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산 일행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현에게 큰소리로 호통치던 그였다.그러나 지금은 이런 비굴한 모양새가 되었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방금 그들의 실세한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공포에 질린 거물 한 명이 세계무맹의 4대 상임이사 중 3 개의 상임이사가 이 조건을 수락했으니 우리 같은 소국의 무맹이 뭘 할 수 있겠냐며 소리쳤다.원청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구평도 일행도 아연실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일이 이렇게까지 발전했기 때문에 그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그때 광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반대! 반대! 난 대하무맹이 세계무맹에 가입하는 걸 반대해!”“우리 스스로 우리를 잘 알고 있어. 우리 대하무맹은 아직 그 정도 자격이 없어!”“하현, 당신이 이렇게 몰아붙이는 건 대하무맹을 나락으로 몰아넣고 극동지역과 남양지역의 다른 무맹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꼴이 될 거야!”“대하무맹을 죽일 셈이야?”“그래서 난 절대 동의 못 해!”말을 하는 동안 조한철은 더욱 악랄한 표정으로 브라흐마 아티와 미야모토 잇신을 노려보았다.이 두 사람까지 나서서 반대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조한철도 자신이 제시한 조건과 이유들이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할 수 없었다.그러나 이때 브라흐마 아티와 미야모토 잇신은 조한철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머뭇거리기만 했다.“조 세자, 당신은 혼혈인인데 언제 이렇게 대하무맹을 대표한다고 반대 의사를 표명할 수 있어?”하현이 냉담한 표정으로 조한철을 노려보며 말했다.“당신 그럴 자격 있어?”“개자식! 난 도저히 동의할 수 없어!”조한철이 하현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높였다.“하현, 당신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비열한 짓을 하는 거야? 4대 상임이사 중 3개국이 이 일에 동의했다니!”“얼마나 많은 국익을 그들에게 팔아넘겼길래 그들이 동의를 하냔 말이야?!”“우리 대하가 당신의 이런 얼토당토않는 일을 벌이는 데
다른 사람들도 이 상황을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이번 사건의 주동자로 의심되는 조한철이 원청산에게 뺨을 맞을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개자식 감히 날 건드려?!”조한철은 원청산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지만 뻗어 올린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원청산 같은 놈은 언제든지 죽이려면 죽일 수 있었다.그러나 원청산의 배후에 있는 남양무맹은 조한철이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왜? 우리가 당신을 세자라고 불러 주니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나까지 건드리려고?”원청산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조한철을 밀어젖혔다.“쓰레기 같은 놈! 소리만 지르는 쓰레기 같은 놈!”“잘 들어. 아무리 힘들더라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서더라도 우리 남양무맹과 극동무맹은 대하무맹의 편에 단단히 설 거야!”“소위 회원국인 무맹이 일찌감치 서명해 대하무맹을 5대 상임이사로 추대했어!”원청산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조한철을 무시한 채 만진해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맹주 어르신, 먼저 축하의 인사 올립니다.”“앞으로 우리 남양무맹은 대하무맹을 누구보다 우선시 여기겠습니다!”강진남도 얼른 앞으로 나와 환한 얼굴로 말했다.“어르신,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극동지역에서 우리는 대하의 의견을 경청할 것입니다!”“두 분 대표께 감사드립니다!”만진해는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얼떨떨했지만 껄껄 웃으며 감사의 인사에 화답했다.“우리 대하무맹이 5대 상임이사가 될 수 있어서 아주 영광입니다. 앞으로 우리 대하무맹은 극동지역과 남양지역의 이익을 함께 고려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탁!”조한철은 이 광경을 지켜보다 손바닥을 책상에 탁 쳤다.하현은 조한철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이 탁자는 황화목으로 만든 거야. 일억이 넘는 탁자라고.”“하현, 당신 앞으로 두고 봐...”