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와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배현우에 대해서 알아보세요.”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알아보지 않겠다고 성혜인과 약속을 했었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고 심지어 성혜인에게 약까지 먹였으니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반드시 찾아내서 갈기갈기 찢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같은 시각.성혜인은 아직도 포레스트에서 야근을 하고 있다.그녀 또한 반승제와 마찬가지로 배현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다.반승제에게 알아보지 말라고 당부했던 건 그 일을 잊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아니면 그 일은 영영 두 사람 가슴 속의 응어리로 남게 될 것이다.하여 반드시 어찌 된 일인지 알아내야만 했다.왠지 모르게 이상이 들었고 배현우가 자기한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그뿐만 아니라 그 칩은 또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성혜인은 심지어 포레스트의 개인 의사를 찾아보라고 시켰었다.만약 개인 의사가 아니라면 배현우는 포레스트에 들어갈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개인 의사는 배현우의 일에 대해서 일절 모른다고 했었다.다른 의사를 부른 건 사실이나 그 의사는 누군가에게 맞아 기절했다고 했다.같은 시각.제원과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습을 숨긴 작은 실험실이 있다.실험실 안에서 남자는 컴퓨터를 통해 데이터를 보면서 분노하며 테이블을 치고 있다.연구 실험에 관해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는 반승우와 달리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하여 데이터를 알아본다고 한들 직접 조작할 능력이 없다.실험에 관해 반승우는 제일 으뜸으로 가는 천재이다.고작 열 몇 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 나이에 막강한 실력을 지닌 연구원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었으니 말이다.“반승우 씨! 저 좀 도와주세요.”남자는 이미 칩을 손에 넣었다. 만약 칩 안에 들어있는 내용만 장악하게 된다면 반승우라는 인간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그가 이 몸의 주인이 된다.그럼 깨어날 때마다 왜 또 다른 곳에 있
남자는 소문을 퍼뜨리고 나더니 속이 다 시원해졌다.그는 칩을 작은 상자 안에 놓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왜 이딴 걸 연구하고 그래요? 난 또 무슨 세상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무기인 줄 알았는데, 쓸모없는 물건이잖아요. 이런 걸 연구하는 당신들도 참 변태가 따로 없네요.”“아니요, 그거 무기 맞아요. 여러 큰 나라들 사이에서는 화기로 전쟁을 벌릴 수 없어요. 모두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런 방면에서 손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만약 실험에 성공하여 한 사람에게 다른 인격이 나타날 수 있게 한다면 딱 마침 그들이 필요한 인격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럼, 그 인격은 아주 손쉽게 한 나라의 고관을 책동하여 모반할 수 있는 것이죠.”이에 남자는 피식하고 웃었다.“별 쓸데도 없네요.”반승우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럼, 저 또한 그들에게 컨트롤 당하고 이용당하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나타난 이유도 단지 그것 때문인가요?”“네.”“반승우 씨 말만 듣고 믿을 수 없어요. 어찌 된 일인지 저 혼자서 알아낼 거예요.”반승우는 한참동안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혜인이한테 상처 주지 마세요.”그러자 남자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상처 범벅인 당신이 걱정할 바는 아닌 것 같네요.”“제가 어떤 모습이든 혜인이 걱정하는 마음만은 변치 않을 거예요.”반승우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게 된다.뼛속까지 부드러움이 배 있는 반승우에게 언성을 높이면 마치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남자는 반승우의 부드러움을 무척이나 싫어하며 그가 내숭을 떨고 있다며반감했다.반승우가 몸가짐을 깨끗이 하는 점도 무척이나 싫었다.여자와 잠자리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지만, 가장 관건이 되는 순간마다 그로부터 제재를 당했었다.그때 반승우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한없이 어둡고 무거웠었다.“저 여자들이 제 몸에 손대는 게 싫습니다.”두 사람은 같은 몸
