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다물어! 나는 당신이 이렇게 비현실적인 얘기 하는 거 듣기 싫어!”“하현, 당신 몇 살이야? 당신이 3살짜리 어린애인 줄 알아?”“우리 좀 현실적일 수 없을까?”“당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한걸음씩만 디디면 나는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믿어!”설은아는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하현은 입을 벌렸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 순간 설은아는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설은아는 옷장에서 양복 한 벌을 꺼냈다. “이거 너한테 주려고 샀어. 내일 가족 모임 때 이거 입고 가자.”“내가 할아버지께 부탁해서 다시 기회를 줄게!”“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해. 오늘 같은 일이 생겨서는 안돼. 알았지?”하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이렇게 말을 마쳤다.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그가 하엔 그룹의 회장이라고 했지만 설은아는 믿지 않았다. 남원에 와서 자신이 설씨 집안을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설은아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사실 설은아만 안 믿은 게 아니라 설씨 집안 모두가 믿지 않았다. 하현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밤새도록 말이 없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희정은 손바닥으로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던 하현을 깨웠다. 설재석은 하현을 노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찌질이. 아직도 안 일어나고 뭐해? 오늘 너는 반드시 은아와 이혼장을 받으러 가야 돼!”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버지,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일이에요. 더군다나 저는 이혼하지 않을 거에요.” “너희들의 일? 너 말 다했어?”“하현, 내가 너한테 말하는데 그날은 우리 설씨 가문이 너를 데릴사위로 삼았었지만, 오늘은 너를 설씨 가문에서 내 쫓을 거야!”“너는 정말로 우리 설씨 가문에 기대서 계속 먹고 마실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우리 설씨 가문에게 너 같은 폐물은 필요가 없어!”“넌 자격이 없어!” 설재석은 욕을 퍼붓더니
“어? 쓸모없는 녀석! 네가 우리 설씨 집안의 큰 일을 망쳐놓고도 여전히 얼굴을 들이밀어?”“너 정말 우리가 널 때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오늘 셋째 삼촌이 설씨 어르신 앞에서 사정하지 않았으면 나는 너를 때려 죽였을 거야!”“폐물, 내가 너한테 충고하나 할게!”“……”순간, 한줄기 시선이 하현의 몸 위로 떨어졌다. 설씨 어르신은 오직 냉랭한 얼굴이었을 뿐, 하현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 여기는 그저 남원이었기 때문에 설재석은 많은 인맥들을 가지고 있었고, 왕씨 가문의 일 역시 그가 연락을 하러 간 것이었다. 그래서 설씨 어르신께서 체면을 세워주신 것이다. 만약 여기가 서울이었으면 설씨 어르신의 성격에 벌써 하현은 쓸려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그는 하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설씨 어르신이 지금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설지연네 식구들이었다. 필경 설지연은 곧 왕씨 집안에 시집을 가게 될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는 줄곧 마음에 들어 했던 설민혁네 식구들이 설지연네 식구들의 지위보다 못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설은아네 식구들은 먼저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막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셋째 삼촌! 여기는 남원이지 서울이 아니에요!”“할아버지께서 지금 우리는 남원에서 새로운 귀인이니 가문의 규칙들도 좀 고쳐야 한다고 하셨어요.”“그러니, 여기에 앉으시면 안돼요!” 설민혁이 입을 열며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야?”설재석은 화가 난 얼굴이었다. “이 술집은 내 연줄로 예약한 거야. 지금 내가 앉지도 못하는 거야?”“삼촌 화부터 내지 마시고 새로운 규칙부터 들어보세요.”설민혁은 일어서서 팔짱을 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남원의 새 귀인은 귀인의 모양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오늘 비록 가족 내부 회의이긴 하지만 이따가 왕 도련님도 오시니까 우리가 더 꼼꼼하고 규모 있는 모양새를 갖춰야죠. 우리 설씨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곧 종업원이 와서 작은 테이블을 하나 차려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저와 그릇을 제외하고 차와 야채 두부만 있었다. 몇 명 종업원들 역시 세상 물정에 훤했는데 설재석 일가의 눈빛을 보며 의아해했다. “자! 빨리 앉아요. 