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세상은 생각보다 컸고, 유남우가 박민정의 모든 인간관계를 전부 끊어버린 지금, 유남준은 어쩌면 평생 박민정을 찾지 못할 지도 몰랐다.“신경 쓸 필요 없어요.”유남우가 대답했다.“네.”이지원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럼 약속한 건 어떻게 된 건가요?”“아직 일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자꾸 서두르는 거죠?”유남우가 다시 말했다.유남우를 이미 따르기로 한 이지원은 지금 모든 것을 그의 말에 따라야만 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죄송합니다.”“이제 마지막까지 딱 한 단계 남았어요. 유남준한테 박민정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되거든요.”유남우가 입을 열었다.이지원은 그런 유남우를 보면서 보통 미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 한 명을 위해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알겠습니다, 지금 가서 준비하죠.”“그래요.”이지원이 자리를 뜨자 유남우는 다시 코트를 입고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하자 홍주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남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도련님, 요즘 안색이 안 좋아보이시는데, 따로 주치의라도 불러드릴까요?”“필요없어.”유남우는 단호히 홍주영의 말을 거절했다.“주영아, 난 요즘 하루하루가 정말 기쁘거든. 나쁜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네가 괜한 걱정 하는 거야.”그 말에 홍주영도 더는 권하려 하지 않았다.유남우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더미를 한아름 안고 온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도련님, 실례가 안 된다면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요 며칠 동안 어디 다녀오신 건가요?”유남우는 퇴근 들어 계속 외출을 하는 것 같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서류 위로 사인 하던 남자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실례되는 질문인 것 같은데, 묻지 말아야 할 질문 아닌가?”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냉기가 스며있었다.유남우의 이런 말투는 처음 들어보는 홍주영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사과를 건넸다.
그녀가 쥔 친자 확인 감정서에는 두 사람이 모녀 관계라고 적혀 있었다.비서는 다른 병원에서도 받아온 서류들을 건네며 말했다.“이번엔 틀림없습니다, 대표님. 박민정 씨는 대표님의 친딸이 확실합니다. 지난번엔 저희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친자 확인 감정서를 쥔 정수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어떻게... 그 걔가 어떻게 내 딸이야?”박민정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수미는 너무 갑작스러운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그녀 역시 자신이 친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 짓들이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제 어떡해야 하지?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어떻게 날 이런 식으로 갖고 놀아?”정수미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친자 확인 감정서를 손에 꼭 쥐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만큼 괴로웠다.“내가, 내가 그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라는 작자가 딸한테 오히려 모욕감만 잔뜩 줬으니...”정수미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오랫동안 찾고 있던 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다.더군다나 친딸을 괴롭히는 자신의 양딸을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다.비서 역시 이런 운명의 장난에 착잡함을 느끼고 있었다.“대표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잖아요. 조금 더 일찍 아셨더라면 민정 씨를 해치지 않으셨을 겁니다.”정수미는 비서의 위로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책을 멈추지 않았다.“그 아이가 날 찾아왔을 때도 난 상처만 잔뜩 줘버렸어. 얼마나 아팠을까.”오랜 세월 동안 눈물이라는 것을 거의 흘려보지 않았던 정수미였지만 하늘의 장난과도 같은 이 상황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난 정말 나쁜 년이야! 어떻게 친딸한테 그럴 수가 있어!”만약 이 세상에 후회 약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전 재산을 내걸고서라도 얻고 싶을 지경이었다.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정신 차리라며 자신의 뺨을 수차례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가야
“뭐라고요?”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실종됐다는 거예요?”“저도 잘은 몰라요.”설인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아무튼 벌써 이틀이에요. 이틀 동안 찾아 헤매는 중인데 도통 안 보이네요.”그 말을 들은 정수미가 몸을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런 그녀를 비서가 붙잡아 주었다.“조심하세요, 대표님.”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정수미는 비서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겨우 찾았는데 실종이라니?”“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누가 데려갔는지는 알아냈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비서가 애써 정수미를 위로했다.“그래, 얼른 사람 보내서 민정이 좀 찾아내.”정수미가 말했다.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박민정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박민정을 찾아낼 것이다.“알겠습니다.”정씨 가문에서도 사람들을 시켜 전국적으로 박민정을 수색하기 시작했다.힘없이 자리를 뜨는 정수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설인하는 의아했다. 정수미가 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민정 씨, 제발 빨리 좀 돌아와요.”설인하가 혼자 중얼거렸다....한편, 유남준은 거의 진주 시내 전체를 뒤집다시피 했지만 박민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유남준은 주변 지역에까지 사람을 보내 수색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그렇게 마침내, 단서를 발견했다.유남준은 즉시 차를 몰고 그곳으로 향했다.그리고 정수미는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 역시 박민정을 찾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결국, 두 세력이 힘을 합쳐 공동으로 박민정을 수색하기로 했다.그렇게 수색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사람들은 곧장 단서가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오직 불에 다 타버린 집뿐이었다.차에서 내린 유남준은 망설임 없이 까맣게 불타버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민정아!