반승제는 확실히 성혜인을 기다리고 있다.어제 성혜인이 차에서 내리기 전에 네이처 빌리지로 와서 함께 저녁을 먹겠다고 약속을 했었기 때문이다.하여 그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기다리기 시작했다.설레는 마음에 집으로 오기 전부터 미리 연락해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하기도 했다.집으로 돌아오고 난 뒤, 그는 줄곧 소파에 앉아 있었다.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정원에 꽃이 예쁘게 피어난 것을 보고 그만 참지 못하고 스토리를 올리게 된 것이다.올리고 나니 부끄러움이 밀려와서 게시물을 삭제 하려고 했었다.하지만 스토리에 달린 댓글을 보고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연애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예쁜 물건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상대방이 먼저 떠오른 것.이 순간 사랑하는 그 사람과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반승제에게 있어서 이상하기만 한 정서가 아닐 수 없었다.갑자기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 그는 한쪽에 있는 노트북을 펼쳤다.그렇게 저녁 7시가 되었고 성혜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뿐더러 전화 한 통 없었다.성혜인은 오늘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삐 보내고 있었다.어젯밤에도 밤을 지새우며 업무를 보았고 5시가 넘자마자 또다시 회사로 와서 업무를 처리했다.새 직원들은 어느 정도 업무에 익숙해졌지만 회사 성립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고 TJ 엔터 4분의 1 업무까지 소화하고 있어 그들에게 많이 버거웠다.요즘 회사 직원들은 같은 마음으로 야근을 하면서 건물 전체가 등불이 환했다.성혜인은 회의를 시작으로 매 프로젝트의 세부적인 사항까지 직접 체크하여 매사에 최선을 다했다.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았을 무렵 성혜인은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것이 살아있는 송장과 같았다.과한 업무로 정신이 해롱해롱해졌고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무거운 머리를 겨우 치켜든 채 남은 업무를 보고 있을 때 장하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장하리가 온 것을 보고 성혜인은 이미 완성한 자료를 넘겨 주었다.“장 비서가 좀 신경 써줘야
장하리는 성혜인의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다.살금살금 책상 앞으로 다가와 성혜인을 깨우려고 했으나 편히 좀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한편, 네이처 빌리지에서 저녁 음식은 이미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음식 준비를 마치고 난 뒤로 주방장은 식은 음식을 여러 번 데워 다시 올리고 했었다.여러 번 반복하고 나더니 주방장은 감히 반승제에게 물어볼 용기조차 없었다.그렇게 음식은 또다시 식게 되었고 반승제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는데 어느덧 저녁 10시가 되었다.성혜인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는 한 통도 없었고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예전에 반승제도 성혜인만큼 바쁜 적이 있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은 없었다.아무리 바빠도 성혜인의 전화는 꼭 받고 그랬었다.속이 타들어 가는 반승제는 그만 참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려 했으나 때마침 성혜인이 돌아올까 봐 걱정되었다.담배 냄새에 입맛이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여 이미 꺼낸 담배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였는데, 10시 30분이 될 즈음에 끝내 담배를 태우고 말았다.주방장이 퇴근함에 따라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을 다시 데워줄 사람도 없게 되었다.반승제는 오기가 생긴 듯이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식탁에 앉아 기다렸다.지금 거실에 감돌고 있는 분위기는 더없이 무겁다.심인우마저 감히 반승제 곁으로 다가가지 못한 채 멀리서 묵묵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저녁 11시가 되었을 때 심인우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대표님, 인제 그만 들어가서 쉬세요.”심인우는 문 앞으로 다가와 위로도 해주고 싶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그리고 반승제라는 인간을 어느 정도 알 것 같기도 했다.자기 마음을 알기 전에 반승제는 늘 억지로 우기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자기 마음을 알고 나서 반승제는 세상 그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사람으로 되었다.이는 극단적인 변화이지만 서로 모순되지는 않는다.사랑에 있어서 용기를 내지 못했던 쪽이 일단 첫걸음을 내디디게 된다면, 이
