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 반씨 가문에 대해 뒷조사했던 설기웅은 반씨 가문에 반승우라는 사람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뜬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 갑자기 사무실을 찾아온 사람이 자신을 반승우라고 소개하니 황당한 것이다.설기웅은 사람을 시켜 조사를 하게 했고, 반승제와 얼굴이 비슷한 것을 확인하고 결국 확정 지을 수 있었다. 반승우가 아직 살아 있다.하지만 그가 들은 바로 반승우는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180도 달랐다.아니면 혹시 지나간 7년 사이에 사람의 성격이 완전히 변한 건가.배현우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더니 손에 들려있던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장을 남겼었어요. 원래 반승제에게 주겠다던 15%의 주식의 조건이 바로 내 죽음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으니 그 주식은 제 것이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는 BH 그룹에 고위직의 신분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그날 밤 반승우는 멸망을 자초하는 방법으로 성혜인을 도와주었고 이에 배현우는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그래, 좋아. 반승우 네가 그렇게 소란을 피우겠다면 나도 같이 피워주지. 전체 제원을 파국으로 만드는 거야.반승우가 먼저 둘 사이의 약속을 어긴 것이니 그의 탓은 아니다.배현우가 어르신의 유언장을 꺼내 보이며 만족스러운 어조로 말했다.“대표님께서 의향이 있다면 필적 전문가를 불러 감정을 의뢰하셔도 됩니다.”“그렇다고 해도 그쪽이 받을 수 있는 건 15%의 주식뿐일 텐데요.”배현우가 가볍게 웃으며 손에 든 술잔을 흔들었다.“이 외에도 반승제와 성혜인 사이의 감정에 개입할 수 있어요. 제가 성혜인의 첫사랑이거든요.”배현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다음 날 점심,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반승제는 사람들이 보낸 문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워버렸다.그리고는 성혜인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조용히 차단을 푼 그녀를 보고 그는 성혜인이 자신을 의식하고
다른 여자들이 반승제 때문에 성혜인을 조롱하고 모함하는 것에 비하면 조현의 태도는 정말 우호적이었다.조현에 대한 호감이 한순간에 크게 상승했다.“조현 씨가 옳은 선택 한 거예요. 두 사람은 맞지 않아요.”조현이 또다시 깔깔 웃기 시작했고 손에 든 커피를 다 마시게 되었을 때쯤 밖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해요. 제 동생 수업이 끝나서요. 올해 고3인데 오늘 점심 제가 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고3이라 시간이 촉박해 이곳으로 오라고 했으니 혜인 씨가 싫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성혜인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현의 집에 확실히 남동생이 있긴 했다. 그러나 이 남동생은 그녀와 같은 핏줄이 아니라 조현이 직접 입양해 온 아이였다. 어떻게 입양한 건지는 본인이 잘 알 터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성혜인은 길 건너편에서 키 큰 소년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대략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청초하고 꼿꼿하며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주변에 여러 명의 학생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 아이는 조현의 기풍과 너무 비슷했다. 조금 쌀쌀한 느낌.“누나!”그가 누나를 불렀지만 성혜인은 보지 못했다.조현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도시락 싸 왔으니까 먹어.”조승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앉더니 조용히 도시락을 열었다.성혜인이 그의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작가님은 동생 연예계에 진출시킬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조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이 아이는 공부에 재능이 있어서요.”그제야 조승한의 시선이 성혜인을 향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식사를 시작했다.다른 활발한 고등학생들과는 다르게 이 아이는 말수가 적었다.성혜인의 시선이 그에게 잠깐 머물렀다. 무언가 아이가 조현을 보는 눈빛이 이상한 것 같았다.눈치가 빠른 그녀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고 아이가 식사를 마치고 떠난 후에야 조현에게 물었다.“오늘 왜 갑자기 동생이랑 밥 먹으러 온 거예요? 제가 기억하기론 오랫동안 제원에 없었던 걸로 아는데요.”조