조한철은 비틀거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수표에 서명한 뒤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로부터 3일 동안 하현은 만진해와 함께 대하무맹의 일상 업무를 처리했다.극동무맹과 남양무맹의 공동 천거와 함께 대하무맹은 세계무맹 5대 상임이사국이 되었다.대하무맹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완벽한 결말은 없었다.또한 대하 국경에서 벌어졌던 약탈은 하루아침에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손해 배상도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이 일을 처리한 후 하현은 진주희 일행에게 무성에 남아 설은아와 힘을 합쳐 무성 황금회사의 업무를 처리하도록 당부했다.국술당의 일은 사청인과 남궁나연에게 일임했다.인맥이 두터운 사청인과 실력이 뛰어난 남궁나연이 함께 일을 하게 되니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이다.게다가 배후에서 만 씨 가문이 비호해 주고 있으니 국술당의 발전도 점차 궤도에 오를 것이다.모든 일을 차근차근 처리한 후 하현은 진주희에게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달라고 한 뒤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며칠 전에 양제명이 브라흐마 바찬에게 부상을 입었는데 아직 회복이 되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양제명이 중상을 입은 것은 어느 정도 하현과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하현은 늘 마음에 걸렸다.그래서 오늘 일련의 일들을 다 처리하고 가뿐한 마음이 되자 그는 마음의 짐을 털어내려고 제일 먼저 남양으로 가는 향하게 된 것이다.하현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설은아에게서 전화가 몰려왔다. 잠시 망설이던 하현이 전화를 받았고 맞은편에서 설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방금 당신 직원들이 말하길 남양의 페낭으로 간다던데, 사실이야?”하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응. 며칠만 다녀올게.”“무슨 일 있어?”“아는 어르신 한 분이 나 때문에 조금 다치셨어.”“도리상 안 가 볼 수가 없어서.”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설은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우리 둘 사이에 할 얘기가 있다는 거 기억하지?”하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무성의 일을 다 처리하고 나면 잠시 여길 떠날 거야. 금정에 좀 다녀오려고.”
양유훤과 통화를 마친 후 하현은 하수진과 최영하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그가 이번에 페낭에 가는 주된 목적이 사람을 구하는 것이고 양유훤도 틀림없이 제 역할을 잘 하고 있겠지만 페낭은 해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무슨 변고가 생기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둬야 한다.하수진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남양쪽 사람들이 대하에서 항성과 도성에 일정한 구역을 이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나 남원에서 사람을 차출하는 것보다 항성과 도성에서 사람을 차출하는 것이 훨씬 편리했기 때문이다.하수진과 통화를 마친 후 하현은 귀빈 통로를 이용해 비행기에 올랐다.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시간 후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기를 기다렸다.몇 시간 후 하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비행기 안에는 이미 남태평양의 따뜻하고 습한 바람이 느껴지는 듯했다.다음 날 아침 9시가 넘어 비행기는 페낭 상공에 진입하며 슬슬 착륙 준비를 했고 승객들은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하현은 며칠 동안 못 본 양유훤을 만나려면 우선 어느 정도 예의는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그는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그때 무심코 코끝에서 남양인 체취가 느껴졌다.스쳐 지나가는 누군가가 하현의 짐을 슬쩍 만진 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쓱 지나가는 것이었다.“잠깐만요.”하현은 상대방이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불러 세웠다.“내 물건 돌려줘요!”비록 남양 청년의 손이 아주 빨랐지만 하현은 자신의 트렁크 아래 둔 지갑을 슬쩍하는 청년의 손놀림을 놓치지 않았다. 요즘은 모바일 결제가 대세지만 페낭은 해외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아직 현금 사용에 익숙한 곳이었다.