성혜인은 슬며시 한숨을 돌렸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에 사실 둘 다 많이 먹지 않았다. 너무 많이 먹으면 속이 쓰릴 테니 말이다.두 사람 모두 열 입 정도 먹고 나서 성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과 젓가락을 치우기 시작했다.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두 사람이 먹었던 그릇을 싱크대에 넣었다. 곧이어 세제를 손바닥에 짜자 갑자기 누군가 성혜인의 허리를 감쌌다.역시 반승제답게 그는 성혜인이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흥” 하며 뾰로통 해있기만 하더니, 아무 말도 없이 그녀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 틈을 타 스킨십을 해왔다. 그것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뒤이어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반승제는 이미 키스를 하려고 달려들었다.“손에 세제 있어요. 잠깐만요, 잠깐만.”하지만 그는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성혜인은 아예 세제를 그의 양복 코트에 묻혔다. 일부러 아니라 반승제가 너무 서두르는 탓에 별수 없었다.그녀는 반승제가 양복 코트를 벗는 것을 도와주고 키스에 점차 젖어 들었다.다음 순간, 반승제는 성혜인을 번쩍 들어 키스를 하며 부엌 밖으로 나갔다.그러고는 조금 전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었던 대리석 식탁 위에 그녀를 올렸다.자극을 받은 성혜인은 왠지 모를 수치심을 느끼며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반승제는 분명히 오랫동안 참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식탁에서 두 번이나 한 뒤 다시 성혜인을 안고 안방으로 갔다.성혜인은 남의 손에 운명이 맡겨진, 도마 위의 생선 같다고 느꼈다.얼마나 지났을까, 흐리멍덩한 상태로 눈을 뜬 그녀의 앞에는 온통 물안개뿐이었다.‘아, 샤워 중이구나.’뒤에는 반승제의 넓은 가슴이 있었고 두 사람은 함께 샤워하고 있었다.성혜인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반승제가 다시 그녀의 머리를 꾹 누르며 키스를 퍼부었다.그 키스에 온몸의 힘이 풀려 성혜인은 반항할 수조차 없었다.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에는 어느새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이미 오후 2시 반이었고 회사 임원들이 보낸 문자 메시지는 이미 100여
만약 강민지가 이곳에 있었다면 성혜인은 그녀와 이야기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예전에 강민지와 얘기했다가 그녀의 부러움과 질투만 샀던 일이 떠올랐다.성혜인은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짚고 있었다.장하리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진짜 머리가 아픈 것이라 생각했다.“사장님, 좀 쉬세요. 종일 서류 보셨잖아요. 그리고 어젯밤에도... 피곤한 게 당연해요.”성혜인은 그 말에서 이상함을 눈치채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을 내려다보았다.비록 깃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흔적들은 여전히 보일 듯 말 듯했다. 한여름에 깃 높은 옷을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녀는 서둘러 깃을 위로 당겼다.그러자 장하리가 감탄하며 말했다.“반 대표님 정력이 정말 좋으신가 봐요.”‘게다가 어젯밤 전화 오셨을 때는 많이 화나신 것 같았는데, 보아하니 이미 잘 달래진 모양이군. 단순히 달랜 것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까지...’남겨진 흔적들은 심한 멍이 아닌 그저 핑크빛을 띠는 정도라 남자가 힘을 많이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내려놓았다.“최근 승제 씨가 많이 한가해졌어요. BH 그룹이 이번에 새로 들인 임원들이 모두 능력 있는 사람들이거든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 앞 의자에 가서 앉았다.“장 비서, 저녁 좀 가져다줄래요? 손안에 있는 이 서류들만 보고 퇴근할게요.”아침은 조금 먹고 점심은 아예 먹지도 않아 성혜인은 뱃가죽이 등에 붙는 것만 같았다.“알겠습니다.”장하리가 나간 후, 성혜인의 핸드폰에 몇 개의 알림이 울렸다. 조금 전 올린 게시물에 댓글이 달린 것이었다.그녀는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정신이 조금 나자 게시물을 눌러 들어가 보았다.이 글은 성혜인이 진지하게 써 올린 것이었다. 두 사람이 사귄 지 이제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확실히 반승제를 견뎌낼 수 없었다.성혜인은 자신이 “착취” 당해 말라 죽는 건 시간 문제라 생각하고 미리 이런 위험을 피하고자 글을 올렸다.하지만
