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얼마면 돼?”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돈은 필요 없어요.”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됐어요.”‘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단미, 윤단미...’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언니가 어떻게 왔어?”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어머니.”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반승제가 아닌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반승제의 비서인 심인우였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건 사모님께 전해달라고 하신 선물입니다.”백연서는 반승제에게 돌아와서 저녁밥이나 먹으라고 했지 성혜인이 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그의 성격으로 원래 오려고 했던 것도 안 올수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심인우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그래, 승제가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으니... 대신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주렴.”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백연서는 성혜인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손을 휘적였다.“너도 이만 돌아가. 승제가 시간 있을 때 다시 부를 테니까.”“네.”성혜인은 애초부터 남아서 밥 먹을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심인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흐릿한 뒷모습 만으로도 반승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게다가 오늘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혼 서류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다시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성혜인은 빨간불을 기다리며 회사 단톡방을열어 봤다.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단톡방은 아주 시끄러웠다.‘반승제가 이번에 결혼하러 돌아왔다면서요? 네이처 빌리지에 비싼 값을 주고 펜션을 샀다고 하던데 곧 인테리어도 하겠죠?’‘사장님이 반승제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실내 디자인 일을 저희 쪽에서 할 수 있을까요?”“만약 가능하다면 저희가 엄청 덕을 보겠는데요? 반승제 정도의 재벌이라면 일은 둘째 치고 말이라도 섞어보고 싶어요...”반승제가 결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뉴스에도 전혀 나온 적이 없는 일이었다.이 화제에 관심 없었던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끄려고 했는데 마침 사장 양한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지금 잠깐 문라이트로 올 수 있어? 네가 디자인했던 펜션에 관심 있는 고객이 있는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
반승제 근처의 아우라는 마치 여름이란 겪어본 적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가지.”성혜인은 반승제를 따라 문라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저마다 단정한 태도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그렇게 조용히 걷고 있던 반제승가 갑자기 멈춰서서 몸을 돌렸다. 성혜인도 따라 멈춰서서는 덤덤하게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너 임경헌한테서 얼마나 받았어?”성혜인은 임경헌과 반승제가 어떤 사이인지 몰랐다. 반씨 일가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니 이것도 당연하였다.반승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녀는 그냥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겠거니 했다.“사장님 말로는 2억 정도 한다고 했어요.”“이 짓거리를 하는데 사장도 있어?”반승제는 진심으로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문라이트에서 비밀스러운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을 임경헌에게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자신이 당사자가 될 줄은 또 몰랐다.어찌 됐든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와서 고민하기에는 늦었다.반승제는 다시 몸을 돌려 룸으로 걸어갔고 성혜인도 묵묵히 따라갔다.“임경헌 말로 너희가 부르는 값은 높지만, 서비스는 확실하다고 했지?”성혜인은 그동안 많은 고객을 만나왔다. 대부분 사람이 다 부자라서 가격만큼은 충분하게 줬지만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말을 듣자마자 기계처럼 대답했다.“반승제 씨, 가격에 관해서는 충분히 서비스와 정비례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서비스와 정비례 한다라...’반승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네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했다면?”어색한 반응에 가만히 있을 줄밖에 모르던 성혜인에게는 서비스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게다가 반승제는 그녀의 얼굴과 몸매가 수억 원을 주고 살 정도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돈 벌기 참 쉬운 직종이군.’성혜인은 ‘고객이 왕이다’라는 생각 하나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제가 최
잠깐 놀란 건 사실이지만 성혜인은 상대가 자신을 알아볼 걱정은 하지 않았다.왜냐하면 명절에도 반태승만 따로 만났기에 반씨 집안의 다른 가족들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반제승 본인도 자신의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더 알 턱이 없었다.어두운 표정으로 떠난 반제승을 떠올리며 성혜인은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반승제 씨는 아무래도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아요.”예쁜 여자라면 직업이고 뭐고를 떠나 사족을 못 쓰는 임경헌은 물씬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그럴 리가요. 혜인 씨의 디자인은 제가 본 것 중 최고였어요. 저희 사촌 형이 경영을 배우는 동시에 예술도 배웠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보아냈을 거예요. 오늘은 그냥 이혼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 같아요.”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양한겸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반승제 씨가 결혼했다고요?”임경헌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진작에 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이혼하느라 변호사랑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에요.”임경헌은 성인이 되고 나서 흥청망청 노느라 집으로 돌아간 적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저 반승제에게 할아버지가 찾아준 아내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결혼 얘기를 처음 들은 양한겸은 궁금한 듯 계속해서 물었다.“저는 네이처 빌리지의 펜션이 신혼집인 줄 알았어요. 만약 신혼집이 아니라면 혼자 사시는 집인가요?”임경헌은 성혜인에게 와서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신혼집이기는 해요. 저희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지금의 형수랑 결혼했거든요. 그래서 이 집은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하면 같이 살려고 준비하는 것 같아요.”임경헌은 이렇게 말하면서 성혜인에게 주스를 건네줬다.“형이 곧 다시 온다고 했으니, 그때 다시 혜인 씨의 설계도를 보여주자고요. 형도 무조건좋아할 거예요.”성혜인은 주스를 받아 들면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제가 후에 꼭 밥 살게요.”임경헌은 성혜인의 당당한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말
