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강민지가 이곳에 있었다면 성혜인은 그녀와 이야기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예전에 강민지와 얘기했다가 그녀의 부러움과 질투만 샀던 일이 떠올랐다.성혜인은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짚고 있었다.장하리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진짜 머리가 아픈 것이라 생각했다.“사장님, 좀 쉬세요. 종일 서류 보셨잖아요. 그리고 어젯밤에도... 피곤한 게 당연해요.”성혜인은 그 말에서 이상함을 눈치채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을 내려다보았다.비록 깃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흔적들은 여전히 보일 듯 말 듯했다. 한여름에 깃 높은 옷을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녀는 서둘러 깃을 위로 당겼다.그러자 장하리가 감탄하며 말했다.“반 대표님 정력이 정말 좋으신가 봐요.”‘게다가 어젯밤 전화 오셨을 때는 많이 화나신 것 같았는데, 보아하니 이미 잘 달래진 모양이군. 단순히 달랜 것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까지...’남겨진 흔적들은 심한 멍이 아닌 그저 핑크빛을 띠는 정도라 남자가 힘을 많이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내려놓았다.“최근 승제 씨가 많이 한가해졌어요. BH 그룹이 이번에 새로 들인 임원들이 모두 능력 있는 사람들이거든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 앞 의자에 가서 앉았다.“장 비서, 저녁 좀 가져다줄래요? 손안에 있는 이 서류들만 보고 퇴근할게요.”아침은 조금 먹고 점심은 아예 먹지도 않아 성혜인은 뱃가죽이 등에 붙는 것만 같았다.“알겠습니다.”장하리가 나간 후, 성혜인의 핸드폰에 몇 개의 알림이 울렸다. 조금 전 올린 게시물에 댓글이 달린 것이었다.그녀는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정신이 조금 나자 게시물을 눌러 들어가 보았다.이 글은 성혜인이 진지하게 써 올린 것이었다. 두 사람이 사귄 지 이제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확실히 반승제를 견뎌낼 수 없었다.성혜인은 자신이 “착취” 당해 말라 죽는 건 시간 문제라 생각하고 미리 이런 위험을 피하고자 글을 올렸다.하지만
“아니요.”그녀는 즉시 뒷좌석에 앉았다.반승제는 자신의 정장 천이 성혜인의 옷에 바싹 붙을 정도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곧이어 길쭉한 손가락 끝이 그녀의 등을 따라 내려가다가 마침내 허리춤에 멈췄고 반승제는 가볍게 꾹 눌렀다.성혜인은 사실 온몸이 시큰거려 견디기 힘들었다. 통증을 참은 채 오후 내내 일을 한 그녀는 반승제의 마사지에 눈을 가늘게 뜨며 편안함을 즐겼다.그러다 스르륵 성혜인은 반승제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뒤척거리며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얼마 후 차가 포레스트에 도착하자 반승제는 그녀를 안고 내렸다.심인우는 매우 눈치 있게 차를 몰고 떠나 아침 일찍 그들을 픽업하러 오기로 했다.반승제는 2층 안방까지 걸어가 그녀를 먼저 한쪽 소파에 눕히고는 욕조에 물을 받아 옷을 깨끗이 벗긴 뒤 안에 넣었다.시큰거리는 곳을 누르면 두어 번 소리를 낼 뿐, 그동안 성혜인은 단 한 번도 깨나지 않았다.반승제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옆에 있던 수건을 뽑아 그녀의 몸을 닦아낸 다음 다시 번쩍 들어 안아 침대에 눕혔다.그리고 이번에는 자기가 샤워하고 나왔다.성혜인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얼굴의 절반이 이불속에 파묻혀 있어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곧이어 반승제가 그녀를 끌어안고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무슨 일이야?”“대표님, 성혜인 씨가 출현한 범위내에 배현우라는 인물을 모두 조사했습니다. 성혜인 씨의 생활패턴은 줄곧 매우 단일해요. 제원을 빼고는 타지에 가는 일이 극히 적습니다. 전국에 있는 배현우라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성혜인 씨와 같은 시간 같은 범위내에 있었던 사람이 없어요.”“예전에 혜인이가 나를 버리고 갔던 그 마을은?”“그곳 호텔에도 성혜인 씨 외에 다른 사람의 흔적이 없습니다. 제원에 있는 호텔도 포함해서 말이죠. 상대편에 아마도 탑급 해커가 한 명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CCTV 기록들을 다 삭제했더라고요. 그리고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성혜인 씨가 말한