서서 망신 당하지 말고요!”설민혁은 웃을 듯 말 듯 입을 열었다. 설재석의 얼굴은 하얗고, 파랗게 질렸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건너와 앉았다. 그들 일가는 어디까지나 설씨 집안 사람이었다. 설재석이 남원에서 인맥이 좀 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다른 설씨 일가들이 한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어젯밤 하현 이 폐물이 설씨 집안의 큰 일을 망쳐놓았으니 말이다. 그들 일가를 쓸어버리지 않은 것 만해도 이미 많이 참아준 셈이다. 이때 하현이 갑자가 설은아의 손목을 잡아 끌면서 돌아보며 말했다.“설민혁,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내가 너에게 하나 묻자. 설씨 집안에 2천억 원을 바쳤으면 어느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거야?”하현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설씨 집안이 지분 51%의 2천억 원을 받은 적이 있다. 이것은 그가 꺼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말하자면 그가 설씨 집안에 공헌한 것은 2천억 원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지금 설씨 집안은 남원에 올 자격도 없었다. 하현이 이 말을 하자 장내는 모두 멍해졌다. 한 사람 한 사람 놀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하하하하……”몇 십 초 후, 온 장내가 떠들썩하게 웃어댔다. 모두들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어르신, 이 모자람을 용서해주세요. 저는 어제 그가 바보짓을 했다고 믿습니다! 하하하!”“2천억? 이 집안은 2억만 꺼내도 나쁘지 않은데!”“셋째 삼촌의 일평생 명예가 맨 마지막에 이 데릴사위 때문에 망가질 줄은 생각도 못했네!”“어르신이 설은아에게 결혼을 재정비 하자고 하셨는데, 그녀가 아직도 거절했다고요? 이 바보 같은 놈 때문에요? 웃겨 죽겠네요!”“하지만 2천억 사위라면 왕씨 집안 사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설씨 어르신도 따져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왕 도련님, 그 큰 인물이 도대체 무슨 내력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왕태민은 신비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 거물급 인사는 우리 왕씨 집안도 관계를 많이 해서야 알게 된 건데 말을 해도 믿지 않으실 거에요!”“증거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그가 하씨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에요!”“3년 전, 하씨 가문을 다시 눈부시게 이끌어 갔던 하씨 후계자!”“하지만, 그는 은퇴한지 3년이 되었어요.”“이번에 강한 세력을 가지고 돌아오다니 우리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어요!”“그 하씨 후계자를 한 번 만나려고 지금 얼마나 많은 거물들이 팔을 걷어 붙이고 열을 올리고 있는지 몰라요.”“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저는 그 하씨 후계자과 같은 대학을 다녔어요. 몇 번 만나 연락처도 남겼고요!”“기회를 잡아서 반드시 하씨 후계자과 만날 약속을 잡을 거에요.”“만약 하씨 후계자가 원한다면 설씨 집안에게 손을 내밀어 지지해줄 거에요. 그러면 설씨 집안 사람들은 아마 일류 가문이 될 거에요.” 왕태민은 여기까지 말하고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씨 가문의 후계자여! 지금 하씨 대문호 최정상의 인물들을 뛰어 넘는 자.그는 이미 한국 최정상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번에 돌아왔을 때 이렇게 크게 진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대단하네요! 왕 도련님이 그런 인물을 아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그 하씨 후계자는 듣기만 해도 완강 하실 거 같아요!”“왕씨 도련님, 기회가 되시면 저희도 꼭 한 번 소개시켜주세요!”이 사람들은 지금 미친 듯이 왕태민을 우러러 보고 있다. 설씨 어르신은 지금 감탄하는 얼굴로 왕태민을 보며 너무나 마음에 들어 했다. 만약 왕태민을 자신의 손녀사위로 삼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설재석 부부는 지금 얼굴색이 복잡해졌다. 그
지금 다른 설씨 집안 사람들도 이러쿵 저러쿵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은아야. 앞으로 이 데릴사위 좀 데리고 나오지 마라!”“너는 망신당하는 게 싫지도 않니! 우리는 망신당하는 거 싫어!”“맞아! 빨리 그를 문 밖으로 쓸어내! 체면 깎이잖아!”“우리 설씨 집안은 지금 남원의 귀하신 몸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멍청한 데릴사위를 알게 되면 이후에 어떻게 사람들과 섞여서 지낼 수 있겠어?”“네가 체면 안 차린다고 우리도 차리지 말아야 되겠어?”“설재석, 너희 집 식구들은 정말 끝까지 썩었구나. 나는 너희 집 식구들에게 정말 실망했다!”설동수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설재석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우리 집안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설재석과 희정 두 사람은 평소에 말솜씨가 좋았지만 오늘은 얼굴색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너무 치욕스러웠다!