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용오정과 장남백 일행은 추한 몰골로 떠났다.동리아는 자신의 손안에 놓인 50억짜리 수표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탄식하듯 말했다.“하현, 이번 만남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어요.”“난 당신이 전쟁의 무드를 화해의 무드로 바꿔줄 거라고 생각했어요.”“그런데 당신은 그들의 얼굴을 가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쥐어짰어요!”“이 돈은 방금 두 어르신들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서 겨우 마련한 거라고요.”말을 마친 후 동리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두 노인이 허풍을 떨며 기고만장했었지만 정작 주머니에는 돈 몇 푼 없었던 것이다.50억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여기저기서 빌려야 했다.하현은 그들에게 50억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얼굴을 맞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하현은 두 노인의 관값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로써 양측이 더 이상 화해할 가능성은 없어진 것이다.“괜찮아. 내가 그들을 그 몰골로 만들지 않았어도 그들은 나를 죽이고 싶어 안달했을 거야.”“어쨌든 그런 사람들 눈에 나 같은 존재는 진작에 죽어 없어져야 할 존재였을 테니까.”하현은 의자에 앉아 유유히 차를 마시며 핸드폰을 들어 공해원이 보내온 자료를 뒤적거렸다.찻잔을 입가에 가까이 대었다가 멈칫하며 그가 입을 열었다.“소식에 따르면 용오정이 원래 큰 재주는 없었지만 여기저기 인맥이 아주 두텁구만. 그야말로 마당발이야.”“섬나라 쪽과도 일찌감치 내통하고 있었고 말이야.”“이번에 공송연이 나서서 그에게 도움을 청해 여기에 나타나게 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섬나라 친구들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 반드시 무슨 짓을 했을 거야.”“장남백은 원래 노국 황실이 키운 마지막 개였어.”“일생을 개처럼 행동한 그 사람에게 노국 황실은 하느님 같은 존재였겠지. 그에게 대하와 우리 국민은 하등의 가치가 없는 존재였을 거야.”“내가 이런 사람 체면을 봐 주며 좋게 좋게 넘긴다고 해도 그는 절대 그만두지 않을 거야.”“결국 정리해 보면 오늘 난 지회장
”그렇다면 두 노인이 끊임없이 하구천을 찾아가 불평을 늘어놓을 테고 하구천은 자연히 그의 계획을 수정해야겠죠!”“만약 하구천이 당신을 상대하기 너무 버거워서 천천히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한다면 아마 두 노인은 자신들이 받은 수모를 하구천이 되갚아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그렇다면 두 노인의 인맥과 지금까지 쌓은 덕망으로 미루어 볼 때 하구천을 따르던 무리들 사이의 견고한 울타리에 조금씩 균열이 생길지도 몰라요.”“만약 하구천이 오늘 일을 참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분명 어디선가 흔적과 허점을 남길 거고요.”“그럼 이 기회에 당신은 그를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내 생각엔 당신은 이 오피스텔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런 큰 그림을 그린 것 같은데요.”“후방에서 천천히 전략을 세운 거죠. 천리 밖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를 이르는 말일 거예요.”말을 마치며 동리아는 하현 앞에 수표를 내려놓았다.방금 하현이 일을 너무 크게 벌린다고 한 자신의 행동이 너무 충동적이라고 느낀 것이었다.게다가 동정감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아버지에게서 온 답신을 보고 동리아는 충격에 휩싸였다.하현의 행동에는 규칙이나 맥락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천천히 적진을 향해 진을 쳤다가 점점 좁혀들어 하구천의 턱밑까지 쫓아온 것이었다.하현과 하구천은 아직 공식적으로 맞붙지 않았지만 이미 양측에선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고 점점 더 흉악한 양상으로 흐르고 있었다.현재 파악된 상황으로 볼 때 적어도 하구천은 하현에게서 어떤 승점도 얻지 못한 셈이었다.이제야 동리아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왜 자신의 아버지가 항성과 도성에서 아무런 기반도 없는 하현의 편에 섰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자신도 모르게 사적인 감정에 흐르게 된 것은 참으로 아쉬웠지만...생각이 여기까지 흐르자 애석한 마음에 울적한 기분마저 들었다.좀 더 일찍 그를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현은 흥미로
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또한 하구천이 섬나라와 노국과 결탁하여 항도 하 씨 가문 안주인의 생일날에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거야. 그러니까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해.”“우린 하구천에게 골칫거리를 만들어 줘야 해. 그래서 그로 하여금 속 시끄러운 마음을 핑계 삼아 항성을 떠나도록 만들어야 한다구.”“매일 집에서 교활한 계책을 연구하는 것도 그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거고.”하구천은 너무 철두철미하고 자기 보호에도 빈틈이 없었다.이렇게 그를 몰아붙이고 아주 구역질이 나도록 괴롭히지 않으면 하현 자신도 계속 하구천을 상대할 계책을 연구하느라 힘들어진다.그러니 하구천을 위아래로 움직이게 해야 하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그래, 알겠어요. 바로 준비할게요.”“하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동 씨 집안이 아직은 항성에서 좀 먹히는 가문이잖아요. 이런 일은 쉽게 처리할 수 있어요.”