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재 씨, 진짜 미쳤어요?”그의 말에 강하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내가 뭘 하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에요? 우린 이미 이혼했어요!”여전히 서류에 사인하는 걸 미루고 있지만 그건 그의 문제고 강하린은 이미 이혼해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 여겼다.주도현과 데이트하는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해도 그가 무슨 자격으로 묻는단 말인가.본인이 먼저 한유나와 시시덕거렸는데 그녀가 설령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그가 했던 짓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내가 사인 안 하고 우리가 이혼하지 않았으면 넌 주민재의 아내야.”그가 강하린의 턱을 잡으며 고개를 뒤로 젖혀 그와 눈을 맞추도록 강요했다.“강하린, 감히 날 뭐로 보고 다른 남자를 만나?”강하린은 우스웠다. 매번 한유나를 감싸고 다정하게 챙겨줄 때마다 그녀의 기분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아니, 당연히 생각하지 않겠지.그의 마음속에는 그녀가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으니까.강하린은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그의 눈을 차갑게 마주하며 분명하게 말했다.“나한테 그쪽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어요.”이미 지나간 인연은 쥐 죽은 듯 조용히 살아주는 게 예의지.“강하린!” 강하린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오른 주민재는 힘껏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너 정말 역겨워.”이미 그의 마음속엔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걸 알았어도 여전히 날카로운 그의 말은 상처가 되었다.턱뼈가 으스러질 듯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마음의 상처에 비해선 아프지 않았다.강하린은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그에게 대꾸했다.“그렇게 역겹다면서 왜 사인은 안 해? 비겁하게.”누구에게 욕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주민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먹물처럼 어두워졌다.어둡고 깊은 눈동자에 서늘한 폭풍이 몰아쳤고 재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활활 태워버릴 분노가 휩쓸었다.“날 도발해? 강하린, 배짱이 대단하네!”그가 강하린을 힘껏 잡고 있어 얼굴까지 일그러졌다.“그럼 날 열받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게!”말을 마친 그는 손을 놓더니 강하린의 손목을
한유나가 실려 가고 수술실 문이 조금씩 닫히다가 이내 빨간불이 켜지는 순간 강하린은 유일한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고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몸에서 모든 힘이 다 빠져나간 듯 그녀는 중얼거렸다.“왜...”하도 소리가 작아 그는 듣지도 못했다.“뭐라고?”“대체 왜!”강하린이 격분해서 소리쳤다.“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주민재,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길래 나한테 이러는 건데! 아무리 내가 약을 먹였다고 의심한다 해도 내가 같이 자자고 강요했어? 내가 결혼해달라고 강요했어? 아내가 밖에 돌아다니는 게 싫다고 해서 내 일도 포기하고 집에서 집안일만 하면서 당신 챙겼어. 당신 취향에만 맞추면서 다른 사람으로 살았어. 당신의 조롱과 무시, 하대와 모욕까지 전부 다 참았고 한유나랑 부적절한 관계인 걸 알면서도 이미지 지켜주려고 온갖 핑계를 다 댔어. 난 당신한테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당신은 뭐야? 대체 왜 나를 그렇게 미워하는 건데? 왜 나한테 희망을 줘놓고 다시 지옥으로 던져버리는 건데!”강하린의 다그치는 질문에도 주민재가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자 마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인극을 하는 광대가 된 것 같았다.그 순간 허탈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를 바라보는 강하린의 눈동자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주민재, 당신이 이겼어. 내가 졌네. 주제넘게 당신을 좋아한 게 이번 생에 제일 후회되는 일이야.”강하린은 이를 악물고 악에 받쳐 말했다.“차라리 처음부터 당신과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그 말에 주민재는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어두운 눈빛이 무섭게 번뜩였다.“뭐라고?”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았고 그 순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시리도록 차가운 증오를 품은 강하린은 한 번도 이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본 적이 없었다.주민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려는데 강하린이 갑자기 격렬하게 그를 밀쳐냈다.“꺼져! 너만 보면 구역질이 나!”강하린은 고함을 지르곤 눈시울을 붉힌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주민재는 믿을 수 없다