“무슨 얘기?”반승제의 말투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앞으로 네 마음대로 이상한 여자 소개해 주지 마.”자신의 사촌 동생이 고객 중 한 명이라니, 반승제는 도저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이런 것을 더 즐기는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금욕적인 생활을하는 반승제는 당연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임경헌이 밖에서 이상한 것을 배워왔다고 생각하며 그는 조만간 잔소리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형, 진짜 안 올 거예요? 제가 형이랑 맞는 사람을 찾느라 한참 헤맸단 말이에요.”인테리어가 필요한 집이라면 임경헌에게도 몇 채 있었기에 그는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형이 싫으면 제가 냉큼 데려갈 거예요. 저는 아주 마음에 들거든요.”반승제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너 이제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말고 BH그룹으로 와서 인턴부터 시작해. 네 어머니가 이미 나한테 다 얘기했어. 그러니 넌 내일부터 출근해,”반승제는 임경헌에게 반발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임경헌은 난감한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성혜인은 바로 자신이 거절당했음을 알아차리고 위로했다.“괜찮아요. 반승제 씨가 따로 마음에 드는 디자이너가 있나 보죠.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사는 펜션이라면 신중하게 선택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임경헌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그럴 리가 없는데... 저는 아직도 디자이너를 찾고 있다고 들었거든요.”성혜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거래도 인연을 따져요. 저랑 반승제 씨는 인연이 아닌가 보죠.”“제가 후에라도 다시 물어볼게요. 만약 형이 싫다고 하면 제집을 디자인해 줘요. 저는 혜인 씨의 스타일이 엄청 마음에 들었거든요.”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임경헌은 또 전화 한 통을 받더니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 저녁은 제가 낼게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하는데 전화번호를 줄 수 있어요? 저희는 다음 날에 다시 만나요.”성혜인은 주저 없이 자신의 번
성혜인의 표정이 너무도 태연한 나머지 반승제는 자신이 너무 단순해서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 싶었다.반승제는 마치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성혜인은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이라도 회사의 미래를 위해 쟁취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체면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깟 체면에 비해 반승제가 줄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반승제 씨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저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어요. 만약 마음에 안 든다면 돈을 받지 않고 포기할게요.”반승제는 도대체 어떻게 이 여자를 형용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말문이 막혀서 가만히 있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고객이라면 이미 있잖아?”성혜인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혹시 본인의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까 봐 이러는 건가?’동시에 여러 고객의 일을 하는 디자이너도 물론 있지만 성혜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반승제 씨를 맡게 되면 다른 고객은 받지 않을 거예요. 만약 관심이 있으시다면 저한테 5분만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관심 없어.”반승제는 먼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섰다. 양한겸을 부축하고 있는 성혜인은 어찌 따라갈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양한겸을 데리고 대리 기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양한겸은 술에 취했어도 성혜인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성혜인이 문라이트 밖으로 나서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던 차 안에서 예쁜 여자한 명이 내려왔다.여자는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성혜인의 뺨을 때렸다.“너지?! 회사에서 물어볼 게 있다며 귀찮게 굴 뿐만 아니라 집으로 ‘사랑의 커피’를 보낸 사람이 너지?! 내가 진작에 발견했어. 너 오늘은 내 남편이랑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양한겸을 부축하고 있느라 미처 피하지 못한 성혜인은 뺨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여자는 화를 주
그러나 설다연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듯했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두 오빠의 일에는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반승제가 도착하자 그녀는 반진율을 안고 차에 올랐다.차창 너머로 설다연이 여전히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다연아, 같이 들어올래?”설다연은 눈을 깜빡이며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오빠가 데리러 올 거야.”성혜인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승제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했다.그러나 차가 조금 달리자마자 성혜인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이번에 설다연이 아니었으면 반진율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플로리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누가 벌인 짓이든 반드시 설씨 가문에서 밝혀내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승제 씨, 오늘 일으킨 사람의 배후를 조사해 주세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사람들을 시켜 조사에 들어갔다.