하현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하구천 같은 사람을 상대할 때는 모든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꾸며야 한다.너무 뻔하게 보이면 상대에게 들킬 수 있다.자연스럽게 물 흐르는 듯한 계획이 종종 더 큰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하현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동리아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하현에게 다가와 손수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하현, 우리 동 씨 집안에서 이렇게 잘해주는 데 뭐 감사의 뜻으로 내놓을 거 없어요? 당신이 직접 못하겠으면 내가 제안을 해도 될까요?”분명 동리아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실은 간신히 용기를 내어 한 말이었다.이국적인 얼굴에 미소가 가득 들어찼다.하현이 원하기만 한다면 곧장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타오를 것 같았다.“하하하.”하현은 실소를 터뜨리며 오른손을 들어 동리아의 손을 툭툭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동리아, 농담하지 마. 잊었어? 난
허민설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으며 하구천이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그러자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하구천, 처음에 그 두 노인을 등판시킨 건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잖아.”“하나는 이번 기회에 용문의 역량이 어디까지인지 탐색하여 용문에서 하현에 대해 어디까지 용인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었고.”“또 하나는 노국을 끌어들이는 것이었잖아. 지금 섬나라가 하현에게 혼이 난 상태에서 당신은 노국의 힘을 빌려 하현을 처리하려고 했을 뿐이야.”“지금 두 늙은이가 당신이 예상한 대로 역할을 해내지 못했지만 아직은 당신 손아귀에 있는 셈이잖아?”하구천은 이 말을 듣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계획은 그랬는데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서 아쉬운 거지.”“어떤 사람은 자신의 지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금이 그가 권력을 잡을 때라고 착각하지.”하구천의 얼굴에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어떤 사람인데?”허민설이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하구천에게 물었다.그때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잠시 후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멍이 든 장남백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하구천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그의 얼굴빛은 말할 수 없이 흉측했고 얼굴에 원망이 가득 서려 있었다.“하구천, 하현 그놈 뭐야?”“그저 용문 대구 지회장에 불과하잖아!”“그런데 어떻게 감히 사람들 앞에서 날 이 지경으로 만들 수가 있어?”“그리고 날 서양놈들의 개라고 했어! 이런 모욕은 난생처음이야!”“당장 죽여 버려! 당신이 내 원한을 갚아 줘야 해. 당장 그를 죽여 줘!”“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 감히 전임 항독의 얼굴을 때려?”“그놈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떻게 항성과 도성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어?”“내가 어찌 노국 황실에 가서 얼굴을 들 수 있겠냔 말이야!”지금 장남백은 하현에 대한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 찬 나머지 자신과 하구천의 지위 차이를 잊은 모양이었다.곧이어 그는 자신의 수행원
장남백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입을 열었다.“용오정이 하현을 제압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나?”“용오정은 용문 집법당 부당주야. 용문 서른여섯 지회를 지휘 통솔하는 인물이라구.”“그런데 어찌 하현은 그의 체면을 조금도 봐 주지 않은 거지?”하구천은 장남백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며 담담하게 웃었다.“아주 간단해요. 하현에게 있어 용문 대구 지회장이라는 신분이 그리 대단한 건 아니거든요. 단지 보너스 같은 것일 뿐이죠!”“그의 신분에 대해 어르신도 들어봤을 거예요!”“강남 하 세자!”“항성 이 씨 가문 이일해도 수중에 막대한 손해를 봤다더군요.”“그런 사람을 아무나 함부로 대할 수 없어요.”“적어도 용오정이나 어르신 정도의 실력이나 되어야 그를 상대할 수 있죠.”하구천은 가벼운 어조로 툭툭 내뱉으며 동시에 쓴웃음을 지었다.장남백은 얼굴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하구천을 바라보며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그렇다면 우리가 공격하기 전에 왜 이런 얘기를 해 주지 않았어?”“내가 그의 정체를 말씀드린다고 해도 어르신 성정과 용오정의 급한 성미가 내 말에 귀 기울이게 했을까요? 믿을 수 있었을까요?”하구천은 자신의 책임을 슬며시 전가하며 말을 이었다.“어르신과 용오정이 이번에 따끔하게 정신을 차렸으니 천지 모르고 날뛰는 이놈을 상대하기 위해 앞으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요.”“이번 일은 두 어르신이 따끔하고 아픈 교훈을 얻었다 생각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앞으로 이런 놈을 상대하려면 아예 손을 쓰지 않거나 손을 쓴다면 단번에 처리해야 한다는 걸 아셨을 겁니다!”잔뜩 찡그렸던 장남백의 얼굴이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잠시 후 그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하구천, 당신이 좀 나서 주겠나?”