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시환은 전화를 끊고 옆에 앉은 여자가 입으로 건네는 과일을 똑같이 입으로 받아먹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며 공지민이 나타났다. 그녀를 본 온시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설마 이 여자 일부러 나를 찾으러 온 거야?’공지민은 평소 작은 동물처럼 겁 많고 순진한 사람이었다. 이 상황은 그녀답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옆자리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양옆에는 이미 여자 둘이 앉아 있어 자리가 없었다. 그러자 공지민은 아무 말 없이 여자 하나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했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과일 접시를 들어 손가락으로 과일을 하나 집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흥미롭네. 겁 많던 토끼가 갑자기 송곳니를 드러냈군.’밀려난 여자는 화를 내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싶었지만 온시환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공지민이 건넨 과일을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공지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물었다.“아직 제 이름도 모르시죠?”온시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솔직히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하지만 어젯밤 그녀가 침대 위에서 보인 모습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만약 끈질기게 매달리는 성격만 아니라면 한 번 더 관계를 맺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그러나 이렇게 찾아온 걸 보니 분명 어떤 확답을 받으러 온 게 틀림없었다. 온시환은 돈은 줄 수 있어도 명분은 줄 수 없었다.“제 이름은 공지민이에요. 그리고 시환 씨가 말했잖아요. 앞으로 제가 시환 씨 여자 친구라고요.”룸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온시환의 화려한 생활은 이미 다들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서 명분을 요구하며 나서는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두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공지민이라... 이름은 꽤 예쁘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온시환은 옆에 앉아 있던 여자를 품에서 내려놓으며 가볍게 웃었다.“이름
온시환은 공지민의 집에서 그렇게 그녀의 몸으로 숙취를 풀었다. 세 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맑아졌다.그는 그녀를 옆에 있는 소파로 옮기고 근처에 있는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침실로 데려가는 것조차 귀찮았고 무엇보다 어느 방이 그녀의 침실인지도 몰랐다.몸을 정리한 뒤 온시환은 다시 한 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아늑한 분위기와 단정함에 그녀가 여느 여배우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온통 명품으로 치장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공지민은 집안을 꾸미는 데 정성을 들인 듯했다.온시환은 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몸 안의 열기가 대부분 풀린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공지민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무심했다. 여자를 한두 번 더 만나 즐기는 건 괜찮지만 그 이상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한편 공지민은 아침까지 깊게 잠들어 있었다. 소파는 편안했지만 같은 자세로 잔 탓에 허리와 등이 뻐근했다.그때 문보영이 전화를 걸어왔다.“어젯밤엔 잘됐어?”“언니, 시환 씨가 새벽에 갔어. 우리 또 했어.”문보영의 목소리가 잠시 끊기더니 다소 어이없어하며 물었다.“이번에는 이름이라도 기억했겠지?”“아마 기억했을걸? 일부러 내 이름을 알려줬거든.”문보영은 그 말을 듣고 거의 화가 나서 쓰러질 뻔했다.“너 지금 자랑하는 거야? 다른 여배우들은 온시환이랑 한 번만 자도 얼마나 많은 혜택을 받는지 알아? 근데 넌 두 번이나 자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고작 이름만 기억하게 했다고 좋아해? 너 이러다 그 사람에게 다 뜯기고 뼈도 못 추릴 거야!”“너무 과장하지 마, 언니. 나도 내 의지로 한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만날 기회가 많을 거야.”“좋아, 그러면 이번에는 그 사람 연락처라도 받았어?”공지민은 그 순간 멍해졌다. 연락처를 물어보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문보영은 그녀가 대답이 없자마자 상황을 눈치챘다.“야, 이 멍청아! 내가 어떻게 이런 바보 같은 연예인을 만나게 됐는지 모르겠어. 그래, 네가 온시환에게 뭘 얻으러
다음 장면은 소하연이 공지민을 밀어 물에 빠트리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감독이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소하연은 공지민을 밀어버렸다.공지민은 수영을 잘 못해 물에 빠지자 잠깐 몸부림치더니 곧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주변 사람들이 급히 물에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냈고 다행히 큰일은 없었다.그러나 소하연은 사과는커녕 한쪽에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물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수영 정도는 배워뒀어야지. 진짜 너무 프로답지 못하네.”공지민은 거칠게 기침을 하며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물을 뱉어냈다. 간신히 숨을 고른 그녀는 소하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소하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웃었다.“왜? 내가 틀린 말 했어?”공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감독이 다가왔다.“하연아, 다음 장면부터는 내 지시에 따라 행동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다른 사람들 시간을 더 뺏지 말라고.”소하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독이 자신을 지목해 공지민을 괴롭힌다는 뜻으로 말한 거였다.그녀는 억울함을 삼키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얘 설마 감독이랑도 그런 사이인 거야? 감독이 올해로 쉰이 넘었는데, 뭐든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건가?’