원래 남원에 온 후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었고, 이전과 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남원에 온 후 모든 것이 수치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설은아는 구석에 앉아 있었다. 여러 가지 빈정거리는 소리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두 줄기의 눈물만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창피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었구나!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이전에 하현에 대해 쌓아 놓은 약간의 호감마저도 전부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녀는 하현이 성과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아 했고, 하현이 못난 놈인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다. 다만 그가 노력하기만 한다면 좋겠다! 남원에 온 이후 그는 착실하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고 처음부터 시작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현은 정말 그녀를 실망 시켰다. 심지어 절망하게 만들었다!비현실적이었다!다른 사람의 총애를 얻으려고 했다!한사코 체면을 세우려고 했다!어릿광대 같았다!이전에 이혼할 생각이 없었던 설은아는 지금 이혼을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녀는 이 사람이 그녀의 남편인
설씨 어르신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왕태민을 쳐다보았다. 다른 설씨 집안 사람들 역시도 하나같이 기대하는 얼굴로 왕태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제 없어요.”왕태민은 바로 두말 없이 대답했으나 사실 살이 아렸다. 또 몇 억이라니! “내가 전화 할게요!”왕태민이 전화를 하러 나가더니 또 두 장의 초대장을 샀다. 설지연은 지금 설은아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은아야, 네가 저녁 만찬 얘기 했었잖아. 내가 너를 만날 수 있을까? 하하하……”설은아의 얼굴은 까매졌다. 설지연은 고의적으로 그녀를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었다. 설지연은 왕씨 집안에 시집갈 여자로 잠시 후 왕태민이 설씨 집안에게 줄 두 장의 초대장안에는 분명 그녀의 몫이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았다. 티타늄 은색 렉서스 승용차가 술집 문 앞에 섰다. 그런 뒤 그 안에 양복 차림의 남자가 나와 안으로 들어왔고, 설씨 집안이 있는 객실로 향했다. “이 사람 하 매니저 아니야?” 이 남자를 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왕태민이 제일 먼저 맞으며 앞으로 나갔다. 하 매니저는 하씨 가문의 백운별원의 총관리자로 말하자면 하인이자, 가신이다. 하지만 문제는 하씨 가문의 지위는 너무 높다는 점이다. 작은 백운별원의 총관리인이라 할지라도 많은 가문들 역시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 거물이었다. 왕태민 같은 일류 가문 사람이라도 하 매니저에게는 체면을 세워주어야 한다. 하 매니저는 이 순간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말했다.“어느 분이 설씨 어르신이신가요? 제가 이번에 온 목적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일 저녁 만찬에 설씨 집안이 참석하시도록 초대장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안에는 10장의 초대장이 있습니다!”초대장을 남긴 후 하 매니저는 군말 없이 발길을 돌려 떠났다.떠나는 순간 그는 식은땀이 흘렀다. 저 사람!저 사람이 진짜 있었어!아무렇게나 서 있을 뿐이었는데도 하 매니저에
설은아는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지금 설지연이 그녀를 대놓고 모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이러면 또 어떤가?왕씨 집안 사람이 너무 대단한걸!역시 남원의 일류 가문이다!왕태민은 아직 후계자가 아니라서 변방의 인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전화 한 통에 하씨 가문의 하 매니저가 직접 초대장을 보내왔다. 왕씨 집안의 인맥이 너무 대단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제주에서 하씨 집안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집안이 왕씨 집안인가?설재석은 창자가 파랗게 질릴 정도로 후회했다. 자기가 어떻게 설은아에게 이런 폐물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던가? 가능한 한 빨리 그들을 이혼시켜야 한다. 그 다음에 이 사위를 호적에 올릴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왕씨 도련님처럼 이렇게 좋은 사위가 있다면 자다가도 웃으면서 깨겠지?앞으로의 삶은 매일 돈을 세면서 살면 되지 않겠는가?뭘 더 할 수 있겠는가?왕태민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 매니저가 어떤 인물인지 몰랐고 그는 아주 잘 알았다. 