한참을 얘기했건만 결국 장남백은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하구천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이 늙은이가 정말 성질도 고약하고 체면을 어떻게든 놓지 못한다는 걸 알았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손자가 동 씨 집안과 혼사가 오갔죠.”“명목상이긴 하지만 동리아의 약혼자, 맞죠?”하구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장남백은 잠시 머뭇거리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당시 동 씨 집안이 아직 세력을 얻지 못했을 때 혼사가 오가긴 했었다.다만 장남백의 손자도 장남백과 마찬가지로 도도하고 오만한 성격이어서 대하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노국의 황실에 사위로 들어가길 원할 뿐이었다.그래서 노국으로 유학을 떠나 황실 방계의 여자친구를 만났고 그 후로 항성에는 발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만약 하구천이 옛일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장남백은 정말 까맣게 잊었을 일이었다.하구천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어르신의 표정을 보니 내가 잘못 기억한 건 아닌 모양이군요.”“오늘 동리아가 현장에 있었는데 하현을 건드리면 자신이 먼저 나서서 다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그 말이 온 동네에 퍼지기라도 한다면 어르신 체면이 도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결국 동리아는 손자 며느리가 될 거잖아요? 왜냐하면 아직 약혼을 취소하지 않았으니까요!”“내 말은 그러니까 어르신 손자가 반드시 항성에 돌아와서 동리아를 따끔하게 혼내줘야 한다는 겁니다. 항성에서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 건지 동 씨 집안에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게다가 동 씨 집안을 밟아 버린다면 하현이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그는 내륙에서는 힘깨나 쓰는지 몰라도 항성에서는 뿌리가 없는 초목과도 같은 처지예요.”“그와 동 씨 집안의 동맹만 끊어 놓는다면 어르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그를 짓밟아 버릴 수 있을 거 아닙니까?”“게다가 하현이 노국의 황실조차 모욕하고 있는 마당에 어르신 손자가 황실 여자친구마저 데리고 온다면 하현의 얼굴을 더욱더 비참하게 짓밟아 버릴 수 있을 거예요.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에요, 안 그렇습니까?”장남백은 그제야 하구천의 말이 이해가 가는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하구천, 역시 전설적인 인물은 다르긴 다르군
다음 날 삼계호텔 스위트룸에서 잠을 자고 있던 하현은 누군가의 다급한 노크 소리에 잠을 깼다.하현은 졸린 눈을 비비며 시계를 확인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서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동리아를 본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동리아, 지금 아침 9시야! 나 좀 더 자게 내버려두면 안 돼?”“좀 편히 잠 좀 자려고 했는데!”세련되고 우아하게 꾸민 동리아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동리아는 하현이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공항에 가서 데려올 사람이 있어요!”하현이 자세히 물어보려고 했지만 동리아의 다급한 모습에 그는 더 물어보지 못하고 잠자코 그녀를 따랐다.동리아의 포르쉐 차량이 도시 순환 고속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며 항성 국제공항에 도착했다.그들은 곧장 항성 국제공항 대합실로 들어갔다.대합실에는 이미 동 씨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동리아와 하현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레스토랑 위치를 알려주었다.동리아는 난감한 얼굴빛을 하고는 자신의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하현의 마음속에서는 의문의 부표가 떠다녔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도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동리아가 이렇게 당황해하는지 그의 마음속에 궁금증이 커져 갔다.곧이어 두 사람은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했다.이렇게 큰 레스토랑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아마도 오늘 통째로 임대를 한 모양이었다.모든 웨이터들이 한 테이블에만 집중적으로 서빙을 하고 있었다.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남자는 대하 출신의 남자로 키가 크고 언뜻 보아도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점잖은 얼굴에 금빛 안경을 쓴 모습이 귀족 그 자체의 풍모가 느껴졌다.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노국의 황실 방계 출신의 여자가 자리하고 있었다.서양 여자처럼 생긴 외모와 몸매는 둘째치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 특유의 기질
