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하율은 울며 백장미를 부르고 있었다.“하율아!”이준국은 휘청거리는 하율을 부추겨 세웠다.연아는 시계를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걔가 아니야…걔가 아니야…”하지석의 추측이 맞았다. 영상에 찍힌 여인은 백장미가 아니고 범인을 도와준 사람일 리도 없다. 백장미는 범인이 아니야!하율이 멈칫하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언니, 뭐, 뭐라고?”“범인이 아니라고.”조연아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백장미는 범인이 아니야, 백장미는 우리 엄마를 살해한 범인이 아니야!”하율은 완전히 멍해 있었다.“살해할 시간이 없었어.’연아는 손을 뻗어 동영상 위쪽에 찍힌 시간을 집으며 말했다.“사건 발생 시간이 저녁 10시고 난 10시 20분에 소식을 들었어. 그런데 영상의 시간은 10시 40분이거든.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에 너희가 교외에 살아서 사건발생지를 오가려면 적어도 50분은 걸리잖아.”조연아는 다시 한번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시간이 맞지 않아… 카메라에 찍힌 뒷모습이 비슷한 것일 뿐이지, 절대 백장미는 아닐 거야.”연아의 말에 하율과 이준국은 제자리에서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하율은 3년 전의 생일날이 떠올랐다.“그날은 내 생일인데 나 혼자 해외에서 연기를 배우고 있어서 엄마가 문자로 아빠랑 온종일 붙어 있었고 매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쇼핑했다고 했었어. 그날에 최고 소비 금액을 찍었기도 했다고. 심지어 선물도 엄청 많이 샀다고…”시간도 오래 흘러 하율의 기억은 조금 모호했다.그녀는 기억을 열심히 되새기며 말했다.“영상은 엄마가 차 안에서 찍은 건데 아마도 아빠가 데려다주려던 참이었을 거야.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임천시의 대형 쇼핑몰들은 항상 저녁 10시까지 영업했어. 나한테 메시지를 보낼 때가 10시 반 좌우니까…맞아! 열시 반! 나 그때 리허설하고 있어서 국내 시간 10시 반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이준국은 하율의 말을 듣고 자기의 생각을 보탰다.“하율의 말대로라면 10시 반에 이미 집으로 돌아가는
“아니야.”연아는 긍정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우리 엄마가 억울하다고 생각해. 그런데 유서에서는 그렇게 썼잖아! 엄마가 살인자라고, 진짜 이상해!”하율은 자기 가방을 찾기 시작했다.이준국도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곁에 놓인 백팩을 건네다 주었다.하율은 가방에 들어간 백장미의 유서를 꺼내 연아한테 건네주었다.“언니, 여기 봐봐. 이렇게 썼어.”연아는 하율이 전해준 편지를 보았다.확실히 위에 정확하게 씌어져 있었다. 백장미는 자기가 바로 추현을 살해한 범인이 맞다고 인정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이랑 하율이한테 밥 잘 챙겨 먹고 잘 있으라는 내용뿐이었다.이 편지가 진짜일 거라고 믿을 수는 없다.조연아는 편지를 이준국한테 건네주고 부탁했다.“백장미 필적이 맞는지 감별해 봐.”“알았어.”이준국은 바로 받아쥐었다.지금 모든 일이 원점으로 돌아갔다.엄마를 죽인 범인은 백장미가 아니었고 백장미는 이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그것인즉슨, 진짜 범인은 아직도 밖에 떠돌고 있다.“그러면, 우리 엄마는 진짜 자살한 거야?”하율의 한마디에 조연아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백장미가 범인이 아니면 백장미의 죽음도 오리무중이 된다.“언니…”하율은 다시 연아를 쳐다보았다.“검사 결과로는 엄마가 자살이라고 하던데…그런데, 그런데 대체 자살 이유가 뭐지? 진짜 범인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런거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 보다시피 범인이 아니잖아…”자살의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다.죽다 살아난 사람이 가족들이랑 잘 사는 일만 남았는데 이 시점에 자살할 필요는 없다…“그럼 한가지 가능성밖에 없지.”“무슨 가능성?”“협박당한 거지.”연아는 확신에 찬 말투였다.“범인은 대체 누군데?”하율은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꼬인 건지…하율이 뿐만 아니라 모두 이런 이야기 전개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지금까지는 의심스러운 사람을 찾지 못하겠지만 범인은 언젠간 잡힐 거야!”조연아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확신할