내일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성혜인은 그한테 답장했다.[내일 오전 10시.] 휴대전화가 진동하자 반승제는 또 스팸인 줄 알았으나 열어보니 성혜인한테서 온 문자였다.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서류마저 떨어뜨릴 뻔한 그는 몇 초 동안이나 멍하니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알았어!][할아버지 일은 너 때문이 아니라는 걸 나도 알아. 내가 그때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그럼 내가 내일 너 데리러 갈까?] 문자를 보내고 나서 그는 뚫어져라 휴대전화만 쳐다봤다. 그녀한테서 빨리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그러나 저편에 있는 성혜인도 그 시각 휴대전화를 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할아버지 일은 그녀도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반승제의 몇몇 친구들은 그녀가 그 일에 관여했다고 여겼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반태승이 세상을 떠나간 지금 그녀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게다가 반태승이 왜 그 상자를 그녀한테 쥐여주며 반승제한테 직접 전달하라고 했는지 그녀도 아직 영문을 모르고 있다.만약 그가 상자 안에 독사가 들어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으면서 그랬다면, 그렇게 한 의도는 뭐였을까?그녀와 반승제의 관계가 틀어지길 바래서? 그렇지만 반태승은 줄곧 그녀와 반승제 사이를 응원해 주지 않았던가?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성혜인은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했다.회사에 돌아오자, 한서진이 파일 하나를 들이밀었다. 유해은의 다음 촬영 스케줄에 관한 내용과 송아현에 대한 일부 자료가 들어있었다.요즘 송아현은 얌전히 촬영에만 임하고 있어 살도 몇 킬로 빠졌다.이번 촬영이 끝나게 되면 회사 명의로 한서진의 옆집에 세를 내어주겠다고 한 성혜인의 약속 때문이었다.순정파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꽂히게 되면 물불을 안 가리는 성향이었다. 그 약속 때문에 진짜로 열심히 촬영하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속으로 웃기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또 마침 한서진이 송아현한테 맞는 배역 유형에 대한
성혜인은 그야말로 웃기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반승제가 스스로 좋다고 따라온 것인데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설인아의 손목을 뿌리치며 말했다.“설인아 씨는 지금, 여자친구가 되려고 쫓아다니다가 거절을 당하니까 꼭지가 돌아버린 거군요? 그런데 그 화를 반승제한테 내진 못하고 나한테 풀겠다, 이거네요?”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설인아는 손가락마저 바들바들 떨며 성혜인한테 삿대질했다.“너 죽여버릴 거야!”그녀는 손에 쥔 가방을 사정없이 성혜인을 향해 내던졌다. 성혜인은 가방을 피하고자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서 막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가방은 다시 튕겨 나가 설인아의 머리에 퉁, 하고 부딪혔다.순간 설인아는 눈앞에 불꽃이 튕기는 것만 같았고, 이어서 뒤로 자빠지며 쓰러지고 말았다.화가 치밀대로 치민 설인아는 심장이 저릿저릿 아파 왔다. 고육계를 써서도 성혜인과 반승제를 완전히 갈라놓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그녀의 심장병을 이용해 아빠 엄마를 제원에 오게 하여 반승제와의 혼사를 결정짓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한편 성혜인은 그녀가 꾀병을 부리는 것인지 아닌지 몰라, 일단 구급차를 불렀다.그 후 설인아가 입원하게 된 사실은 금방 설기웅과 설우현한테 알려졌다.설기웅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병원으로 갔고 설우현은 성혜인한테 전화부터 걸었다.“혜인 씨 이번에 큰일 저질렀어요. 인아의 심장병은 우리 집에서 큰일이에요. 지금까지 잘 보살핀 덕에 재발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면 저희 부모님이 꼭 오실 거예요. 조심하세요, 혜인 씨. 저희 아버지 무서운 사람이니까 반 대표 찾아가는 게 좋겠어요.” 설우현은 진심으로 걱정이 됐다. 요즘 설기웅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고, 아버지 쪽도 그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설씨 집안에서 단순한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그는 성혜인의 성격이 마음에 들어 그녀를 돕고 싶었지만 입장이 난처했다.전화를 받을 때 성혜인은 이미 포레스트에 돌아왔고 자신이 사고를 쳤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미간을 짓누
