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의 서재에 앉아있는 배현우의 옆에는 설기웅이, 설기웅의 옆에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한 남성이 앉아 있는다.남성의 손가락은 유난히 길고 예뻤는데 그는 무심하게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설기웅은 등을 뒤에 기댄 채 두 손을 깍지 끼고 있었다.“이미 설씨 가문 사람들과는 얘기 끝냈어요. 다들 당신 편에 설 겁니다. 반씨 가문은...”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승우가 냉소했다.“반승제 그 자식, 얼마나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살았으면 내가 돌아오자마자 죄다 내 쪽으로 오는 거지? 하하.”이렇게 오랫동안 반씨가문의 후계자로 살아왔음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픈 일이었다.배현우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눈빛에 악의가 가득했다.“기웅 씨는 반승제가 설씨 가문과 약혼하길 원하고, 전 성혜인을 원하니 우린 한배를 탄 겁니다. 함께 잘 해봅시다. 설 대표님.”그는 옅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이에 설기웅이 냉랭하게 손을 얹었고 이때 그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 여동생한테 정말 잘해주네요.”설기웅은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이었다. 들어온 데에 의하면 반승우는 부드러운 사람이라 했는데, 며칠 동안 접해온 그는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잔인함은 반승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다년간의 사업 경험으로 그는 본능적으로 반승우와 너무 많이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그의 시선이 옆의 다른 남성에게 향했다. 그와 반승우가 서로 관계가 있는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설기웅이 떠나려고 몸을 일으켜도 배현우는 배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곧 설기웅이 떠나고 배현우와 그 남성만 남게 되었다. 배현우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그쪽은 목적이 뭐예요?”남성이 고개를 살짝 들며 대답했다.“전 그저 제원, 이 도시가 좀 혼란스러워졌으면 좋겠어요.”“아, 구경꾼? 뭐, 그래도 잘 해봅시다. 적어도 반승제 쪽 사람은 아니니.”남성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저 미세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
일단 선택되면 자유는 꿈꿀 수 없으며 이후의 모든 시간은 거의 상부의 감시하에 살아야 한다.당시 반승우는 자기 동생이 늑대, 맹수라고 생각했다. 맹수는 사슬에 묶이는 것을, 자유를 뺏기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그래서 그는 스스로 사슬에 묶였다. 당시 그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반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 역시 원하지 않았다.그는 동생을 위해 족쇄를 채웠고, 성혜인 때문에 족쇄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그 빠져나오는 과정이 너무 길었고, 그 과정에 죽을 줄은 몰랐다.배현우의 말에 집안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반기훈은 아들의 몸에 남은 바늘 자국들을 바라보았다. 몸 성한 곳 없이 빽빽한 바늘자국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그는 고개를 돌렸다.어르신 역시 이 흔적들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 반승우의 손을 들어주고 반승제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었다. 지금 장면을 보고 있는 반기훈은 이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배현우는 두 팔의 바늘자국을 어루만졌는데, 하도 많은 약물들을 주입해 구멍이 촘촘했으므로 보기에도 끔찍했다.“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실험을 당해오면서도 버틸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바로 혜인이었어. 승제야, 넌 내 동생으로서 밖에선 반씨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까지 했잖아. 이게 공평하다고 생각해? 애초에 성혜인은 나를 좋아했는데. 걘 가문을 위해서 너한테 시집간 거였어.”반승제의 시선이 배현우가 드러낸 팔에 멈췄다.배현우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전에 반승우가 성혜인을 구하면서, 또 자발적으로 차에서 뛰어내린 이후로 반승우의 인격은 전보다 훨씬 약해졌다.덕분에 배현우는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고 심지어 이제는 실험당할 때의 기억도 떠오르게 되었다.정말이지 죽는 것만도 못한 시간이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그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배현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배현우는 반승우라는 인격을 죽이려고 하는 와중에도 반승우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약물을 참아내고 이겨냈다는
총소리를 들었을 때 반기훈은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기분이었다.찻잔을 던지고 그 찻잔이 아들의 머리에 부딪혔을 때, 그는 당황스러움에 손끝이 순간 굳었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반승제는 천천히 총을 내리고 배현우를 한 번, 반기훈을 한 번 바라보았다.그들의 눈빛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반씨 가문에서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그 사람마저 죽기 전 반승우를 도왔다는 사실을.아버지 역시 마음속으로는 반승우를 편애했었다. 그전엔 단지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을 뿐.그러나 반승제는 실망하지 않았다. 반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반승우가 고의로 이런 짓을 한 것도 이 사실을 똑똑히 알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총을 잘 정리해 넣은 뒤 자리를 뜨려 했다.반기훈은 뒤쫓아 가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정도껏 좀 해. 