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네.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돼서요.”당시연은 미간을 누르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원진에게서 온 전화가 확실했다.“미안해. 나 지금 집 아래...”말을 하면 할수록 당시연은 발음이 어눌해졌다. 원진은 다급하게 내려와서 동네를 한 바퀴 돌고서 아파트 단지의 대문 앞에 있는 편의점까지 와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당시연은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잠이 들었고 테이블 위에는 술이 몇 병 정도 있었고 과자도 한 봉지 열려있었다.그는 마음이 따뜻해져서 웃음이 났지만 그래도 허리를 숙여서 당시연을 부축했다.“누나?”당시연은 정신이 든 것 같기도 깨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상태로 원진의 품에 기대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당시연은 자신이 데리고 온 아이인 원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착각인지 아닌지 원진의 키가 더 큰 것 같았다. 금방 집에 왔을 때 178센티 정도였는데 지금은 180센티가 되는 것 같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서 당시연은 헛디딜 뻔했지만, 원진이 잡고 있었다. 165센티 정도 되는 당시연의 키에 원진의 손을 잡아야만 넘어지지 않을 수가 있었다. 당시연은 몸에서 술 냄새가 났고 얼굴에는 연한 화장이 남아있었다. 원진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잠깐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꺼내서 어떻게 화장을 지우는지 검색해보았다.“누나, 화장 지워줄게요.”당시연은 소파에 기대서 살짝 움직이더니 더 반응하지 않았다. 원진은 화장품과 기초 제품에 대해서 몰랐지만, 딥클렌징이라는 글자는 알아보았다.인터넷에서 찾아본 순서대로 그는 허리를 굽히고 열심히 화장을 지웠다. 당시연의 얼굴이 깨끗하게 씻겨진 것을 보고 나서야 원진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원진은 당시연을 부축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당시연이 침대에 누운 다음 원진은 그녀의 신발을 벗겨주었다. 하지만 원진은 당시연의 옷에는 손을 대지 못했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방안의 불을 끄고 나갔다.거실로 돌아와서 원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더러워진 화장솜들을 보고 그것들을 모두
당시연은 칭찬을 건네고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원진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더니 꼭 다물고 있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어색하게 자신의 소매를 정리하고 있었다.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당시연은 자리에 앉자마자 옆 테이블에 있는 김성진을 보았다.김성진과 같은 전공의 학생들이 나와서 모임을 하는 것 같았는데 조촐한 모임인 듯 모두 네 명이었다.당시연을 보았을 때, 김성진은 멈칫했다가 원진을 보고서 화가 치밀어 얼굴이 빨개졌다.“이게 누구야? 당시연, 새 남자친구 생겼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다른 사람이 생길 수가 있어? 너는 애초에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당시연은 김성진의 화난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김성진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느끼고 얼른 진정했다.당시연은 자리를 바꾸고 싶었지만, 이 레스토랑이 너무 인기가 많은 탓에 남은 자리가 없었다. 이 레스토랑은 해산물 요리가 메인이었는데 주문하는 즉시 죽여서 요리하는 거로 유명했다.당시연은 원진의 맞은편에 앉아 먼저 시그니처 세트를 주문한 다음 메뉴판을 원진에게 건넸다.“먹고 싶은 거 한번 봐봐.”불이 뿜어져 나올 듯한 김성진의 눈빛은 원진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 원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메뉴판을 건네받아서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주문했다.“누나, 제가 살게요. 지난번 화학 대회에서 상을 받았어요.”이 일을 이수희가 얘기했었지만, 당시연은 받은 돈을 원진이 직접 갖고 용돈으로 쓰게 했다.자신이 계속 도와주던 아이한테서 음식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뿌듯함이 느껴졌다.“그래.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김성진은 그제야 그 사람이 원진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그의 눈에는 질투하는 기색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원진의 변화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그때 쭈뼛쭈뼛하던 남자애는 어느새 학교에서 무척 환영받는 모습으로 변해있었다.김성진은 칼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표정이 일그러졌다.예전에 원진과 당시연
김성진의 시선은 원진에게로 향했는데 원진이 당시연을 보는 시선이 불순하다고 느껴졌다. 그는 당시연과 같은 여자애들이 남자의 마음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첫사랑 같은 존재였다.예쁘게 생긴 데다가 성격도 좋고 매사에 열심히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불안감이 더해졌다.“당시연, 얘기 좀 해.”당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할 얘기 없어. 천천히 식사해. 나는 먼저 가볼게.”김성진은 체면이 중요한 사람인데 여러 번 거절을 당하고 나니 화가 치밀었다.“너 원진이랑 잤지?”당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예전에 원진이 처음 그녀의 집에 왔을 때부터 김성진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지금 반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당시연,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우리 지인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어린 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성진은 따귀를 세게 맞았다. 