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전화가 울려 받아보니 허민환의 어디 갔냐는 연락이었다.“아, 저 호텔 입구에 있어요. 얼른 갈 테니 대표님과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약을 먹은 유해은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또 한 번 손목이 백현문에게 잡혔다.“해은아.”그가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안 가면 안 돼...?”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해은이 마시다 남은 반 컵의 물을 그의 얼굴에 확 끼얹었다.아까 꽃병 때문에 다친 머리에서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물을 맞은 모습이란 그렇게 나약하고 측은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유해은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녀가 받은 상처에 비하면 백현문이 지금 당한 것들은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백현문의 뺨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유해은은 아랑곳 하지 않고 쏘아붙였다.“네가 뭔데 참견해? 내가 다른 남자랑 관계를 가지든 말든.”그는 여전히 손목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유해은의 가녀린 손목을 잡고 깊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만약 다른 사람이 봤다면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백현문은 제원에서 소문 난 미친개니까.예전에 백씨 가문 어르신을 위해 인간답지 못한 잔인한 일들을 많이 했기에 많은 사람의 미움을 산 그였다.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그가 독하고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그러나 그런 백현문이 지금은 유해은의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나약하다.“해은아... 난 우리가 다시 처음처럼 돌아갔으면 좋겠어.”그렇다면 그는 절대 자기 부하를 종용해 유해은의 손가락을 부러뜨리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배달원이라는 거짓말도 하지 않을 것이며 결혼하겠냐고 물을 때마다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말에 유해은이 냉소했다.그리곤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증오가 가득한 눈에 눈물이 고였다.“뭐?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남자들은 항상 이런 식이야. 가장 좋을 때 사람 다 망쳐놓고 짓밟아놓고서 다시 돌아가고 싶다? 난 지금 해야 할 일이 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성혜인이 떠나고 허민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유해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유해은이 어깨에 걸친 값비싼 정장을 발견했다.“해은 씨, 나간 지 고작 십몇 분 만에 다른 남자 찾은 거예요?”유해은이 걸쳤던 정장을 벗어서는 쓰레기통에 던지며 대답했다.“제가 당신과 같은 줄 알아요?”허민환이 능청스럽게 유해은을 품에 안았다.“그럼 우리 계속할까요?”“됐어요. 이미 두 번이나 했잖아요. 이제 질렸어요.”유해은이 그의 눈길을 아랑곳 하지 않고 곁에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이에 허민환이 발끈 화를 냈다.“고작 두 번인데 질렸다고요? 해은 씨, 지금 저 만나겠다고 줄 선 여자들이 한가득 이에요.”이때 유해은은 아우터를 다 입은 후였다. 그녀는 옆에 뒀던 가방을 들고 팔짱을 낀채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저 오늘 밤엔 연기레슨, 다음 주부턴 드라마 촬영 시작하니까 당분간 만나지 맙시다.”“아니, 저기요. 저 전에는 하룻밤 자면 이후엔 아는 척도 안 하는 냉혈한이었다고요.”유해은은 이미 현관에 도착했다.“그럼 그냥 절 쓰레기라고 생각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문을 닫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한편 방을 나선 성혜인은 1층 로비로 향했다.백현문 때문에 강제적으로 호텔에 왔기 때문에 성혜인은 얼른 택시를 잡아 돌아가려 했다.그러나 로비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백현문이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발견했다.겨우 10여 분이 지났을 뿐인데 백현문의 주변에는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있었다.못 본 척하고 싶었지만 하필 그가 서 있는 곳이 택시 정거장 앞이었다.미간을 좁히고 천천히 걸어가니 그가 말을 걸어왔다.“유해은만 다시 데려와 주면 백씨 가문도 가져다 바칠게.”그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옆에 버리고 또 하나를 꺼냈다.“아니면 뭘 원하는지 말해봐. 누구 죽여줄까? 네가 유해은을 되돌려줄 수만 있다면 뭐든 할게.”백현문은 심지어 울먹이기까지 했다.그러나 성혜인은 그런 백현문