그래도 네 형인데.”반기훈은 이때 배현우를 등지고 있었으므로 배현우의 악독한 눈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반승제는 똑똑히 보았다.배현우가 그를 향해 웃으며 목을 긋는 동작을 해 보였다. 그의 뜻은 매우 분명했다. 그가 돌아온 목적에는 반승제를 죽이는 것도 포함이었다.원래 그는 반승우에게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와 몸을 함께 쓴다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하지만 반승제와 성혜인이 키스하는 모습을 본 후, 반승제에게도 원한을 품게 되어 두 형제를 끔찍이 싫어하게 되었다.반승제는 그를 바라보다 자리를 떴다.그리고 반기훈이 뒤돌아봤을 때 배현우는 이미 온화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반기훈은 배현우의 팔에 난 수많은 바늘 자국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그러나 그런 반기훈을 보는 배현우는 가소롭기만 했다. 사실 이 고통은 모두 반승우의 것이고, 당시 본인에게 족쇄를 채운 것도 반승우 자신이지 배현우가 아니었다.안타깝게도 지금의 반승우는 인격이 하도 허약해서 그저 머릿속에서 작게 말을 걸 뿐이었다.“혜인이 놔줘.”반승우의 인격은 이미
“좋죠. 아버지.”반기훈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죽은 지 6년이 된 아들이 돌아왔으니 기뻐해야 할 텐데.그런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떠나보냈고 아내는 병원에 있으며 형제 둘은 사이가 벌어졌다.반기훈은 한순간에 나이를 몇 살 더 먹은 기분이었다.그는 큰 아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랐고, 그가 보냈던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무엇으로 채워주어야 할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그런 그가 둘째 아들더러 여자를 양보하도록 설득하는 방법은 알 리가 없었다.반승제는 이미 저택을 나온 뒤였다. 차에 올라탄 후 그는 옆에 놓은 수건으로 옷에 묻은 찻물을 벅벅 닦았다.운전석에 앉은 심인우는 그의 흐린 안색을 보고 감히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반승제는 회사가 아닌 네이처 빌리지로 향했다. 성혜인이 아직 그곳에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도착했을 때 성혜인은 없었고 고용인은 그녀가 회사로 갔다고 알려주었다.그는 요새 온수빈의 일로 연예계가 뜨겁게 달궈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 성혜인도 이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게 보낼 것이다.그러나 다 알고 있음에도 그는 성혜인이 보고 싶었다. 특히나 아버지께 찻잔으로 머리를 맞은 뒤 그는 더 미친 듯이 성혜인이 그리웠다.그는 네이처 빌리지의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반 시간이 흘렀고, 회사 상류층의 사람이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대표님, 반승우가 회사에 왔습니다.]반승우가 15%의 주식을 가지고 있으니 그 역시 상류층에 속했다.반승제는 메시지에 개의치 않고 성혜인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문자를 한 줄 썼다가, 다시 지우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결국 보낸 문자는 네 글자였다.[보고싶어.]같은 시각 성혜인은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그가 청한 전문 사립탐정은 이미 적지 않은 사진을 찍어 보여주었다. 성혜인은 한 자폐아 아동의 부모를 조사하게 했는데 최근 그들의 계좌에는 돈이 더 들어오지 않았다.상대방이 수표로 주었을 수도 있고, 아직 은행에 가서 현금화 하지 않았을
성혜인과 반승제는 모두 첫 연애였다. 반승제는 회사를 잃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성혜인을 북아메리카의 지하 격투장으로도 데려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심지어 성혜인만을 위해 규칙을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도 그렇게 자신의 명성을 버릴 만큼 자신을 사랑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반승제는 이곳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지만 성혜인은 아니었다.그랬기에 반승제도 성혜인의 마음으로 도박할 수 없었다.차에 오르면서도 성혜인은 반승제의 기분이 갑자기 가라앉은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반승우가 돌아와서 주식의 15%를 가져가 대표 자리를 위협받았기 때문일까, 혹은 반씨 사람들이 반승우에 대한 편애 때문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성혜인이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왜 반승우는 하필 자신의 회사가 언론 때문에 바쁠 때 돌아오려 해서 이렇게 힘들게 하지?약속 장소에 갔더니 상대의 태도는 거만했다. 그녀는 시종 턱을 치켜올리고 대응했고 성혜인과의 약속이 달갑지 않은 듯 보였다.현재 인터넷은 성혜인과 S.M에 대한 욕설로 가득했기에 얼른 이를 해결해야 했다.“여사님.”성혜인이 예의 바르게 호칭하며 여인의 맞은편에 앉았다.“인터넷에서 그러더군요. 자식을 미끼로 판을 짜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전 우리 회사 아이들 엄청 신뢰하거든요. 딸이 자폐증이라던데 이렇게 아이 명예 훼손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요?”연령이 자신의 전화를 열어 보여주었다. 실검에는 온통 온수빈에 대한 말들이었고 악플들이 가득했다. 특히나 온수빈의 팬들이 마구 욕설을 듣고 있었다.톱스타가 단 하루 만에 최정상에서 사람들이 마구 손가락질하는 연예인으로 전락하였다.“성 대표님, 오늘 그런 말을 하러 오신 거라면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겠네요.”여인의 눈에는 온통 경멸이 가득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잔을 밀더니 말을 이었다.“게다가 전 커피 마시는 거 안 좋아합니다. 대표님은 상류층이라 우리 같은 일반인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어폰의 반대편에서, 연신 연령의 이름을 부르던 린다는 그제야 상대편에서 통화를 끊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화가 나 하마터면 앞에 놓인 테이블을 뒤엎을 뻔했다.“미친년이 감히 전화를 끊어? 내가 무섭지도 않아?”이 재벌 2세들은 설인아의 별장에 모여 있었다. 린다의 말에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린다, 뭘 그렇게 화를 내. 실수로 그런 거겠지.”“그러니까. 성혜인 하나 상대하는 데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기웅오빠한테 들어보니 반승제도 요새 궁지에 몰린 것 같던데. 