그래서 하현은 미리 지갑에 현금을 두둑이 준비했었다.그런데 비행기가 착륙도 하기 전에 누군가가 자신의 지갑에 손을 댈 줄은 몰랐다.“뭐 하는 겁니까?”남양 청년은 겉으로는 다부지고 강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심약한 사람이었다.그는 하현의 손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아!”비명소리와 함께 남양 도둑은 몸을 날리며 기내 가장자리에 그대로 부딪혀 얼굴을 감싸쥔 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이 광경을 보고 현장에 있던 구경꾼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대하 사람이 감히 남양 땅에서 남양인을 때리다니?!이것이야말로 무법천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이봐, 당신 우리 남양에 여행 온 거지?”“이국땅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어떻게 된다는 거 몰라?”“대하인들이 우리 남양땅에 와서 여행하려고 하거든 깍듯하게 행동하고 출입국 직원들한테 팁도 줘 가면서 굽신거려야지 어디 우리 남양인을 괴롭히고 있어?”“당신이 이렇게 하는 건 얼핏 보면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하인 모두한테 피해를 주는 거야!”“우리 남양국에서 이렇게 함부로 날뛰고 사람을 때리는 건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법을 위반하는 거야, 알아?”“지금 당장 사과해! 어서!”양복 차림의 남양 청년 몇 명이 앞으로 나와 하현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노발대발했다.그리고 아름다운 남양 여인들이 얼른 남양 도둑을 부축하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동시에 이 여자들의 눈에는 하현을 향한 노여움이 가득 차 있었다.어떻게 대하 사람이 고귀한 남양인을 감히 때릴 수가 있는가?설마 요즘 대하 사람들이 남양국에 오면 모두 멸시를 당한다는 걸 몰라서 이러는 건가?사람을 때리기까지 하다니!아마도 더 이상 살기 싫은 게 분명해!벌레 보듯 노려보는 사람들의 매서운 시선 속에 하현이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이 사람은 내 지갑을 훔쳤어. 그래서 한 대 때렸어. 뭐 문제 있어?”“우리는 이 남자가 당신 지갑을 훔치는 건 못 봤지만 당신이 이 사람 얼굴을 때리는 건 똑똑히 봤어! 당신은 법도 몰라?!”“우리 남양이 얼마나 부유한 나라인지 알아? 당신들 대하의 부자란 부자는 죄다 우리 남양에 휴가를 즐기러 오는데.”“어떻게 우리나라에 도둑이 있을 수 있어?! 응?”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마디씩 거들었다.“거참, 대하 사
”도둑한테 사과하라고? 농담하는 거야?”하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웃어?!”군중 속에서 화장을 곱게 한 여자가 달려나왔다.그녀는 하현을 노려보며 얼굴 가득 성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개자식! 함부로 사람을 때렸을 뿐만 아니라 뭐? 지금 우리 남양인을 무시하는 거야?”“이 일, 제대로 해명하고 사과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곤경에 처할 테니 각오해!”“해명?”하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당신들이 뭔데 나한테 해명하라고 하는 거야?”“당신이 당신 지갑을 우리 고귀한 남양인한테 순순히 바치려 하지 않고 사람을 때리고 말로 모욕했기 때문에 이제 아주 괴로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아리따운 여자가 떵떵거리며 입을 열었고 한 걸음 걸어 나와며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였다.“사과해! 얼른 무릎 꿇고 사과해!”하현은 거칠고 억센 남양 여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만약 내가 거절한다면?”“거절?”“거절하면 입국을 할 수 없게 될 거야. 공항 경찰서에 구류되어 3박 4일을 옴짝달싹도 못한 채 지내야 할 거고.”“우리 남양인에게 미움을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똑똑히 알게 될 거야!”남양 여자는 표독한 눈빛으로 하현을 깔보며 말했다.그 모습이 마치 한껏 날개를 펼친 공작새의 모습 같았다.“당신이 번지르르하게 차려 입고 일등석에 앉았다고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나 본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야.”“셋을 셀 테니까 그때까지 무릎을 꿇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 얼굴을 날려줄 거야!”“하나! 둘! 셋!”셋을 셀 때까지도 하현이 아무런 미동이 없자 여자는 화가 나서 달려들어 손바닥을 힘껏 들어 올렸다.“퍽!”찰진 소리가 울렸다.팔짱을 끼고 덤덤히 서 있던 하현이 여자를 향해 손바닥을 날린 것이다.“개자식! 사람을 또 때리다니!”몇몇 남양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하현을 혼쭐내려고 달려들었다.“퍽퍽퍽퍽!
