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주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한밤중에 밖에서 나는 기척에 잠이 깼다.오번이 방으로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렸다.“최씨 가문 사람들이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더는 여기 머물 수 없어요.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요. 내일 아침 여덟 시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해요. 반년 동안 플로리아에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설연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을 마친 후 설우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우현 오빠, 일곱 시 경성공항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면 안 돼요? 제발요.]메시지 끝의 몇 글자에서 비굴함이 묻어났지만 그녀는 결국 그 메시지를 보냈다.설우현은 요즘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고 심지어 어젯밤은 잠을 한숨도 자지 않았다.설연주의 메시지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휴대폰을 옆에 던져두고 세면을 시작했다.세면을 마친 그는 수영복을 입고 30분 정도 수영을 했다.수영을 마치고 나오자 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도련님, 누군가가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설우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곧 일곱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부재중 전화 목록에는 설연주의 번호가 떠 있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전화가 다시 울렸다.전화를 받자마자 설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안 올 거예요?”설우현은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설연주는 휴대폰을 꽉 쥔 채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겨우 물었다.“어젯밤 언제 깼어요? 내가 약 넣은 거 알고 있었어요?”설우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설연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오빠, 이번에 떠나면 반년 동안 돌아오지 못해요. 그저 한 번만 보고 싶었어요.”오번은 이미 오래전에 그녀에게 혼자만의 감상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했었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설우현은 그 아이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따라서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게다가 그 아이를 갖겠다고 고
설연주는 이미 탑승구에서 대기 중이었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설우현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하늘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다시 오번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 꺼져 있었다.머릿속에는 오직 설연주가 말했던 그 아이만 떠올랐다. 외진 곳에서 혼자 아이를 낳은 그녀가 도대체 얼마나 고생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그리고 어떤 심정으로 다시 플로리아로 돌아왔을지...설우현은 믿기 어려웠다. 그 작은 사기꾼이 자신을 정말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만약 좋아하지 않았다면 왜 이렇게까지 했겠는가.하지만 설연주는 좋아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했었는데 그는 그것을 단순히 농담으로 여겼거나 그저 자신을 잡아두려는 수작으로만 생각했었다.설우현은 그 자리에 서서 그저 답답함과 초조함만 느껴졌다.그는 곧 사람을 시켜 설연주의 항공편을 조회했다.곧바로 다음 비행편을 타고 그녀를 뒤쫓았지만 설연주는 이미 그 도시를 떠난 상태였다. CCTV에는 그녀가 다시 검은색 차를 타고 도망친 모습이 찍혀 있었다.그 순간 설우현은 그녀가 항상 국경 근처에서 지냈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아마 다시 국경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싶었다.하지만 이 나라의 국경은 너무 넓었다.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설우현은 그 주변을 헤매며 오랫동안 찾았지만 결국 그녀를 찾지 못했다.그렇게 반달이 지난 어느 날 설기웅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최근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요즘 회사에 나가지도 않는다던데,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설우현은 침을 삼키며 무성하게 자란 턱수염을 매만졌다. 더 이상 플로리아에서의 깔끔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형, 여기서 조금 할 일이 있어요.”“무슨 일인데? 그쪽 요즘 상황이 어수선해. 폭동도 일어났고, 뉴스 안 봤어? 구청장이 유세하러 갔다가 총에 맞아 죽었잖아.”설우현은 미간을 문질렀
최용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일은 꽤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보아하니 설우현이 직접 나서려는 것 같았다.그는 설기웅을 바라보며 그와의 우정을 생각해 한숨을 내쉬었다.“우현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리얼하게 해야 해. 우리 집안은 두팔 집안에 큰 신세를 진 게 있어. 우리 부모님께서도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면 봐줄 필요가 없다고 하셔. 그러니까 절대 티가 나지 않게 하란 말이야. 안 그러면 나중에 설명하기 어려우니까.”설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제대로 처리해야 했다.그는 사흘 만에 이미 부패가 진행된 시신을 수습해 정교하게 작업한 후, 법의학 검사를 통해 설연주의 시신으로 밝혀졌다는 소식을 퍼뜨렸다. 그 소식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설우현은 한편으로 최씨 가문의 반응을 주시하면서 최용호에게 상황을 알렸다.최용호는 곧바로 답을 보내왔다. 아직 의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지만 곧 해결될 거라고 했다.설우현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루 더 기다렸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최용호가 답을 보내왔다.“그쪽에서 믿긴 했어. 하지만 꼭 명심해. 앞으로 설연주가 다시 플로리아로 돌아오는 일은 없도록 해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정말 난처해질 거야.”“알겠어요. 이건 제가 형에게 진 빚이라고 생각할게요.”최씨 가문 일이 마무리된 후 설우현은 비로소 자신이 설연주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설기웅이 그를 일깨워줬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설연주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사랑이라는 말은 그에게는 더욱 부담스러운 감정이었다.설우현은 자신의 별장에서 사흘을 보낸 후 마침내 다시 설연주를 찾기로 마음먹었다.그러나 그의 사람들이 국경 근처에서 오랫동안 수색했음에도 여전히 찾지 그녀를 못했다. 설연주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듯했다.설우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직접 국경으로 다시 떠났다. 이번에는 드디어 단서를 찾았고 설연주가 그렇게 외진 곳에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곳은