반승제 없이 성혜인이 뭐 되기나 하냐고.”“쓰레기한테 화내는 건 너무 격 떨어지잖아.”그들의 말에 린다는 순간 화가 풀렸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그년이 이미 우리 돈 챙겨갔어. 원래는 좀 지령으로 뭐라도 정보를 얻어볼까 했는데 성혜인이 입이 그렇게 무거울 줄이야. 게다가 이제 통화까지 꺼버리다니. 둘이 협력하면 어떡해?”“린다, 설마 성혜인이 복수할까 봐 두려워서 그래?”누군가의 말에 현장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곧이어 린다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그래, 성혜인이 복수할까 봐 두렵냐고? 성혜인이 알아도 뭐 어떡할 건데. 쓰레기 두 개가 모인다고 설마 무슨 일이라도 해낼까 봐?여기까지 생각한 린다는 곧 득의양양해졌다. 또 성혜인이 그렇게 멍청하고 비천한 연령과 협력하다가는 언제 그년한테 물릴지 어떻게 알아.린다는 현장의 재벌 2세들과 다시 분위기를 즐기기 시작했고, 그들 중 더 이상 성혜인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에겐 연령을 다시 매수할 충분한 돈이 있었으니까.그 천한 년은 돈에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성혜인 쪽에서 주는 돈이 그들보다 많을 리 없다.한편 카페에서.연령이 이어폰을 빼는 순간, 성혜인은 천천히 커피를 홀짝 마셨다.연령은 성혜인을 한참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은 전혀 당황하지 않는 것 같네요.”성혜인은 들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여사님께서 왜 저를 만나러 오셨을까 계속 생각했어요. 여사님이 손목에 차
연령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성혜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죽음까지도 결심한 듯 결연했다.“혜인 씨, 전 이렇게까지 알려줬으니 남은 건 알아서 해요.”그녀는 협박하고 있었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연령이 떠나고 나서야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맨발인 사람은 신을 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만일 연령, 이 여자의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회사는 그녀에게 꼼짝없이 잡혀 물릴 것이다.조금 가소로웠다. 성혜인은 확실히 연령을 동정했다. 연령은 자폐아인 딸 때문에 사업을 포기했고 집에서 아픈 아이를 돌봐야 했지만, 남편은 내연녀와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무너질 수 있었다.그러나 연령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완전히 꼬여있다. 그녀는 모든 화를 바깥세상에 겨냥하고 있었다. 지금조차도 그녀는 스스로 나서서 남편에 대한 잘못을 감히 대중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그녀는 사실 마음속으로 그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이렇게 긴 시행착오 없이 자신을 무기로 충분히 남자를 패가망신 시킬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간단한 길을 놓아두고 다른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며 자신의 사랑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미천하게 사랑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말 구제 불능이다.손목에 찬 빨간 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일 정말 연령을 도와 남자의 앞길을 망친다 해도 그녀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성혜인이 남편을 망쳤다고 원망할 것이었다.그녀가 정말 쓰레기 남편을 원망했다면 팔찌를 이렇게 오래 남기지 말았어야 했다.성혜인이 양미간을 꾹꾹 눌렀다. 입장이 난처했다.연령은 약속 장소에서 나간 후 바로 린다에게 전화를 걸었다.발신 번호를 본 린다는 피식 웃으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야, 이년아. 내 전화를 끊어? 돈 갖기 싫다는 거지?”연령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동시에 성혜인을 원망했다.성혜인의 그 고귀한 듯한 태도는 정말이지 진절머리 나게 했다. 린다도, 성혜인도 자신을 무시하니, 차라리
커피숍에 앉아 있던 성혜인은 연령이 간 뒤에도 떠나지 않고 자신이 받은 서류를 뒤적거리며 훑어보았다.서류에 따르면 연령의 딸은 자폐증은 있었지만 그녀가 말한 것처럼 선천성 신부전증은 없었다. 그러나 연령은 확실히 유방암 말기였다.그러니까 결국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하는 데다 남편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 자폐증인 딸을 내세우며 조작한 것이었다.성혜인이 한참 고민하다 연령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전 남편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어요.]협상이라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다.그녀는 연령 배후의 사람이 연령과 이런 조건 없이 돈을 주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성혜인이 내건 조건이야말로 가장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이었다.역시나 연령에게서 답장이 금방 왔다.그러나 여전히 몸을 사렸기에 답장은 물음표 하나뿐이었다.그녀가 방금 성혜인과 한 대화에서는 두 사람 모두를 패가망신시키고 싶다고 했는데, 성혜인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니 의심할 만도 했다. 설마 자신이 남편을 아직 사랑한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했단 말인가?곧이어 두 번째 메시지가 날아왔다.[그들을 패가망신시키는 건 너무 약해요. 그 사람이 다시 사랑하게 하고, 그러나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을 때 당신이 세상을 뜨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거예요. 여사님이 자신의 목숨으로 복수한다면 그 사람은 남은 평생 후회하며 살 거예요.]연령은 온몸이 떨려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이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시은은 남편을 위해 아들을 낳았고, 지금은 뻔뻔스럽게 둘째 아이까지 임신하고 있다.