30분 후 비행기는 페낭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하현 일행은 일등석에 앉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비행기에서 내렸고 동시에 특별 셔틀버스가 마중 나와 있었다.하현에게 뺨을 맞은 몇몇 남양인들은 먼저 차에 탔고 그 남양 도둑은 핸드폰을 꺼내 하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뒤 음흉한 미소를 띠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10분 후 셔틀버스가 터미널 밖 출입국 심사대에 도착했다.“선생님, 거기 서세요!”수백 명의 승객이 일일이 출입국 심사대에서 검사를 마치고 별다른 문제없이 모두 통과했다.그런데 하현의 차례가 되었을 때 갑자기 제복을 입은 여직원이 나타나 하현을 가로막았다.그녀의 눈에 의심하는 눈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그녀는 하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먼발치에서 남양 도둑은 흡족한 듯 냉소를 짓고 있었다.국제항공법에 따라 비행기에서 일어난 일은 남양 측에서 하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들에게 하현을 혼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하현은 곧 몇몇 공항의 보안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심층 검사를 위해 격리 구역으로 갔다.아무런 흔들림 없는 하현의 표정을 보고 많은 남양 승객들은 경멸하는 눈빛을 보냈고 일부는 손가락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지어 보였다.그들은 하현이 비행기에서 일으킨 행동 때문에 그곳에 끌려가서 샅샅이 검사를 받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기 나라도 아닌 곳에서 신중하게 행동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리낌 없이 주먹을 날리다니, 저런 꼴을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핸드폰 잠금장치를 푸세요. 안에 수상한 내용이 없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몇 명의 보안요원들이 하현의 짐을 마구잡이로 뒤지면서 몸수색을 시작했고 동시에 하현에게 핸드폰 잠금장치를 풀라고 종용했다.하현은 눈앞에 있는 여직원이 왠지 아까 그 남양 도둑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자 얼굴 가득 흥미로운 기색을 떠올렸다.“선생님, 핸드폰 잠금장치를 어서 풀어주세요. 그래야 우리가 검사를 할 수 있습니
또 다른 여자가 냉소를 흘리며 끼어들었다.“당신이 아무개 그룹의 자식이든 말든.”“여기선 그런 신분 나부랭이 아무 소용없습니다!”“좋은 마음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요. 최대한 우리 일에 협조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잠금장치 비밀번호 말씀하시고 태도를 똑바로 하세요.”“혹시나 금지된 자료를 가지고 왔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공항 경찰서에서 당신을 48시간 동안 가두고 본국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어요!”“48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여자의 말을 들은 다른 직원들은 하나같이 비웃으며 하현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위협했을지 안 봐도 훤했다.아무리 능숙한 척해도 그들 앞에서는 결국 사나운 호랑이도 온순하게 머리를 납작 엎드려야 했을 것이다.심지어 소지하고 있는 현금, 시계, 보석류 등을 모두 기꺼이 ‘바쳐야'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바로 공항 경찰서로 넘겨버리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지금 그들은 하현의 트렁크에서 그다지 가치 있는 물건을 발견하지 못한 것임이 틀림없다.만약 발견했다면 아마 벌써 하현을 보냈을 것이다.“자, 당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 같으니 내가 당신들한테 마음껏 기를 펼 수 있는 기회를 드리죠.”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 핸드폰 잠시 줘 보세요. 전화 좀 할 데가 있어서요.”“오우! 전화해서 누구한테 일러바치려구요?”“아주 대단하군요! 흥!”이초연이 코웃음을 쳤다.“연경의 어느 대단한 분에게라도 전화하려구요?”“잘 들어요. 어떤 거물에게 전화를 한다고 해도 소용없어요!”이 말에 보안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비아냥거렸다.지나가던 승객들도 어느덧 구경꾼처럼 이 광경을 보고 아주 쌤통이라는 듯 비아냥거리며 수군거렸다.그들이 보기에 하현은 정말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이곳에서 감히 행패를 부