예전에는 항상 설우현이 다른 사람을 비아냥거렸지만 이번에는 그가 당했다. 그것도 자신이 하찮게 여기는 오번에게.전에 그를 봐준 건 서주혁의 체면을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이 인간은 고마워할 줄도 몰랐다.설우현은 코웃음을 치며 물통을 오번 옆에 내려놓고 설연주를 바라보았다.“최씨 가문 문제는 이미 해결했으니까 나랑 플로리아로 돌아가자. 너를 잘 돌보게 할 게.”설연주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오번이 끼어들었다.“잘 돌보게 한다는 게, 또 남한테 떠넘기고 알아서 살게 내버려둔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우현 씨는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어요. 괜히 희망을 주고 다시 절망을 안기려고 왔어요?”설연주는 속눈썹을 살짝 떨며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오번 씨.”오번은 입꼬리를 비틀며 다시 땅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설우현 씨,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세요?”설우현은 잘 알지 못했다.‘설마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 건가?’이 근처 사람들은 대부분 채소를 재배하며 지냈고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은 시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주민들은 주로 물물교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채소를 키우는 거 아니에요?”“아니요, 꽃을 키우고 있어요. 연주 씨가 당신 별장에 핀 꽃이 너무 예뻐서 여기도 꽃을 피우고 싶다고 하더군요. 여기 사람들은 다 먹고살기 위해 채소를 심는데, 연주 씨는 꽃을 심겠대요. 낭만을 택하느라 목숨은 뒷전인 거죠.”설우현은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자신도 꽃을 좋아했지만 항상 정원사에게 맡겨두었고 정작 설연주가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오번은 이미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설우현은 시선을 돌려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 저 멀리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연주야?”그가 다시 부르자 설연주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우현 씨, 그냥 돌아가요.”“나랑 같이 돌아가. 이번에는 절대 너를 남한테 넘기지 않을 거야.”그러나 설연주는 방금 오번이
성혜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들어 이마를 주무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설우현은 누가 봐도 감정에 휘말린 상태였다.그녀는 잠깐 침묵하다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오빠,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시환 씨랑 술 한잔하러 가는 건 어때요? 오늘 밤에 사람도 많대요. 승제 씨도 일찍부터 나갔는걸요.”“허, 반승제는 이제 애도 있는 놈이면서 아직도 밖에서 술을 마신다고? 혜인아, 네 남편 좀 잘 단속해. 밖에서 말썽부리지 않게.”성혜인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설우현은 항상 반승제를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결혼한 지 꽤 됐지만 여전히 반승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반승제가 좋은 남편감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오빠, 그냥 다녀오세요.”마침 설우현도 기분이 꿀꿀해서 그냥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게다가 눈앞의 두 아이를 보니 더더욱 허탈해졌다. 문득 자신의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지 떠올려 보려 했지만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술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예전 같았으면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차례로 비꼬며 한마디씩 던졌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하지만 그가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설우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온시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현 씨, 요즘 여자 쫓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에요?”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데 온시환이 어떻게 그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걸 알 수 있단 말인가.그는 무의식적으로 반승제를 바라보았다. 반승제는 눈을 내리깔고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설우현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래, 반승제. 네가 내 뒤에서 험담한 거로군.’여자를 쫓아다닌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플로리아의 대표적인 귀공자였다. 여자를 쫓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손짓 한 번이면 여자가 줄줄이 따라왔으니까.반박하려는 찰나 온시환의 다음 말에 설우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이