성혜인은 절을 하고 일어나서 슈트 상의을 들어 그에게 돌려주었다.옷을 받는 순간 반승제는 자신의 손끝이 그녀의 것과 살짝 닿는 게 느껴졌다. 손끝이 하나는 차고 하나는 뜨거웠다.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반승제는 그녀한테 거짓말을 했다.“할아버지가 그러던데 네가 뭘 한가지 약속한 게 있다며?”반태승의 유언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그는 오히려 성혜인을 떠보았다.그날 절벽에서 할아버지가 그녀한테 무슨 얘기를 한 게 없는지 궁금했다.그러나 사실 그날 밤 반태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은 애초에 전부 배현우가 짠 판이었을 뿐이다. 그 판 위에는 반태승과 그날 하이킹한 모든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녀도 포함이었다.이름마저 가짜인 배현우, 그는 대체 무슨 사람일까. 왜 반씨 집안을 겨냥한 걸까.반승제가 갑자기 묻자, 성혜인은 그날 일을 다시 떠올리며 반태승한테 한 약속이 생각났다. 반씨 집안에 증손주를 낳아주겠다고 했던.하지만 이 약속을 반승제한테 얘기해줄 순 없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다. 반승제는 물어도 그녀가 대답을 해주지 않을 걸 알고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라 같이 내려갔다.내려가는 속도는 올라올 때보다 훨씬 빨랐다. 그는 언뜻 하이킹하던 그 길에서 성혜인을 업고 걸을 때 그녀가 등에 업혀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와 생사를 오가는 고비를 겪었지만 따뜻하고 훈훈했던 순간은 유독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둘은 차를 세운 곳에 도착했다. 반승제는 그녀를 태우고 싶었지만 그녀는 보디가드가 몰고 온 차로 가서 ‘잘 가요’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반승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는 그녀의 차창을 두드렸다.차창이 쉬익, 하며 내려졌다.“저녁 식사라도 같이 안 할래?”성혜인은 휴대전화를 힐끔 하고는 대답했다.“저녁에 스케줄 있어서 안 돼요.”“그럼 내일에는?”“내일에는 회의 있어요.”“회의를 하루 종일 해?
그는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지만 성혜인이 여전히 그 남학생한테서 시선을 거두지 않자 그녀 옆에 딱 붙어 서서 얘기했다.“나도 농구 잘하는데.”입김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성혜인은 예전에 반태승한테서 반승제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열대여섯살때의 반승제는 엄청 말을 안 들었고 투우장의 소처럼 매사에 힘과 패기가 흘러넘쳤다고 했다. 또한 가장 눈부신 아이였다고.아쉽게도 그녀는 그런 반승제를 말로만 들어야 했다.성혜인은 너무 가깝게 붙어있는 그를 팔꿈치로 조용히 밀어냈다. 그리고 조승한이 물티슈로 땀을 닦으며 다른 학생들한테 둘러싸여 걸어오게 되자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승한!”조승한은 체육복 겉옷을 손가락 끝에 걸고 가다가 땀을 다 닦고 나서야 단정히 입고 겉옷 지퍼를 맨 위까지 올렸다. 공 칠 때의 활기찬 모습 대신에 원래의 냉랭한 자태로 돌아왔다.그는 성혜인을 단번에 알아보는 듯했다.“무슨 일이에요?”시간을 확인한 후 성혜인은 그한테 말했다.“아직 수업 시작하려면 20분 남았지? 나한테 한 십분만 줄 수 있어? 너랑 좀 얘기하고 싶은데.”전에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적이 있는 조승한은 사실 연예인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아니요.”“조현 작가님에 관한 얘기야. 난 작가님이랑 파트너 관계인데, 넌 아마 작가님의 일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지?”그녀의 말이 소년의 허를 찔렀다.그가 발걸음을 멈칫하게 되는 순간, 성혜인이 반승제한테 하는 말이 들렸다.“나 따라오지 마요. 가든가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든가 하세요.”반승제는 말없이 농구대가 있는 그 곳에 멈춰서서 덤덤하게 조승한을 흘깃 쳐다봤다.성혜인은 조승한을 향해 눈짓을 하며 약간 멀리 떨어져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우리 저기 가서 앉을까?”그렇게 조승한과 나란히 백 미터 정도 걷는 동안 지나가는 학생들이 모두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고 어떤 학생들은 웃으면서 다가와 조승한한테 인사를 건넸다.벤치에 앉자마자 성혜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성혜인이 그의 요청을 수락하려는 그때, 한 차가 그들 옆에 멈춰 섰다. 이어 차창이 내려지더니 신이한이 얼굴을 드러냈다.“혜인 씨.”“이한 씨?”지난번에 반승제는 신이한한테 꽤 큰 골칫거리를 안겨주었지만 본인도 별로 이득을 보지 못했다. 