반승제가 성혜인을 안아 들었고 백현문은 차를 몰고 떠났다.만일 그가 반사거울에서 저격수의 반짝이는 총구를 보지 못했다면 성혜인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이미 성혜인을 따라붙었으니 반승제에게 보내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반승제의 품에 안긴 성혜인은 불편함에 빠르게 잠에서 깨어났다.눈을 뜬 성혜인의 눈에 익숙한 하관이 보이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내려줘요.”반승제의 뺨에 아직도 그녀의 손바닥 자국이 남아있었다.곧바로 밖으로 가려던 성혜인이 반승제에 의해 가로막혔다.“방금 누군가 널 죽이려 했어.”발걸음을 멈춘 성혜인이 문득 픽 웃어버렸다.참 우스운 소리를 하는구나.성혜인이 조롱 가득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그럼 누가 절 죽이려 한건지는 알고요?”반승제가 말이 없자 성혜인이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당신의 현 여자친구요. 오늘 식당에서 있은 일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거겠죠. 전에 장하리가 칼에 찔린 것도 설인아가 한 것일 텐데 대표님께서 지금 절 네이처 빌리지에 데려왔으니 이후에 어떻게 또 복수할지 겁나는군요.”성혜인이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승제 씨, 우린 어울리지 않아요. 제가 승제 씨 성격 감당할 자신도 없고요. 기왕 설인아랑 함께 하기로 결정했으면 안전감을 좀 주세요. 자꾸 저한테 화풀이하지 않게요.”“혜인아...”반승제의 부름에 성혜인이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리고 우리는 지금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에요. 당신은 저한테 혜인 씨나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돼요. 제발 우리의 마지막이 더 최악으로 남게 하지 말아요.”성혜인이 자리를 뜨려 하자 반승제가 급히 뒤따라갔다.“혜인아, 이번엔 내 잘못인 거 알아. 하지만 너도 나한테 숨기는 게 있었잖아. 내가 설인아와 사귀기로 한 건 단지 널 화나게 하기 위해서였어.”“그만해요!”성혜인이 듣기도 싫다는 듯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그제야 반승제는 입을 닫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승제 씨, 당신이 정말 날 사
500미터를 걸어 나간 후에도 성혜인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성가심을 느꼈다.택시를 잡아 타자 반승제도 따라 올랐다.“미쳤어요?”성혜인이 사나운 말투로 쏘아붙이고는 옆으로 자리를 옮겨 가능한 한 멀리 앉았다.그러나 반승제는 뻔뻔하게 가까이 붙어 앉으며 어떤 욕설을 해도 묵묵히 듣기만 했다.심지어 차가 흔들릴 때는 손을 들어 천장에 부딪치지 않게 보호해 주었다.차가 포레스트에서 멈춰서자 얼른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포레스트 대문에 도착한 성혜인이 경비원에게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지만 반승제가 재빠르게 들어오는 바람에 막지 못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국 별장 문 앞까지 함께 오게 되었다. 이때 성혜인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문을 바로 닫아버렸다.이번에 반승제는 따라 들어가지 않았고 밖에서 벤치를 찾아 앉았다.정원에는 벤치뿐만 아니라 돌로 된 탁자도 있었다. 그는 컵 속에 우려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집 안을 살펴보았다.성혜인은 상대하기도 귀찮았다.‘굳이 밖에서 고생하고 싶다면 그러든지.’별장으로 들어간 성혜인은 재빨리 샤워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세 시였고 그녀는 얼른 잠을 청했다.그러나 이때 밖에서 갑자기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번개가 여러 번이나 온 방 안을 밝게 비추었다.겨울이가 방 문 앞에서 컹컹짖자 얼른 문을 열어 들어오게 했다.흰둥이도 기다렸다는 듯 따라 들어왔다. 번개를 무서워하지 않는 흰둥이는 마치 수호신인 양 침대 옆에 엎드려 있었다.겨울이도 흰둥이도 강아지 치고는 매우 똑똑한 편이었다.천둥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 성혜인이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반승제는 벤치 위에 외로이 앉아있었다.성혜인은 화가 나서 커튼을 꽉 움켜쥐었다. 