자기 자신은 고사하고 자신의 큰형 왕정민도 하 매니저가 원하지 않으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분명 누군가 실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자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래야 자신이 더 위풍당당해 질 수 있었다. 이 생각에 미치자 왕태민은 살며시 웃었다.“설씨 어르신 죄송하지만 제 능력이 부족해서 겨우 열 장밖에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수준의 만찬에는 정원이 많지 않습니다.”설씨 어르신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왕태민 도련님 별말씀을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상상을 초월하시네요! 자, 한 잔 받으세요!”그러자 왕태민도 매우 정중하게 말했다.“이왕 이렇게 된 이상 열 장의 초대장을 드렸는데 누가 만찬에 참석할 지 설씨 집안에서 정해보세요.”“네!”설씨 어르신은 초대장 한 묶음을 받았고 그는 바로 미소를 지었다.그를 제외하고 설동수 가족, 설지연 가족 전부 초대장을 받
설민혁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하현 너 네 얼굴 좀 볼 수 없어? 이 초대장은 왕태민 도련님이 부탁해서 받은 게 분명한데 너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왕태민 역시 화를 내며 말했다.“당신 뭐 하는 물건이야? 감히 내 공을 가로채?”설동수는 설재석의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셋째야! 너 네 사위 꼴 좀 봐라! 빨리 데리고 나가!”“아니면 이 사람을 빨리 문 밖으로 쓸어버리던지!”“나중에 이 사람을 데리고 와서 망신 당하지 말고!”“우리 설씨 집안이 너 때문에 체면을 구길 수 없어!” 하현이 막 무슨 말을 하려는데 설은아가 뺨을 한 대 후려쳤다.“나 따라와!!!”설은아는 이미 이 사람 때문에 창피를 당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늘 그녀는 자신이 받은 모욕이 충분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하현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치욕을 안겨 주었고 끊임없이 그녀를 창피하게 했다. 그녀의 심성이 비록 좋다 할지라도 이 순간에는 이런 좋은 마음씨도 다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술집 밖.설은아는 배꽃에 빗방울이 맺힌 듯 울며 말했다. “하현, 제발 부탁이야!”“설씨 집안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내가 어렵게 다져놓은 기업이 이젠 없어졌어!”“나는 남원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다시 새롭게!”“나 좀 살려줘. 나에게 살 길을 열어줘. 더 이상 나 좀 창피하게 하지 마!”“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나는 정말 버틸 수가 없어. 버틸 수가 없다고……”설은아는 울면서 억울한 마음에 불쌍한 여자아이처럼 길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하현의 마음은 비할 데 없이 아팠다.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의 눈물 자국을 닦으며 말했다. “은아야. 너 내일 만찬에 가고 싶어?”설은아는 흐느끼며 말했다. “누가 안 가고 싶겠어? 설씨 집안을 대표해서 가는 건데. 대표해서 가면 나중에 설씨 집안에서 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거야.”“설씨 집안이 그 밥통들을 건네 줄 수 있을까?”“게다
”여수혁?”하현은 여음채를 쳐다보며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그가 이 병원 대주주인 동시에 당신의 뒷배라고?”“그래! 알고 나니 이제야 겁이 나?”“무서운 줄 알면 이제 무릎 꿇고 내 신발 밑창을 핥아!”“그리고 다리를 부러뜨리고 이십억을 배상해! 그러면 여수혁도 당신한테 살길을 열어줄지도 모르지!”“그렇지 않으면 당신 오늘 재수 없을 줄 알아!”여음채는 경멸하는 기색을 한껏 드러내었다.하현이 남양 무맹과 여수혁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전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것이 분명했다.강옥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현에게 말했다.“하현, 여수혁은 남양 무맹주가 총애하는 제자야.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페낭 무맹의 부문주라서 건드리기가 쉽지 않아.”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어릿광대일 뿐이야.”“뭐? 어릿광대?”하현의 말에 여음채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그런 용기를 줬는지 모르겠군! 흥!”“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이 사람은 페낭 무맹의 부맹주 아들이야!”“이 사람은 페낭 무맹 장로가 아주 아끼는 제자라구!”“게다가 남양 무맹이 페낭 무맹에 파견한 제자라고!”“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딜 가나 거칠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뿐만 아니라 실력도 비할 데 없어!”화려한 옷차림의 남녀 예닐곱 명이 걸어와 소리치며 하현을 향해 멸시하는 눈빛을 보이며 비아냥거렸다.“야, 너 오늘 큰일 났어! 아주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우리가 당신 목숨뿐만 아니라 가죽까지 싹 벗겨버릴 거거든! 