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희가 감탄하며 말했다.“전에 사모님께서 나약해 보이셨는데 이제 보니 외유내강이네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태연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유남준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당연하지.”누군가 아내를 칭찬하자 유남준은 더없이 기뻤다.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박민정이 직접 상황을 해결하도록 기다리기로 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은 잠시 침묵했지만 곧 윤석후의 지시를 받자 다시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아이고, 이게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요?”“우리 집이 얼마나 어려운데! 이 여자는 우리를 모욕하고 있어요! 그까짓 보상금으로 어떻게 먹고 살라는 겁니까!”“맞아요! 노모가 병원에서 위독한 상황인데 이 여자가 우리 생계를 끊어놨어요!”사람들은 도덕적 압박을 가하며 상황을 몰아가려 했다.하지만 박민정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 병상 사진을 들고 있는 한 남성에게 다가갔다.“어머님이 참 낯이 익네요.”그 남자는 비웃으며 말했다.“인연이 있다고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 우리 엄마는 너라는 사람도 모른다고!”“그게 아니라... 어머님 사진 인터넷에서 본 것 같아서요.”박민정의 말에 진서연은 사진을 찍어 바로 이미지 검색을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서연은 검색 결과를 확인하고 빠르게 걸어왔다.“이봐요! 이 사진 속 여사님은 당신 어머니가 아니잖아요!”남자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무... 무슨 소리야! 아니면 네 엄마라도 된다는 거야?”화가 난 진서연은 조소를 내뱉으며 핸드폰을 높이 들어 올렸다.“여러분 보세요. 이 사람이 들고 있는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이에요. 이 사진 속 사람은 옛날에 뉴스에 나온 적도 있고 가족 없이 혼자 사시는 분이었어요.”진서연은 카메라를 향해 크게 말했다.정체가 드러난 남자는 화를 내며 진서연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이 나쁜 년!”그는 손을 들어 핸드폰을 뺏는 동시에 진서연을 때리려고 했다.그러나
윤석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지금 당장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박민정을 공격해. 특히 배를 도려. 기습적으로 움직여야 해. 알겠어? 유산하게만 만들면 인당 2억씩 줄게.”2억이라는 금액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돈이었다.그 무리 중 리더는 망설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이어 그는 무선 이어폰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명령을 전달했다.그들은 2억이라는 거금을 떠올리며 단지 뱃속의 아이를 없애는 것뿐이라며 고의 살인도 아니니 감옥에 갈 일도 없을 것이라며 생각하며 시선을 박민정에게 돌렸다.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매정한 대표! 오늘 너 죽고 나 살자!”한 사람이 먼저 움직이자 다른 사람들도 뒤따랐다.눈빛을 굳힌 진서연이 박민정을 보호하려 그녀를 뒤로 보내고 달려오는 사람들을 제지했다.민수아와 설인하도 곧바로 박민정을 둘러싸며 그녀를 지켰다.보안 요원들 역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박민정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그러나 사람들은 집요하게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어디선가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 사람들까지 있었다.이것은 윤석후가 계획 실패를 대비해 준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박민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욕을 내뱉었다.“제기랄!”그녀는 조심스럽게 배를 감싸며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진서연 역시 두려웠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기엔 자신 혼자선 역부족이었고 회사의 보안 요원들로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어떡하지? 갑자기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타난 거지?’“보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세요. 반드시 대표님을 보호해야 합니다.”진서연이 초조하게 외쳤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박민정은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다.한편 윤석후와 윤소현은 차 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내 말이 맞았지? 괜히 올 리는 없다고 했잖아.”“아빠, 정말 선견지명이 있으시네요.”윤소현은 곧 보게 될 재밌는 장면을 기대하며 들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장면 대신 누군가가 차창을 두드렸다
유남준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했다.“우연히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야.”우연이라고? 이렇게 우연히 필요할 때 나타난다고? 게다가 이렇게나 많은 경호원까지 데리고?박민정은 유남준의 거짓말이 너무 서툴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굳이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유남준이 오늘 그녀를 포함한 모두를 구해주었으니 말이다.만약 유남준이 와주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보스!”진서연은 혹시라도 박민정이 조금 전의 그 사람들 때문에 다치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되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됐어요, 이제 괜찮으니까 다들 회사로 돌아가서 계속 일 봐야죠?”박민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네.”그제야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함께 회사로 돌아갔다.박민정은 예의상 유남준에게 말했다.“올라가서 좀 쉴래요?”“그러지, 뭐.”유남준은 사양하는 척도 하지 않고 바로 수락했다.박민정은 그런 유남준을 데리고 함께 회사 위층으로 올라갔다.회장실로 도착하자마자 유남준은 자연스레 바로 문을 잠갔다.박민정은 당황한 듯 멈칫하며 물었다.“문을 왜 닫아요?”대낮에 문을 꼭 잠근 채로 두 남녀가 단둘이 한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이 박민정으로서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그녀는 잠긴 문을 열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유남준은 뒤에서 박민정을 꼭 끌어안더니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순간적으로 당황한 박민정이 큰 소리로 말했다.