회사에서 새벽 3시까지 줄곧 야근한 터라 장하리는 건물 아래로 내려갈 때 머리가 무겁고 발이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이윽고 차에 타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몇 명의 남자들이 튀어나와 몽둥이로 장하리의 머리를 때렸고 그녀는 순간 기절했다.몇 명의 남자들은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서둘러 다른 차로 장하리를 끌고 갔다.얼마나 지났을까, 찬물을 끼얹자 장하리가 깨어났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앞에는 몇 명의 남자가 보였고 곧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핸드폰을 던져주며 말했다.“성혜인한테 전화해서 구하러 와달라 해.”‘사장님을 노리고 온 거였구나.’처음에 장하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한쪽으로 치우쳤다.그러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웅크려 앉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 위로 향하게 하고 뺨을 때렸다.“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 혼자 우리 다섯 명을 전부 당해내야 할 테니까.”갑작스러운 손찌검에 장하리의 머리가 삐뚤어졌고 입가는 온통 핏자국이었다.곧이어 남자는 악랄하게 발로 핸드폰을 걷어찼다.“전화해. 10분 안에 하지 않으면 네 몸을 탐할 거야.”이 무리는 양아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운을 풍기는 게 딱 봐도 전문 납치범들 같았다.장하리는 주변 환경을 빙 살펴보았다. 교외에 버려진 어둡고 습한 지하실과 비슷해 보였다.그녀는 느릿느릿 자신의 핸드폰을 줍더니 어쩔 수 없이 전화 한 통을 걸어 짧게 6글자만 말하고는 뚝 끊었다.“저 납치됐어요.”그러자 옆에서 여전히 술을 마시던 남자가 그 말을 듣고 핸드폰을 휙 내팽개쳐버리더니 계속해서 술을 따랐다.몇 명의 납치범들은 장하리가 전화를 건 상대가 성혜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우리를 갖고 놀아?!”누군가 벌써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지만,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장하리의 핸드폰을 꺼내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은 새벽 4시, 시간이 시간인지라 성혜인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곧이어 수신 버튼을 누르자 핸드폰
전화를 끊은 성혜인이 고개를 돌려보자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현장에 서 있는 반승제가 보였다.그녀는 다가가서 의심스러운 듯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그러자 반승제가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장 비서는 괜찮대?”“네.”...창밖에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을 바라보던 장하리는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여미려 했다.얼마 안 지나 차는 현재 그녀가 살고 있는 곳에 멈춰 섰다. 이곳은 성혜인이 예전 소속 연예인들에게 마련해준 숙소 단지였다.건물은 일찍이 인테리어를 끝마쳐 S.M의 여러 연예인들이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이곳은 보안이 잘 되어있고 정문 입구의 경비원이 매 가구마다 소유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매번 들어갈 때마다 반복해서 검문했으며 방문자는 주민등록증을 남기도록 했고 소유주 본인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야만 사람을 들여보낼 수 있었다.장하리는 도어를 내리고 밤늦게까지 당직을 서고 있는 경비원을 향해 웃었다.“문 좀 열어주세요.”경비원은 그녀를 알아보고 큰 철문을 열어주었다.이윽고 사는 곳에 도착하자 장하리는 자기 곁에 조용히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뭘 하려고 이 안까지 따라 들어왔지?’그녀가 전전긍긍해 하며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집안에 들어서자 남자는 혼자 소파에 가서 앉았다.“샤워해.”말투가 차가운 게, 이 작은 집에 별로 눈길조차 주는 것 같지 않았다.장하리와 같은 여자는 현모양처로 적합하다. 