”장묵빈은 어릴 때부터 노국의 황실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결국 노국의 황실에서 여자친구를 찾았죠.”“저런 알콩달콩한 모습이 해외에서 일어나는 건 얼마든지 괜찮아요. 나랑 아무 상관없어요.”“심지어 그가 우리 동 씨 집안과의 약혼을 미리 앞당겨 파혼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리 동 씨 집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하지만 우리 집안과 파혼도 하지 않고 저렇게 버젓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내 체면을 구겨? 그것도 항성에서?”“절대 가만있을 수 없죠!”동리아의 표정은 차갑게 식었다.약혼자인 장묵빈에 대해서는 전혀 개인적인 감정이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체면을 구기고 나아가 동 씨 집안의 체면을 깎는 짓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항성과 도성, 이 큰 도시에 이 일이 알려진다면 동 씨 집안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하현은 동리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지금 저 남자한테 가서 당신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물어볼 거야? 아니면 두 사람 사이의 약혼을 계속 유지할 거야?”“죽어도 싫어요!”동리아가 매몰차게 부정했다.하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간단해. 이왕 이렇게 왔으니 가서 분명히 말해.”“당신들 쌍방이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 장 씨 가문이 자발적으로 이 약혼을 취소하게 만들면 깔끔하게 처리되는 거 아니야?”하현은 장묵빈이 장남백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자신이 나서서 말해 볼까도 생각했었지만 어쨌든 당사자인 동리아가 나서서 조용히 해결하는 편이 깔끔할 것 같았다.어쨌든 동 씨 집안과 장 씨 집안이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자신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도리상 동 씨 집안에 가장 피해가 적게 가는 방향으로 흘러가길 하현은 바라고 또 바랐다.자신은 앞으로 항성과 도성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동리아는 여전히 이곳에
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설은아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정말 해결할 수 있어?”설은아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응. 할 수 있어.”해결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하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았다.이번이야말로 하현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알았어. 해결할 수 있으면 됐어.”하현도 설은아가 허투루 말을 하는 가벼운 입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해결이 잘 안 되면 억지로 버티지 말고 꼭 말해. 내가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볼게.”하현의 말을 듣고 이시운은 더욱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보아하니 데릴사위가 말주변이 아주 좋을 뿐만 아니라 허세 부리는 것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붕!”바로 그때 사람이 드문 도로에 번호판 없는 승합차 여러 대가 포르쉐 앞에 나타났다.뒤이어 승합차 몇 대가 나타나 하현 일행을 태운 포르쉐를 에워쌌다.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길이 없는 설은아와 이시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착!”이때 문이 열렸고 러닝셔츠를 입은 십여 명의 사람들이 손에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걸어 나왔다.그때 승합차 한 대의 문이 스르르 열리며 우민은과 이국흥 두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이 개자식들!”설은아는 이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차렸다.“이런 치졸한 방법을 쓰다니!”하현은 이런 일을 너무 많이 겪어 봐서 그저 냉담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이시운은 이런 광경이 처음이라 온몸을 부르르 떨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제 어떻게 해요?”“어서 신고해!”설은아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내가 가서 시간을 벌어 볼 테니까!”“그래도 내가 대구 정 씨 가문 사람이니까!”“날 건드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들도 모르진 않을 거야.”“그러니 날 함부로 하진 못 하겠지!”“하현, 당신은 차 안에 있어. 나오지 말고 여기 있어. 괜히 나와서 일 크게 만들지 말고!”설은아는 상대가
설은아는 이시운을 데리고 포르쉐에 올라탔고 하현을 조수석에 앉혔다.액셀을 밟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아침에 대출받느라 바빴고 점심때는 직원들 월급 해결하고 회사 일도 다 처리했어. 이제 아무 문제없어.”“자, 이제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말해 봐, 아직도 아무 말 안 할 거야?”하현이 웃으며 말했다.“무슨 일?”“당신과 나천우의 일.”설은아는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이 나천우와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어차피 하현도 성공한 사람이니 그럴 수 있다.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나천우가 어떻게 그처럼 그를 깍듯하게 모실 수 있냐는 것이다.하현을 위해 나천우는 은행 고위직 두 명을 바로 해고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곧바로 이천억이란 거금을 대출해 주었다.하현은 금정에 온 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나천우는 은둔가 나 씨 가문 사람인데 어떻게 그가 하현에게 이렇게 극진한 대우를 할 수 있는가?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현이 나천우를 안다는 말을 듣고 이시운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못마땅한 표정으로 비웃었다.