강하린은 주민재와 한유나가 정말 미웠다.일찌감치 주민재의 인간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떠나지 않은 자신도 미웠다.이제부터 다시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 거다.“엉망진창이네.” 강하린이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너한테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눈이 멀어서 좋아해선 안 되는 사람에게 마음을 줘서 이 지경이 됐어. 당해도 싸.”각막을 떠올리면 강하린은 여전히 쿡쿡 가슴을 쑤셔대는 통증이 느껴졌다.“그런 말 하지 마.” 주도현의 진지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강하린은 그가 자기 손을 잡는 것을 느꼈다.“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얘기할 필요 없어. 주민재가 잘못한 거야. 주민재가 네 마음 저버린 거고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이야. 앞으로 그 자식이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게 너 자신부터 사랑해.”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강하린은 코끝이 시큰거렸다.“안 그래.”강하린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앞으론 나 자신을 사랑할 거야.”주도현은 꾹 참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배고프지? 기다려. 내가 식당 가서 음식 좀 사 올게.”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병실을 떠났다....한편, 한유나의 수술이 끝나고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의사가 나와서 마스크를 벗고 말했다.“대표님, 수술은 성공적이고 일주일 정도 지나면 눈이 회복될 겁니다.”“잘됐네요.” 주민재는 그 말에 안심했다.마취가 채 가시기도 전에 한유나는 침대에 실려 VIP 병동으로 들어갔다.주민재는 붕대로 눈을 감고 있는 한유나를 바라보다가 강하린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그를 보면 역겹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순간 차분했던 감정이 다시 격해지며 데려와 제대로 혼내고 싶었다.그를 보면 역겹다고? 그녀만큼 역겨울까.주민재는 더더욱 난폭한 기운을 뿜으며 결국 차가운 얼굴로 돌아서서 병동을 나가서 휴대폰을 꺼내 강하린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강하린은 연락이 되지 않았고 별장에 전화해 집사에게 돌아왔냐고 물었지만 집사
“하린아, 내가 왔어! 미안해, 내가 제때 오지 못해서 저 쓰레기 같은 놈이 각막을 가로채 갔어.”“지안이야?” 강하린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에 손을 더듬었고 고지안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눈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고지안이란 걸 확인한 강하린은 안심하며 그녀를 달랬다.“일시적인 실명일 뿐이니 걱정하지 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어쩌다 이렇게 됐어? 예전엔 이런 적 없었잖아.”고지안은 불안했다. 예전에 시력을 잃었을 때도 그저 잠깐이었을 뿐인데 왜 지금은 오랫동안 앞이 안 보이는 걸까.강하린의 차트를 살펴본 고지안은 그녀가 사용한 약물을 확인하고 표정이 굳어졌다.충격을 받아 강하린의 상태가 악화된 거다.“주민재 이 개자식이!”고지안은 이를 갈며 눈시울을 붉혔고 강하린은 허공에 손을 뻗어 더듬었다.“지안아...”고지안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괴로웠다.“나 진짜 그 자식 죽여버리고 싶어. 어떻게 너한테 이래?”고지안이 이를 갈며 말하자 강하린은 참담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사랑하지 않으니 함부로 대하는 거다.주민재에게 그녀는 한낱 길거리를 떠도는 고양이나 강아지와 다름이 없었다.주민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며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어 강하린의 행방을 물었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했다.문득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한 주민재는 걸음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특정 방향을 응시했다.훤칠한 남자가 문득 고개를 들자 부드럽고 잘생긴 얼굴이 보였고 손에는 음식이 들려 있었다.주도현이었다.주도현은 그를 보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주민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쪽이 왜 여기 있지?”주도현이 걸음을 멈추었다.“여긴 병원인데 그쪽만 올 수 있고 나는 못 오는 곳인가요?”“강하린이랑 무슨 사이야?”주민재가 뒤돌아 매서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고 주도현은 차분하게 상대를 응시했다.“개인적인 일인데 굳이