눈 속에는 혐오감이 가득했지만 더 이상 큰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제 공지민의 뺨을 열 대 넘게 때린 일로도 이미 현장에서 자신에 대한 평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그래도 상관없었다. 팬들 눈에는 여전히 그녀는 순수한 ‘작은 요정’이니까.그날 물에 빠지는 장면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찍고 나서야 겨우 오케이 사인이 났다. 공지민은 어지럼증이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부터 제대로 쉬지도 못한 상태에서 물속에서 오랜 시간을 버틴 탓이었다. 오후 촬영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병원으로 실려 가는 모습은 기자들에게 찍혔고 곧바로 인터넷에 소문이 퍼졌다.[촬영장에서 사고 발생, 드라마 촬영 중단 위기.]이 드라마의 투자자인 온시환은 소식을 듣고 곧바로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온시환이 아무리 뻔뻔하다 해도 이번에는 스스로 조금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아, 맞아. 네 이름 알아. 방금 갑자기 생각이 안 났던 거야. 근데 촬영 아직 안 끝났어?”공지민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온시환은 그녀의 촬영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전 조연이에요. 후반에 촬영할 분량이 남아 있어요. 나중에 캐릭터가 흑화하거든요.”온시환은 이마를 문지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녀가 하녀 같은 배역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그래서 왜 불렀어? 무슨 일이야?”그는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 주변에서 스태프들이 모두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고 공지민과 자신이 엮였다는 소문이라도 퍼질까 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얼마 전 감독이 돌려 말하며 그녀와 관련해 떠본 것도 기억났다. 공지민이 감독에게 그와의 관계를 암시라도 했나 싶어 꺼림칙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직접 다가오면서 순진한 척 행동하고 있었다.“아직 시환 씨 연락처가 없잖아요. 그리고 카톡 친구도 아니고요. 만약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시환 씨를 도와드릴 수 있게 연락처를 알려주세요.”예컨대, 지난번처럼 그가 술에 취해 운전할 사람이 없을 때 그녀가 가서 그를 데리고 올 수도 있었다.공지민은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말은 다소 초라하게 들리기도 했다.“전에 말했잖아요. 저는 시환 씨를 쫓고 있어요. 그러니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온시환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 여자를 대담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겁이 많다고 해야 할까.대담하다고 하기에는 이미 두 번이나 그와 잠자리를 가졌으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게다가 겁이 많다고 하기에는 대놓고 그를 쫓겠다고 말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온시환은 흥미를 느꼈다. 결국 그녀에게 번호를 주고 카톡 친구도 추가했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연락처를 저장한 휴대폰을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그녀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 문보영은 답답한
문보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이미 할 말을 잃었다. 공지민의 동작은 마치 전문가처럼 완벽했다. 그녀의 발차기는 소하연의 경호원보다 더 능숙해 보였다.이게 정말 그녀가 몇 년 동안 데리고 다닌 여배우가 맞단 말인가. 이렇게 잘 싸우는 줄은 문보영조차 몰랐다.공지민은 소하연을 발로 찬 뒤 자신을 붙잡고 있던 두 경호원을 가볍게 제압했다. 기이한 동작으로 경호원들에게 매달리더니 온 힘을 실어 그들을 바닥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소하연은 바닥에서 간신히 일어나 공지민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복수를 결심했던 그녀였지만 공지민이 자신뿐만 아니라 두 경호원까지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는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너 뭐야? 괴물 같은 힘을 가진 여자라니! 두고 봐. 대표님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화를 삭이지 못한 소하연은 촬영장을 뛰쳐나가 곧바로 시벅 엔터의 본사로 향했다. 그녀는 김종찬 대표를 찾아가 눈물을 쏟아내며 부어오른 뺨을 보여줬다.“대표님, 저한테 온시환 씨를 꼬시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지금 제 얼굴이 이 모양이에요! 지민이 걔가 절 때리고 대표님이 붙여준 경호원까지 쓰러뜨렸어요!”김종찬은 소하연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소하연이 장난치는 거라 생각했다.그가 아는 공지민은 여리디여린 여자로, 두 경호원을 쓰러뜨릴 만한 힘이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소하연의 진지한 표정에 결국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김종찬은 곧바로 공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때 공지민은 여전히 촬영장에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어딘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기만 하면 그녀가 당장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문보영의 표정은 처음에는 어딘가 복잡해 보였지만 곧 걱정으로 가득 찼다.소하연의 뒤에는 김종찬이 버티고 있었다. 그가 그녀들의 직속 상사인 만큼 소하연이 김종찬을 찾아가면 공지민이 회사에서 철저히 배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지민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시환 씨한테 전화해 봐