그런데 성혜인이 어떻게 남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성혜인이 틀림없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남편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므로, 그녀는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장을 보냈다.[어떻게 하려고요?]성혜인은 일부러 초조하게 하기 위해 답장을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는데 연승혁이 말한 대로 안전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연승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연승혁의 부하들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격정스런 눈빛을 지었다. “공지민 씨, 괜찮으신가요?”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는요?”“형님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오빠 보러 가고 싶어요.”그때 그녀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그를 몇 번 밀쳤고 기억에 의하면 그를 불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등은 아마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연승혁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탈출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공지민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그와 함께 그곳에서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승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연승혁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섬의 의료 수준은 제원에 미치지 못했다. 연승혁은 등 부상으로 인해 이미 이틀째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의사는 감염을 우려하며 그의 곁을 이틀 동안 지키고 있었다. 공지민의 눈빛에 조롱의 기색이 스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이 사람은 타 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가 붉어진 채 천천히 병상 옆에 앉았다.“오빠는 괜찮아졌나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공손하게 답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혁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병상 옆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의사는 곧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연승혁과 공지민 두 사람만 남았다.공지민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베개를 가져다 이 남자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려던 찰나
남자는 이미 죽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승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정리해. 난 먼저 간다.” 호텔 쪽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원래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직접 돌아가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승혁은 자신이 공지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걸 단순한 게임으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약 공지민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원래는 30분은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그는 1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은 이미 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 자신의 부하를 붙잡고 물었다. “공지민 어디 있어!” “형님, 공지민 씨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승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섬의 소방은 아직 빠르지 않아 불은 이미 1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번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승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밖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면 공지민이 운 좋게 스스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공지민! 공지민!”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곧 방 한구석에서 공지민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짙은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연승혁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공지민은 방구석에 웅
연승혁은 즉시 공지민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넌 이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처리하고 나서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자.”공지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위험하진 않겠죠?”“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있어.”연승혁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섬에서 가장 큰 호텔로 매우 호화로운 데다가 그의 부하들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지민은 안전했다.공지민은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연승혁은 겨우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안했고 심지어 공지민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건 결코 안전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혹시나 손에 총이 있다면 공지민은 위험할 수 있었다.