애를 쓴 데에 비해 성혜인과의 만남은 얼마 유지하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다.신이한은 그 때문에 속이 아주 후련했다. 하지만 그는 요즘에도 그 일의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방금 그는 잘못 본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보니 진짜 성혜인이었다.반승제와 같이 있는 건 심히 거슬렸지만,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차에서 내렸다. 물론 반승제는 본 척도 안 하고 무시해 버렸다.“요즘 조현 작가랑 일 얘기가 오간다면서요?”“네, 조현 작가님의 시나리오가 맘에 들어서요.”“그 작가님의 좋은 시나리오는 한두 개가 아니에요. 줄곧 팔지 않고 있는 시나리오가 하나 있는데 아마 그것이 작가님이 제일 만족스러워하는 작품일 거예요.”그의 말을 들으니 성혜인은 구미가 당겼다.“어떻게 아세요?”“예전에 잠깐 인연이 있었죠.”신이한은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혜인 씨, 저녁에 같이 식사 어때요?”그도 반승제와 똑같이 미끼를 던져 저녁 식사를 요청해 왔다.성혜인은 신이한의 미끼에 더 관심이 가는 터라 얼른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반승제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내 차로 가.”성혜인이 반승제의 차 뒷좌석에 올라탄 그때, 신이한이 재빠르게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반승제는 원래 뒷좌석에 성혜인과 같이 타고 신이한한테 운전을 맡기려고 했는데 신이한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한발 앞서 차에 탈 줄 몰랐다.심인우도 오지 않았는데 만약 세 사람 모두 뒷좌석에 탄다면 운전할 사람이 없게 된다.신이한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득의양양한 얼굴로 염장을 질렀다.“어머, 반 대표님이 운전하셔야 겠네요?”반승제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부스러뜨릴 것처럼 주먹을 꽉 쥐더니 결국 운전
"혜인아, 여기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면 돼. 그러고 나와서 온천욕 하자. 너 요즘 맨날 야근했잖아. 온천욕하고 나면 피로가 좀 풀릴 거야.”성혜인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저도 몰래 뻐근해진 목을 손으로 꾹꾹 주물렀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살짝 차가운 손이 그녀의 목 위에 얹혀졌다.“내가 주물러 줄게.”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할 때의 반승재는 확실히 몸을 낮출 줄 아는 남자였다.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온천탕의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른 이 분위기는 아무리 봐도 이상야릇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거의 겹치다시피 거리가 가까웠고 그의 손은 그녀의 목을 부드럽게 주무르고 있다.“어때, 힘이 이만큼이면?”성혜인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답했다.“옷 갈아입으러 갈게요.”최근에 확실히 피곤함에 시달렸던 참이었는데 시원하게 온천욕으로 피로를 풀 수 있다면 왜 굳이 마다하겠는가. 그리고 앞으로 이런 평온한 날이 며칠 더 있을지도 모른다. 설인아의 집안에서 그녀를 입원시킨 ‘주범’을 어떻게 응징하겠다고 나설지 모르는 일이었다.그녀가 탈의실에 들어간 후, 반승제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기며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옆에 있는 탈의실로 들어갔다.성혜인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 마침 반승제도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는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 동공이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살결이 워낙 하얀 데다가 그녀가 입은 하늘색 치마 수영복 역시 그녀의 몸에 착 달라붙어 굴곡진 몸매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녀는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데는 나온 완벽한 S라인이었다.그녀와 많은 밤을 같이 보낸 반승제는 만지지 않아도 그녀의 허리가 어떤 촉감인지, 그녀의 다리가 몸에 감겼을 때 얼마나 넋을 잃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앞으로 몇 발짝 걸어가더니 성혜인은 갑자기 멈추며 뒤를 돌아 그를 보았다.그 바람에 반승제도 멈칫하며 순간 몸안에서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더니 코에서 무언가 흘러나왔다. 성혜인은 보더니 얼른 탈의실로 뛰어 들어가 물티슈를 갖고 나왔다.“승제 씨, 코피 나요.”성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