최근 이틀은 몸도 마음도 지쳤고 정말 힘들었다. 유남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녀를 살며시 안았다.박윤우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을 때 바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 “엄마, 아빠...”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긴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여전히 보였고 시선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박민정은 서둘러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윤우야, 이리 와봐. 엄마가 좀 볼까?”간호사도 다가왔다.“축하드립니다. 제대혈 교차검사를 했는데 적합하네요. 윤우가 곧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이 소식에 박민정은 무척 기뻤다.“정말요?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별 말씀을요. 당연한 일입니다.” 간호사는 이
“지금 회사가 정상 운영이 안 되고 밖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언론인들도 데리고 왔는데 쫓아내기도 곤란하고요.” 진서연은 해외에서 박민정의 작은 회사나 관리했지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유남준은 오히려 침착했고 차근차근 지시를 내렸다.연지석도 왔는데 도우려다가 유남준이 있는 걸 보고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이때 설인하가 창백한 얼굴로 사과했다. “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지난번에 주신 프로젝트를 또... 망했어요.”그녀는 지금 자신의 능력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고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연지석은 그녀를 탓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이건 설인하 씨 잘못 아닙니다. 내가 인하 씨 같은 평직원이었고 뭘 하든 막으려는 재벌 회장까지 있다면 나도 성공 못 했을 겁니다.”설인하가 놀랐다.“무슨 뜻이세요?”“인하 씨랑 방성원 씨의 부부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조사해 보니 내가 인하 씨한테 줬던 프로젝트들은 다 방씨 가문에서 가로챘더군요.”설인하는 가슴이 철렁했고 곧이어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그랬군요!”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사장님,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제 개인사 때문에 사장님 프로젝트에 피해를 끼쳤네요.”연지석은 두 손을 책상 위에 모았다.“괜찮아요. 민정 씨 친구니까 내 친구기도 해요. 이 정도 프로젝트는 별거 아니에요.”“감사합니다.” 설인하는 다시 허리 굽혀 인사하고 연지석 사무실을 나와 방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왜 이런 비열한 짓을 한 거야!”아직 새벽 4시였다. 방성원은 설인하가 혼자 자다가 잠이 안 와서 자기를 생각하며 전화한 줄 알았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이른 아침부터 날 욕하려고 깨운 거야?” 방성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욕은 무슨, 때리고 싶을 정도야! 왜 내 프로젝트를 가로채? 그게 너한테 무슨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 방씨 가문이랑 우리 PMJ는 업종도 다르고 경쟁사도 아니잖아!” 설인하는 분노가 치밀어 목소리가 떨렸
박민호는 그 말을 듣고 아첨하는 웃음을 지었다. “형,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걱정 마세요, 꼭 도와드릴게요.”차가 출발하자 박민호는 이미 자신이 진주시의 유력 인사가 되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병원 밖에는 그들 외에도 윤소현과 이지원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평범한 차 안에 앉아 각자 생각에 잠겼다.“아들 둘을 또 낳았대요!” 윤소현은 질투심을 숨기지 못했다.유남준에게 아들이 넷이나 있으니 앞으로 자기 아이와 재산을 두고 경쟁할 인물이 생긴 것이다.이지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소현 씨, 우리 계획대로라면 곧 박민정의 경사가 상사로 바뀔 거예요.”윤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이 소식을 최현아에게도 전했다.최현아는 최근 시아버지 유석진과 함께 호산 그룹에 있으면서 유남우의 권력을 빼앗으려 했던 터라 갑자기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짜야?”“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요? 조금만 알아보면 알 수 있죠.” 윤소현이 한숨을 쉬었다. “박민정의 아들 둘도 똑똑한데 이제 둘이 더 생겼으니 지훈이나 제 미래의 아이는 스트레스가 심하겠네요.”최현아는 옆에서 게임하는 유지훈을 보자 화가 났다. “얼른 숙제나 해!”“엄마, 유치원에 무슨 숙제가 있어요.” 유지훈이 불평하며 제 할 일을 계속했다.최현아는 어쩔 수 없었다. 윤소현이 일부러 자신을 부추기는 걸 알았기에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다.“요즘 경쟁이 치열하지. 박민정이 출산했으니 나도 가봐야겠네. 알려줘서 고마워.”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여기서 최현아가 소식을 들었다면 고영란도 당연히 알았을 터. 그녀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귀여운 사내아이 둘을 보자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민정아, 남준아, 예찬이랑 윤우는 어렸을 때 내가 제대로 키우지 못했잖아. 이번엔 꼭 이 두 아이만큼은 내가 곁에서 돌보면서 키우고 싶어.”박민정이 따뜻하게 웃었다. “좋아요.”유남준은 그녀가 동의하는 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
마침내 분만실 문이 열리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간호사가 두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유남준은 아기를 보지 않고 바로 분만실로 들어갔는데 분만실에는 박민정이 기력이 없이 누워있었다.“민정아.”박민정은 힘겹게 웃었다. “괜찮아요.”유남준은 그런 그녀가 더욱 안쓰러웠다.“이제 그만 낳자.”“네, 좋아요.”박민정이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아기들은요?”“밖에 있어, 건강해.” 유남준의 이 말에 박민정은 안심되면서도 궁금했다.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유남준이 멈칫했다.“잠깐만, 내가 보고 올게.”그는 박민정 생각에만 빠져서 아기를 보는 걸 잊고 말았다.밖으로 나오니 박윤우와 박예찬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기들은요?”조하랑이 혀를 찼다. “이제 아기 생각나요? 신생아실로 갔어요.”“깜빡했네요.”유남준이 물었다.“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멋진 사내아이 둘이에요.”조하랑의 말에 유남준도 박예찬, 박윤우처럼 실망했다. 그는 박민정을 닮은 딸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박민정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고 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깊은 잠에 빠졌다.그녀가 쉬는 동안 조하랑과 진서연네는 아기들을 달래고 있었고 의사는 박윤우의 수술을 위한 검사로 바빴다.“너무 작고 귀여워.”진서연은 모성애가 한껏 피어올라 연신 귀엽다고 했으나 박예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이 하나라도 있었으면...”“남동생 둘도 좋아, 실망하지 마.”조하랑의 위로에 박예찬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랑 이모, 언제 아기 낳으실 거예요? 저랑 윤우한테 여동생 둘 낳아주세요.”“맞아요, 한 명씩이요.” 박윤우마저 한마디 하자 조하랑은 말문이 막혔다.“꿈도 꾸지 마. 내가 낳은 딸을 왜 너희한테 하나씩 줘? 게다가 성별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조하랑이 부글부글 말하고 있을 때 김인우도 다가왔다. “맞아,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