하하하!”이 사람들은 하현이 무슨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원하는 대로 칼질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험한 말을 마구 내뱉었다.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은 더욱 경멸하는 눈초리로 하현을 노려보았다.하현 같은 외지인이 감히 그들 같은 거물들한테 입을 놀리다니 정말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망나니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하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 광경을 보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외지인 관광객 주제에 너무 오만하고 포악하지 않는가?진 반장이 이미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려는데 여전히 권세를 믿고 남을 괴롭히려고 하다니, 이건 지나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진 반장은 얼굴을 가리고 일어나 하현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뭔지 알 길이 없어 진 반장은 순간 분노했지만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젊은이, 당신 너무 심한 거 아니야?”“퍽!”하현은 손바닥을 휘둘러 또다시 뺨을 때리며 냉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대단하게 나한테 큰소리쳤다는 건 잘못을 하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도리도 잘 안다는 뜻 아니셨나?”“이렇게 간단한 이치도 몰라?”진 반장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생각 같아서는 하현을 죽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는 소리 없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미안해! 잘못했어!”그는 하현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구봉이 전화를 건 정종화 총경이 두려운 것이 분명했다.감히 이런 상황에서 어찌 그가 하현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겠는가?상대방의 사과를 들은 후에야 하현은 앞으로 나와 그의 오른쪽 얼굴을 툭툭 건드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진 반장은 그의 무리들을 데리고 쏜살같이 꽁무니를 뺐다.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들은 하현이 진 반장을 내쫓을 만큼 강력한 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진 반장 일행이 꽁무니를 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진 반장의 얼굴까지 때렸다.“내가 당신을 얕잡아 본 것 같군. 당신이 이렇게 큰 뒷배를 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진 반장이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여음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냉소를 흘렸다.“그렇지만 똑똑히 들어. 당신 뒤에 얼마나 큰 거물이 있든 간에!”“페낭 병원의 뒷배가 훨씬 강할 거야!”“날 건드려?! 흥! 두고 봐! 당신은 죽
선두에 선 남자를 보자 여음채는 안색이 환해졌다.그리고 나서 얼른 다정하게 남자의 팔짱을 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진 반장님, 마침 잘 오셨어요. 바로 저 자식이에요. 저 자식은 우리가 의료 윤리를 중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때린다고 호도하고 있어요.”“게다가 내 아랫배까지 걷어찼다구요!”“저놈을 반드시 감옥에 가둬 주세요. 그 안에서 제대로 반성할 수 있게요.”여음채는 하현을 가리키며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부일민 일행도 모두 큰소리로 맞장구를 치며 하현이 억지를 부린다고 한마디씩 보탰다.“뭐? 감히 병원에서 원장님을 때려요?”“대낮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법도 뭣도 없답니까?”진 형사는 하현의 얼굴을 주시했고 곧바로 그가 남양인이 아니란 걸 눈치챘다.그러자 얼굴이 싸늘하게 바뀌며 비아냥거렸다.“이봐, 어서 저놈을 데려가! 모질게 심문해! 지독하게 조사해!”“감히 반항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법으로 다스려!”하현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진 형사를 쳐다보았다.“당신은 어쨌든 형사반 반장이면 경찰서를 대표해서 일을 해야죠. 무슨 일이 생겼으면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일을 어떻게 하든 당신 같은 사람이 날 가르칠 건 아니지!”“당신이 먼저 사람을 치고 법을 어겼어. 그러니 법 집행자로서 당신을 연행하는 건 당연한 거야!”“물론 당신도 저항하는 길을 택할 수 있어!”“하지만 저항한 결과는 내가 당신을 한 방에 죽이는 거야!”진 반장은 언성을 높였고 눈을 부릅뜨고 하현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려고 손을 내밀었다.하현은 손을 들어 진 반장의 오른손을 막은 뒤 담담하게 하구봉을 쳐다보며 말했다.“전화 걸어.”하구봉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곧바로 하현이 말하는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건너편에 냉랭한 목소리가 전해오자 하구봉은 핸드폰을 진 반장에게 건네주었다.“당신의 직속 상사가 전화를 받아