주도현이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샀어. 맛있는 걸 먹으면 빨리 나을 수 있을 거야.”강하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입맛이 없어서 나중에 먹을게.”“조금만 먹어봐. 그러다가 쓰러지면 어떡해?”주도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물었다. 그 모습을 본 고지안이 입을 열었다.“내가 먹여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주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옆으로 물러났다. 주도현이 사 온 건 따뜻한 죽과 만두였다.강하린은 몇 입만 먹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고 주도현과 고지안은 병실에서 나왔다.“고지안 씨, 하린의 주치의라고 했죠?”병실을 나선 주도현은 엄숙한 말투로 물었다.“주치의라면서 그런 일이 벌어질 때까지 뭐 하고 있었던 건가요?”주도현의 말에 고지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전부 내 탓이에요. 수술 전에 다른 의사의 전화를 받고 나갔다가 창고에 갇혔어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거든요.”고지안은 강하린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주민재의 비열한 수법에 놀아났다는 것에 분노했다.“결국 빼앗기고 말았네요.”주도현이 덤덤하게 말했다. 대처가 미흡한 고지안이 눈에 거슬렸지만 이 일의 배후에는 주민재가 있었다. “인맥을 총동원해서 각막 기증자를 알아볼 테니 그동안 하린이를 잘 보살펴주세요. 혼자 있으면 더 우울할 거예요.”그 말을 들은 고지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혹시 언제부터 하린이랑 친하게 지낸 건가요? 하린한테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고지안과 강하린은 제일 친한 친구였기에 서로 숨김없이 전부 말하곤 했다.그러나 눈앞의 남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주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었어요. 그러다가 연락이 끊겨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고요. 앞으로 주민재가 하린이를 다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고지안이 진지하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두 날 후, 강하린은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고지안은 강하린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한유나는 울먹이면서 말을 이었다.“이러면 안 되는데 미안해요. 민재 오빠한테 자꾸 기대고 싶어지는 내가 미워요. 바쁘면 얼른 가보세요. 혼자 무섭지만 잘 견뎌볼게요. 아이처럼 굴면서 오빠한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거든요.”주민재는 한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조금 있다가 간병인이 올 테니 마음 편하게 있어. 무서우면 오빠한테 전화해도 돼. 알았지?”“역시 민재 오빠가 최고예요. 나를 보러 꼭 와줘야 해요.”한유나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병실을 나선 주민재는 지난번에 병원에서 주도현과 마주친 것이 생각났다. 주도현이 병원에 나타난 건 분명 강하린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그렇다면 강하린이 입원했을 가능성도 있었다.주민재는 인맥을 통해서 병원의 입원 기록을 샅샅이 뒤졌다. 강하린의 입원 기록을 찾았지만 오늘 퇴원했다고 쓰여 있었다.주민재는 곧바로 별장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사가 공손하게 인사했다.“도련님, 오셨어요.”“그 사람은 집에 돌아왔어요?”주민재는 집 안을 둘러보면서 물었다.“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집사는 멈칫하더니 주민재가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눈치챘다.“사모님은 아직 들어오시지 않았어요.”주민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돌아오지 않았다고? 설마 주도현 그놈이랑 붙어있는 거야?’주민재는 차갑게 웃더니 강하린한테 전화를 걸었다.강하린과 고지안은 방금 집에 도착했고 강하린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하린은 발신자가 주민재인 것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고 문자로 통보했다.[강하린: 이혼합의서에 사인하세요.]고지안이 물컵을 건네면서 물었다.“설마 그 미친놈이 너한테 전화를 건 거야?”“맞아.”강하린은 물과 함께 약을 넘겼다. 고지안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이제 와서 너한테 전화하는 이유가 뭐지? 짐승보다 못한 놈! 절대 용서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멀어지면 돼.”“걱정하지 마. 더 이상 바보처럼 굴지 않을 거야.”강하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주상철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너희 둘은 처음부터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애초에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게 아니었어. 나의 욕심이 하린이를 아프게 했던 거야. 아무튼 저녁에 집으로 오거라. 하린이랑 너한테 할 말이 있어.”말을 마친 주상철은 전화를 끊었고 강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던 강하린이 전화를 받았다.“하린아, 지금 어디에 있어? 민재가 너를 괴롭히면 할아버지한테 언제든지 말해. 나는 영원히 하린의 편이야.”강하린은 주상철의 목소리를 듣고는 코끝이 찡했다. 며칠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할아버지...”