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일은 꽤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보아하니 설우현이 직접 나서려는 것 같았다.그는 설기웅을 바라보며 그와의 우정을 생각해 한숨을 내쉬었다.“우현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리얼하게 해야 해. 우리 집안은 두팔 집안에 큰 신세를 진 게 있어. 우리 부모님께서도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면 봐줄 필요가 없다고 하셔. 그러니까 절대 티가 나지 않게 하란 말이야. 안 그러면 나중에 설명하기 어려우니까.”설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제대로 처리해야 했다.그는 사흘 만에 이미 부패가 진행된 시신을 수습해 정교하게 작업한 후, 법의학 검사를 통해 설연주의 시신으로 밝혀졌다는 소식을 퍼뜨렸다. 그 소식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설우현은 한편으로 최씨 가문의 반응을 주시하면서 최용호에게 상황을 알렸다.최용호는 곧바로 답을 보내왔다. 아직 의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지만 곧 해결될 거라고 했다.설우현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루 더 기다렸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최용호가 답을 보내왔다.“그쪽에서 믿긴 했어. 하지만 꼭 명심해. 앞으로 설연주가 다시 플로리아로 돌아오는 일은 없도록 해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정말 난처해질 거야.”“알겠어요. 이건 제가 형에게 진 빚이라고 생각할게요.”최씨 가문 일이 마무리된 후 설우현은 비로소 자신이 설연주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설기웅이 그를 일깨워줬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설연주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사랑이라는 말은 그에게는 더욱 부담스러운 감정이었다.설우현은 자신의 별장에서 사흘을 보낸 후 마침내 다시 설연주를 찾기로 마음먹었다.그러나 그의 사람들이 국경 근처에서 오랫동안 수색했음에도 여전히 찾지 그녀를 못했다. 설연주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듯했다.설우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직접 국경으로 다시 떠났다. 이번에는 드디어 단서를 찾았고 설연주가 그렇게 외진 곳에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곳은
예전에는 항상 설우현이 다른 사람을 비아냥거렸지만 이번에는 그가 당했다. 그것도 자신이 하찮게 여기는 오번에게.전에 그를 봐준 건 서주혁의 체면을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이 인간은 고마워할 줄도 몰랐다.설우현은 코웃음을 치며 물통을 오번 옆에 내려놓고 설연주를 바라보았다.“최씨 가문 문제는 이미 해결했으니까 나랑 플로리아로 돌아가자. 너를 잘 돌보게 할 게.”설연주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오번이 끼어들었다.“잘 돌보게 한다는 게, 또 남한테 떠넘기고 알아서 살게 내버려둔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우현 씨는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어요. 괜히 희망을 주고 다시 절망을 안기려고 왔어요?”설연주는 속눈썹을 살짝 떨며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오번 씨.”오번은 입꼬리를 비틀며 다시 땅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설우현 씨,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세요?”설우현은 잘 알지 못했다.‘설마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 건가?’이 근처 사람들은 대부분 채소를 재배하며 지냈고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은 시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주민들은 주로 물물교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채소를 키우는 거 아니에요?”“아니요, 꽃을 키우고 있어요. 연주 씨가 당신 별장에 핀 꽃이 너무 예뻐서 여기도 꽃을 피우고 싶다고 하더군요. 여기 사람들은 다 먹고살기 위해 채소를 심는데, 연주 씨는 꽃을 심겠대요. 낭만을 택하느라 목숨은 뒷전인 거죠.”설우현은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자신도 꽃을 좋아했지만 항상 정원사에게 맡겨두었고 정작 설연주가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오번은 이미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설우현은 시선을 돌려 설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 저 멀리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연주야?”그가 다시 부르자 설연주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우현 씨, 그냥 돌아가요.”“나랑 같이 돌아가. 이번에는 절대 너를 남한테 넘기지 않을 거야.”그러나 설연주는 방금 오번이
성혜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들어 이마를 주무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설우현은 누가 봐도 감정에 휘말린 상태였다.그녀는 잠깐 침묵하다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오빠,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시환 씨랑 술 한잔하러 가는 건 어때요? 오늘 밤에 사람도 많대요. 승제 씨도 일찍부터 나갔는걸요.”“허, 반승제는 이제 애도 있는 놈이면서 아직도 밖에서 술을 마신다고? 혜인아, 네 남편 좀 잘 단속해. 밖에서 말썽부리지 않게.”성혜인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설우현은 항상 반승제를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결혼한 지 꽤 됐지만 여전히 반승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반승제가 좋은 남편감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오빠, 그냥 다녀오세요.”마침 설우현도 기분이 꿀꿀해서 그냥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게다가 눈앞의 두 아이를 보니 더더욱 허탈해졌다. 문득 자신의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지 떠올려 보려 했지만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술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예전 같았으면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차례로 비꼬며 한마디씩 던졌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하지만 그가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설우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온시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현 씨, 요즘 여자 쫓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에요?”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데 온시환이 어떻게 그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걸 알 수 있단 말인가.그는 무의식적으로 반승제를 바라보았다. 반승제는 눈을 내리깔고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설우현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래, 반승제. 네가 내 뒤에서 험담한 거로군.’여자를 쫓아다닌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플로리아의 대표적인 귀공자였다. 여자를 쫓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손짓 한 번이면 여자가 줄줄이 따라왔으니까.반박하려는 찰나 온시환의 다음 말에 설우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이