이의진도 눈살을 찌푸리며 거들었다.“하현, 내 말 잘 들어! 지금 당장 사과해!”“그리고 무릎 꿇어!”“그렇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벽돌 나를 생각은 하지도 마!”“당신은 그냥 굶어 죽어!”하현은 이 씨 남매가 하는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오만방자한 사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3분, 고명원에게 어서 와서 차를 따르라고 해.”“나 하현이 말했다고 전해.”“어서 어서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을 넘길 시엔 차를 따르는 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이영산을 비롯한 이 씨 가족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얼굴빛이 새까맣게 변했다.하현이 이렇게 고명원을 도발하는 것은 그들을 불구덩이로 집어넣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이놈이 이 씨 가족들을 데리고 같이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야! 당신이 뭔데? 감히 고 사장님을 오라 마라, 차를 따르라 마라 하는 거야?”장발의 사내는 냉랭한 눈빛으로 말했다.“사는 게 지겨워?”장발의 사내는 여차하면 하현을 밟아 죽일 듯 눈을 부라렸다.그때 온몸에 거즈를 두른 남자가 뒤에서 들어왔다.알고 보니 소항 회관에서 하현과 충돌한 그 남자였다.남자는 하현의 얼굴을 똑똑히 본 순간 두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 서린 눈빛으로 온몸을 덜덜 떨었다.그는 장발의 사내에게 얼른 귓속말로 속삭였다.소항 회관에서 그는 하현에게 단번에 걷어차였다.고성양의 손발은 부러졌다.엄도훈은 하현 앞에서 나라님 모시듯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이로 미루어 보아 하현의 신분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장발의 사내는 남자의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쏜살같이 그의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하현! 당신은 이제 죽었어!”이영산은 하현을 가리키며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의 최후를 한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따가 일이 생기면 당신 혼자 다 책임져! 절대 우리 끌어들이지 마!”이 씨 가족의 친척들도 모두 사나운 눈초리로 하현을 노려보며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
장리나는 이 말을 듣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하현, 얼른 형님께 감사하다고 해야지!”“형님이 아니었으면 어디 가서 그렇게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겠어?”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러다 혓바닥 깨물까 봐 겁도 안 나?”“하 씨! 당신 나한테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신 정말...”장리나는 하현에게 조롱이 가득 담긴 말을 퍼부으려고 했다.그런데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발로 문을 차고 들어왔다.차를 마시고 있던 하현은 들고 있던 찻잔을 든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곧이어 러닝셔츠를 입은 남자 몇 명이 들이닥쳤다.그들 앞에 서서 담배를 물고 있는 긴 머리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씨 가족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모두 꺼져! 이 룸은 우리가 접수한다!”이영산은 오늘 아침 마침내 인생의 절정을 맞이했는데 어떻게 이런 꼴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술기운을 내뿜으며 테이블을 세게 쳤다.“무슨 소리야? 우리 아직 다 못 먹었다구!”“우리 장청 캐피털 고 사장님이 여기서 밥을 먹을 건데 당신들 감히 이런 식으로 굴 거야?”시가를 물고 있던 남자는 무심한 듯 이영산을 쳐다보았다.장청 캐피털 고 사장님?고명원?고명원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영산은 술이 확 깨는 듯했다.방금까지의 원망과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무례하다고 느끼던 이 씨 가족들도 장청 캐피털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 겁을 먹었다.고명원은 어쨌든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게 어떻게...”이영산은 말할 수 없이 난감한 표정이었다.그는 얼굴을 돌려 주변 친척들을 몇 번이나 쳐다본 뒤 멋쩍은 목소리로 말했다.“저기, 거의 다들 드셨죠?”“고 사장님이 이렇게 내 사업을 챙겨주시고 수백억짜리 프로젝트도 맡겨주셨는데 이 룸을 원하셨다니 드려야죠!”“다
설은아는 안색이 약간 변하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하현에게 제지당했다.그가 오늘 여기 온 것은 이영산이 도대체 어떻게 기고만장한 허풍을 떠는지 보기 위해서였다.이제 막 좋은 볼거리가 시작되었는데 못하게 막아서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이영산의 부모도 소리를 듣고 와서 눈동자에 살벌한 눈빛을 떠올린 채 주시하고 있었다.데릴사위인 주제에 우리 아들의 경사를 축하하는 자리에 와서 재를 뿌리겠다는 것인가?!하현이 아니었으면 자신의 아들에게 아내가 하나 더 생겨 설 씨 가문의 모든 자산을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아이고, 이게 누구야? 바로 그 전설의 데릴사위 아니야?!”“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어쩜 저렇게 머리가 안 돌아갈까?!”“머리가 좋았으면 노점에서 사 온 무 따위를 장모에게 선물했을까?! 흥!”“게다가 우리 영산이가 선물한 그림을 감히 가짜라고 모욕하다니!”“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꼴같잖게 센 척하기는!”이영산은 그동안 설 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포장해서 이 씨 일가들에게 한껏 허풍을 떤 것이 분명했다.장리나는 당연히 이영산의 편이니 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은아는 이영산이 이렇게 낯짝이 두꺼울 줄은 몰랐다.