강하린이 울먹거리면서 말했다.“만약 민재 씨랑 이혼하고 싶다면 허락하실 거예요?”한참 동안 말이 없던 주상철이 한숨을 내쉬었다.“결국 너는 헤어지기로 마음먹었구나.”어찌 되었든 주상철은 두 사람이 같이 행복하게 지내길 바랐다. 그러나 강하린이 먼저 이혼에 관한 말을 꺼냈기에 아무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오늘 저녁에 할아버지랑 같이 밥 먹자. 얼굴 보면서 천천히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좋아요.”강하린은 주상철의 말을 듣고 마음이 편해졌다. 주씨 가문에서 강하린한테 제일 친절했던 사람은 주상철이었다.이혼하기로 마음먹고 나서 주상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강하린은 주방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옅은 화장으로 창백한 얼굴을 가렸다.주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을 때, 정원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주상철을 발견했다.주상철은 강하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하린아, 이쪽으로 와서 앉아.”“할아버지!”강하린은 미소를 지으면서 달려갔다. 주상철은 강하린을 지그시 쳐다보면서 말했다.“얼굴이 또 여위었어.”그 말에 강하린은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관심이 없다면 살이 찌든 빠지든 보아내지 못할 것이다.강하린은 주상철의 관심과 사랑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감동했다.“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많았겠어...”주상철이 한숨을 내쉬었다.“민재가 너한테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주상철이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끼어들지 말라고?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어.”이때 집사가 다가와서 말했다.“어르신, 저녁 식사를 하실 시간이에요.”“그래. 들어가서 밥 먹자.”주상철이 일어나자 강하린이 부축해 주었다. 주상철은 강하린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물었다.“하린아, 눈이 왜 그래?”“아, 그게...”강하린은 멈칫하더니 두 눈을 매만지면서 말했다.“요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런가 봐요.”주상철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쳐다보았다. 강하린의 두 눈은 어딘가 이상한 것 같았지만 다시 보면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강하린은 주상철을 부축하고 들어갔고 주민재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주민재는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식탁 앞에 앉은 주상철은 강하린에게 음식을 집어주면서 말했다.“하린아, 많이 먹어.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민재가 너한테 밥도 차려주지 않은 거야?”주상철은 강하린과 주민재가 별거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강하린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그런 거 아니에요.”주상철은 주민재를 흘겨보면서 말했다.“아내한테 반찬도 집어줄 줄 몰라? 너처럼 무심한 남편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할아버지.”주민재가 대답하기도 전에 강하린이 입을 열었다.“제가 직접 집어서 먹으면 돼요. 할아버지도 얼른 식사하세요.”강하린은 고기를 집어서 주상철의 그릇에 올려놓았다. 주민재는 강하린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식사를 마친 뒤, 주상철은 강하린과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하린아, 민재랑 이혼하기로 마음먹은 거지?”주상철은 주민재가 여전히 강하린을 사랑한다고 생각했기에 강하린을 설득하려고 했다.“할아버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할 거예요. 죄송해요.”주상철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민재를 불러왔다.“이혼합의서에 사인하고 하린이를 보내줘. 하린이는 마음을 굳힌 것 같아.”주상철이 엄숙하게 말하자 주민재는 강하린을 힐끗 쳐다보고는 대답했다.“할아버지, 두 사람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됐어.”주민재는 거절하고 나가 버렸다.한유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방금 집사가 주민재에게 전화해서 사모님을 병원에 모셔 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사모님이라면 강하린 말고 누가 있겠는가?지금 저렇게 서둘러 병원에 가는 걸 보니 강하린 그 몹쓸 년을 보러 가는 게 분명했다.한유나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택시를 타고 몰래 주민재의 차를 뒤쫓았다.주민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강하린은 이미 모든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이곳은 유명인이나 부자들만 이용하는 고급 개인 병원이었다.집사와 도우미는 마치 경호원처럼 강하린의 양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의사는 강하린의 검사 결과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한 달 안에 수술하지 않으면 영구 실명될 가능성이 높습니다.”