그는 신이 아니었고 공지민을 100%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과실로 그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감히 모험할 수 없었고 그녀를 호텔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은 차에 올라탔고 차는 30분 동안 달리다가 암초가 있는 곳에 멈췄다.근처의 암초는 크고 새까맣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였다.연승혁은 옆에 있는 부하한테 물었다.“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 저희 쪽 사람들이 지금 수색하고 있어요. 늦어도 30분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고 휴가를 온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양측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연승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제 그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하들은 온몸이 새까만 남자를 붙들고 걸어왔다.어쩐지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더라니 그의 몸에는 검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마치 암초와 융합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연승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밤바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그는 심호흡한 뒤 그 남자
연승혁은 한동안 그녀와 꽁냥꽁냥하다가 해변의 경치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공지민은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구은우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았다.그녀는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연승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걸었다.“지민아, 어때? 여기 달이 특별히 예쁜 것 같지 않아?”공지민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뻐요.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 봐요.”연승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정말로 여기의 달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함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뭔가 더 특별했고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공지민은 내내 연승혁한테 맞춰줬고 그가 바닷물을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녀도 따라나섰다.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연승혁이 물었다.“이런 해변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공지민의 눈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연승혁은 구은우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공지민은 그때 구은우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구은우가 사망했는데 그녀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이상우가 최면술을 사용했음에 불구하고 연승혁은 그녀가 갑자기 기억해 낼까 봐서 걱정이었다.하지만 공지민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연승혁은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억 안 나면 됐어. 손 줘봐. 우리 여기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자.”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빠가 잡으려는 그 사람은요?” “아마 일주일 안에 잡힐 거야. 이 섬이 제국만큼 크지는 않지만 숨을 수 있는 동굴이 많아.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후 바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를 찾아내려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해.”그들이 며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이전에는 연승혁의 주변에 여자가 별로 없었고 오직 원아정 한 명뿐이었다. 원아정과는 단순히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만났던 거라서 그녀와의 경험은 그저 상쾌함만 느껴졌고 내면의 만족감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공지민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연승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피부를 만지기 시작했고 무기력하게 기대어 있는 공지민이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연승혁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그는 공지민이 다 씻은 후 옆에 있던 타월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침대에 누운 공지민은 곧 잠이 들 것 같았지만 연승혁은 욕구를 참느라 너무 힘들었다.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무해한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고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이 손끝으로 그녀의 허리에서 가슴까지 쓰다듬을 때 공지민은 가끔 눈을 떠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연승혁은 더욱 불타올랐지만 그녀가 현재 아픈 상태라는 걸 잊지 않았다.연승혁은 몸을 숙여 그녀의 목에 흔적을 남겼고 공지민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낸 후 그한테 물었다.“오빠, 우리 정말 약혼한 사이에요?”그녀의 질문에 연승혁은 순간 몸이 굳었다.공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냥 우리 둘 사이가 너무 순수해 보여서요.”연승혁이 그녀의 목을 힘껏 깨물자 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소리 질렀다.연승혁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순수해 보여? 오늘 밤, 네 몸 전체에 흔적을 남겨줄게.”공지민의 볼이 빨개졌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연승혁은 그냥 말해본 거였는데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그가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자 공지민은 허리를 굽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연승혁이 그녀의 몸에 키스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비도덕적인 생각들이 떠올랐고 자신이 지금의 행위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간다면 벌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흔적을 하나하나 남길 적마다 그의 이성은 사라졌고 오늘 밤만은 그녀
