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성혜인이 문득 그의 손가락에 난 물집이 떠올라 얼른 일어섰다.“전에 준 연고 아직 가지고 있죠?”반승제가 옆에 있던 서랍에서 연고를 꺼냈다.성혜인은 방 불빛에 의지하여 그의 손가락에 조심스레 연고를 발라주었다.그 모습을 반승제는 유심히 바라보았다.그녀의 연한 목덜미를 따라 내려다보면 잠옷이 아래로 드리워져 하얀 속살이 드러났고 그녀의 살에는 자신이 남겨놓은 울긋불긋한 흔적들이 가득했다.지금 성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그의 손가락을 잡고 있었다.반승제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약을 다 바른 성혜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우리 위험해진 거 아니에요?”반승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눈썹과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준수했고, 그는 성혜인의 얼굴을 받치고 입술을 가볍게 맞댔다.“반승우는...”그의 이름을 꺼내기에 바쁘게 입술이 따끔해졌다.반승제가 순식간에 그녀의 손을 결박하여 위에서 내리눌렀다.“설기웅과 둘이 협력하기로 한 것 같아. 그 사람은 가문도, 너도 가지고 싶어 해.”그를 보는 성혜인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그럼 승제 씨는요?”반승제가 천천히 몸을 숙여 성혜인의 목에 키스했다.“난 너만 있으면 돼.”그에게는 가문도 필요 없었다.지금 이 순간 성혜인은 자신의 무능함이 원망스러워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반승제의 목을 감싼 채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반승제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우리 이제 다시 만나는 거야?”성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조심스럽게 성혜인의 잠옷을 벗겼다.“아직 시간이 일러요.”“아니, 읍...”두 사람의 구애가 끝났을 때는 새벽 6시였다.반승제는 성혜인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 정장을 입고 침실을 나왔다.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변했다.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심인우가 서류를 건넸다.“어젯밤 반승우가 보내온 유언장입니다. 어르신께서 반승우가 죽었을 시에 15%의 주식을 양도하겠다고 조건을 붙였습니다. 지금 반승우가 살
별장의 서재에 앉아있는 배현우의 옆에는 설기웅이, 설기웅의 옆에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한 남성이 앉아 있는다.남성의 손가락은 유난히 길고 예뻤는데 그는 무심하게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설기웅은 등을 뒤에 기댄 채 두 손을 깍지 끼고 있었다.“이미 설씨 가문 사람들과는 얘기 끝냈어요. 다들 당신 편에 설 겁니다. 반씨 가문은...”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승우가 냉소했다.“반승제 그 자식, 얼마나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살았으면 내가 돌아오자마자 죄다 내 쪽으로 오는 거지? 하하.”이렇게 오랫동안 반씨가문의 후계자로 살아왔음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픈 일이었다.배현우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눈빛에 악의가 가득했다.“기웅 씨는 반승제가 설씨 가문과 약혼하길 원하고, 전 성혜인을 원하니 우린 한배를 탄 겁니다. 함께 잘 해봅시다. 설 대표님.”그는 옅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이에 설기웅이 냉랭하게 손을 얹었고 이때 그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 여동생한테 정말 잘해주네요.”설기웅은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이었다. 들어온 데에 의하면 반승우는 부드러운 사람이라 했는데, 며칠 동안 접해온 그는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잔인함은 반승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다년간의 사업 경험으로 그는 본능적으로 반승우와 너무 많이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그의 시선이 옆의 다른 남성에게 향했다. 그와 반승우가 서로 관계가 있는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설기웅이 떠나려고 몸을 일으켜도 배현우는 배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곧 설기웅이 떠나고 배현우와 그 남성만 남게 되었다. 배현우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그쪽은 목적이 뭐예요?”남성이 고개를 살짝 들며 대답했다.“전 그저 제원, 이 도시가 좀 혼란스러워졌으면 좋겠어요.”“아, 구경꾼? 뭐, 그래도 잘 해봅시다. 적어도 반승제 쪽 사람은 아니니.”남성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저 미세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