김성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얼굴을 움켜잡았다.“지금 저 자식 때문에 나를 때렸어?”당시연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김성진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곱게 자랐고 또 집에 돈이 많았기 때문에 본성은 아주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받는 것에 익숙했고 누군가가 자신을 받들어주지 않는다면 그걸 못마땅해했다.“김성진, 네가 이렇게까지 저질일 줄 몰랐어!”김성진은 곁눈질로 자신의 동기들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문득 후회했다. 당시연과 이렇게 난리를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뺨을 맞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김성진은 깊은 곳에서 불쑥 어떠한 힘이 치밀어 올랐다. 따귀도 맞은 마당에 오늘 반드시 말을 끝까지 해야 했다.“아니야? 이 자식이 너를 보는 눈빛을 못 봤어? 나도 남자야. 그러니까 그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고!”당시연은 화가 치밀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진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잠깐 생각하다가 다가가서 당시연의 등을 토닥였다.“누나, 저 때
말이 최선이지 사실 사력을 다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두 번째 학기 때, 원진은 반에서 1등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17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당시연도 이때에는 졸업했고 선생님이 될 생각이었지만 자신의 지도 교수님의 추천으로 남게 되었다.대학교 4년 동안 당시연은 계속 이 교수님의 밑에 있었고 그 기간에 많은 대회에 참가했었다. 지금 교수님은 그녀가 계속 학업을 3년 정도 지속하기를 제안했고 그렇게 되면 그녀를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게 추천할 수 있었다.당시연은 고민도 하지 않고 승낙했고 이것 때문에 더 바빠졌다. 아무래도 교수님한테 있는 프로젝트들은 모두 해외와 관련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녀는 대부분 시간에 따라서 외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다.대학의 교수님들은 겸손하시지만 사실 밖에 나오면 대부분이 대단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연도 외국에 나와서야 자신의 교수님이 그쪽 연구소에서의 명예 교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연은 거기서 두 달 정도 지냈는데 그 기간에 이수희의 전화를 받게 되어 원진이 처음으로 1등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직 성적표를 나눠주지 않았어. 먼저 너한테 전화해서 말하는 거야. 그 아이가 참 영리해. 그런데 너 요즘 외국에 있지 않아? 진이는 매일 학교에서 아주 늦게까지 남아있던데.”“선생님, 저 지금 외국에 있는 거 맞아요.”“너랑 진이는 얘기를 별로 안 하지? 나한테 네 스케줄을 묻더라고.”당시연은 자신의 핸드폰을 한번 보았다. 얘기를 안 하는 건 아닌데 시차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메시지가 원진이 휴식하는 걸 방해할까 봐 시간에 따라 연락하고 답장이 적어진 것뿐이다.“휴식하는 데 방해될까 봐 그래요. 너무 열심히 하잖아요. 매일 잠도 얼마 자지 않으면서 말이에요.”이수희는 자신의 손에 있는 시험지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때 이 아이를 반에 데리고 왔을 때 다른 선생들은 모두 볼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어. 모두 우리 반의 짐이 될 거로 생각
공교롭게도 오늘 밤 김성진도 이 술집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인들과 나와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졸업한 김성진은 집에서 경영하는 회사를 이어받을 예정이었고 자연스레 경영진들과 술자리를 함께해야 했다.이 사람들은 모두 여자 파트너를 데리고 왔고 술을 마시고 나서는 계속 여자의 옷에 손을 넣고는 했다.김성진은 이 모습을 보면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중 한 사람이 여자 파트너를 데리고 화장실을 가겠다면서 떠났다. 정말 화장실로 가는 게 맞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몇 분 후, 밖에서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미친년, 너 이게 무슨 뜻이야? 내가 늙었다고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고등학생한테 번호를 물어봐? 젠장, 내가 너를 너무 봐줬지?”“이거 놔요! 이 손 놔요!”“미친년, 저 자식을 보는 네 눈에 빛이 도는 걸 봐서는 네가 뒤에서 얼마나 더럽게 노는지 다 알 텐데, 번호를 물어보러 가? 내가 너 때려죽일 거야!”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김성진은 방금 나간 자신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얼른 일어서서 나왔다.이때,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원진을 보게 되었다. 원진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김성진은 발걸음을 멈추었고 분노가 또다시 타올랐다. 저번 학기에 원진에게 저격당한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한 학기를 못 봤는데 키가 더 크고 더 품격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치 당시연이 한번 다시 키운 듯했다.김성진은 마음이 아주 불편했다. 그는 이미 소유진을 명확히 거절했고 그렇게 하면 당시연이 언젠가는 마음이 돌아지리라 생각했는데 몇 달이 지나고 두 사람이 각자 졸업을 한 마당에도 당시연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예전에도 김성진은 당시연과 싸움을 하지 않은 게 아니지만, 매번 당시연은 스스로 돌아왔었다.하여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김성진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의 원진을 본 그는 갑자기 두려움이 생겼다. 그제야 그는 무언가가 자신의 인지를 벗어