하현은 여음채의 말을 듣고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페낭은 정말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곳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이렇게 공공연하게 정경유착이 만연할 줄이야!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여음채는 순간 하현이 겁을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자 여음채는 다시 의기양양한 기운을 내뿜으며 이를 악물고 하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왜? 무서워?”“이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어?”“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봐줄 수도 있어. 아직 늦지 않았다구.”“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기다리는 건 억세게 불행한 일들뿐일 거야!”말을 하는 동안 여음채는 부일민에게 손짓을 하며 다른 의료진과 경호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하현 일행을 겹겹이 에워쌌다.기세등등하게 하현 일행을 노려보고 있는 그들 무리는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사나운 모습이었다.이 광경을 본 여음채는 더욱 득의만만해져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이봐, 이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 어서 사과하고 내 신발 밑창을 개처럼 깨끗이 핥아!”“그렇지 않으면 당장 오늘 밤부터 감옥에서 썩어야 할 거야!”강옥연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하구봉은 콧방귀를 뀌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다.주위의 구경꾼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현에게 다가올 불운을 생각하며 탄식했다.아무리 거세게 싸운다고 해도 경찰관들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설마 하현 일행은 법이라도 어기려는 건가?하현은 냉담한 얼굴로 여음채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내가 감옥에 갈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의료 윤리를 중시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어떻게 이익만 챙기고 인명을 돌보지 않는 거야?”“멀쩡한 병원이 사기꾼 소굴이 되어 관광객을 속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군.”“당신들 오늘 잘 만났어. 당신들은 이제 좋은 날 끝났어.”“이 병원, 망하게 해 줄게.”하현의 말을 들은 부일민과 예쁘장한 간호사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그녀들은 허
잠시 후 넋이 나간 듯 멍하던 여음채는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일어나 하현을 노려보며 말했다.“개자식! 감히 날 걷어차?”“내 엄마가 누군지 알아?”“당신은 누구야? 의료 윤리를 저버린 원장 아니야?”하현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때린 건 당신이야.”“뭐?”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현의 목소리와 행동에 여음채는 화가 치밀어 올라 하현을 가리키며 호통쳤다.“모두 저놈을 죽여!”“일이 터지면 내가 다 수습할 거야!”그녀의 말에 수십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사납게 웃으며 하현을 에워쌌다.강옥연은 이런 막무가내 인사를 본 적이 없었다.병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라니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강옥연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조심해!”그녀의 말을 들은 부일민은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우리 원장님한테 미움을 산 사람은 살아남지 못해!”예쁘장한 간호사들은 앳된 얼굴로 눈을 흘기며 거들었다.“흥! 조심해 봤자 소용없어! 죽어야 해!”주위를 둘러보던 환자와 의료진들도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하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여음채의 인품이 별로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영향력과 인맥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이 페낭 병원에서 누가 감히 그녀한테 대들 수 있겠는가?아무 물정 모르는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하필 여음채를 건드리다니!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이때 선두에 선 경호원은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하현에게 다가왔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까딱 꺾으며 광분한 사냥개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이놈아! 감히 여기서 소란을 피워? 여기가 어디라고? 눈을 어디다 둔 거야?”“퍽!”“앗!”경호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현은 듣기 귀찮다는 듯이 손바닥을 휘둘러 그를 내동댕이쳤다.맨 앞에 있던 경호원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기절하고 말았다.기절했어?!이 광경을 보고 놀