일단 선택되면 자유는 꿈꿀 수 없으며 이후의 모든 시간은 거의 상부의 감시하에 살아야 한다.당시 반승우는 자기 동생이 늑대, 맹수라고 생각했다. 맹수는 사슬에 묶이는 것을, 자유를 뺏기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그래서 그는 스스로 사슬에 묶였다. 당시 그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반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 역시 원하지 않았다.그는 동생을 위해 족쇄를 채웠고, 성혜인 때문에 족쇄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그 빠져나오는 과정이 너무 길었고, 그 과정에 죽을 줄은 몰랐다.배현우의 말에 집안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반기훈은 아들의 몸에 남은 바늘 자국들을 바라보았다. 몸 성한 곳 없이 빽빽한 바늘자국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그는 고개를 돌렸다.어르신 역시 이 흔적들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 반승우의 손을 들어주고 반승제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었다. 지금 장면을 보고 있는 반기훈은 이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배현우는 두 팔의 바늘자국을 어루만졌는데, 하도 많은 약물들을 주입해 구멍이 촘촘했으므로 보기에도 끔찍했다.“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실험을 당해오면서도 버틸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바로 혜인이었어. 승제야, 넌 내 동생으로서 밖에선 반씨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까지 했잖아. 이게 공평하다고 생각해? 애초에 성혜인은 나를 좋아했는데. 걘 가문을 위해서 너한테 시집간 거였어.”반승제의 시선이 배현우가 드러낸 팔에 멈췄다.배현우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전에 반승우가 성혜인을 구하면서, 또 자발적으로 차에서 뛰어내린 이후로 반승우의 인격은 전보다 훨씬 약해졌다.덕분에 배현우는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고 심지어 이제는 실험당할 때의 기억도 떠오르게 되었다.정말이지 죽는 것만도 못한 시간이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그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배현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배현우는 반승우라는 인격을 죽이려고 하는 와중에도 반승우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약물을 참아내고 이겨냈다는
총소리를 들었을 때 반기훈은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기분이었다.찻잔을 던지고 그 찻잔이 아들의 머리에 부딪혔을 때, 그는 당황스러움에 손끝이 순간 굳었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반승제는 천천히 총을 내리고 배현우를 한 번, 반기훈을 한 번 바라보았다.그들의 눈빛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반씨 가문에서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그 사람마저 죽기 전 반승우를 도왔다는 사실을.아버지 역시 마음속으로는 반승우를 편애했었다. 그전엔 단지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을 뿐.그러나 반승제는 실망하지 않았다. 반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반승우가 고의로 이런 짓을 한 것도 이 사실을 똑똑히 알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총을 잘 정리해 넣은 뒤 자리를 뜨려 했다.반기훈은 뒤쫓아 가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정도껏 좀 해. 그래도 네 형인데.”반기훈은 이때 배현우를 등지고 있었으므로 배현우의 악독한 눈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반승제는 똑똑히 보았다.배현우가 그를 향해 웃으며 목을 긋는 동작을 해 보였다. 그의 뜻은 매우 분명했다. 그가 돌아온 목적에는 반승제를 죽이는 것도 포함이었다.원래 그는 반승우에게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와 몸을 함께 쓴다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하지만 반승제와 성혜인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반승제에게도 원한을 품게 되어 두 형제를 끔찍이 싫어하게 되었다.반승제는 그를 바라보다 자리를 떴다.그리고 반기훈이 뒤돌아봤을 때 배현우는 이미 온화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반기훈은 배현우의 팔에 난 수많은 바늘 자국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그러나 그런 반기훈을 보는 배현우는 가소롭기만 했다. 사실 이 고통은 모두 반승우의 것이고, 당시 본인에게 족쇄를 채운 것도 반승우 자신이지 배현우가 아니었다.안타깝게도 지금의 반승우는 인격이 하도 허약해서 그저 머릿속에서 작게 말을 걸 뿐이었다.“혜인이 놔줘.”반승우의 인격은 이미