순간 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됐어! 뭐가 어떻게 되고 저렇게 되고 상관없어!”“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고 그 분수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거야!”“자기 것이 아니라면 노력해서 얻을 생각을 해야지!”이 씨 가문 둘째 할아버지는 경험자 같은 자태로 말을 이었다.“젊은이, 내가 자네라면 지금쯤 순순히 설 씨 집안을 떠나 경비원이라도 해서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했을 거야. 그게 데릴사위보다는 훨씬 나아!”“자네가 그러는 걸 자네 조상이 알면 무덤에서도 벌떡 일어날 거야!”하현은 웃으며 말했다.“맞는 말씀입니다. 딱 봐도 데릴사위 경험자로서 하시는 말씀이신 듯하군요!”“뭐?
”물론 두 사람이 오늘의 이 성과를 이룬 데는 여러 친척들, 어른들, 형제, 자매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저와 제 남편이 이런 연회를 마련한 것은 여러분에게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이영산의 부친은 거만한 자세로 껄껄 웃으며 일어섰다.“여러분, 오늘은 마음 편히 즐겁게 먹고 마시길 바랍니다!”“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82년산 마오타이든 뭐든 원하는 만큼 준비해 뒀으니까요!”이영산도 의기양양한 얼굴로 일어섰다.“부모님, 여기 어르신들, 형제, 자매 여러분!”“오늘 저를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고맙습니다.”“저 이영산, 절대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건배!”말을 마치며 그는 호탕한 얼굴로 술 한 잔을 마셨다.“영산이와 의진이가 능력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 이렇게 빨리 출세할 수 있었던 거구요! 앞으로 우리 친척들 좀 많이 살펴 주세요!”“맞아요.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런 대단한 성과를 거두다니! 정말 대단해요!”“장청 캐피털 일을 따내다니! 그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요?!”“성월TV도 마찬가지예요! 배후에 금정 간 씨 가문이 떡 받치고 있는 곳이죠! 따라서 이것은 금정 간 씨 가문과 연줄을 맺은 거나 마찬가지예요!”“이제 우리 이 씨 가문이 완전히 떴어요!”친척들은 하나같이 영광스러운 얼굴로 이영산 남매를 바라보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항렬이 가장 높은 둘째 할아버지가 테이블을 탁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자손을 낳으려거든 이영산 같은 아들을 낳아야지!”“우리 이 씨 가문에 이영산이 있으니 이제 우리 가문은 더 높은 곳으로 갈 일만 남은 거야!”이에 이영산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에 내걸며 호탕하게 웃었다.“둘째 할아버지, 숙모님, 숙부님. 과찬이십니다!”“저와 제 여동생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이 씨 가족이라는 사실은 바꿀 수 없습니다!”“이 씨 가문에 꼭 보답하겠습니다!”이어 이의진도 곱게 화장한 얼굴
이튿날 아침, 밤잠을 설친 하현은 방을 나서자마자 설은아의 차에 몸을 실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그녀는 하현을 원망하기 시작했다.분명 오늘 이영산이 밥을 사기로 했다고 어제 다 얘기를 했는데 결국 하현은 이렇게 늦게 일어난 것이다.설은아의 스포츠카에 올라타서야 하현은 알게 되었다.이영산이 요 며칠 동안 무슨 개똥 같은 운이 그렇게 좋았는지 수천억짜리 공사를 수주했고 그와 함께 신분이 순식간에 치솟았다는 것이다.그리고 그의 여동생, 이의진도 직장에서 순풍에 돛 단 듯 승진하며 겹경사를 맞았다고 했다!최희정과 설재석 부부도 원래 이 자리에 참석하려고 했지만 임시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설은아를 대표로 내세웠다.설은아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영산은 하현을 콕 집어 말하며 꼭 데려오라고 했다.말하자면 자신의 높아진 위상을 하현에게 보여줌으로써 코를 납작하게 할 셈인 것이다.하현도 이영산이 절대 좋은 마음으로 자신을 부른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상관없었다.설은아가 참석하라고 하니 함께 가 보는 것이다.낮 12시.하현과 설은아가 홍궁관 2번 룸에 도착했다.룸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안에는 커다란 테이블 다섯 개가 놓여 있어서 한 번에 오십 명 정도가 함께 식사할 수 있었다.테이블당 최소 몇백만 원이 든다고 하니 이영산이 떼돈을 벌었다는 얘기가 나올 만도 했다.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고 화색이 가득한 그들의 얼굴은 상류층 자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설은아는 낮은 목소리로 이 사람들이 모두 이 씨 집안사람들이라고 하현에게 설명했다.이 씨 집안은 삼류 가문이었지만 그 수는 적지 않았다.게다가 금정 토박이였기 때문에 항상 자신들의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며 한껏 자존심을 치켜세우고 다녔다.설은아와 하현의 등장은 이 씨 집안사람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이영산의 친부모는 이 자리를 주최한 장본인이지만 하현을 보고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자태로 문 바로 앞자리를