“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손 놔요!”유남준은 그 말에 손을 놓기는커녕 박민정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오늘 나한테 감사 인사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그 순간, 박민정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더니 심장 박동이 갑자기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그녀는 억지로 침착하려 애쓰며 몸을 돌리더니 고개를 들어 유남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본인 아내랑 아이를 구해놓고, 무슨 보상을 기대하는 거죠?”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긴장이라고?유남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이 긴장을 했다고?그는 확신이 서지 않는 듯 김인우에게 다시 물었다.“긴장했다는 건 좋아서 그런 거 아니야?”그 질문에 김인우는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게 무슨 질문이야?”“대답이나 해!”유남준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 있었다.“긴장이라는 건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는 거야. 좋아서도 그 요소들 중 하나겠지만.”김인우가 분석하기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가끔은 환경적인 이유도 있겠지. 혹시 두 사람이 새로운 장소에 있었던 건가?”김인우는 수상한 눈빛으로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유남준은 김인우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뭘 그렇게 많이 물어?”말을 마친 유남준은 곧장 박민정이 있는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혼자 남겨진 김인우는 혼자 혀를 끌끌 찼다.“남준이 저놈도 참, 지 필요한 답만 얻어내고 딱 잘라버리네.”김인우 역시 유남준의 뒤를 이어 병실로 가 박민정에게 별문제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돌아갔다.유남준은 박민정의 옆에 앉아 있었고 박민정은 유남준을 째려보고 있었다.“남준 씨는 내가 평소보다 이상하다는 거 못 느꼈어요?”박민정 역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이내 눈앞이 캄캄해졌을 뿐이었다.유남준은 죄책감 어린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그래도 큰일이 아니라 다행이었다.“미안해.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유남준이 손을 들어 박민정의 손을 꼭 잡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보고 싶었어.”유남준에게 손이 잡힌 채 낯간지러운 말을 들으니 박민정은 또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자신이 왜 사소한 것에도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됐어요, 됐어. 단순 산소 부족이라 다행이죠. 다음부턴 그러지 마요.”“응, 앞으로는 자제할게.”유남준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오늘따라 예뻐 보였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들먹거리던 남자는 순식간에 기가 팍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는 더 기분이 나빠진 듯 말했다.“들었지? 대기업 대표도 책임감 느끼고 아내 산부인과까지 따라오는데, 너는?”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꺼버렸다.병원 밖으로 나오자 박민정은 지금 이 순간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 유남준도 누군가의 눈에는 단순히 빛 좋은 개살구로 보일 줄이야.차에 올라탄 박민정은 유남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오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유남준의 표정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내가 그렇게 한심해 보여?”참다못한 박민정이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히 아니죠.”“아니라면서 왜 웃어?”유남준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가살이나 할 것 같다든지, 한심해 보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그런 유남준의 모습을 보던 박민정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제 됐죠?”유남준은 박민정의 모습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됐어. 그냥 웃는 게 훨씬 예쁘네, 많이 웃어.”박민정이 활짝 웃는 모습을 못 본 지도 너무 오래된 것 같았다.“웃기 싫어졌어요.”박민정은 눈을 감던 유남준의 어깨에 기대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유남준은 자신에게 기댄 박민정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박민정 역시 더 저항하지 않고 편한 자세를 잡아 얕은 잠에 빠졌다.회사에 도착하자 유남준은 박민정과 함께 따라 올라가려 했지만 박민정에 의해 매정하게 거절당하고 말았다.홀로 회사에 돌아온 박민정에게 동료들이 다가오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갑자기 유남준의 품에 안겨 떠났는지에 대한 온갖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별일 아니야. 그냥 산소 부족으로 잠깐 기절했을 뿐이니까.”박민정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기색으로 답했다.“아, 그래요? 왜 갑자기 산소가 부족해진 건데요?”진서연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캐물었다.그 질문에 박민정이 어떻게 솔직히 답할 수 있을