“아니요.”그녀는 즉시 뒷좌석에 앉았다.반승제는 자신의 정장 천이 성혜인의 옷에 바싹 붙을 정도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곧이어 길쭉한 손가락 끝이 그녀의 등을 따라 내려가다가 마침내 허리춤에 멈췄고 반승제는 가볍게 꾹 눌렀다.성혜인은 사실 온몸이 시큰거려 견디기 힘들었다. 통증을 참은 채 오후 내내 일을 한 그녀는 반승제의 마사지에 눈을 가늘게 뜨며 편안함을 즐겼다.그러다 스르륵 성혜인은 반승제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뒤척거리며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얼마 후 차가 포레스트에 도착하자 반승제는 그녀를 안고 내렸다.심인우는 매우 눈치 있게 차를 몰고 떠나 아침 일찍 그들을 픽업하러 오기로 했다.반승제는 2층 안방까지 걸어가 그녀를 먼저 한쪽 소파에 눕히고는 욕조에 물을 받아 옷을 깨끗이 벗긴 뒤 안에 넣었다.시큰거리는 곳을 누르면 두어 번 소리를 낼 뿐, 그동안 성혜인은 단 한 번도 깨나지 않았다.반승제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옆에 있던 수건을 뽑아 그녀의 몸을 닦아낸 다음 다시 번쩍 들어 안아 침대에 눕혔다.그리고 이번에는 자기가 샤워하고 나왔다.성혜인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얼굴의 절반이 이불속에 파묻혀 있어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곧이어 반승제가 그녀를 끌어안고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무슨 일이야?”“대표님, 성혜인 씨가 출현한 범위내에 배현우라는 인물을 모두 조사했습니다. 성혜인 씨의 생활패턴은 줄곧 매우 단일해요. 제원을 빼고는 타지에 가는 일이 극히 적습니다. 전국에 있는 배현우라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성혜인 씨와 같은 시간 같은 범위내에 있었던 사람이 없어요.”“예전에 혜인이가 나를 버리고 갔던 그 마을은?”“그곳 호텔에도 성혜인 씨 외에 다른 사람의 흔적이 없습니다. 제원에 있는 호텔도 포함해서 말이죠. 상대편에 아마도 탑급 해커가 한 명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CCTV 기록들을 다 삭제했더라고요. 그리고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성혜인 씨가 말한
회사에서 새벽 3시까지 줄곧 야근한 터라 장하리는 건물 아래로 내려갈 때 머리가 무겁고 발이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이윽고 차에 타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몇 명의 남자들이 튀어나와 몽둥이로 장하리의 머리를 때렸고 그녀는 순간 기절했다.몇 명의 남자들은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서둘러 다른 차로 장하리를 끌고 갔다.얼마나 지났을까, 찬물을 끼얹자 장하리가 깨어났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앞에는 몇 명의 남자가 보였고 곧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핸드폰을 던져주며 말했다.“성혜인한테 전화해서 구하러 와달라 해.”‘사장님을 노리고 온 거였구나.’처음에 장하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한쪽으로 치우쳤다.그러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웅크려 앉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 위로 향하게 하고 뺨을 때렸다.“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 혼자 우리 다섯 명을 전부 당해내야 할 테니까.”갑작스러운 손찌검에 장하리의 머리가 삐뚤어졌고 입가는 온통 핏자국이었다.곧이어 남자는 악랄하게 발로 핸드폰을 걷어찼다.“전화해. 10분 안에 하지 않으면 네 몸을 탐할 거야.”이 무리는 양아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운을 풍기는 게 딱 봐도 전문 납치범들 같았다.장하리는 주변 환경을 빙 살펴보았다. 교외에 버려진 어둡고 습한 지하실과 비슷해 보였다.그녀는 느릿느릿 자신의 핸드폰을 줍더니 어쩔 수 없이 전화 한 통을 걸어 짧게 6글자만 말하고는 뚝 끊었다.“저 납치됐어요.”그러자 옆에서 여전히 술을 마시던 남자가 그 말을 듣고 핸드폰을 휙 내팽개쳐버리더니 계속해서 술을 따랐다.몇 명의 납치범들은 장하리가 전화를 건 상대가 성혜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우리를 갖고 놀아?!”누군가 벌써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지만,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장하리의 핸드폰을 꺼내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은 새벽 4시, 시간이 시간인지라 성혜인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곧이어 수신 버튼을 누르자 핸드폰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