나천우가 설은아의 미모에 흑심을 품고 하현의 체면을 세워 준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하현은 우쭐대고 있는 건가?참, 같잖은 꼴이라니!하현은 설은아가 무엇을 물어보는 것인지 간파한 뒤 입을 열었다.“나천우가 나한테 마침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었거든.”“무슨 부탁? 중요한 일이야?”설은아는 호기심에 눈빛이 반짝반짝거렸다.“나천우 같은 사람이 웬만한 일로 부행장과 부장을 해고하지는 않았을 거야.”이 말을 듣고 이시운은 깜짝 놀라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이 그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점점 더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단지 데릴사위인 하현이 주제도 모르고 설칠 뿐이라고 생각했다.“날 속일 생각하지 마. 도대체 어떻게 나천우의 신임을 얻게 된 거야
”참, 여기 사인 좀 해 줘.”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나천우는 발걸음을 옮기려던 하한을 붙잡았다.그는 재빨리 옆방으로 가서 서류철을 가져와 하현에게 사인하라고 했다.하현이 서류를 받아들고 힐끔 쳐다보다가 나천우에게 눈길을 돌렸다.“이게 뭐예요?”“작은 거지만 내가 준비했어. 거절하면 안 돼!”말을 하면서 나천우는 직접 하현의 손을 잡고 지장을 찍은 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까지 쳤다.하현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형님, 도대체 이게 뭐예요?”나천우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당신 형수가 우리 집안에 시집오고 나서 일으킨 회사야. 금정개발이라고 집을 짓고 파는 부동산업이지.”“이제 당신 형수는 아이를 낳는 데 전념해야 하니 이 땅과 회사 일에 쏟을 시간이 없어.”“이걸 팔거나 혹은 다른 사람한테 좌지우지하는 것도 보기 불편할 거야. 혼수나 다름없는 거였으니까.”“이제 당신 손에 넘어갔으니 아마 당신 형수도 분명 기뻐할 거야.”“지금부터 당신은 주식을 90% 가진 금정개발 대주주이며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진 사람이야!”“나머지 10%는 우리 부부의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셈으로 치자고.”“회사가 크지는 않아. 직원도 100명 남짓이고.”“회사에서 최근 몇 필지를 분양받아 개발하려고 사전 준비 작업을 하고 있어!”“하현, 마음에 드는 땅이 있거나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해야 하니까 이자는 꼬박꼬박 내야 해. 하지만 우대금리로 잘 해줄게.”말을 마치며 나천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속으로 부자들은 역시 스케일이 다른 건가 잠시 생각할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부동산 개발 회사가 보너스라니!이렇게 되면 자신이 금정 제일 부동산 개발업자가 되는 게 아닌가?만약 최희정이 이 사실을 안다면 피를 토하며 분노를 뿜을 것이다.하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는 이것이 나천우 부부의 호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만
하현은 나천우에게 담요를 가져와 임단의 몸에 덮어 주라고 일렀다.그다음 그녀를 푹 쉬게 해 두고 조용히 나천우에게 따라나오라고 했다.바깥으로 나온 나천우는 하현을 깍듯이 대하며 옆에 있는 응접실로 데리고 와서 허리를 굽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하현, 이제 다 해결된 거죠?”“우리 아이를 극락으로 잘 보내 준 거죠?”그의 얼굴에는 기대와 긴장감이 가득했다.하현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나천우를 쳐다본 뒤 옅은 미소를 지었다.“나 사장님, 세상에 귀신이 있다고 믿습니까?”나천우는 적잖이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하현, 세상에 귀신이 없다면 방금 그 말은 도대체...”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나 사장님, 아침에 제가 한 말 기억하세요?”“마음의 병은 마음의 약으로 고쳐야 합니다.”“사모님은 사실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아이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에 마음에 응어리가 졌던 것뿐입니다.”“그래서 사모님의 몸은 일종의 가임신 상태에 빠진 거죠.”“이런 상황에서는 두 분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하지만 방금 제가 사모님 앞에서 보인 모습 때문에 사모님은 비로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겁니다. 죽은 아이가 좋은 것으로 갔다는 안도감이 사모님의 마음을 위로한 거죠.”“마지막으로 사모님의 몸에 숨을 불어넣어 사산했을 때 감염되었던 약간의 풍한을 제거했어요.”“이제 사모님은 멀쩡한 사람입니다.”“두 분이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거죠.”하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물론 내가 사장님한테 이렇게 다 털어놓고 말씀드리는 건 사장님이 문화인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거예요.”“하지만 사모님은 여자이기 때문에 이 일은 아마 사장님과 나 사이의 비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아이를 무사히 출산한 뒤에 말씀드려도 늦지 않습니다.”“나중에 두 분이 날 너무 사기꾼으로 몰아붙이지나 마세요. 하하.”하현이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말을 마친 후 하현은 얼른 종이와 붓을 꺼내 그 위에다 뭔가를 쭉 쓴 뒤 담담하게 말했다.“나 사장님,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이 물건들을 빨리 준비해 달라고 이르세요.”“이 물건들은 부인의 체내에 음흉한 기운을 모두 뽑아줄 겁니다.”“그렇게 해야 완전히 문제가 해결됩니다.”“음흉한 기운이 다 제거된다면 두 분은 자연스럽게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예요.”