“좋죠. 아버지.”반기훈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죽은 지 6년이 된 아들이 돌아왔으니 기뻐해야 할 텐데.그런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떠나보냈고 아내는 병원에 있으며 형제 둘은 사이가 벌어졌다.반기훈은 한순간에 나이를 몇 살 더 먹은 기분이었다.그는 큰 아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랐고, 그가 보냈던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무엇으로 채워주어야 할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그런 그가 둘째 아들더러 여자를 양보하도록 설득하는 방법은 알 리가 없었다.반승제는 이미 저택을 나온 뒤였다. 차에 올라탄 후 그는 옆에 놓은 수건으로 옷에 묻은 찻물을 벅벅 닦았다.운전석에 앉은 심인우는 그의 흐린 안색을 보고 감히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반승제는 회사가 아닌 네이처 빌리지로 향했다. 성혜인이 아직 그곳에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도착했을 때 성혜인은 없었고 고용인은 그녀가 회사로 갔다고 알려주었다.그는 요새 온수빈의 일로 연예계가 뜨겁게 달궈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 성혜인도 이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게 보낼 것이다.그러나 다 알고 있음에도 그는 성혜인이 보고 싶었다. 특히나 아버지께 찻잔으로 머리를 맞은 뒤 그는 더 미친 듯이 성혜인이 그리웠다.그는 네이처 빌리지의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반 시간이 흘렀고, 회사 상류층의 사람이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대표님, 반승우가 회사에 왔습니다.]반승우가 15%의 주식을 가지고 있으니 그 역시 상류층에 속했다.반승제는 메시지에 개의치 않고 성혜인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문자를 한 줄 썼다가, 다시 지우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결국 보낸 문자는 네 글자였다.[보고싶어.]같은 시각 성혜인은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그가 청한 전문 사립탐정은 이미 적지 않은 사진을 찍어 보여주었다. 성혜인은 한 자폐아 아동의 부모를 조사하게 했는데 최근 그들의 계좌에는 돈이 더 들어오지 않았다.상대방이 수표로 주었을 수도 있고, 아직 은행에 가서 현금화 하지 않았을
성혜인과 반승제는 모두 첫 연애였다. 반승제는 회사를 잃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성혜인을 북아메리카의 지하 격투장으로도 데려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심지어 성혜인만을 위해 규칙을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도 그렇게 자신의 명성을 버릴 만큼 자신을 사랑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반승제는 이곳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지만 성혜인은 아니었다.그랬기에 반승제도 성혜인의 마음으로 도박할 수 없었다.차에 오르면서도 성혜인은 반승제의 기분이 갑자기 가라앉은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반승우가 돌아와서 주식의 15%를 가져가 대표 자리를 위협받았기 때문일까, 혹은 반씨 사람들이 반승우에 대한 편애 때문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성혜인이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왜 반승우는 하필 자신의 회사가 언론 때문에 바쁠 때 돌아오려 해서 이렇게 힘들게 하지?약속 장소에 갔더니 상대의 태도는 거만했다. 그녀는 시종 턱을 치켜올리고 대응했고 성혜인과의 약속이 달갑지 않은 듯 보였다.현재 인터넷은 성혜인과 S.M에 대한 욕설로 가득했기에 얼른 이를 해결해야 했다.“여사님.”성혜인이 예의 바르게 호칭하며 여인의 맞은편에 앉았다.“인터넷에서 그러더군요. 자식을 미끼로 판을 짜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전 우리 회사 아이들 엄청 신뢰하거든요. 딸이 자폐증이라던데 이렇게 아이 명예 훼손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요?”연령이 자신의 전화를 열어 보여주었다. 실검에는 온통 온수빈에 대한 말들이었고 악플들이 가득했다. 특히나 온수빈의 팬들이 마구 욕설을 듣고 있었다.톱스타가 단 하루 만에 최정상에서 사람들이 마구 손가락질하는 연예인으로 전락하였다.“성 대표님, 오늘 그런 말을 하러 오신 거라면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겠네요.”여인의 눈에는 온통 경멸이 가득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잔을 밀더니 말을 이었다.“게다가 전 커피 마시는 거 안 좋아합니다. 