앞뒤 사리를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여음채의 모습에 강옥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뭐가 모욕이에요?”“당신들은 환자를 구하고 비용을 청구해야 하는데 환자를 구하기는커녕 무슨 스타가 나타났다고 부리나케 쫓아다니지 않았냐구요?!”“응급실에 30분씩이나 방치해 놓고 이제 와서 보증금은 돌려주지 못하겠다니요?”“당신들 같은 병원이 무슨 의료 윤리 의식이 있겠어요?”“병원이 아니라 사기 소굴이에요!”강옥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식약청에 고소할 거예요!”하현은 침착한 눈빛으로 여음채의 표정을 살피다가 하구봉에게 원가령의 안전을 보호하라는 손짓을 했다.아마도 강옥연의 강경함에 여음채는 일을 처리하기가 좀 곤란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여음채는 눈빛이 서늘해지더니 달려오는 수십 명의 경비원들에게 하현 일행을 포위하라고 손짓하며 지시했다.이어 그녀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긴 다리를 뻗으며 다가와 말했다.“우리 페낭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고 잘못을 하면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해.”“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해. 그리고 내 신발 밑창을 깨끗이 핥아. 그뿐만 아니라 우리 부일민 의사에게 십억을 배상해. 그러면 이 일은 이대로 덮어 두겠어!”“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마.”“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칠흑 같은 남양 감옥에 갇히게 될 거야!”“1년 반 동안 안에서 통곡만 하다가 세월을 보내게 될 거라고!”분명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여음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주 능수능란했다.어떤 외국인이라도 감히 페낭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모두 이런 꼴을 당했을 것이다.부일민 일행은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린 채 고소하다는 듯 히죽거렸다.큰소리 뻥뻥 치더니 하현이 아주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페낭 거물도 아닌데 감히 페낭 병원에 와서 행패를 부려?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꺼운지 모르는 거지!강옥연은 한기를 가득 품은 목소리로 소리쳤다.“당신들은 아주 법도 뭣도
응급실에 있던 원가령은 아직도 술에 취한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원래 같았으면 벌써 위를 씻고 상처를 치료해야 했었지만 의료진은 그녀를 병상에 눕혀만 놓고 방치한 것이다.하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뻗어 원가령의 위를 몇 번 누른 다음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하구봉에게 쓰레기통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원가령은 술을 모두 토한 뒤에야 비로소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이 되었다.강옥연에게 응급실의 소독약으로 간단하게 원가령의 상처 부위만 소독한 뒤 휠체어를 구해 원가령을 실었다.그리고 하현 일행은 떠날 준비를 했다.이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남양 말로 뭔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분명 경비원들이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하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구봉에게 눈빛을 보냈고 하구봉은 지체 없이 한 걸음 내디디며 한 발로 세게 문을 걷어찼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응급실 문이 벌컥 열렸다.예닐곱 명의 건장한 경비원이 뛰어들려다가 튕겨나가는 부일민과 부딪혀 난장판이 되었다.비슷한 시각 복도 끝 쪽에서는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어딘가 낯이 익어 보이는 여자가 맨 앞에 서 있었다.그녀는 몸매가 유려했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으며 걸어왔다.앳된 간호사 몇 명은 이 여자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이 중년 여자는 페낭 병원에서 제일 영향력이 센 원장, 여음채였기 때문이다.여음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우리 병원에서 소란을 피워? 눈도 없어?”“원장님, 외지 사람들이 와서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우리가 의술의 도리를 저버렸다고 하면서 사람을 때리고 응급실 문을 발로 차고 있어요.”“우리는 모두 들어가서 환자를 치료하려고 하는데 환자를 마음대로 데려가려고 합니다!”“이건 아주 우릴 무시하는 거죠!”넘어져 있던 부일민은 여음채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하현 일행의 행동을 가리키며 고자질