화도 났고 대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는 성혜인이 반승제를 싫어하는 원인 중 하나기도 했다.상처를 주어도 타격이 없어보였다.반승제의 뇌 구조는 정상인과 다른듯싶었다.그러나 그가 자라온 환경을 생각하면 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반승제가 그녀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떨구었다.“그럼 나 이제 갈게.”“네.”별장으로 돌아온 성혜인이 쫄딱 젖은 흰둥이가 바닥에 흙탕물을 떨군 것을 보았다.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명령했다.“들어가.”옆에는 대형 건조기가 있었는데 애완동물의 털을 말리는 용이었다. 흰둥이는 건조기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들어갔다.잠이 오지 않아 창밖을 내다보니 반승제가 마침 떠나고 있었다.그 뒷모습이 쓸쓸하고 처량해 보였지만 성혜인은 마음 약해지지 않기로 했다. 반승제의 성격은 확실히 누군가 고쳐줘야 했다. 그가 자신의 문제를 고치지 않는다면 그와 다시 시작할 이유도 없었다.포레스트 밖으로 걸어 나오니 심인우가 그의 차를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오르니 심인우가 깨끗한 수건 한 장을 건넸다.“대표님.”대충 머리를 닦은 반승제가 밖에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차가 네이처 빌리지에서 멈추자 그는 처음으로 설기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설씨 가문과의 약혼 동의 안 합니다. 앞으로 설인아 다시 만날 일 없어요. 그리고 여동생한테 알려주세요. 뒤에서 자꾸 수작 부리지 말고 엔디라는 사람 관리 좀 잘하라고요. 그 사람이 다시 한번 성혜인 건드리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설기웅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지금 시간이면 진작부터 깊은 잠에 빠져있을 그가 정신이 몽롱한 채로 전화를 받았더니 들은 말이 약혼 취소란다.그가 제대로 일어나 앉아 차갑게 말했다.“반승제 씨, 지금 우리 가문 가지고 논 겁니까?”“제가요? 전 그저 지내보자고만 했죠. 설인아와 잠깐 만나보니 제가 성혜인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반승제 씨!”설기웅이 냉랭한 얼굴로 몇초간 침묵을 지키더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설씨 가문은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닐 텐데요.”“그럼 한 번 해보시든가요.”전화를 끊은 그가 네이처 빌리지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나온 후 설인아의 번호를 차단했다.침대에 누운 그가 습관적으로 옆 사람을 안으려다 성혜인이
“그래서 형이 돌아오기 전에 날 못 떠나게 하려고.”반승제가 담담히 말하며 앞에 있는 문서를 바라보았다.“날 떠나지 못하면 차지도 못할 테니까.”서주혁은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전화를 끊은 반승제는 온시환이 걸어온 전화를 보았다.그러나 그는 받지 않고 끊어버렸다. 온시환이 또 어떤 이상한 생각을 할지 무서웠다.아침부터 밤까지 그는 성혜인에게 총 여덟 개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한 통의 답장도 받지 못했다.오후 5시, 회의하려고 준비하려던 그가 그대로 자리에서 픽 쓰러지고 말았다.어제 그렇게 몸을 혹사하더니 오늘 열이 나면서도 약을 먹지 않아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그가 쓰러지자, BH 그룹은 크게 들썩였다. 심인우는 얼른 반승제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동시에 반승제가 쓰러졌다는 소문은 업계 내에 파다히 퍼졌다.그의 인스타를 보았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얼마 전 결별 소식이 들려왔고 최근엔 설인아와 사귄다고 하고 설인아가 반승제를 위해 다치기까지 했다더니 갑자기 반승제는 성혜인을 좋아한다?“성혜인한테 당한 거야. 그게 아니면 그렇게 가난한 가문 사람한테 매달릴 일이 있겠어?”“설인아는 창피하겠다.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녔는데 결국 성혜인이 좋다잖아. 설인아만 바보 됐네.”“성혜인이 대체 뭐가 좋다고?”업계 내 사람들은 가십거리가 생겼다고 신나게 씹어댔다. 게다가 반승제가 아파서 쓰러졌다고 하니 소문의 불씨가 점점 거세져 큰불이 되어가고 있었다.“반승제 군대 출신이라 체력도 좋은데. 내가 보기에 성혜인 그년이 그냥 재앙인 거 같아.”“그러니까 말야. 성혜인이 반씨 가문에 온 이후로 바람 잘 날이 없었잖아. 지금은 어르신마저 돌아가셨는데 반승제는 그 사람 손을 동아줄처럼 꽉 붙잡고 있으니.”“질투 나! 반승제가 날 한 번이라도 봐준다면 난 필사적으로 잘해줬을 텐데.”업계 내에 그를 짝사랑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반승제는 모두에게 차갑게 대했고 말 몇 마디 하는 것도 성가시게 생각했다.특히나 외국에