정수미는 그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대답했다.“유 대표는 이미 내가 민정이 친엄마라는 걸 알고 있었죠?”유남준은 그 말에도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그런데 대표님은 제 말 안 믿었잖아요.”정수미는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 내가 어리석었어요, 내 잘못이에요... 저도 너무 후회 중이에요.”그동안 윤소현이 늘 박민정에 대해 안 좋은 얘기만 늘어놨던 탓에 정수미는 박민정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못했다.그 탓에 정수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박민정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줘버렸다.박민정이 자신을 찾아왔던 그때도, 정수미는 그녀를 가차 없이 비웃고 쫓아내 버렸다.“지금 민정이 어디 있어요? 찾았어요?”눈시울이 붉어진 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유남준은 폐허로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손에 꽉 쥐고 있던 반지를 보여주었다.“마지막으로 추적된 곳이 여기인데, 방금 민정이 반지를 찾았어요.”그가 낮게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정수미는 몸을 휘청이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기색을 보였다.놀란 비서가 다급히 정수미를 부축해 주었다.“대표님.”“얼른, 얼른 주변 수색해!”정수미가 지시했다.“알겠습니다.”비서는 곧바로 인력을 충원해 폐허 속에 남았을지도 모를 박민정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밤이 깊도록 폐허 속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박민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박민정과 관련된 물건만 몇 가지 발견되었을 뿐이었다.비서는 멍하니 서 있는 정수미의 곁에 서서 슬쩍 말을 꺼내 보았다.“아가씨 말이에요,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그 말에 정신을 차린 정수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비서를 올려 보았다.“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대로 봐야 할 것이고, 죽었다면 죽은 대로 시체를 봐야만 했다.정수미는 박민정이 이렇게 실종됐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민정이 여기 없는 거 확실해. 다른 데서 계속 찾아봐.”“네.”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유남준도 폐허
“엄마...”이지원은 떠보듯 정수미를 부르고는 말을 이었다.“엄마, 언니가 사라졌어요.”그녀는 박민정의 일부터 처리한 후 윤소현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도무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정수미는 멍한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뭐?”“소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저도 모르겠어요. 오늘 언니랑 같이 산부인과 검진 가려고 했는데, 어딜 갔는지 갑자기 사라졌어요.‘이지원이 대답했다.정수미는 멍한 표정으로 이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상황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유남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윤소현은 제가 가둬놨습니다.”유남준이 말했다.정수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현이는 왜 가둔 거죠?”“민정이의 실종은 분명 윤소현이랑 관련이 있으니까요.”유남준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이지원에게로 옮기며 말했다.“윤소현이 그러더라, 이지원 네가 내 아이들 데리고 갔다고. 민정이는 아이들 찾으러 간 거라고 하던데, 어디로 데려간 거야?”그 말에 이지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준 오빠?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저랑 민정 언니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하지만 유남준이 그녀의 말을 믿어줄 리 없었다.곧바로 몇 명의 경호원이 다가와 이지원을 제압했다.“끌고 가!”이지원은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유남준의 수법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그녀가 스스로 이곳에 등장한 것도 전부 유남우 때문이었다. 그가 이지원에게 직접 유남준을 찾아가 박민정의 실종이 자신과는 관련 없다는 사실을 어필하라고 조언해주었기 때문이었다.“오해예요, 오빠. 소현 언니가 왜 그런 얘길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민정 씨 아이들 데리고 간 적 없어요.”뒤이어 그녀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엄마, 엄마.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그동안 집에만 있었고, 어디 간 적도 없어요.”하지만 정수미는
유남준의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있었고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 전반적으로 초췌해 보였다.“이지원 조사하고 왔는데, 민정이의 실종과는 아무 관련도 없던데요.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예요?”만약 윤소현이 임신 중인 아이가 유씨 가문의 아이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정수미의 양녀만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당장이라도 윤소현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윤소현의 수려한 얼굴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그럴 리 없어요, 이지원이 분명 저한테 그랬다고요. 박민정이랑 그 두 아이들 처리해준다고...”윤소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남준은 천천히 윤소현의 앞으로 다가갔다.