나천우는 종이에 적힌 물건들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맙습니다. 바로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순간 나천우의 마음속엔 하현에 대한 존경심이 솟아올랐다.나천우는 하현이 엄청난 돈이나 물질적인 것을 터무니없이 요구할까 봐 살짝 걱정이 되었었다.그런데 하현이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단칼에 승낙할 줄은 몰랐다.그래서 나천우는 하현을 완전히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잠시 후 나천우의 측근들은 하현이 지시한 물건을 모두 준비해 왔다.닭 피 한 그릇과 종이돈 한 묶음, 종이돈을 태우는 양동이.이를 본 임단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하현,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하현은 테이블을 가리켰다.“부인, 죄송하지만 여기 누우시고 배가 보이게 옷을 살짝 위로 올려 주세요.”하현의 말에 임단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이어 그녀는 코트를 벗은 뒤 셔츠를 살짝 걷어 올려 새하얀 아랫배를 드러낸 채 테이블 위에 누었다.나천우는 이 광경을 보며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현, 이건...”하현이 천천히 나천우에게 설명했다.“부인은 뱃속에서 아이가 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음흉한 기운이 여기 가득 들어 있습니다.”“예로부터 뱃속에서 죽은 아기는 엄마의 품을 떠나기 싫어 그 영혼이 떠돈다고 합니다.”“그래서 두 분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죠.”“오늘 저는 죽은 아이의 영혼을 잘 달래서 보내주려는 거고요.”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와 임단은 동시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벌린 입을
하현은 냉랭하게 말했다.“미안하다고 할 필요 없습니다.”“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나한테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만 들으면 됩니다.”“나머진 당신이 알아서 하면 되죠.”“난 아무 이견도 달지 않을 테니까요.”하현의 말은 마치 이 모든 것이 그와 무관한 일처럼 가볍게 들렸다.그러나 가볍게 들리는 그 말속에 숨어 있는 어조는 서늘한 기운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원래 하현이 어떻게 망신을 당하나 구경이나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놀라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눈알을 땅바닥으로 떨구었다.결국 그의 어조로 보아하니 그가 가볍게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리고 우민은과 이국흥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나천우는 하현을 향해 빙긋 웃으며 허리를 곧게 펴고 시선을 뒤로 돌렸다.그의 눈빛 속에 찬바람이 가득 휘몰아쳤다.우민은과 이국흥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왔고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아 그대로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일어서세요!”나천우는 폭풍 전야의 고요한 태풍의 눈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단지 손가락을 까닥이며 경호원에게 쇠 파이프를 건네받아 직접 두 사람의 다리를 한쪽씩 부러뜨렸다.그리고 나서 활을 들고 두 사람의 손바닥을 향해 활을 쏘았다.“휙!”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울렸다.두 사람이 손바닥이 떨구어지자 나천우는 두 사람을 문 바깥으로 걷어차며 말했다.“잘 들어. 다시는 당신들 두 얼굴을 금정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아.”“감히 이 두 사람을 거두는 자는 나 나천우에게 도전하는 거라 생각할 거야!”“사람들을 교외로 내쫓아 스스로 빌어먹고 살게 해!”...10분 만에 설은아가 그토록 골머리를 앓던 이천억 대출이 순조롭게 실행되었다.무이자일 뿐만 아니라 담보 물건도 없이 진행되었다.다만 각종 수속이 복잡해서 설은아는 VIP실에 남아 서류 처리를 해야 했다.나천우는 하현을 깍듯이 모시고 행
”좋아, 당신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니 한 명이라도 어디 해고해 봐!”우민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자! 어서 해 보라니까!”“퍽!”바로 그때 은행 로비의 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 열 명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부티가 좔좔 흘렀다.그는 바로 금정은행 은행장, 은둔가 나 씨 가문 나천우였다.나천우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민은과 이국흥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굽신거렸다.“행장님!”“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우민은과 이국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나천우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런데 평소에는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던 나천우가 오늘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천우는 그들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하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하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말을 듣고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모두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곳곳에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현에게 쏠렸다.몇몇 여자 고객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다.우민은은 마치 사지가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국흥은 더했다.사지가 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그들은 하현