강하린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지금 당장 적합한 각막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그가 물었다.의사는 고개를 저었다.“각막은 항상 부족합니다. 돈이 있다고 해도 운이 따라야 하죠.”주민재는 한참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최대한 알아봐 주세요.”진료실에서 나오자 강하린이 말했다.“화장실 좀.”각막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주민재는 그녀의 말에 도우미에게 말했다.“모셔다드려.”도우미는 강하린을 부축해 화장실 앞까지 데려갔다. 강하린이 말했다.“나 혼자 들어갈 수 있어요.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알겠습니다.”도우미가 대답했다.강하린은 일을 보고 지팡이로 길을 찾으며 세면대까지 갔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손을 씻었다.금방 손을 다 씻었는데 발소리가 들렸다.그녀는 도우미인 줄 알고 말했다. “부축해 줘요.”“부축해 달라고?”한유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지팡이를 발로 차 버렸다.강하린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방금 목소리가 낯익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한유나 씨?”“눈은 멀었는데 귀는 참 밝네요.”한유나는 강하린의 앞
주민재는 강하린의 휴대폰을 집어 들어 고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강하린의 귀에 가져다 댔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네 친구한테 안전하다고, 네가 여기 있는 게 자의라고 말해.”강하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곧 전화가 연결되었고 고지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졌다.“하린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괜찮아? 주민재가 널 어떻게 하진 않았지?”강하린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나 괜찮아, 지안아, 나 지금 잘 있어. 그 사람이 날 어떻게 하진 않았어. 그러니 너 돌아가. 나 좀 다쳐서 사람 만나기 힘들어. 그리고 나 다시 여기서 살기로 했어. 미안해.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거니까 이제 신경 안 써도 돼.”“거짓말!”고지안은 강하린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주민재와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절대 다시 돌아가지 않을 아이라는 걸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놈이 협박했지? 걱정 마, 말해. 내가 구해 줄게!”“아니야.”강하린은 다급하게 말했다.“정말 아니야. 함부로 행동하지 마! 나 지금 앞이 안 보여서 네 집에 계속 있으면 폐가 될까 봐 다시 돌아온 거야. 여기 있으면 돌봐주는 사람이 있잖아. 걱정하지 마. 나 정말 괜찮아. 민재 씨가 새 각막을 찾아서 내 눈을 고쳐 주겠다고 했어.”고지안: “그 사람 말을 믿어? 널 속이는 거 아니야? 전에 네 각막도 빼앗아 갔잖아!”“아니야, 이번에는 날 속이지 않을 거야.”강하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고지안은 잠시 침묵했다.“알았어. 네가 그렇게 결정했으면 난 네 선택을 존중할게. 하지만 나중에 힘든 일 있으면 꼭 나한테 전화해. 알았지?”“응.”고지안은 전화를 끊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주도현이 물었다.“어떻게 됐어요?”“별로 안 좋아요.”고지안은 미간을 찌푸렸다.“하린이는 분명 주민재 그 자식한테 협박당했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저런 말 할 리가 없는데. 평소랑 너무 달라요. 게다가 그 자식이 하린이 눈을 고쳐 주겠다고 했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하
집사는 황급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도련님!”주민재가 나가자 도우미는 겁먹은 얼굴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집사는 눈짓으로 그녀에게 강하린의 상처를 소독하라고 지시했다.고지안은 어디에서도 강하린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주도현에게 전화해서 함께 찾아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강하린의 그 친구는 뭔가 범상치 않아 보였는데 그가 도와주면 좀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하지만 둘이 아무리 찾아도 강하린은 없었다. 병원 CCTV 영상도 일부분이 지워져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삭제한 게 분명했다.고지안이 절망하며 경찰에 신고하려는 찰나, 주민재의 전화를 받았다.“하린이 나한테 있어요.”주민재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찾았어요.”강하린은 코웃음 쳤다.“찾았다고? 웃기시네. 분명 당신이 데려간 거잖아.”주민재는 그녀의 말은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하린이는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지낼 겁니다.”“무슨 소리야?”고지안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하린이한테 무슨 짓을 했어? 걔 지금 어디 있어? 전화 바꿔 줘!”“지금 통화하기 힘들어요. 