“말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정말로 이지원이었어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요.”윤소현이 다시 대답했다.유남준은 바닥나버린 인내심에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윤소현은 다시 어둠과 침묵 속에 갇혀 버렸다.“남준 씨, 얼른 저 내보내 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나 좀 꺼내달라니까!”그제야 윤소현은 자신이 유남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밖으로 나온 유남준은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찍혀있었지만 그중 일부는 정수미에게서 온 것들이었고, 다른 몇 통은 고영란에게서 온 것이었다.그는 제일 먼저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시죠?”“유 대표, 민정이 소식은 있나요?”정수미가 조심스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직 없습니다.”유남준이 대답했다.정수미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더욱 절망스러워졌다.“그럼... 소현이는 어떻게 됐나요?”윤소현은 어릴 때부터 정수미가 직접 지켜봐 왔던 아이였고, 그 아이와 깊은 정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현재 임신 중이었다.“소현 씨도 아무 일 없습니다.”“그럼, 소현이 좀 풀어줄 수 있을까요? 내가 직접 물어볼게요.”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정수미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호사만 누리며 살아온 윤소현이 그런 감금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수미 본인 역시 윤소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박예찬은 연락이 닿는 순간, 박윤우가 서둘러 물었다.“형, 엄마 어떻게 됐어?”박예찬 역시 박윤우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금방 수술을 마치고 나온 동생을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무슨 소리야, 그게? 엄마 잘 계셔.”박윤우는 형마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스럽게 이마를 찌푸렸다.“형까지 나를 세 살 먹은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거야? 이렇게 오랫동안 엄마가 날 보러 안 왔다는 건, 분명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잖아. 그리고 요즘 아빠도 거의 매일 밖에만 있고, 정민기 아저씨도 요즘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들었어. 엄마 실종된 거 맞지?”박예찬은 동생이 이 정도로 많이 알고 있을 줄 몰랐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더는 숨기지 않았다.“맞아, 엄마 실종됐어. 그리고 아직도 못 찾았고.”“어떻게 그럴 수 있어?”박윤우는 확신 어린 소식을 듣는 순간, 밀려오는 걱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엄마 납치당한 거 아니야?”“그럴 가능성도 있지.”박예찬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넌 이제 막 수술을 끝냈으니까 잘 쉬어야 해. 절대 다른 사람들 걱정시키지 말고, 엄마 돌아오실 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그래야 엄마도 기뻐하실 거야.”박윤우는 자신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알겠어.”전화를 끊은 아이는 다시 병상에 누웠다.최근 며칠 동안 정수미도 손자들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밀려오는 후회를 멈출 수 없었다. 만약 박민정을 조금만 더 일찍 찾았더라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그날, 윤소현은 풀려났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곧장 정수미에게 달려가 울음을 터뜨리며 하소연했다.“엄마, 저는 다시는 못 돌아오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그 나쁜 놈이, 유남준이 저를 가둬놨어요. 너무 어둡고, 너무 조용해서 미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임산부를 그런 곳에 가둬놨어요!”정수미는 그런 윤소현의 불쌍한 표정
“정말 실망이다.”정수미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윤소현은 힘겹게 일어나 그녀를 쫓아가며 말했다.“엄마, 함미현 일 기억 안 나세요? 저도 그때처럼 될까 봐 두려워서 그랬어요. 엄마도 아시잖아요.”정수미는 함미현 얘기가 나오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정말 함미현한테 진실을 안 물어봤을 것 같니?”그 말에 윤소현의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설마 정수미가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조사를 마쳤을 줄은 몰랐다.“함미현 일은 제가 다 말씀드렸잖아요. 엄마가 어렵게 찾은 딸을 잃게 될까 봐, 혹시라도 진실을 알게 되면 상처 받으실까 봐 그랬던 거예요.”정수미는 그 말에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랬다고? 그런데 미현이는 네가 박민정이 친딸이라는 걸 알고 그랬다고 하던데. 내가 평생 친딸을 못 찾게 하려고 미현이한테 연기시킨 거라더라.”윤소현이 변명해 보려고 했지만 정수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제 거짓말 좀 그만해. 너 계속 이럴 거면 나도 더는 너 내 딸로 인정 못 해.”그 말에 윤소현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정수미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윤소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진짜 딸을 찾았다고 이제는 날 버리겠다는 거야? 박민정을 원한다는 거야? 하지만 이걸 어째. 박민정한테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윤소현이 중얼거렸다.밖으로 나온 정수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비서의 기척을 느꼈다. 비서는 애써 정수미를 위로해주며 말했다.“아가씨께서는 아무 문제 없으실 겁니다.”정수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난 정말 실패한 엄마야. 친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바로 옆에 내 딸을 두고도 못 알아봤어. 그런 주제에 양딸이 그렇게나 버릇없이 굴었는데도 난 계속 감싸기만 하다가 내 친딸을 해칠 뻔했어. 아마 민정이는 지금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비서를 통해 알아본 박민정은 마지막으로 정수미를 만났던 날, 심각한 모욕을 당하고 조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소식