한편, 한쪽 구석에서 류소영은 자신의 사람들이 성혜인을 제압하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초조해진 그녀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의 여자를 상대로 실패할 리가 없었다.류소영은 급히 쇼핑몰로 향했으나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경찰들이 그녀의 부하들을 들것에 실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모두 심각한 상처를 입은 듯 끙끙 앓고 있었다.류소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성혜인만 상대하면 될 일 아닌가?’당황한 그녀는 김현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김현서는 그때 정승후와 함께 침대에 있었고 둘은 설강민에 대해 험담을 하며 묘한 분위기 속에 있었다. 김현서는 류소영의 전화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끊어버렸다.류소영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할 수 없이 그녀는 일단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한편, 성혜인은 반승제가 찾아낸 자료를 통해 그들의 대장이 정승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처음에는
설기웅은 설다연과의 대화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지금 당장 반진율을 데려와. 절대 다치게 하지 마.”“알겠어, 오빠.”전화를 받은 이는 열아홉 살의 소녀였고 전화를 끊자마자 몇몇 남자들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설다연은 망설임 없이 바로 움직였다.성혜인이 달려왔을 때 본 것은 설다연이 반진율을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아이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녀는 반진율을 마치 강아지 다루듯 손에 들고 있었다.성혜인은 바로 다가가지 않고 그 소녀를 유심히 바라봤다. 어디선가 본 얼굴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설다연?”설다연은 반진율을 성혜인에게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어.”성혜인의 시선이 그녀에게 멈췄다. 이전에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설다연은 연구소에서 길러졌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 무지했고 말투도 다소 서툴렀다. 설기웅이 몇 년간 데리고 있었기에 이제 말은 능숙해졌지만 여전히 세상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그녀는 사랑스러울 정도로 귀엽게 생긴 소녀였고 눈에는 순수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성혜인은 그녀가 사람을 죽일 때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큰오빠로부터 설다연의 전투력이 보통 남자 쉰 명을 넘는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처음 설다연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누군가가 그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저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연구소에서는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녀는 오직 자신이 기분 좋을 때만을 기준으로 삼았다.이런 사람을 옆에 두는 건 마치 시한폭탄을 곁에 두는 것과 같았다. 설기웅이 참을성 있게 그녀를 정상인으로 길러낸 덕분에 지금은 다소 평범해 보일 뿐이었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반진율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설다연은 눈을 깜빡이며 성혜인을 바라보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들 중 한 명의 갈비뼈를 발로 으스러뜨렸다.성혜인은 그 소리에 온몸이 저릿했지만 이 남자들은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설다연은 다시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이제 됐어
설연주는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다 연락이 왔다. 정승후가 류소영에게 몇 사람을 붙여줬다는 소식이었다.설연주의 눈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원래는 류소영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정승후까지 이 물에 뛰어들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아마 둘이 같이 자멸하게 될 터였다.“알았어. 계속 지켜봐.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고.”전화를 끊고 돌아서자마자 설우현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녀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되짚어보며 성혜인의 이름을 언급했는지 확인했다. 언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오빠, 걸음 소리도 없이 언제 온 거예요?”설우현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무슨 일이에요, 오빠?”“오늘하고 내일 집에 없을 거야. 형이랑 회사 시찰하러 갈 거라서.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도우미에게 말해. 약이나 다른 것들도 다 챙겨줄 거야.”순간 설연주의 심장이 쿡 쑤셨다. 마치 독이 조금씩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알겠어요. 고마워요.”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고 설우현은 그녀의 환한 미소에 순간 눈이 부셨다.그는 몇 초간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지금처럼 웃으니까 훨씬 보기 좋네. 앞으로도 많이 웃어.”설연주는 말없이 속으로 생각했다.‘진실을 알게 될 때 화내지나 않으면 다행일걸요.’그때쯤이면 자신이 죽기만을 바랄 텐데 무슨 웃는 얼굴을 보고 싶겠나 싶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에 피어난 꽃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무 걱정 없이 피어나는 꽃들이 문득 부러워졌다.설연주는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붙였다.하지만 요즘 악몽에 시달리는 그녀에게는 설우현이 집에 있을 때만 유독 그 악몽이 사라지고는 했다.이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설우현은 그녀가 의지할 사람이 아니었다.아마도 가장 절망적인 순간 그가 천사처럼 나타난 그 장면이 마음속에 남아 그에게 약간의