공지민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곳은 온시환이 차를 세워둔 위치였다.오후부터 그녀는 강한 시선이 느껴졌고 신기하게도 그녀는 그 시선의 주인이 온시환이라는 걸 알았다. 온시환은 열 몇 시간 동안 은밀한 곳에 숨은 채 그녀의 곁을 지켰다.공지민은 연승혁를 향해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연승혁은 그녀를 안아 들고 곧장 차로 돌아간 후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그녀의 몸에 덮어줬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그는 공지민을 안고 안방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악몽을 꾸는 듯 이마에 땀이 맺힌 채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가지 마요.”“날 괴롭히지 마요.”그런 공지민의 얼굴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는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중간에 공지민이 눈을 떴지만 그가 돌아온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도우미가 몸보신하는 죽을 들고 오면서 물었다.“도련님, 제가 지민 씨 먹여드릴까요?”연승혁은 손을 들어 죽을 건네받으며 말했다.“제가 할게요.”도우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연승혁은 공지민을 일으켜 세우고 흔들어 깨웠다.“지민아, 얼른 일어나서 이거 좀 먹어. 너 지금 열도 나고 저녁에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공지민은 어렴풋이 눈을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오빠 돌아왔네요.”연승혁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한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네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데 내가 어떻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어?”공지민은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말했다.“역시 오빠밖에 없어요. 근데 또다시 나갈 건가요?”연승혁은 늦어도 날이 밝은 후 일 보러 다시 나가봐야 했다. 하지만 공지민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고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그렇다고 이상우를 불러 공지민의 기억을 되돌리고 온시환 곁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걸 생각만 해도 연승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 없이 그녀한테 죽을 먹여준 다음 옆에 있던 휴지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염정아는
염정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지민은 그녀의 표정을 통해 그녀가 그다지 나오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면회가 끝나갈 무렵 염정아는 갑자기 공지민한테 다가가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지민 언니, 나는 내가 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공지민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눈이 따가워졌다.염정아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경찰을 따라 다시 들어갔다.홀로 남은 공지민은 몸과 마음이 너무 괴로웠고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그녀의 심장을 갉아 먹는듯한 느낌이었다. 경찰서 문 앞까지 나온 그녀는 속이 울렁거려서 토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복수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해 망설이기 시작했다.마침 연승혁의 전화가 걸려 와 그녀의 위치를 물었다.공지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있었고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연승혁은 드디어 도망간 사람에 관한 단서를 얻게 되어 그 사람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공지민이 걱정되고 마음에 걸려 전화를 한 거였다.“나 지금 경찰서에요. 내 친구가 사람을 죽였어요. 오빠, 나 걔랑 있었던 일이 기억났어요. 고등학교 때 우린 둘 다 괴롭힘을 당했었어요. 근데 우리를 괴롭힌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연승혁은 그녀들을 괴롭힌 사람이 이미 죽은 원아정이란 걸 알고 있었다.그가 목을 가다듬고 그녀를 위로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공지민이 울기 시작했다.“오빠, 보고 싶어요.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예요? 너무 보고 싶어요. 나 지금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숨이 멎을 것 같아요.”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자 연승혁의 심장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헬리콥터에 올라탔고 원래는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러 가야 했지만 그녀가 걱정되어 조종사한테 목적지를 바꾸라고 말했다.“우린 먼저 제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추적하라고 해.”조종사는 조금 놀랐다. 보스가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고 이제 겨우 단서를 얻었는데 제국으로 돌아간다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