하율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믿어.”“그러면 일단 언니 말 듣고 이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해. 여전히 넌 엄마가 돌아가신 슬픔에 잠겨져 있고 휴식기를 가지다가 복귀해서 드라마 찍고 활동에 참석해. 이상함을 눈치채게 하면 안 돼.”연아는 범인이 하율을 지켜보고 있을까 봐 신신당부하고 있었다.“언니, 근심하지 마. 내가 연기에는 자신 있어.”“언니가 꼭 알아낼게.”“범인 너무 무서운 사람인 것 같은데, 꼭 조심해야 해.”하율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응답하듯 조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이준국이랑 조연아는 같이 하율이 물건을 다시 정리해 주었다.이준국이 물건을 옮기고 있을 때, 옆집 아줌마들이 유명한 연예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하율의 집 앞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이준국은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누굴 찾으세요?”“그, 하율이 있는가? 맨날 테레비에 나오던 걔 있잖어. 우린 어릴 때부터 걜 봤다니께.”“우리 손주 얼마나 똘망똘망하게 생겼어. 그 하율이 보고 좀 티비에 같이 데리고 나가라고 부탁해 달랑게.”“그리고 우리 아들 올해 서른인데 아직 결혼을 못했거든. 그래서 하율이한테 소개 좀 해주려고 왔지.”아줌마들의 목청은 점점 더 높아갔다.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하율이 밖의 소리를 듣고 방 안에서 나왔지만, 아줌마들을 본 순간 한숨을 들이쉬더니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야! 하율이! 나 기억나? 옆집에 손씨잖어.”“하율아, 유씨 아줌마. 기억나지?”“하율아, 하율아. 나는? 네가 자라는 걸 내가 옆에서 지켜봤지.”하율은 겁에 질렸다. 이 아줌마들, 하율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귓속에 다시 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 했다.--혼외 딸이라니까. 우리 애같은 바른 애가 어떻게 저런 더러운 애랑 놀아?--우리 애 보고 놀지 말라고 해야겠다. 지 아빠도 싫다는 애를 우리 애랑 놀게 만들면 안 되지!--엄마도 몸 파는 사람인데 그 엄마가 낳은 애가 어디 가겠어. 지 엄마처럼 여우같이 생겨서.
아줌마들은 키가 1.9미터가 넘는 만두를 바라보며 무례하게 소리쳤다. "어떻게 우리를 모를 수가 있다는 거야?! 난 그 아이가 자라는 걸 다 지켜봤다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를 잊어버릴 정도로 성공했다 이 말이지! 우리를 도울 줄도 모르고 말이야, 우리에게 집 한 채씩은 주어야 하지 않겠어?!”"맞아, 방금 나와서 한 마디도 안 하는데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이 아줌마들은 정말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다행히 만두는 키가 커서 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위압감 때문에 아줌마들이 들이닥치지 못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들어와서 조하율을 쫓아갔을 것이다.조연아는 수납함을 정리하고 침실 문을 닫은 뒤, 문에 기대어 있는 조하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고, 에어컨이 켜져 있었지만 여전히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무슨 일이야?” 조연아도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즉시 그녀에게 물었다.“밖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누가 왔어?” 말을 마친 조연아는 문 손잡이를 돌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조하율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언니 나가지 마... 만두 오빠는 덩치가 크고 힘도 세서 저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만, 언니가 나간다면 해코지를 당할까 봐 겁나.”그 사람들에 대한 인상은 매우 깊었고, 그들의 침방울에 익사 당할 것만 같았다……"저 사람들이 누군데? 옛날 이웃집 사람들이야?” 조하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나랑 엄마가 여기에 살 때 우리 뒤에서 얘기를 엄청 많이 했던……” 여기까지 말한 조하율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사람들이 내가 사생아라고, 엄마가 날 특별히 키워서 나중에 나이트에 보내 돈을 벌게 할 거라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뭐?” 조하율은 아랫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다 지난 일이고. 언니, 나가지 말고 있어. 저 사람들이 날 보지 못하면 분명히 떠날 거야…… 어쨌든 여기에 계속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잖