문밖에 갇힌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유남준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서렸다.그는 대체 언제쯤 아내와 제대로 함께 지낼 수 있을까?두 사람은 이미 오래된 부부나 다름없건만 정작 함께하는 모습은 연애 초기보다도 못했다.오전 아홉 시가 넘어서야 윤소현은 정수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장 병실로 향했다.그곳에서 정수미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엄마, 깨어나셨어요? 왜 비서에게 미리 연락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정수미는 차가운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리더니 먼저 의사에게 나가달라고 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비서에게 들었어. 너랑 민정이가 밤새 나를 지켰다고. 괜히 너희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긴장된 마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며 윤소현이 말했다.“엄마, 전 엄마 딸이에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어요?”이어서 그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지금 몸은 좀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많이 나아졌어.”정수미가 잠시 말을 멈춘 뒤 덧붙였다.“의사 말로는 아마도 상한 음식을 먹은 탓일 거라고 하더구나.”“어제 저희가 요리사에게 같은 음식을 다시 만들게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무언가 찾아내셨나요?” 윤소현은 다급히 물었는데 혹여 정수미가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그러나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의사는 음식에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어. 아마도 고객과 외식하는 자리에서 뭔가 잘못된 걸 먹었을 거라고 하더구나.”그 말을 듣고서야 윤소현은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앞으로는 꼭 조심하셔야 해요.”“그래야겠지.” 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가 윤소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묘하게 의미심장했다.“엄마, 민정이는 어디 갔어요?”주위를 둘러보던 윤소현은 박민정이 보이지 않자 자연스레 물었다.“이제 난 괜찮으니 민정이에게 돌아가 쉬라고 했어.”“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만약 엄마께
박민정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그렇게 정수미는 드디어 박민정의 얼굴을 만져볼 수 있었고 뜨거운 촉감은 그녀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줬다.그리고 어느새 누가가 빨개진 채 계속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민정아, 민정아...”“네, 저 여기 있어요.”“내가 지금 꿈꾸는 게 아니라 진짜 우리 민정이구나. 난 네가 또, 또 사라지는 줄 알았어.”정수미는 아주 기나긴 악몽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자기 딸을 데려갔고, 또 나중에 박민정을 만났는데 꿈속의 그녀는 절대 정수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차갑게 말했다.박민정은 그런 정수미의 모습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유남준이 마침 마실 물을 가져왔고 박민정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먹여줬다.의사도 와서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해줬다.모든 검사가 끝난 뒤 의사는 병실 밖에서 그들에게 결과를 말해줬다.길연서도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정 대표님께서 혹시 깨어나셨나요?” 그녀가 묻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방금 깨어나셨어요.”길연서는 빠르게 핸드폰을 꺼냈다.“지금 당장 큰 아가씨한테 알릴게요.”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의사가 길연서 더러 먼저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전했다.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던 정수미는 그녀를 보자마자 귓가에 무언가 말해줬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길연서는 다시 핸드폰을 끄더니 이후에도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박민정과 유남준은 밖에서 기다리다가 길연서의 부름에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정수미가 한껏 기운 없는 목소리로 박민정을 불렀고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갔다.그러자 정수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민정아, 괜히 나 때문에 온 밤 고생했어. 이제 괜찮으니까 너도 빨리 돌아가서 쉬어.”“네.”박민정은 가볍게 대답만 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두 사람을 떠나보내자마자 정수미는 갑자기 침대에 털썩하고 쓰러지더니