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 내가 엄도훈의 목숨을 구해 줬으니 그는 나한테 신세를 진 셈이야.”말을 마치며 하현은 화제를 바꾸었다.“참, 대구 정 씨 가문 아홉 번째 집안이나 되면서 왜 갑자기 자금난이 생긴 거야?”“그리고 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어?”하현은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원래 아홉 번째 집안에는 아무런 자금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설은아가 상석에 앉게 되자 대구 정 씨 가문의 일부 친족들이 불만을 품었고 그들은 비밀리에 물밑으로 많은 일을 벌여 원래 가문의 자금이었던 돈의 일부를 소리 소문도 없이 빼내었다.아홉 번째 집안이 가장 규모가 컸기 때문에 자금이 유출된 후 여기저기 구멍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설은아는 최선을 다해 구멍을 메워보려 했지만 아무리 해 봐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특히 그녀는 금정에 온 후 대구 정 씨 가문이 벌여 놓은 난장판을 떠안아 자금에 대한 압박이 더욱 커졌다.설은아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은행에 두 배의 이자를 물고 대출을 했지만 여전히 이천억이란 돈이 모자랐다.그래서 그는 오늘 고성양을 만나 돈을 빌려볼 생각이었던 것이다.“당신한테 왜 말 안 했냐고?”설은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말해 봤자 무슨 소용 있어?”“당신 능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한 번에 이천억을 융통하기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을 대구 정 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한테 이로울 게 없거든.”설은아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그것은 아홉 번째 집안이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과 대구 정 씨 가문 고위층 사이에 일생일대 도박과도 같은 계약을 했다는 것이다.만약 그녀가 하현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청한다면 계약을 어기는 것이 된다.문제는 대구 정 씨 가문은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만만찮은 가문이라는 것이다.하현은 말끝마다 그녀를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으로 만들겠다고
저녁 9시.술과 밥을 배불러 먹은 하현은 소항 회관을 떠나 설 씨 가문으로 돌아갔다.하루 종일 고생한 그는 전에 최희정과 한바탕 크게 싸운 것도 있고 해서 그녀를 다시는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 소리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자신의 방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설은아의 방에서 ‘아앗’하는 소리가 들렸다.하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꽃향기가 물씬 풍겨왔다.설은아는 방금 목욕을 한 것으로 보였고 하얀 목욕 수건은 몸의 중요 부위만 감싸고 있었다.그녀의 백옥 같은 긴 다리는 수건 바깥으로 훤히 드러나 있어서 하현의 눈앞을 아찔하게 만들었다.하현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미녀들을 만났다.그녀들 각각의 매력도 상당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그를 가장 설레게 한 사람은 역시 설은아였다.순간 하현은 자신의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다행히 그는 곧바로 냉정을 되찾아 얼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들어왔어?”누군가 들어오자 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하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 긴장을 풀었다.하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이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길래 들어왔어. 괜찮아?”설은아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조금 삔 것뿐이야. 주물러주면 괜찮아질 거야.”“내가 해줄게.”하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설은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설은아는 침대에 앉아 곧고 긴 다리를 하현 앞에 쭉 뻗었다.하현은 설은아 앞에 쭈그리고 앉아 긴 다리를 주물렀다.손끝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펄쩍 뛰었다.백옥같이 아름답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을 만큼 그녀의 다리는 곱고 매끄러웠다.하현은 거의 무아지경으로 그녀의 다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설은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하현, 안마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왜 만지작