부일민은 더욱 냉소적으로 말했다.“하지만 우리 앞에서 귀에 거슬리는 그런 말은 해도 되지만 이것만은 알고 가세요. 한번 지불한 돈은 환불되지 않아요.”“사람이야 얼마든 데려가도 되지만 보증금 천만 원은 돌려주지 않습니다!”“그럼 어서 물러가세요!”“여기서 방해하지 말구요!”의사의 오만방자한 말에 강옥연은 얼굴이 싸늘해졌다.“살리기는커녕 환불도 안 된다구요?!”“내가 당신들 고소할 거예요!”“고소?!”부일민은 여간호사 몇 명과 눈을 마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떤 사람은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강옥연이 고소라는 말을 꺼내도 그녀들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게 분명했다.어차피 페낭 병원은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소? 그래 하세요!”부일민은 눈썹을 치켜세운 뒤 벽에 붙은 전화번호를 가리켰다.“국민신문고, 식약처, 경찰서, 등등, 전화번호들이 여기 다 있으니까!”“아무데나 전화해서 아무나 불러 보세요!”“사람을 불러서 날 고소해 보세요! 그럼 내가 당신들을 할아버지라고 부를게요!”“대하 촌놈들이 감히 우리 남양 땅에 와서 거드름을 피우며 위세를 부리고 있어?! 흥!”“당신들이 전화를 해 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부일민은 한껏 코웃음을 쳤다.그들은 이미 관광객들을 등쳐먹는 데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관광객이 신고해도 결국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당신들 제정신이에요!”강옥연은 눈을 부라렸다.이런 몰상식한 사람들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이때 하현이 앞으로 나와 강옥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강옥연, 어쨌든 당신은 용문 사람인데 어떻게 기본적인 도리도 몰라?”“뭐라고?”강옥연이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도무지 하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어떤 사람들은 말로 하면 못 알아들어. 그냥 얼굴을 두들겨 맞아야 알아듣지.”
황천화 일행을 해결하고 하현은 강옥연에게 전화를 한 뒤 택시를 타고 페낭 병원으로 향했다.페낭 병원은 사립 병원으로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인테리어가 호화로웠다.거리마다 홍보 간판이 걸려 있는 병원다웠다.다만 의술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했고 보감 그룹 병원에 속하며 페낭 현지에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보통은 관광객을 속이고 사기를 쳐서 이익을 남기는 병원이었다.그리고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사기를 당해도 신고할 길이 없어 결국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하현은 오는 길에 이런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강옥연도 현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병원에 가게 된 것을 그녀의 잘못만이라고 탓할 수가 없었다.하현과 하구봉은 곧바로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 복도에서 강옥연을 찾았다.“하현.”하현이 나타난 것을 보고 강옥연은 급히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응급실에 들어가긴 했지만...”강옥연이 말끝을 흐렸다.하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응급실 문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대여섯 명의 환자가 병상에 누워 있었고 그중 두세 명은 외상을 입고 낮은 소리로 신음하고 있었다.그러나 응급실 안에는 의료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내가 원가령을 데리고 왔을 때 의료진은 어떤 유명 연예인이 다쳐서 나간다고 했어.”“이곳의 한 인플루언서 스타가 영화를 찍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급하게 응급실 의료진이 갔어!”“곧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보증금 천만 원을 먼저 내라고 했어.”“그래서 보증금을 내고 30분째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직 아무도 안 와...”강옥연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하현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보감 그룹 산하 병원의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그가 다른 의료진을 찾아보려고 하자 강옥연이 그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하현, 내가 가서 재촉해 볼게.”강옥연은 혼자서 달려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