성혜인이 그 문자를 받았을 때 반승제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보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반승제가 평소에도 선물을 자주 보내서 그녀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문자에 답장을 보내려던 찰나 설우현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않고 캐리어를 꺼내 짐을 싸기 시작하더니 세 시간 후 비행기를 타겠다고 말했다.“오빠, 이번에도 이렇게 짧게만 있다가 가는 거예요? 조금 더 있다 가면 안 돼요?”그러나 설우현은 움직임이 빨랐고 금방 짐을 다 싸더니 집을 나서기 직전에 차갑게 말했다.“혜인아, 반승제 좀 단속해. 오늘 밤 내가 보니까, 반승제가 룸 안에서 여직원이랑 아주 다정하더라. 심지어 여직원을 무릎에 앉히고 술까지 마시고 있더라고. 룸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봤어. 조심 좀 해라.”그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차를 몰고 떠났다.성혜인은 그 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반승제를 안 지 오래된 그녀는 그 정도의 신뢰는 가지고 있었다.아마도 반승제가 또 설우현의 신경을 건드린 게 분명했다.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그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이 두 사람 예전에도 주먹다짐까지 했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크게 싸운 거야?’한편, 설우현은 플로리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도착하자마자 시차 적응도 하지 않은 채 설연주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운명처럼, 그는 설연주와 오번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오번은 피곤한 듯 몸을 기대고 있었고 설연주는 그런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설우현은 갑자기 가슴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설연주!”설연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 또 온 거지? 전에는 엄청나게 화내며 떠나지 않았나?’설우현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오번을 거칠게 밀쳐냈다.“설연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남녀유별도 모르냐?”설연주는 황당한 듯 그를 바라봤다. 그가 이런 말을 하다니 마치 농담 같았다.이전에 그녀
아기를 낳는 건 분명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이전에 성혜인이 두 아이를 낳을 때도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그리고 장하리, 그녀도 서보겸을 낳으면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그렇다면 설연주는? 그녀 역시 많이 아팠겠지.이렇게 의료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당시에는 의사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그녀는 이 질문을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설우현이 이런 말을 해 줄 거라고는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순간적으로 감정이 북받쳤다.사실 그녀는 전부 쏟아내고 싶었다.너무 아팠다고. 아기를 낳고 나니 담요 위가 피로 흥건했다고.그리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너무나 두려웠다고.자신의 상태는 신경도 못 쓴 채 아기의 상태부터 확인하러 갔다고.하지만 아기는 움직이지 않았고, 숨소리조차 없는 채로 고요히 누워 있었다고.설연주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모든 게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라는 생각이 들어 미친 듯이 울었다.“연주야.”설우현이 그녀를 다시 한번 부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꾹 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전에 오번이 그녀에게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었다.“후회하지 않아요. 이건 내 운명이니까.”하지만 지금 설우현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을 본 순간 그녀는 진심으로 후회했다.설연주와 설우현은 애초에 같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녀의 욕심이 문제였다.그렇지 않았다면 설우현처럼 고귀한 사람이 이렇게 황량한 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었겠는가.설우현은 그녀를 오랜 시간 동안 꼭 끌어안았다. 팔이 저려올 때쯤 그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에는 떠나지 않을 거야. 나도 이곳에서 너와 함께 살고 싶어.”설연주는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았다.‘이런 곳에 머무르겠다고? 말도 안 돼.’“오빠, 그냥 돌아가요.”“네가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다면
설연주는 설우현의 연이은 행동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 흔들렸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그사이 설우현은 다시 자리에 누워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예전에 설연주는 이런 꿈을 자주 꾸곤 했다. 꿈속에서 설우현이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하게 대하는 장면들.하지만 막상 이런 순간이 현실이 되자 그녀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다.설우현은 정말 지쳐 있었던지 깊이 잠들었고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설연주는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조심스레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이번에도 설우현이 얼마나 오래 머물지 알 수 없었다. 짧은 행복은 마치 훔친 것처럼 불안하게 느껴졌다.다음 날 아침, 설연주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설우현이 깨어났을 때 침대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잠시 침대를 더듬더니 서둘러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설연주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이곳은 모든 것이 원시적이었지만 불편한 점만 제외하면 나름 살 만한 곳이었다.문 앞에서 그녀를 한참 바라보던 설우현은 혼자 그녀를 바쁘게 두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다가가 돕기 시작했다.오번은 남자인 데다 요리에는 소질이 없었던지라 이곳에서의 식사 담당은 항상 설연주의 몫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부엌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오번이 깨어나 부엌에 들어왔을 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설우현을 보며 비아냥거렸다.“도련님, 이런 일은 도련님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냥 연주 씨에게 맡기세요.”설우현은 냄비 뚜껑을 들고 있었지만 사실 요리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번처럼 말로만 떠들고 싶지는 않았다.끝까지 설연주를 도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그녀에게 플로리아로 돌아가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그러자 오번은 마치 그와 대립하려는 듯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여기 온 지 고작 며칠밖에 안 됐잖아요. 조금 더 있어 보세요. 여기가 얼마나 척박한 환경인지 느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