조연아는 이리도 파렴치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라며 기가 차기까지 했다. "안타깝네요, 거울이 아무리 커도 당신들의 그 크고 두꺼운 낯짝은 비출 수 없을 것 같아요.” 아줌마들은 조연아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호통을 쳤다. "왜 이렇게 버릇없이 말을 하는 거야?! 우린 당신보다 수십 년은 더 살았고, 어쨌든 당신보다 어른이라고!” 조연아는 이 막돼먹은 아줌마 무리들을 바라보며 두 손을 가슴에 포갠 채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남의 집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예의 바른 행동인가요? 저보다 수십 년을 더 살았다고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러면 내 조상들은 당신들보다 수백 년은 더 살았는데, 내 조상들에게 정성을 들여 절하고 또 나한테도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줌마들은 조연아의 질책에 말을 잇지 못했고, 잠시 뒤 연달아 욕설이 튀어나왔다. “조하율 그 계집년을 당장 불러내! 돈이 많다고 거드름을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은 뭔데? 왜 조하율을 대신해서 말하는 거야?!”아줌마들이 번갈아 가며 큰소리를 쳤다. "난 조하율의 언니예요! 언니가 자기 동생을 대신해서 말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럼 당신들은 누굴 대신해서 내 동생에게 집을 요구하러 온 거죠?”조연아의 말에는 형언할 수 없는 힘이 뿜어져 나왔고, 그녀의 아우라가 매우 강력해서 아줌마들은 이전만큼 패기가 넘치지 않았다.지금은 오히려……좀 소심할 정도였다! "전 이미 경찰에 신고를 했고, 방금 전 당신들의 언행들을 모두 기록해 뒀으니 그리 아세요.” 조연아의 말에 아줌마들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고, 조연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여기엔 당신들이 어떻게 내 여동생을 괴롭혔는지, 어떻게 모욕을 했는지 다 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모두 넘겨줄 겁니다. 내 생각에는 스타 엔터의 회장인 나라면 충분히 당신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조연아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협박하는 짓을 한 적이 없었
조연아는 입을 가리고 웃었고, 몇 초 뒤 조하율이 문을 열었다.그녀는 조용한 방과 닫힌 아파트 문을 바라보며 놀란 얼굴을 하고 물었다."그, 그 사람들이 어떻게 간 거야?” 만두는 조연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고모할머니한테 겁을 먹고 다 나갔어. 하율아, 그 아줌마들은 완전히 안색이 변해서 줄행랑을 쳤다니까!” "언니, 어떻게 쫓아낸 거야?”조하율은 조연아를 감탄한 얼굴로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 그녀를 껴안았다. "우리 언니는 역시 너무너무 대단해! 내가 녹화를 했던 프로그램에서 어렸을 때 수공예품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그걸 들고 오려다가 그 아줌마들이랑 딱 마주친 거야. 그래서 한 사람당 5만 원씩 주니까 날 보내줬었는데…… 언니, 정말 대단해!”"인당 5만 원씩 줬다고?” 조하율은 고개를 끄덕였다.조연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조하율의 이마를 살짝 찔렀다. "이 바보야!""아..." 조하율은 억울해하며 말했다."어쩔 수 없었어... 내 차 앞을 가로막고, 바닥에 누워서 온갖 억지를 부리는데…… 경찰이 와서 뉴스에 날까 봐 어쩔 수 없이 그랬어……” “그 사람들이 너한테서 한 번 돈맛을 보니까 이번에 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또 이런 억지를 부리는 거네.”만두는 조연아의 말에 동감하며 얘기했다."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서 한 번 단맛을 보면 또 어떻게든 다시 맛보려고 노력할 거라고. 하율아, 넌 너무 착해.”"내가 착하다고 할 수는 없지, 난 단지 싸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을 뿐이야.” "예전에는 나도 항상 그랬어. 많은 일들을 묵묵히 삼켰지만 이게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만 증명해 줬지. 강자는 강하게 대해야 상대방이 무시하지 않는다고.” 조하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강해질 거야, 언니한테 배울 거야!” 조연아는 동생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하율아, 더 강해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내가 널 지켜줄 거야!” "만두도 너를 지켜줄 거고 말이야.” 조연아의