기다린 지 벌써 세 시간이 넘었으나 정수미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길연서는 야식을 배달시켰다. “두 분은 이것 좀 드시고 가서 쉬어요. 여기는 제가 있을게요.”윤소현은 진작에 졸려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녀의 말에 음식을 힐끗 보더니 손을 저으며 답했다.“저는 안 먹을래요. 시간도 늦었고 지금 먹으면 살도 찌고 건강에도 안 좋아요.”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지개를 켰다.“그럼 전 이만 쉬러 갈 테니까 제 동생이랑 지키고 있어요. 혼자서 지키면 제가 마음이 안 놓여서요.”사실 윤소현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졸리지도 않았고 이따 유남준이 오기에 그를 기다려야 했다.윤소현이 떠나가자마자 길연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20년 넘게 키운 수양딸이라고 해도 어떻게 지금껏 헤어져 있었던 친딸보다 더 정이 없는지, 길연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둘째 아가씨, 아니면 저기 간병인 침대에서 잠깐만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그러나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안 졸려요.”“그럼 뭐라도 좀 드세요.”박민정은 그녀의 말대로 음식을 조금 가져와서 먹은 뒤 계속 앉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이 찾아왔는데 가녀린 몸으로 정수미 곁을 지키고 있는 박미정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민정아.”박민정은 지금 유남준을 보기만 해도 무섭고 떨렸다.“왔어요?”원래 유남준에게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기어코 아이들을 재우고 이쪽으로 달려왔다.길연서는 정수미의 사위가 온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다.“유 대표님.”“안녕하세요.”“그럼 말씀 나누세요.”굳이 부부 사이에 끼기 싫어 길연서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박민정은 원래 그녀를 불러세우려고 했으나 한발 늦은 것 같았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유남준과 박민정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이때, 박민정이 어색함을 깨려고 먼저 말을 걸었다.“이만 돌아가서 쉬어요. 시간도 늦었고 내일 출근해야 하
어쨌든 정수미는 박민정의 친엄마다.길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나서야 안심되었다.그러나 윤소현은 계획이 틀어지자 박민정에게 한껏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민정아, 설마 엄마 유산을 네가 못 받을까 봐 걱정돼서 여기 남겠다는 건 아니지?”박민정은 원래 그녀와 입씨름하기 싫어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자꾸 자극하는 윤소현을 더는 봐주기 힘들어 이참에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맞아요. 정 대표님은 제 친엄마인데 당연히 제가 유산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더구나 유언장에도 제가 유산 절반을 상속받는다고 되어있고요.”박민정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만약 정 대표님께서 진짜 돌아가셨는데 제가 없는 틈에 누군가가 유언장에 손을 대면 어떡해요?”“너!”윤소현이 박민정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높게 들자 옆에 서 있던 정민기가 단번에 그녀의 팔목을 잡고 내팽개쳤다.그러다가 윤소현은 뒤로 몇 발짝 휘청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박민정, 엄마가 죽길 바라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윤소현이 불같은 화를 냈지만 박민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수술실 문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정수미가 밀려 나오자 윤소현이 빠르게 달려가 의사한테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엄마는 괜찮나요?”그러자 의사가 대뜸 엄숙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혹시 환자분께서 어제저녁이랑 오늘 아침에 뭘 드셨을까요?”순간 윤소현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늘 드시던 음식이었어요.”자신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한 분이 대표로 가서 혹시 환자분이 먹다 남은 음식이 있으면 싸 오세요.”의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길연서는 곧바로 집안 도우미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윤소현이 그녀를 말렸다.“매일 먹다 남긴 음식은 모두 음식물 쓰레기 통에 버리는데 그걸 어떻게 갖고 와요? 의사 선생님, 우리 엄마는 대체 왜 저렇게 된 걸까요?”“일단 응급처치해서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여
그렇더라도 이상하게 이번이랑 지난번이랑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무 미련없이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자꾸만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이게 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는 거랑 없는 것 차이일 것이다.오후가 되어서야 박민정은 진서연과 에리가 가짜 연인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그녀의 물음에 진서연이 답했다.“에리 씨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 크게 실망하실까 봐요.”“이러다가 나중에 들통나면 오히려 더 불쾌해하실 거야. 그때 가서 했던 말들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고.”“에리 씨가 요 며칠 시간을 이용해서 최대한 빨리 여자 친구를 찾겠대요. 그러면 저는 슬쩍 빠지면 되거든요.”“그래.”박민정은 더 이상 말하기도 뭐했다.저녁 퇴근길에 그녀는 정민기의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는데 하마터면 앞에 차를 들이받을 뻔했다.