성혜인이 그 문자를 받았을 때 반승제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보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반승제가 평소에도 선물을 자주 보내서 그녀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문자에 답장을 보내려던 찰나 설우현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않고 캐리어를 꺼내 짐을 싸기 시작하더니 세 시간 후 비행기를 타겠다고 말했다.“오빠, 이번에도 이렇게 짧게만 있다가 가는 거예요? 조금 더 있다 가면 안 돼요?”그러나 설우현은 움직임이 빨랐고 금방 짐을 다 싸더니 집을 나서기 직전에 차갑게 말했다.“혜인아, 반승제 좀 단속해. 오늘 밤 내가 보니까, 반승제가 룸 안에서 여직원이랑 아주 다정하더라. 심지어 여직원을 무릎에 앉히고 술까지 마시고 있더라고. 룸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봤어. 조심 좀 해라.”그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차를 몰고 떠났다.성혜인은 그 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반승제를 안 지 오래된 그녀는 그 정도의 신뢰는 가지고 있었다.아마도 반승제가 또 설우현의 신경을 건드린 게 분명했다.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그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이 두 사람 예전에도 주먹다짐까지 했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크게 싸운 거야?’한편, 설우현은 플로리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도착하자마자 시차 적응도 하지 않은 채 설연주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운명처럼, 그는 설연주와 오번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오번은 피곤한 듯 몸을 기대고 있었고 설연주는 그런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설우현은 갑자기 가슴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설연주!”설연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 또 온 거지? 전에는 엄청나게 화내며 떠나지 않았나?’설우현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오번을 거칠게 밀쳐냈다.“설연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남녀유별도 모르냐?”설연주는 황당한 듯 그를 바라봤다. 그가 이런 말을 하다니 마치 농담 같았다.이전에 그녀
아기를 낳는 건 분명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이전에 성혜인이 두 아이를 낳을 때도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그리고 장하리, 그녀도 서보겸을 낳으면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그렇다면 설연주는? 그녀 역시 많이 아팠겠지.이렇게 의료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당시에는 의사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그녀는 이 질문을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설우현이 이런 말을 해 줄 거라고는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순간적으로 감정이 북받쳤다.사실 그녀는 전부 쏟아내고 싶었다.너무 아팠다고. 아기를 낳고 나니 담요 위가 피로 흥건했다고.그리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너무나 두려웠다고.자신의 상태는 신경도 못 쓴 채 아기의 상태부터 확인하러 갔다고.하지만 아기는 움직이지 않았고, 숨소리조차 없는 채로 고요히 누워 있었다고.설연주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모든 게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라는 생각이 들어 미친 듯이 울었다.“연주야.”설우현이 그녀를 다시 한번 부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꾹 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전에 오번이 그녀에게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었다.“후회하지 않아요. 이건 내 운명이니까.”하지만 지금 설우현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을 본 순간 그녀는 진심으로 후회했다.설연주와 설우현은 애초에 같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녀의 욕심이 문제였다.그렇지 않았다면 설우현처럼 고귀한 사람이 이렇게 황량한 곳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었겠는가.설우현은 그녀를 오랜 시간 동안 꼭 끌어안았다. 팔이 저려올 때쯤 그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에는 떠나지 않을 거야. 나도 이곳에서 너와 함께 살고 싶어.”설연주는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았다.‘이런 곳에 머무르겠다고? 말도 안 돼.’“오빠, 그냥 돌아가요.”“네가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다면