그리고 난 하린의 남편이니 하린이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앞으론 신경 끄세요.”말을 마치자 주민재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뭐라는 거야? 말 똑바로 해! 주민재!”고지안은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뚜뚜 소리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뭐래요?”주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고지안은 욕설을 퍼부었다.“그 자식이 사람을 시켜 하린이를 납치했어요! 그러고는 지금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앞으로 신경 끄라잖아요! 대체 뭘 하려는 건지!”주도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 사람이 직접 데려간 건 아닌 것 같아요.”“혹시 짚이는 거라도 있어요?”고지안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주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목소리가 좀 익숙했어요. 근데 누군지 바로 생각이 안 나네요. 아마 그 사람이 하린이를 데려갔다가 주민재에게 걸린 것 같아요.”“어쨌든 지금 하린이는 지
“꺼져!”강하린은 차갑게 말했다.주민재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지만 애써 눌렀다.지금 그녀는 앞이 보이지 않으니 예민해진 것도 당연했다.하지만 주민재는 이렇게 무시당한 적이 없었다.고작 그 정도 죄책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처음부터 그녀가 함정을 파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건데. 그리고 그때 자신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진작에 그녀 아버지의 원수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을 것이다.참으로 은혜를 모르는 여자였다.주민재는 벌떡 일어서서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좋아, 약 바르기 싫으면 관둬. 어차피 아픈 건 너니까!”그는 분노에 찬 발걸음으로 방을 나가 버렸다.강하린은 이를 악물고 손으로 더듬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사모님, 무슨 일로 침대에서 내려오셨어요?”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를 부축하며 방 안으로 데려갔다.“앉으세요. 약 발라 드릴게요.”“싫어요!”강하린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도우미의 손을 뿌리쳤다.“약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여기서 나가게 해 줘요! 주민재가 내 허락도 없이 여기에 데려왔단 말이에요. 난 이미 이혼하자고 했어요! 날 여기서 나가게 해줄 수 있어요?”도우미는 당황한 듯 잠시 말을 잃었다가 대답했다.“사모님, 저는 약 발라 드리는 일밖에 해드릴 게 없어요. 다른 건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집사를 불러줘요!”강하린은 화를 내며 말했다.“집사를 데려오라고!”“잠시만 기다리세요!”도우미는 서둘러 나갔다.강하린은 벽을 짚고 서 있었다. 머리가 욱신거렸다.눈을 꾹 감자 괴로움이 밀려왔다.방금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거지? 분명 그 도우미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녀는 감정 조절을 제대로 못 한 자신이 한심했다.눈이 멀게 된 후 그녀는 스스로의 성격이 눈에 띄게 날카로워졌음을 느꼈다. 아마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집사가 곧장 올라왔다.“사모님, 무슨 일이세요?”“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만약 오늘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면?그녀가 시력을 잃은 데에는 그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녀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그는 이것을 책임감이라고 불렀다.아직 이혼하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부부였으므로 그가 그녀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차는 곧 별장 앞에 도착했다. 강하린이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었다.주민재는 차에서 내려 그녀 쪽으로 가서 문을 열고 안전벨트를 풀어 그녀를 안아 내렸다.강하린은 발버둥 치며 두 다리를 허공에 휘둘렀다.“놓으라고!”하지만 주민재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마중 나온 집사는 주민재가 강하린을 안고 있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황급히 다가왔다.“도련님, 사모님께서는...”“눈에 문제가 생겨서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주민재가 말했다.집사는 놀라 말했다.“사모님께서 앞을 못 보신다고요?”“사모님 시중들 사람을 배치해요.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이게 무슨 뜻이야?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난 이런 싸구려 보상 필요 없어!”강하린은 목이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당신 때문에 내가 눈을 잃었잖아! 내 각막 돌려줘!”집사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놀랐다.