온시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소하연 옆에는 강한 경호원 두 명이 있지 않았나? 공지민이 어떻게 그들을 제압한 거지?’공지민은 온시환이 대답이 없자 그가 화난 줄로만 알았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 여자가 제 휴대폰을 빼앗아 부숴버렸거든요. 그래서 시환 씨 연락처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손이 먼저 나갔어요.”온시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대신 그의 머릿속에는 당시의 상황이 그려지고 있었다.공지민은 점점 불안해졌다. 땀이 손바닥을 적셨고 온시환이 소하연의 편을 들며 자신을 꾸짖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네가 전화한 이유가 나더러 도와달라는 거야?”소하연은 시벅 엔터의 돈줄 같은 존재였고 공지민 역시 시벅 엔터 소속이었다. 그녀가 퇴출 위기에 처한 것도 전혀 놀랍지 않은 상황이었다.온시환은 공지민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전화한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분을 기다린 끝에 그녀가 한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그냥 보고 싶어서요.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어요?”공지민 옆에 앉아 있던 문보영은 당연히 그녀가 지금 상황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고작 보고 싶다는 거라니 너무 황당했다.“지민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이 와중에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당장 시환 씨한테 네 상황을 얘기해야지! 대표님이 사람 데리고 와서 널 끌고 가면 어쩔 건데!”하지만 공지민은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조용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그저 온시환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온시환은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지금 친구 집에서 아이 보고 있어.”말하고 나서야 자신의 사생활을 말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곧 그녀가 서주혁을 알 리 없다는 생각에 안도했다.“더 할 말 없으면 끊을게.”“시환 씨, 혹시 국 좋아하세요? 제가 앞으로 요리할 시간이 많을 것 같거든요. 좋아하신다면 자
문보영은 공지민을 위해 급히 김종찬에게 사정했다.“대표님, 지민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이번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이번 작품이 좋아서, 지민이가 충분히 대박 날 수 있는 기회예요. 소하연처럼 잘되면 회사에도 돈을 많이 벌어다 줄 거예요.”소하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보영의 뺨을 후려쳤다.“쟤 따위를 감히 나랑 비교해? 문보영, 너 미친 거 아니야? 너도 빨리 다른 연예인 맡아. 공지민 같은 천박한 애랑 같이 다니면 네 수준도 떨어질 거야. 네가 쟤랑 더 엮이면 앞으로 누가 너랑 일하고 싶어 하겠어?”매니저는 연예인 덕에 먹고사는 직업이다. 연예인이 잘나갈수록 매니저도 더 많은 돈을 번다. 하지만 문보영이 맡은 공지민은 늘 그저 그런 상태였다. 사실 문보영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지금은 오히려 공지민 때문에 발목이 잡힌 상황이었다.뺨을 맞고도 문보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김종찬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김종찬은 소하연 편이었다. 지금의 문보영이 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당장 나가. 내가 신인 붙여 줄 테니, 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마. 네가 다른 회사로 간다고 해도 여기만큼 높은 기본급을 받을 순 없을 거야. 회사에서 배당금까지 주는 거 알지? 잘 생각해 봐.”바로 이런 이유로 문보영은 시벅 엔터를 떠날 수 없었다. 그녀는 공지민을 깊게 바라보았다. 둘은 단순히 매니저와 연예인의 관계를 넘어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공지민을 구할 수 없었다.김종찬이 공지민과의 잠자리를 원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면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공지민은 문보영을 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요리를 해야 온시환이 좋아할지 그 생각뿐이었다.그때 누군가 계약서를 공지민 옆에 던졌다. 시벅 엔터와 체결했던 계약서였다. 계약은 아직 2년이나 남아 있었다. 이 상황에서 만약 그녀가 활동을 중단한다면 피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연예계는 트렌드 변
공지민이 온시환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문보영은 그저 그녀가 온시환의 팬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일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문보영도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공지민은 이미 결정을 내렸고 이제 2년 동안 활동을 중단한다면 자신이 그녀의 매니저로 남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언니, 걱정하지 마. 사실 나도 온시환이 좋은 사람 아니라는 거 알아. 그래도 한 번쯤은 시도해 보고 싶어.”문보영은 갑자기 손을 뻗어 공지민을 꽉 끌어안았다.“네가 뭘 하는지 알고 있다면 괜찮아. 지민아, 그럼 2년 후에 다시 보자.”공지민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마치 온시환을 쫓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회사를 나온 뒤 그녀는 바로 온시환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집 주소를 물었다.온시환은 전화기 너머에서 이마를 문지르며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매일 촬영도 해야 하잖아. 언제 시간이 있어서 국을 끓여 준다는 거야? 그리고 내 몸값을 생각해 봐. 나를 모시겠다고 줄 서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그런데 너는 딱히 눈에 띄는 장점도 없잖아.”“시환 씨, 저 회사에서 활동 정지당했어요. 이제 시간이 많아졌으니 시환 씨를 더 열심히 따라다닐 수 있어요. 국 끓이는 건 시작일 뿐이에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그보다 훨씬 많아요.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온시환은 잠시 침묵했다.‘활동 정지라니?’그런 큰일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다니 온시환은 이 여자가 제정신이 아닌지 싶었다.연예인이 활동 정지를 당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일 텐데,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너 제정신이야? 활동 정지가 뭘 의미하는지 진짜 몰라서 그래?”“알아요. 그러니까 주소가 어디예요? 오늘 밤 바로 가서 국 끓여드릴게요.”온시환은 그녀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답답함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이 여자가 어디까지 할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