예상 밖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게 윤석후는 경호원들에게 끌려갔다. 이윽고 들려오는 그의 처참한 비명에 윤소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서다희는 하품을 한 번 하더니 말했다.“가죠.”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윤소현이 뒤늦게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늦은 듯했다. 윤석후는 이미 형체를 똑바로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아빠, 아빠...”윤소현은 큰 소리로 윤석후를 불러보았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박민정, 네가 우리 아빠를 이렇게 만든 거야. 넌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두고 봐.”그녀는 이를 갈며 모진 말을 내뱉더니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이번 일로 윤석후는 한동안 조용히 지내게 될 것이다.정씨 가문 본가로 돌아온 윤소현은 곧장 함미현을 불렀다.“저는 갑자기 왜 부르신 거죠, 소현 씨?”함미현은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자신을 한껏 낮추며 윤소현에게 존칭을 붙였다.“지금 당장 정수미 앞에서 울면서 하소연해 봐. 박민정이 네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말이야. 어떻게든 정수미가 박민정을 없애게 만들란 말이야!”윤소현은 정수미가 아직도 자신을 위해 직접 손을 써 박민정에게 해를 가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그러니 모든 기대를 함미현에게 걸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지금 정수미에게는 함미현이 친딸로 보일 테니까.그 말을 들은 함미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이렇게 말 한마디로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게 맞을까?함미현은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더 이상 윤소현의 악행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함미현은 아직 박민정의 목숨까지 노릴 만큼의 악인이 아니었다.“그건 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범죄잖아요.”함미현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범죄? 무슨 범죄? 너 생각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날 안 도와준다고 하면 난 정수미한테 진실을
함미현은 윤소현을 한 번 쳐다보더니 정수미의 앞으로 다가가 갑자기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엄마.”정수미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라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함미현의 앞으로 걸어갔다.“왜 그러니? 왜 갑자기 무릎을 꿇어?”“엄마,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들어주시면, 그때 일어날게요.”함미현이 말했다.“무슨 부탁인데 그래? 어서 말해보렴.”정수미는 딸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엄마, 박민정 좀 죽여주세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네?”그 말에 깜짝 놀란 정수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함미현을 바라보며 물었다.“뭐라고?”“엄마, 저는 박민정이 너무 싫어요. 언젠가 저를 해칠 것 같단 말이에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살려주세요.”함미현은 콧물까지 훌쩍이며 애원했다.“안 그러시면 저 계속 이대로 있을 겁니다.”이때, 윤소현도 다가와 거들었다.“엄마, 제가 뭐랬어요. 박민정 언젠간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요. 이제 미현이도 박민정 그 여자가 싫다잖아요.”“싫다고 사람을 죽여?”정수미가 되물었다.그 질문에 윤소현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정수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미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람 목숨이 걸린 일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말을 마친 그녀는 시선을 윤소현에게 돌렸다.“잠깐 서재에서 보자.”그 말에 당황한 윤소현은 당황한 듯했다. 함미현이 정수미에게 부탁만 한다면 예전처럼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일이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그녀는 정수미를 따라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상황 판단이 끝나기도 전에 정수미는 화난 표정으로 윤소현을 바라보고 있었다.“왜 미현이한테 그런 일을 시킨 거니?”“네?”윤소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엄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런 거 시킨 적 없어요. 다 미현이 혼자...”“넌 내가 바보로 보이니?”정수미가 윤소현의 말을 끊었다.“미현이랑 민정이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이야. 그런 미현이가 왜
“됐어, 가서 쉬어.”함미현이 더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자 정수미도 더 추궁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함미현이 자리를 뜨자 정수미는 자신의 비서를 불러들였다.“소현이가 미현이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게 분명해. 조사 좀 해줘.”그런 게 아니라면 함미현이 이렇게까지 윤소현의 말에 따를 리가 있을까?정수미는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윤소현이 함미현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친딸인 함미현이 그렇게까지 비굴하게 행동할 리 없었다.한편, 함미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그러고는 서둘러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어 정수미가 윤소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좋은 소식을 전했다.“알려줘서 고마워요.”박민정이 말했다.“다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진심으로 민정 씨가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가족의 은인이잖아요.”잠시 망설이던 함미현이 말을 이었다.“그런데, 정수미 대표님은 정말 무서운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제일 무서운 건, 그 여자가 우리 엄마한테 또 해를 끼치진 않을까 하는 거예요.”“정수미가요? 확실해요?”박민정이 의아해하며 질문했다.“네, 소현 씨도 그렇게 생각하던데요. 어쨌든 소현 씨는 대표님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박민정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윤소현한테 그런 말은 왜 한 겁니까? 그 여자가 공범이면 어쩌려고요?”처음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던 함미현은 박민정의 말을 듣자마자 당황한 듯한 기색을 보였다.“아,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함미현은 어딘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정 씨, 제발 우리 엄마 좀 지켜주세요. 어릴 때부터 아빠 없이 자라와서 엄마가 저를 정말 힘들게 키우셨단 말이에요. 절대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어선 안 돼요.”울먹이며 말하는 함미현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난감했다.“저도 장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경호 인력을 더 붙여줄 수는 있죠. 앞으로 미현 씨도 조심하세요. 더는 윤소현이랑 얽히려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