대표님은 상류층이라 우리 같은 일반인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어폰의 반대편에서, 연신 연령의 이름을 부르던 린다는 그제야 상대편에서 통화를 끊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화가 나 하마터면 앞에 놓인 테이블을 뒤엎을 뻔했다.“미친년이 감히 전화를 끊어? 내가 무섭지도 않아?”이 재벌 2세들은 설인아의 별장에 모여 있었다. 린다의 말에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린다, 뭘 그렇게 화를 내. 실수로 그런 거겠지.”“그러니까. 성혜인 하나 상대하는 데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기웅오빠한테 들어보니 반승제도 요새 궁지에 몰린 것 같던데. 반승제 없이 성혜인이 뭐 되기나 하냐고.”“쓰레기한테 화내는 건 너무 격 떨어지잖아.”그들의 말에 린다는 순간 화가 풀렸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그년이 이미 우리 돈 챙겨갔어. 원래는 좀 지령으로 뭐라도 정보를 얻어볼까 했는데 성혜인이 입이 그렇게 무거울 줄이야. 게다가 이제 통화까지 꺼버리다니. 둘이 협력하면 어떡해?”“린다, 설마 성혜인이 복수할까 봐 두려워서 그래?”누군가의 말에 현장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곧이어 린다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그래, 성혜인이 복수할까 봐 두렵냐고? 성혜인이 알아도 뭐 어떡할 건데. 쓰레기 두 개가 모인다고 설마 무슨 일이라도 해낼까 봐?여기까지 생각한 린다는 곧 득의양양해졌다. 또 성혜인이 그렇게 멍청하고 비천한 연령과 협력하다가는 언제 그년한테 물릴지 어떻게 알아.린다는 현장의 재벌 2세들과 다시 분위기를 즐기기 시작했고, 그들 중 더 이상 성혜인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에겐 연령을 다시 매수할 충분한 돈이 있었으니까.그 천한 년은 돈에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성혜인 쪽에서 주는 돈이 그들보다 많을 리 없다.한편 카페에서.연령이 이어폰을 빼는 순간, 성혜인은 천천히 커피를 홀짝 마셨다.연령은 성혜인을 한참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은 전혀 당황하지 않는 것 같네요.”성혜인은 들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여사님께서 왜 저를 만나러 오셨을까 계속 생각했어요. 여사님이 손목에 차
연령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성혜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죽음까지도 결심한 듯 결연했다.“혜인 씨, 전 이렇게까지 알려줬으니 남은 건 알아서 해요.”그녀는 협박하고 있었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연령이 떠나고 나서야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맨발인 사람은 신을 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만일 연령, 이 여자의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회사는 그녀에게 꼼짝없이 잡혀 물릴 것이다.조금 가소로웠다. 성혜인은 확실히 연령을 동정했다. 연령은 자폐아인 딸 때문에 사업을 포기했고 집에서 아픈 아이를 돌봐야 했지만, 남편은 내연녀와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무너질 수 있었다.그러나 연령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완전히 꼬여있다. 그녀는 모든 화를 바깥세상에 겨냥하고 있었다. 지금조차도 그녀는 스스로 나서서 남편에 대한 잘못을 감히 대중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그녀는 사실 마음속으로 그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이렇게 긴 시행착오 없이 자신을 무기로 충분히 남자를 패가망신 시킬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간단한 길을 놓아두고 다른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며 자신의 사랑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미천하게 사랑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말 구제 불능이다.손목에 찬 빨간 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일 정말 연령을 도와 남자의 앞길을 망친다 해도 그녀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성혜인이 남편을 망쳤다고 원망할 것이었다.그녀가 정말 쓰레기 남편을 원망했다면 팔찌를 이렇게 오래 남기지 말았어야 했다.성혜인이 양미간을 꾹꾹 눌렀다. 입장이 난처했다.연령은 약속 장소에서 나간 후 바로 린다에게 전화를 걸었다.발신 번호를 본 린다는 피식 웃으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야, 이년아. 내 전화를 끊어? 돈 갖기 싫다는 거지?”연령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동시에 성혜인을 원망했다.성혜인의 그 고귀한 듯한 태도는 정말이지 진절머리 나게 했다. 린다도, 성혜인도 자신을 무시하니, 차라리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