류소영은 운도 참 좋았다. 그날 오후 성혜인이 혼자서 쇼핑을 나왔고 마침 그녀가 보낸 몇 명이 그녀를 발견했다.하지만 성혜인의 뒤에는 조용히 두 명의 경호원이 따라붙어 있었고 그들이 다가가기도 전에 경호원들에게 가뿐히 제압당하고 말았다.류소영은 멀리서 기다리며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 성혜인을 잡아 올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성혜인이 애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상상만으로도 짜릿할 정도로 흥분됐다.하지만 곧 류소영은 자신이 보낸 사람들이 처참한 몰골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분노에 휩싸였다.“뭐야, 여자 하나도 제압 못 해? 정말 쓸모없는 놈들이야.”그들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쇼핑몰 보안 요원들이 이렇게 강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양아치들은 그들이 성혜인을 보호하는 경호원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성혜인은 이 모든 상황을 전혀 모르고 쇼핑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그러나 류소영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성혜인을 다시 발견하기만 하면 이번에는 확실하게 잡아 올 계획을 세웠다.“이번엔 꼭 성공해야 해. 여자 하나도 못 제압하면 너희들은 내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이들은 원래 정승후를 따라다니며 생활을 유지하는 양아치들이었고 여자에게 명령을 받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류소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곧장 김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김현서는 요즘 설강민과 연락을 끊었지만 그가 쉽게 자신을 잊지 못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마음속 갈망이 점점 커지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지금 자신이 정승후와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남자라는 자존심으로라도 설강민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류소영의 전화를 확인한 김현서는 다소 귀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언니, 요즘 어떤 여자가 언니를 험담하고 다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여자가 설연주와 한패더라고요. 심지어 설연주의 따까리라니 어이가 없죠.”김현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설연주 같은 하찮은 인간에게도 따까
말을 마치자마자 설우현은 설연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설연주의 얼굴에는 마지막 남은 핏기마저 사라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오빠... 오빠였구나. 깜짝 놀랐잖아요.”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오늘 밤의 일이 그녀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분명했다.설연주가 아무런 소란을 피우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설강민은 그녀의 친오빠였다. 친오빠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는가.조금 전 겉으로 강한 척했던 건 전부 꾸며낸 모습이었다.설우현의 마음 한구석이 약간 부드러워지며 그는 도우미에게 수면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약 먹고 자.”“역시 오빠는 좋은 사람이에요.”그 말에 설우현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그 말이 별로 칭찬처럼 들리진 않았다.화가 난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설연주는 수면제를 삼켰다.원래는 이런 약을 함부로 먹지 않았다. 너무 깊이 잠들면 혹시 누가 방에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침대에 몸을 기대었지만 곧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이건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설강민을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으면 이 공포심은 평생 그녀의 삶을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설연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화장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방은 그녀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설연주는 오늘 밤 있었던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대신 되물었다.“김현서는 아직 정승후 옆에 있어?”“그래, 게다가 요즘 정승후는 김현서를 아주 애지중지하고 있어.”‘애지중지?’설연주는 피식 웃었다. 아마 김현서가 또 어떤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겠지.가끔 의아했다. 왜 이렇게 뻔하고 저급한 거짓말에 남자들이 넘어가는 걸까?하지만 곧 깨달았다. 아마 남자들도 김현서가 사람에 따라 다른 말을 한다는
설연주는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다가 설우현이 따라오지 않는 걸 깨닫고 뒤돌아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설우현은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설연주는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거짓말쟁이는 평소 말투도 거슬리더니 마음속에도 한 고집을 품고 있는 듯했다.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앞질렀다.설연주는 그가 왜 갑자기 성난 것처럼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기운조차 없었다.그녀는 거실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사실은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우현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잠시 멈춰 서 있던 그녀는 점점 온몸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오빠, 저 오늘 밤 어디서 자요?”이 집에 그녀가 머물 방이 없었기에 설우현이 준비해 주어야 했다.설우현은 사람을 시켜 객실을 정리해 그녀가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설연주는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고일까 봐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시울이 이미 살짝 붉어져 있었다.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방 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 앞에서 토하기 시작했다.밖에 있던 도우미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드렸다.“설연주 씨, 혹시 어디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집 안에 약상자가 있어요. 속이 불편하신가요?”설연주는 입가를 닦으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으며 볼은 전보다 핼쑥해 보였다.요즘 김현서와 설강민을 견제하느라 3킬로나 빠진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도우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그녀는 얼른 입을 헹구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하지만 방금 전 분명히 토하시는 소리가...”“아니에요.”그녀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 사람들은 모두 설우현의 사람들이었다.설연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설우현이 그녀를 싫