이국흥은 염치도 체면도 안중에 없는 사람 같았다.그는 없던 일을 있었던 일처럼 꾸몄다.그의 목적은 단 하나, 우민은이 하현을 혼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이때 설은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부행장님, 그게 아닙니다...”우민은은 이국흥에게 힘을 실어 주러 온 상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은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감히 우리 은행에서 사람을 때려요?”“간이 배밖에 나왔어요?”“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은행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예요!”“이봐! 어서 관청에 신고해!”그녀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그러자 설은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분명 그녀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설은아가 이끄는 회사의 자금줄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자신이 아홉 번째 집안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는가?이렇게 빨리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훗날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이 되겠다는 것인가?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하하하! 이게 바로 당신의 최후야!”“이제 알겠어?”이국흥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개자식! 이 개새끼야! 너 방금 정말 미친놈처럼 날 치더라? 정말 대단했지, 안 그래?”“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시지?!”“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퍽!”하현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그의 요구에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다.이국흥은 하현이 감히 자신에게 또 손을 쓸 줄은 몰랐다.뺨을 맞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가까스로 우민은의 몸에 기댄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미친 거야?!”“당신들 여기가 무법천지인 줄 알아?”우민은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봐, 어서 신고해!”“은행 협회에 통보해서 설은아한테 대출 다 막으라고 해!”이때 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민은과 이국흥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사람이야말로 내 블랙리
하현을 말리는 설은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국흥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갈며 일어섰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자식! 당신 누구야?!”“당신이 뭔데 감히 이러는 거야?”“날 때려? 감히 날 때렸어?”“내가 뭐?”하현은 앞으로 나서면서 또 손바닥을 올려 이국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아내한테 그런 모욕감을 주다니!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어?”“내가 누군지 당신 눈엔 안 보여?”“혹시 설 대표가 당신 부인이야?”이국흥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그 쓰레기 같은 놈?”“그런데 감히 날 때려?!”“죽여버릴 거야!”하현은 또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퍽!”“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내 여자를 건드리는 놈은...”“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국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하현, 그만해! 그만하라고!”설은아는 한사코 하현을 말리며 붙잡았다.“또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그를 고맙고 든든하게 여겼지만 불똥이 그에게 튈까 봐 걱정도 되었다.오래된 도시 금정의 은둔가 가문이 뒷배에 있는 금정은행 부장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금정은행의 뒷배인 나 씨 가문은 금정 금융계의 거물이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리다니?!”“흥! 넌 이제 죽었어! 내가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이국흥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나 그는 감히 하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입만 떠들썩하게 떠벌렸다.“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그리고 제멋대로 날뛰는 네놈 때문에!”“이 여자도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블랙리스트에 올라 금융계에선 다시는 일 원 한 푼 빌릴 수 없게 만들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