주민재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혔다.강하린은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하마터면 주민재의 얼굴을 때릴 뻔했지만 그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네가 화난 건 알아.”주민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 마. 네 각막 가져간 대가, 반드시 갚아줄 테니까.”강하린은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비웃었다.“갚아주면 다야? 난 당신을 절대 용서 못 해! 당신은 양심에 찔려서 이제 와서 보상해 주겠다는 거잖아? 늦었어! 난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날 내보내 줘!”주민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부터 여기서 눈 나을 때까지 어디도 가지 마.”말을
신현수가 손을 흠칫 떨며 뒤를 돌아보니 주민재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민재 형?”신현수는 반사적으로 손을 놓고 일어섰다.“형이 어떻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주민재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현수 도련님!”경호원들은 깜짝 놀라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신현수는 제대로 한 방 얻어맞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한참 만에야 그는 경호원들에게 부축받아 간신히 일어섰다.주민재는 이미 코트를 벗어 강하린에게 덮어주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신현수는 속으로 뜨끔했다.“민... 민재 형...”“누가 얘를 여기 데려오라고 했어? 현수 너 정말 잘났다. 배울 게 없어서 여자 괴롭히는 것만 배웠어?”주민재는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주민재? 강하린은 덮어준 외투를 꽉 쥐었다. 결국에는 주민재가 자신을 구하러 올 줄은 몰랐다.“민재 형, 그게 아니라 나는 그저...”“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네 다리를 분질러 버릴 줄 알아!”주민재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고는 강하린을 안아 들고 나가 버렸다.신현수는 분노에 찬 욕설을 내뱉었다.“빌어먹을!”주민재가 강하린에게 정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대체 저 둘은 무슨 사이인 거지?강하린은 주민재에게 안겨 나가면서 계속 저항했다.“놓으라고! 내려놔! 가식 떨지 말고!”“가식?”주민재는 차갑게 말했다. “내가 제때 안 왔으면 넌 어떻게 당했을지도 몰라.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가식이라니?”“신현수가 날 납치한 게 당신 허락 없이 가능했을 것 같아?”강하린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글썽였다. “내 꼴이 이런데도 왜 아직도 날 놓아주지 않는 거야? 도대체 뭘 더 하려는 건데?!”“내가 허락했다고? 내가 언제 현수에게 널 잡아 오라고 시켰다는 거야? 정말 그랬다면 내가 널 구하러 오느라 이렇게 고생했겠어?”주민재는 은혜를 모르는 그녀가 한심했다.강하린은 차갑게 말했다.“당신이 평소에 그 자식이 날 괴롭히는 걸 눈감아 줬으니까 그런 거잖아! 이게 다 당신 때문
신현수는 휴대폰을 찾아내 버튼을 눌렀다. 아직 고장 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줄게. 널 납치하기 전에 민재 형한테 이미 말했어. 형은 너한테 조금도 관심 없었어.”그에게 말했다고?강하린은 이를 악물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러고보니 주민재가 묵인한 거였다. 어쩐지 신현수가 저렇게 대담하더라니.전에는 아무리 그녀가 미워도 주민재의 눈치는 봤는데 이젠 그와 이혼하려고 하니 배경이 없어졌다고 이렇게 안하무인인 모양이었다.신현수는 강하린의 얼굴인식으로 휴대폰 잠금을 풀고 연락처를 뒤졌다.“어젯밤에 그 자식 이름이 뭐였더라?”강하린은 주도현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말했다.“나한테 앙심 있으면 나한테 풀어. 너랑 나 사이의 일에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오호, 네 상간남을 이렇게 감싸는 거야?”신현수는 비웃었다.“너 하나로는 내 화가 안 풀려. 감히 날 때린 놈은 댓가를 치러야지!”옆에 있던 사람이 귀띔했다.“도련님, 주도현이라고 합니다.”“아, 주도현.”신현수는 코웃음 치며 주도현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휴대폰 내놔!”강하린은 갑자기 달려들어 휴대폰을 빼앗으려 들었다.비록 빼앗지는 못했지만 신현수는 깜짝 놀라 화가 나서 그녀를 거칠게 밀쳤다.“망할 년, 놀랐잖아!”하지만 힘 조절을 못 한 탓에 강하린은 벽에 세게 부딪히며 머리가 터졌다.옆에 있던 자가 조심스레 말했다.“도련님, 머리에서 피가 나는데 치료해 줄까요? 아무래도 저 여자는 아직...”“필요없어!”신현수는 차갑게 말했다.“민재 형이 이년한테 마음도 없는데,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강하린은 벽에 기대어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쏟았다.‘그래, 민재 씨는 날 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되든 신경도 안 쓰겠지.’전화가 연결되었다.“하린아, 무슨 일이야?”주도현의 목소리를 듣자 강하린의 심장이 떨렸다.신현수는 비웃으며 말했다.“하린이? 다정하게 부르네. 이 천한 계집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지?”“당신 누구야? 하린이는 어디 있어?”