설우현이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설강민은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데 설우현이 이 중요한 순간에 여기에 나타날 줄이야.설우현은 침대 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설강민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쟤는 네 여동생이야!”설강민은 주먹을 맞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그제야 설강민은 울먹이며 말했다.“난 이런 여동생 없다고요!”침대 주위에 둘러서 있던 남자들도 잠시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설우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다 꺼져! 당장!”남자들은 설강민이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설우현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침대 위에서 설연주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설우현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에 묶인 끈을 풀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피가 묻어 있는 끈을 보자 그의 손이 멈칫했다. 차마 그 끈을 풀 수가 없었다.“조금만 참아.”그때 설연주는 힘겹게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현 오빠, 진짜 와줄 줄은 몰랐어요. 순간 눈앞에 천사가 나타난 줄 알았어요.”설우현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그녀를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그는 가위를 찾아 곧장 끈을 잘라냈다. 설연주의 손목은 이미 피가 나고 살이 벗겨져 끔찍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보이는 오래된 상처들까지 발견했다.설우현은 그 상처들이 무엇 때문에 생긴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설연주가 그동안 어떤 비밀을 숨겨왔는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설연주는 끈이 풀리자마자 피곤한 듯 침대에 몸을 기댔다.“저 좀 데려가 줘요. 너무 졸려요. 우현 오빠가 있는 곳이 저한테는 가장 안전한 곳이에요.”설우현은 거절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는 가슴께가 습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고개를 내려보니 설연주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깨진 인형처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설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여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안 가. 혼자 미쳐가든 말든 나 찾지 마. 밖에 너한테 매달리는 남자들 많잖아? 그쪽이나 찾아가.”설연주는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더욱 단단히 몸에 두르며 오늘 밤은 이렇게 버텨보려 했다.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비몽사몽인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설강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얘야.”곁에 있던 남자가 물었다.“정말 괜찮겠어? 이 여자 네 동생이라며. 너희 아버지가 돌아오면 우리 가만두지 않을 텐데.”“괜찮아. 우리 아버지는 얘 인정하지도 않거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할게, 할게. 우리도 설씨 가문 여자는 처음이거든. 전에 뉴스에서 본 성혜인 얼굴, 하... 진짜 대박이던데.”설연주는 눈을 번쩍 뜨고 자신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상의를 벗은 채 야릇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연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문 앞에 서 있는 설강민을 바라봤다.‘설강민은 가출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지?’설강민은 담배를 피우며 그녀의 도움 요청에 일부러 못 본 척하며 말했다.“너희한테 주는 거야. 마음껏 즐겨.”남자들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설연주는 몸을 한쪽으로 굴렸으나 금세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설강민, 제정신이야? 아버지한테 혼나는 게 두렵지 않아?”설강민은 오히려 더 화를 내며 소리쳤다.“그래, 당연히 혼내겠지! 이제 너 때문에 아버지가 나까지 쫓아낼 지경이라고. 이런 아버지 나도 필요 없어. 설연주,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놓고 넌 무사할 줄 알았어?”설연주는 설강민이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남자들을 집에 불러 그녀를 겁탈하라고 하다니.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심으로 두려움이 밀려오는 순간이었
설연주는 내내 말없이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 물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설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강민이 지나치게 시끄럽다면 이 딸은 가끔 너무 조용했다.“연주야, 올라가서 자.”설연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아버지. 너무 화내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설준석은 반평생을 살며 아들한테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아버지로서의 자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가슴이 살짝 저릿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돈이 부족하면 말해.”“괜찮아요. 지난번에 주신 4억 원도 아직 안 썼어요.”설준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애인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설연주는 넓디넓은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너무도 넓어 차갑게 느껴졌고 마치 온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고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은 언제나 혼자 남는 것이 당연했다.방으로 가서 쉬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특정한 벨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설연주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받아들었다.남성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밤 사람 보내서 널 데디러 갈 거야.”이 남자는 오성파의 두목이자 설연주가 기대고 있는 가장 두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와 엮인 것을 후회했지만 그때는 정승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때 마주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설연주가 말없이 듣고만 있자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왜? 이제 설연주가 됐다고 나를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설연주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각인된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기다리던 남자는 짜증이 나는 듯 말을 이었다.“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알잖아? 예전에 울며 빌면서 영원히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