설연주는 설우현의 연이은 행동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 흔들렸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그사이 설우현은 다시 자리에 누워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예전에 설연주는 이런 꿈을 자주 꾸곤 했다. 꿈속에서 설우현이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하게 대하는 장면들.하지만 막상 이런 순간이 현실이 되자 그녀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다.설우현은 정말 지쳐 있었던지 깊이 잠들었고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설연주는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조심스레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이번에도 설우현이 얼마나 오래 머물지 알 수 없었다. 짧은 행복은 마치 훔친 것처럼 불안하게 느껴졌다.다음 날 아침, 설연주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설우현이 깨어났을 때 침대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잠시 침대를 더듬더니 서둘러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설연주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있었다. 이곳은 모든 것이 원시적이었지만 불편한 점만 제외하면 나름 살 만한 곳이었다.문 앞에서 그녀를 한참 바라보던 설우현은 혼자 그녀를 바쁘게 두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다가가 돕기 시작했다.오번은 남자인 데다 요리에는 소질이 없었던지라 이곳에서의 식사 담당은 항상 설연주의 몫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부엌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오번이 깨어나 부엌에 들어왔을 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설우현을 보며 비아냥거렸다.“도련님, 이런 일은 도련님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냥 연주 씨에게 맡기세요.”설우현은 냄비 뚜껑을 들고 있었지만 사실 요리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번처럼 말로만 떠들고 싶지는 않았다.끝까지 설연주를 도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그녀에게 플로리아로 돌아가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그러자 오번은 마치 그와 대립하려는 듯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여기 온 지 고작 며칠밖에 안 됐잖아요. 조금 더 있어 보세요. 여기가 얼마나 척박한 환경인지 느껴
오번은 애초부터 귀한 대접만 받으며 살아온 재벌 2세 도련님이 이런 고생을 견딜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설우현이 고작 닷새 정도 버티다 돌아갈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한 달 내내 이곳에 머물렀다.매일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일을 도우며 살아가는 동안 이제는 요리까지 배우게 되었다. 비록 설우현이 지은 밥은 여전히 약간 덜 익었지만 분명히 큰 발전이었다.설연주는 오번을 한쪽으로 불러냈다. 그녀의 표정에는 어딘가 모르게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정말 우현 씨를 계속 여기 머물게 해야 할까요?”한 달이 지나며 설우현은 더 이상 비싼 양복도, 값비싼 손목시계도 착용하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은 이제 아주 소박했다.오번은 설연주의 흔들리는 마음을 눈치채고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한 주만 더 지켜보죠, 어때요? 난 연주 씨가 걱정돼서 그래요.”설연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선택이 결국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네, 그렇게 해요.”다섯 날이 지난 후 설연주는 결심을 굳히고 설우현에게 함께 플로리아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집안 어디에도 설우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오번은 문득 아침에 설우현이 근처 주민들과 함께 산나물을 캐러 가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이맘때가 되면 이 지역에서는 산나물이 특히 인기가 많았다. 근처 주민들은 모두 산나물을 캐러 가고는 했다.게다가 그 산나물은 볶으면 달콤한 맛이 나서 설연주도 나물볶음을 좋아했다. 아마 그래서 설우현이 직접 주민들을 따라 나물을 캐러 나갔을 것이다.“오번, 그 근처에서 최근에 무장 강도가 출몰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이 말을 들은 오번은 이마를 탁 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설연주는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급히 나가려 하자 오번이 그녀를 붙잡았다.“너무 위험해요. 연주 씨는 집에서 기다려요. 내가 가볼게요.”그러나 설연주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번의 만
설연주가 자신을 가두는 삶을 감내하면서도 그를 위해 이곳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사실에 설우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설연주가 이곳에서 계속 머무는 것 역시 결국 자신을 가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사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마음의 문을 열어 두었다. 다만 망설이고 있던 건 설우현 자신이었다.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는 플로리아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오번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물었다.오번은 설연주가 이번에는 정말 결심을 굳힌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설연주는 그가 걱정하는 마음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번, 우리랑 플로리아로 같이 가는 건 어때요? 거기서도 충분히 일을 이어갈 수 있을 텐데요.”오번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솔직히 연주 씨가 준 돈으로 지금 당장 은퇴해도 될 정도예요. 하지만 내가 연주 씨 돈을 받았다고 해도 당신은 여전히 내 가장 소중한 친구예요.”그렇지 않았다면 오번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설연주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설우현은 두 사람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에 속이 꽉 막히는 듯했다. 그는 설연주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그 정도로 뛰어난 해킹 실력이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오번한테 일자리를 마련해줄 테니까, 넌 걱정하지 마.”오번은 귀찮다는 듯 그를 흘겨보더니, 더 이상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설우현과 설연주는 함께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창문 옆 침대에 나란히 누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이곳의 밤하늘은 도시와 달리 별이 가득했다. 개발되지 않은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풍경이 더욱 아름다웠다.설연주는 설우현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오랜 침묵 끝에 설우현이 말했다.“진연주, 앞으로 내가 잘할게. 이제 너는 설연주가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