원진은 남자의 주먹을 놓아주고 시선은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김성진에게로 향했다. 김성진은 여유만만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가난에 찌들어있던 절박함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당시연이 사람을 참 잘 키웠다. 기품이 있고 반듯했다.생각하면 할수록 김성진은 더 질투가 났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는 다른 사람을 질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에야 질투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김성진의 질투는 남김없이 원진에게로 직접 표출되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물리고 마치 불꽃이 일 것 같았다.원진은 손에 들렸던 과일 맛 술을 내려놓았다. 이런 종류의 술은 맥주랑 비슷해서 몇 병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김성진은 차갑게 웃었다.“역시 어린 애야.”원진은 똑같이 비아냥거렸다.“그렇죠. 당신 같은 어른들처럼 느끼하지는 않죠.”젊음은 자산이지 비웃음을 받을 이유는 아니다. 김성진은 마음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술을 두 잔 정도 마신 것 때문에 후끈해지는 것 같았다.“시연이가 너를 언제까지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아? 반년이 더 지나면 나랑 결혼할 거야. 그때가 되면 너는 네가 살던 데로 돌아가야 할 거야.”“그래요? 누나가 요즘 형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저번에 따귀를 맞은 후부터 두 사람 완전히 헤어진 거 아니에요?”원진은 따귀를 맞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어 김성진은 더 체면을 구겼다.김성진은 왜 매번 원진을 마주칠 때마다 참을 수가 없었는데 몇 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아마도 서로를 처음 봤을 때부터 제일 강력한 상대가 될 것이고 제일 소중한 것을 빼앗기리라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원진,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현재 누나가 제일 신경 쓰는 사람이죠. 오늘은 저의 17살 생일이에요. 누나가 특별히 외국에서 돌아온다고 하죠. 이따가 데리러 가야 해요.”원진의 곁에 있던 친구들도 그제야 원진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시연 누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소란이 끝나고 나니 원진이 있는 이곳의 분위기도 조금 이상해졌다. 원진에게 연락처를 묻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계속해서 방해받았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오늘 진이를 찾은 사람들로 축구팀 하나는 충분히 꾸리겠는데?”“이게 어른들의 세계인가? 이렇게 직설적이라니. 인정, 인정.”그 친구의 발언이 너무 웃겨서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하지만 원진은 눈에 띄게 기운이 빠져 보였다. 조금 전 그가 김성진을 속이기 위해 당시연이 귀국한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당시연이 오랫동안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마치 자신이 버려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시연 누가 이제 나를 정말로 버리려는 걸까?’원진은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손에 쥔 잔을 더 세게 잡았다. 그와 동시에 눈가가 뜨거워졌다.한 시간 후 모임이 끝났다.원진은 택시를 타고 살고 있는 아파트로 돌아갔다. 멀리서 당시연의 모습이 보였고 그의 눈이 순간 환해졌다. 막 달려가려던 순간 당시연의 곁에 중년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당시연, 내가 김성진의 회사에 찾아가지 않았다면 너희가 이렇게 오래 전부터 헤어졌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네가 정말 원진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어?”당시연은 원진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 서둘러 해외에서 돌아왔다. 아직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는데 당지석이 그녀를 막아섰다.그녀는 피곤함을 느꼈다.“아빠, 원진은 학교에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제 반에서 1등도 했고 이수희 선생님도 그 아이는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어요. 나중에 제원대에도 충분히 갈 수 있을 거라고요. 제발 그 아이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지 말아주세요.”“그만해! 그 아이 때문에 너와 성진이가 헤어진 거잖아. 내가 성진이의 회사에서 나간 후에도 성진이는 계속 너에게 연락하려고 시도했어. 성진이가 아직 너를 놓지 못한 건 분명해. 성진이와 대화를 잘 나눠서, 6개월 안에 너희 결혼 문제를 확정 짓도록 해.”당시연은 손에 작은 여