고명원의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렸다.“뭐라구요?”정홍매도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그녀는 남편이 고향에 가서 조상님께 향불을 올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줄곧 그 이유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그런데 이런 이유가 있었다니!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간단합니다. 당신은 기가 강한 사람입니다. 남을 압도할 만큼. 그래서 당신의 강한 기운이 조상의 기운을 눌렀던 거죠.”“만약 당신의 기운이 충분히 강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당신은 열 번도 더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스스로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 평생, 당신 아들이 태어난 후 당신이 몇 번이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는지!”하현의 말을 듣고 고명원은 마침내 큰 충격을 받았고 탄복해 마지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하현, 당신은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엄 회장님이 이렇게 당신을 좋아하는군요!”“맞습니다. 난 정말이지 몇 번이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그때마다 중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어요.”“하지만 운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죠.”“옛날 사람들은 큰 재난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훗날 반드시 복이 온다고 했어요.”하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런 건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당신에게 조상의 비호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신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죠!”“그래서 지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아들이든 딸이든 낳아 보길 권합니다.”“그러면 다음에 조상님께 제를 올릴 때 저절로 향불을 태우고 싶을 겁니다.”“봉분의 풀들도 그렇게 푸르지는 않은 것 같군요.”“조상들의 숨결이 모두 기운을 다했기 때문이죠!”“개자식!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자꾸 그런 말 하면 내가 당신 입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여보! 가! 가자구!”“자기가 무당이야? 뭐야?”“저 말을 믿느니 차리리 죽는 게 나아!”말을 마치자마자 정홍매는 고명원을 데리고 얼른 나가려고 했다.“
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의술은 정말 잘 몰라. 하지만 살인술은 좀 알지.”“한번 보여줘?”“단번에 당신의 목숨을 앗아버릴 수 있는데.”하현의 말을 들은 엄도훈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리고 나서 아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농담하지 마세요! 형님! 농담도 참!”“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전 지금 형님이 제 목숨을 구해 주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구요!”하현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은침을 자신의 손가락에 살짝 찔러 피 한 방울을 짜낸 뒤 엄도훈의 미간에 떨어뜨렸다.그리고 큰 혈이 지나가는 명치 몇 군데에도 떨어뜨렸다.그러자 가슴에 있던 흔적이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어? 어? 사라지고 있어?! 정말로 사라졌다구!”몇몇 측근들은 모두 놀란 얼굴을 한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왜냐하면 그들은 눈앞에서 흔적들이 서서히 옅어지다가 사라지는 것을 똑바로 목격했기 때문이다.엄도훈은 처음에 하현이 뭘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그런데 이제 보니 흔적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온몸을 얽매고 있는 기운도 함께 사라졌고 이윽고 정신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고명원도 눈앞의 광경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그는 처음에 하현이 농간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일을 보고 자신의 식견이 이렇게 모자랄 줄은 몰랐다.“형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해요!”“정말 감동했어요! 이건 정말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동이에요!”엄도훈의 얼굴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였다.“다만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긴 해요.”“집이나 가게에 팔괘경을 비치하는 것을 좋아하는 어른들을 많이 봤어요. 하지만 그들은 모두 무사했는데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은 거예요?”“그 물건이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다들 그런 골동품을 쓰니까요.”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신이 가지고 있던 팔괘경은 출토될 때부터 원한에 얽혀 있었어.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그 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