조하율은 눈을 크게 떴고, 민지훈이 여기에 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언니..." 조하율은 옆에 서 있는 조연아를 불렀다. "형부… 아, 아니, 전 형부가 어떻게 여기에 온 거죠?"조연아의 전 남편이라면 저 사람은 자신의 전 형부가 아닌가?조하율은 혼란스러웠고, 마땅한 호칭을 찾을 수 없었다. 조연아는 눈살을 찌푸리고 대답하지 않았고, 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조하율은 민지훈이 한걸음 한걸음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놀라서 곧바로 복도로 달려갔다. "언니, 난 만두 오빠를 도와주러 갈게!” 조하율은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연예계에서 일을 하다 보니 머리는 잘 굴러갔기에 이럴 때는 당연히 도망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여름 바람이 불어왔고, 피부도 덩달아 뜨거워졌다.조연아는 민지훈이 앞으로 다가오면 뒤로 갔고, 그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민지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더 이상 뒤로 가면 도랑에 빠져.” 조연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정말로 아파트 옆에는 도랑이 있었다. "놔!" 조연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주 차가운 태도와 말투로 그에게 소리쳤다. 그는 손을 놓았고 조연아의 손은 자연스럽게 떨어졌다.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고, 어쩐지 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보름 동안 잘 지냈어?” "응.”조연아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지훈 도련님께서 나타나질 않으니 너무 즐겁고 걱정 없이 지냈지.” "그럼 됐어.”그는 안도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별일 없으면 이만 가, 여긴 당신의 신분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니까.”조연아는 그를 쫓아내려 했고, 그러자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그럼 여기는 네 신분이랑은 잘 어울려?” “그건 내 일이야.” 조연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그럼 내가 가든 말든 그것도 내 일이지.” “너……”조연아는 아랫입술을 오므리고 돌
민지훈은 위협적인 눈동자를 반쯤 뜬 채로 짧게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런 뒤 그는 얇은 입술을 살짝 뗀 채로 말했다.“물건들을 옮기세요.” 오민은 어리둥절해하며 잠시 반응하지 못했지만, 바닥에 있는 몇 개의 상자를 보고 순간 깨달았다. 민지훈 도련님은 부하를 시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물건을 옮겨 주려는 거였군!왜 항상 상처받는 사람은 도련님일까? 오민은 마음이 씁쓸했지만 즉시 "예"라고 대답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상자를 옮기기 시작했고, 동시에 만두도 상자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오고 있었으며 조하율도 가벼운 물건을 들며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오민이 헐떡이며 물건을 옮기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시각, 조연아는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여전히 햇빛 아래에 서 있었고, 그의 모습은 올곧고 위엄이 있었으며 눈빛은 깊지만 어두웠다. 차 안에는 에어컨이 켜져 있었다. 분명히 여름이었지만 조연아는 약간 춥게 느껴졌고, 에어컨 온도를 조금 높인 뒤 고개를 숙이고 꽉 잡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동쪽 교외 산수마을……”조연아는 휴대폰을 꺼내 동쪽 교외 산수마을 주소를 검색하며 산수 별장 주소를 검색하려 했지만,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메시지가 왔다. 위치는 동쪽 교외의 산수마을이었고,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내가 갈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조연아는 약간 짜증이 나서 화면을 잠근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오민의 도움으로 만두는 빠르게 상자 여러 개를 트렁크에 넣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만두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아닙니다, 당연히 도와야 하는걸요! 저희는 앞으로 꼭 자주 만나게 될 겁니다.” 곧이어 조하율도 오민에게 감사를 표한 뒤 만두와 함께 차에 탔다. 차 문을 닫은 후 만두는 엔진에 시동을 걸고 차량을 마을 입구를 향해 몰았다..."언니..." “이것 좀 봐, 민지훈 도련님이 아직도 저기에 있어……” 조하율의 말투에는 약간의 동정심이 담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