원진은 주방으로 가서 요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냉장고에서 얼음팩도 꺼냈다.하지만 당시연은 너무 피곤했다. 소파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얼굴에 차가운 감촉이 닿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원진의 진지한 표정을 마주했다.그의 눈에는 걱정, 아쉬움, 그리고 무언가 깊숙이 감춰진 감정이 담겨 있었다.당시연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원진이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원진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순간 더 진지하게 변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얼마간 당시연의 얼굴에 얼음을 대고 있던 원진이 물었다.“시연 누나, 정말 저를 돌려보내실 건가요?”당시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알았다.원진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후로 그는 수없이 그녀와 가족들 간의 다툼을 목격해왔다. 아마 그는 늘 불안 속에서 지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을 것이다.당시연이 눈을 뜨자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원진의 손이 점점 더 불안하게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소년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꼬리를 흔들며 애원하는 강아지 같았다.당시연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늘 원진의 성적만 신경 썼지 그의 마음 상태는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한 번도 도시의 높은 빌딩을 본 적 없는 산골 소년이, 갑자기 낯선 세상으로 끌려왔다면 얼마나 무서웠을까?그제야 당시연은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를 키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그녀는 원진을 끌어안았다.원진은 그녀보다 키가 훨씬 컸지만 이 순간에는 몸을 최대한 낮추어 그녀의 어깨에 기대었다.당시연은 위로하듯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원진을 안고 있는 동안 당시연은 그가 꽤나 건장해졌다는 걸 느꼈다. 처음 산속에서 그를 봤을 때에도 그를 안아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마치 작은 고슴도치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사람을 밀어냈었다.그때 당시연은 이 아이가 너무 말라서 마음이 아팠다.이제 원진의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바로 문을 나섰다.공지민은 식탁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다.한편 온시환은 집을 나서자마자 추지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문을 열자마자 거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온시환은 침착하게 옷을 발로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거실 한가운데에서 추지성은 한 여인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온시환을 보자마자 놀란 나머지 금세 흥미를 잃고 입맞춤을 멈췄다.“시환아?”추지성의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온시환은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무시했다.추지성은 이마를 문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부드럽게 달랬다.“이만 가봐.”여인은 옷이 주워 입으며 서둘러 방을 나가자 추지성은 타올 하나만 걸친 채 태연하게 소파로 와서 앉았다.“야, 너 다음부터 올 때는 전화 좀 하고 와라.”온시환은 담배를 쥔 손이 축 늘어진 채 지쳐 보였다.추지성은 의아했다. 분명 어젯밤에는 공지민과 화해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가 싶었다.“무슨 일이야? 아침에 전화로 자랑질하더니만. 아, 맞다. 너 점 다시 찍었더라? 확실히 점 있는 네가 낫다. 예전에 다른 여자들도 그 점이 좋아서 너한테 홀렸잖아.”온시환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구은우의 죽음을 조사하려는 거였어.”추지성은 옆에 놓인 주스를 집어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죽은 사람의 일을 왜 조사해? 이게 몇 년 전 일이냐. 다 끝난 거잖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난 가끔 여자들이 이해가 안 돼. 남자라면 이미 새로운 연애 몇 번은 했을 텐데.”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봐봐. 주변에 아내 잃은 남자들 있지? 그놈들 지금 얼마나 잘 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근데 남편 잃은 여자들은? 평생 못 벗어나.”추지성의 가족 이야기도 이어졌다. 그의 친누나는 난
공지민은 정말 지쳤다. 밤새 몇 번이나 잠들 뻔했지만 온시환이 계속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온시환을 바라봤다. 그의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끊임없이 떨어졌다.온시환이라는 이 나쁜 남자 몸매 하나는 참 잘 관리했다.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코끝에 점이 있는 온시환이 더 좋았다. 만약 점이 없었다면 그와 대화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온시환은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빌어먹을.’공지민이 이 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다행히 다시 그 점을 되돌려 놨다.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날 공지민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침에 일어나 사골국을 끓이려고 했지만 전날 밤 온시환의 끈질긴 괴롭힘에 결국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깨어났을 땐 창밖에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온시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래, 점 다시 찍었어. 신경 꺼. 쪽팔려도 내가 쪽팔려. 너랑 무슨 상관인데. 자꾸 그딴 소리하면 화낼 거야.”지난번 온시환이 점을 제거했을 때 많은 사람이 물었다. 그는 그냥 없애고 싶어서 없애는 거라며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해 왔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점을 다시 찍자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궁금해했다.온시환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추지성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온시환은 그에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사실 추지성이 온시환을 부추기지만 않았더라도 그와 공지민이 이렇게까지 어긋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지성은 여전히 냉철했다.“지난번에 너희가 금방 헤어지고 네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지민 씨는 한 번도 널 보러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너희가 다시 잘되길 반