정민기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며 그녀에게 연신 사과했다.“정말 죄송합니다.”여태껏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이런 실수를 범했는데 한눈에 봐도 정민기는 지금 온통 진서연과의 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민기 씨, 혹시 서연이랑 무슨 오해가 생긴 건가요?”박민정의 물음에 정민기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아니요.”그가 부정하는 모습에 박민정은 원래 진서연과 에리 사이의 일을 솔직하게 말해주려 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을 보니 정수미 비서인 길연서였다.“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둘째 아가씨,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병원에 한 번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 대표님께서 지금 응급실에 실려 왔거든요.”울먹이면서 말하는 비서의 목소리에 박민정도 순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네, 바로 가겠습니다.”정민기는 그길로 박민정을 병원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응급실 복도에서 윤소현이 안정부절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이모 정주보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
에리는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하늘 아래에 널린 게 남잔데 왜 하필 정민기 씨에요?”그도 정민기를 본 적이 있었는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보고는 분명 평범한 보디가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에리 씨는 아마 모를 거예요. 저 같은 여자가 그런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건 하늘에 별 따기라는 사실을요.”진서연은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정민기는 마치 드라마 속의 여느 멋진 남주처럼 느껴지면서 더욱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에리는 반지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아니에요. 이건 제가 드리는 위로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요.”에리는 항상 씀씀이가 컸고 더구나 아직 여자 친구가 없는 그로서는 반지를 다시 돌려받는다고 해도 줄 사람이 없었다.진서연은 원래 기뻐해야 할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기쁘지 않았다.“싫어요. 이런 반지는 나중에 진짜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한테서 받을래요.”에리는 난생처음으로 여자에게 준 선물을 거절당했는데 순간 자신이 저따위 보디가드보다 매력이 없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지금 헤어진 마당에 그냥 제 가짜 여자 친구가 되는 건 어때요? 당연히 이에 따르는 보상도 있고요.”에리는 잠깐 뭔가를 고민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아직 그 사람이 신경 쓰이잖아요. 그러면 정민기 씨도 서연 씨가 신경 쓰이게 저를 이용해서 한번 자극해 보는 건 어때요?”“정민기 씨는 자기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바로 저 같은 대스타랑 연애한다고 생각하면 분명 배 아파할 겁니다.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오잖아요? 많은 여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남자들한테 자신이 매우 인기가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들잖아요.”진서연은 어느새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 그에게 물었다.“그래도 될까요?”“어차피 헤어졌는데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그렇게 두 바보는 이상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민수아가 지나가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어 박민정의 사무실로 돌
박민정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왜?”그러자 진서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저도 모르겠어요.”어제 집에 돌아간 뒤, 진서연이 막 자려고 누웠는데 정민기가 갑자기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하여 진서연은 두 사람 사이에 드디어 진전이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건 정민기의 이별 선고였다.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 멍한 상태였다.낮에는 별말이 없었다가 왜 저녁에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이유가 뭔지 물어봤어?”“우리 두 사람은 안 어울린대요.”진서연은 어느새 눈가가 빨개져서는 겨우 말을 이었다.“그러면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말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안 어울린다고 할까요? 설마 밖에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니겠죠?”“설마.”박민정은 정민기가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왜 그럴까요? 갑자기 저한테 흥미가 떨어졌을까요?”진서연은 박민정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다시 중얼거렸다.“내가 못 생겨서 질렸나?”진서연은 진심으로 정민기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니 자꾸 이상한 생각만 들면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분명 무슨 오해가 있다고 생각해. 일단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기회를 봐서 민기 씨한테 물어볼게.”“네.”