“언제 없어진 거예요? 왜 나한테 빨리 말 안 했어요?”주민재는 말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한유나는 그가 나가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따라갔다.“주 대표님, 이따 다른 회의가...”“회의 취소해. 지금 급한 일이 생겼어!”주민재는 급하게 말하고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한유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며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무슨 뜻이에요? 하린이를 데려간 게 당신이 아니라고요?”고지안은 어리둥절했다.주민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 내가 사람을 보내서 찾아볼 테니까 당신 쪽에서도 무슨 소식 있으면 곧바로 연락 주세요.”전화를 끊자마자 주민재는 곧 전화를 걸어 경호원들에게 강하린을 찾으라고 지시했다.경호원들은 즉시 병원으로 출동해 CCTV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에는 모자를 쓴 여자가 강하린을 데리고 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여자는 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강하린이 길가로 끌려 나온 후, 차 한 대가 멈춰 섰고 차에서 내린 누군가가 그녀를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경호원은 이 장면을 캡처해서 주민재에게 보냈다. 주민재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악!”한 통의 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려 강하린의 온몸을 적셨다.쿵!물통이 바닥에 내던져지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물에 흠뻑 젖은 옷이 차갑게 몸에 달라붙었다.신현수는 마치 물에 빠진 생쥐 꼴인 그녀를 보며 경멸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너 같은 건 진작에 죽었어야 했어. 네 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풍비박산 났는지 알기나 해? 너도 똑같은 죄인이야. 내가 너라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낯짝도 없었을 거다!”강하린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그런 모습에 신현수는 더욱 화가 났다.“말해!”턱에 격통이 느껴졌다.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들었지만 눈앞은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신현수의 숨
강하린은 의아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지?하지만 고지안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얼마나 걸었을까, 강하린은 점점 시끌벅적한 곳에서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세 층을 내려오고 나서야 자신이 원래 3층에 있었으니, 지금 1층에 도착한 셈이라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의아한 듯 물었다.“지안이가 왜 1층에 있는 거죠?”간호사는 대충 둘러댔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1층에서 볼 일이 있는 게 아닐까요?”간호사는 계속해서 강하린을 데리고 갔다. 이때 강하린은 확성기 소리, 차가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 각종 소음이 들려오는 걸 깨달았다.그제야 자신이 이미 길가에 나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고지안이 병원 안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다지 않았나? 그런데 왜 병원을 벗어난 거지?!강하린은 경계하며 간호사의 손을 확 뿌리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당신, 지안이가 보낸 사람 아니지! 도대체 누구야?!”“어라? 생각보다 눈치 빠른데?”귀 옆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순간 강하린의 머리칼이 쭈뼛 섰다. 신현수였다.그녀는 발소리를 들었다. 신현수가 다가온 것이다.강하린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뭐가 그렇게 무서워?”신현수는 그녀를 냉랭하게 노려보더니 초점 없는 그녀의 눈을 보고는 비웃음을 터뜨렸다.“정말 눈이 안 보이는 거냐? 진짜 장님이 됐다고? 꼴좋다! 어젯밤에 네 덕분에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그러니까 이제 나랑 가자고. 내 화가 풀릴 때까지 절대 안 놔줄 거야!”강하린의 손에 있던 지팡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신현수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놔줘! 제발!”신현수는 그녀를 거칠게 차 안으로 밀어 넣고는 자신도 올라타 문을 세게 닫았다.“가자!”...고지안은 3호실 환자와 씨름하며 30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겨우 달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