나미선이 입꼬리를 올리며 해사하게 웃었습니다.“이제 막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됐구나. 그래. 오늘 네 아빠랑 상의할 테니 시름 놓으렴. 내가 얼른 제원에 가서 도와주마. 아직은 여기에 할 일이 좀 남았어.”설인아가 활짝 웃었다. 역시, 엄마가 세상에서 날 제일 사랑해.나미선이 있는 곳은 아직 오후였다. 그녀는 지금 귀부인들과 애프터눈 티를 마시는 중이었다.모두들 세련된 화장에 밝게 차려입고 있다. 어떤 사람의 머리 위에는 작은 모자까지 쓰고 있었고 모두 전통적인 유럽식 드레스를 입고 있다.한 귀부인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나미선에게 물었다.“부인은 아직 동생 못 찾으셨어요?”나미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아니요.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아마 죽었을 겁니다.”“아쉽네요. 의약에서는 천재 소리를 들어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가 있죠? 원래 설씨 가문에 시집와야 할 사람도 그 동생분이었는데 전날 갑자기 도망친거잖아요.”하지만 동생이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설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가 나미선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나미선과 이 여동생은 쌍둥이였다. 여동생은 줄곧 약 제조 연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어린 나이에 이미 의학계에서 명성을 떨쳤다.그러나 사라진 여동생에 비해 나미선은 평범했고, 마치 권세 높은 가문에 시집 보내기 위해 특별히 키운 여인 같은 존재였다.나미선의 여동생을 언급하는 귀부인들의 얼굴에 질투심과 더불어 추억에 잠긴 듯한 아련함이 보였다.당시 그 여인을 쫓아다니는 사람은 줄을 설 정도였지만 그녀는 오로지 연구에만 집중하려 했다.설의종의 몇 년간의 구애 끝에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지만 결혼 전날 밤 여자는 사라졌다. 그러나 하객들이 전국 각지에서 수고스럽게 왔기에 설씨 가문과 나씨 가문 모두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미선, 즉 신부의 언니를 신부석에 보낸 것이었다.모두 설의종이 소란을 피울 것으로 생각했으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의외로 평온했고 심지어 두 아들과 하나의 딸까지 낳았다.그 후, 나씨
진작 반씨 가문에 대해 뒷조사했던 설기웅은 반씨 가문에 반승우라는 사람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뜬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 갑자기 사무실을 찾아온 사람이 자신을 반승우라고 소개하니 황당한 것이다.설기웅은 사람을 시켜 조사를 하게 했고, 반승제와 얼굴이 비슷한 것을 확인하고 결국 확정 지을 수 있었다. 반승우가 아직 살아 있다.하지만 그가 들은 바로 반승우는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180도 달랐다.아니면 혹시 지나간 7년 사이에 사람의 성격이 완전히 변한 건가.배현우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더니 손에 들려있던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장을 남겼었어요. 원래 반승제에게 주겠다던 15%의 주식의 조건이 바로 내 죽음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으니 그 주식은 제 것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는 BH 그룹에 고위직의 신분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그날 밤 반승우는 멸망을 자초하는 방법으로 성혜인을 도와주었고 이에 배현우는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그래, 좋아. 반승우 네가 그렇게 소란을 피우겠다면 나도 같이 피워주지. 전체 제원을 파국으로 만드는 거야.반승우가 먼저 둘 사이의 약속을 어긴 것이니 그의 탓은 아니다.배현우가 어르신의 유언장을 꺼내 보이며 만족스러운 어조로 말했다.“대표님께서 의향이 있다면 필적 전문가를 불러 감정을 의뢰하셔도 됩니다.”“그렇다고 해도 그쪽이 받을 수 있는 건 15%의 주식뿐일 텐데요.”배현우가 가볍게 웃으며 손에 든 술잔을 흔들었다.“이 외에도 반승제와 성혜인 사이의 감정에 개입할 수 있어요. 제가 성혜인의 첫사랑이거든요.”배현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다음 날 점심,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반승제는 사람들이 보낸 문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워버렸다.그리고는 성혜인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조용히 차단을 푼 그녀를 보고 그는 성혜인이 자신을 의식하고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