하지만 택시 기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지민이 내리려 할 때까지도 계속 말했다.“내가 보니까 그 남자 친구 참 괜찮아 보이던데. 뒤따라오는 저 차도 그 사람 거죠? 아무리 싸웠어도 아가씨 혼자 차 타고 가는 거 걱정돼서 저렇게 따라오는 거 아니겠어요?”공지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온시환의 차가 틀림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집에 도착한 공지민은 곧장 인터넷에서 그 남자 배우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이름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은 아예 생략돼 있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예전에 알던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혹시라도 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공지민은 연예계에서 활동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인맥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사교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이번 조사가 더욱 쉽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돈을 송금하며 기자들에게 의뢰했지만 돌아온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남자 배우의 어머니와 동생의 연락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마음이 초조해진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분명 실마리를 찾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공지민의 시야에 여전히 아래에 서 있는 온시환의 차가 들어왔다.만약 온시환이의 능력이라면 이런 조사는 금세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고 집 문을 열었다.아래로 내려온 그녀는 온시환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운전석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온시환은 공지민을 보자 깜짝 놀란 듯했다.공지민이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시환 씨.”온시환은 그녀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공지민은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는 예전과 똑같은 점이 다시 자리 잡고 있었다.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공지민은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를 부축했다. 남자는 술이 정말 많이 취했는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다 대답했다.10억...엘리베이터가 한 층에서 멈췄을 때 공지민은 그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남자는 자신의 방 카드를 꺼냈고 공지민을 향한 시선은 이미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다.공지민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건넨 카드를 받아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막았다.뒤를 돌아보니 온시환이었다.온시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그렇게 공지민은 그의 가슴팍에 부딪혔고 옆에 있던 남자 배우는 누군가 자신을 막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있다가 온시환의 얼굴을 보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온 작가님?”온시환은 공지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원래부터 이 남자와 뭔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얼굴로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공지민, 너 그렇게 절박해?”‘절박해’라는 말이 그의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너무 떨려 담배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갔다.공지민은 온시환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남자 배우와 관련된 조사에 쏠려 있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반드시 구은우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결심했다.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온시환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모임 장소는 고급스러워서 촬영을 마친 여러 제작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오늘 밤에도 몇몇 팀이 이곳에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연예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온시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