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걱정스레 말했다.“혹시 물어보실 때 절대 제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가볍게 원인만 물어봐 주시면 돼요. 네?”비록 헤어졌지만 자존감은 지키고 싶었고 정민기한테 집착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래, 알겠어.”박민정은 먼저 진서연을 회사로 보낸 뒤 곧바로 씻으러 갔다.“민정아, 왜 날 피해?”유남준이 언제부터 화장실 문 어구에 서 있었는지 박민정은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양치하던 물을 삼킬 뻔했다.“설마요. 제가 왜 남준 씨를 피하겠어요?”유남준은 그녀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진짜 일부러 피한 게 아니라고?”그가 들어오면서 순간 화장실이 좁아졌는데 박민정은 숨을 한번 깊게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진서연은 볼록해진 배와 트림까지 하더니 대뜸 감탄하기 시작했다.“에리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랐을 텐데 너무 행복했겠어요.”“서연 씨는 식성이 좋아서 뭐든 다 맛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요?”그녀의 말대로 에리는 어렸을 때부터 산해진미를 먹고 자라서 오늘 요리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그게 복인 줄도 모르고.”진서연은 투덜거리다가 아까 받았던 돈봉투를 에리에게 돌려줬다.“자, 이건 돌려줄게요.”어차피 가짜 여자 친구인데 밥 한 끼 정도는 먹어줄 수 있어도 이 돈은 받을 수 없었다.그러자 에리가 덤덤하게 답했다.“하루 일당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요.”“맛있는 밥도 얻어먹었는데 돈은 당연히 돌려줘야죠.”“제가 그 돈이 아쉬운 사람처럼 보여요?”에리의 물음에 진서연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사람한테는 이깟 돈이 아무것도 아니다.“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요. 고마워요.”비록 봉투 안에 돈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께를 만져보니 적지 않은 돈인 것 같은데 문득 출근하는 것보다 수입이 짭짤하다고 생각되었다.“별말씀을요. 저희는 친구잖아요.”에리는 그길로 진서연을 박씨 가문 옛 저택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저택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져 있었다.진서연은 차에서 내린 뒤 에리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그러나 누군가가 어두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진서연은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봉투를 열어보았는데 역시나 50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 있었다.이때 갑자기 봉투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는데 줍고 나서야 그게 커다란 다이아몬드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대박, 너무 예뻐!”진서연은 그들이 여기에 다이아몬드까지 넣어줄 줄은 몰랐다.이렇게 큰 사이즈면 분명 몇천만 원도 넘을 것이다.첫 만남에 500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만 이런 다이아몬드는 당연히 받을 수 없었다.하여 진서연은 내일 아침 일찍 회사에 가자마자 에
결국 진서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어줬다.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정민기에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이 시각, 정민기는 문자를 보자마자 혹시나 진서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원래 많이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참고 메시지에 답장했다.“네.”저녁때쯤, 에리는 진서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민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라오던 그의 부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보스, 오늘 형수님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일 있대.”“헐, 저거 엄청 비싼 차인데!”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값비싼 슈퍼 카를 타고 자리를 떴다.부하들은 원래 정민기를 무서워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보스, 형수님은 왜 갑자기 저런 차를 타고 갈까요?”정민기는 원래 몇십억짜리 자동차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지만 부하가 대놓고 물어보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나도 몰라.”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탔다.지금 그가 타고 다는 차는 고작 몇천만짜리였고 길거리에 몰고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안 줄 그런 차였다.그저 박민정의 보디가드로서 너무 좋은 차를 끌고 다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민기가 말없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부하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형수님이랑 다툰 건가?” “아까 그 차는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싼 차일 것 같은데 설마 형수님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어떻게...”“대단하면 뭐 해? 지금 시대는 돈이 제일 쓸모가 있단 걸 몰라?”“하긴 요즘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야.”부하들의 말을 정민기는 차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그러나 지금은 퇴근한 박민정을 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