늘 집안 모든 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방안의 가구 역시 모두 그녀가 직접 고른 것이었다. 대다수 것이 중고 시장에서 사 온 매물이었지만 많은 신경을 써서 아늑하고 예쁘게 꾸몄다.그러나 남자는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고 넥타이를 풀고 등을 뒤로 젖혔을 뿐, 그녀 주변의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장하리는 고개를 숙이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뒤 타월을 두르고 나왔다.남자는 이 방면에서 인내심이 별로 없는 타입인지라 “예열”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한 키스도 하지 않았다.사실 남자는 그저 폭력적
평소 출근 시간대와 비교해보면 이미 한참 지각한 뒤였다. 장하리는 자신을 한번 정리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사무실로 들어가자 일찍이 도착한 성혜인이 어두운 안색의 장하리를 보고 물었다.“장 비서, 안색이 많이 안 좋은데 열나는 거 아니에요?”장하리는 얼른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확실히 조금 뜨거운 감이 있었다.“어젯밤 감기에 걸렸나 봐요. 약 좀 먹으면 나을 겁니다.”“어제는 괜히 저 때문에... 누를 끼쳐서 미안해요. 승제 씨한테 그 납치범들 출처를 알아보게 했더니 누가 보낸 사람인지 이미 다 나왔어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일어나지 않도록 할게요.”“미안해할 필요 없으십니다, 사장님. 저도 아무렇지 않고요.”눈앞이 어지러웠지만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하리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서둘러 해열제를 먹었다.매우 피곤하면서도 몸이 아팠고, 아프면 또 자연스럽게 정신을 차리게 된다. 이런 고통은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었다.그렇게 장하리는 저녁까지 흐리멍덩해 있다가 겨우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을 마치고 성혜인에게 반차를 얻은 뒤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해열제는 도무지 소용이 없었다. 방안 작은 침대에 누워 장하리는 얼떨결에 옛날 일을 떠올렸다.부모님이 이혼한 지 일 년 후, 엄마는 재혼했다.계부는 항상 그녀에게 손찌검을 해댔고 장하리가 가정 교사 수업을 받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수그러들었다.그 가정 교사가 바로 이전에 장하리가 결혼하려고 했던 방우찬이다.당시 방우찬이 계속 장하리의 곁에 있어 계부는 기회가 없었다. 방우찬이 자신을 계부의 손찌검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줬기에 장하리는 자연스레 그를 구원자로 여기게 되었다.그렇게 그들은 7년간 사귀다 곧 결혼할 예정이었는데, 방우찬은 부잣집 딸과 얽히게 되었다.장하리는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느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건 물론 유일하게 잡고 싶었던 남자도 그녀를 버렸으니 말이다.추억을 회상하던 장하리의 뇌리에 갑자기 자신을 사랑해주던 친아버지가 떠올랐다.당시 그녀의 어머
소파에 힘없이 누워있는 장하리의 귀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고 곧이어 성혜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장 비서한테 메시지를 여러 개나 보냈는데 답장이 없길래 경비실에서 마스터키 갖고 왔습니다. 아직도 열나요? 제가 개인 의사한테 와서 봐달라고 부탁했어요.”열이 나는 탓에 비록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지만, 장하리는 그것이 성혜인의 좋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래서 서둘러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열 때문에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의사는 그녀에게 수액을 놓아주기 위해 손등에 바늘을 꽂았다.성혜인은 허약한 장하리의 모습을 바라보다 잠옷 사이로 비치는 얼룩덜룩한 흔적을 발견했다.‘분명 직접 낸 흔적은 아닐 텐데... 장 비서가 어제 말한 친구는 도대체 누굴까? 어젯밤에 물어볼 때도 왠지 우물쭈물하는 것 같았어. 그 남자도 만만치만은 않은가 보군.’하지만 장하리가 직접 털어놓지 않는 이상 성혜인도 더 깊게 물어볼 수 없었다. 어쨌든 이것은 어디까지나 프라이버시니 말이다.그렇게 배달음식까지 주문 완료한 성혜인은 반승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백지영이야. 백현문은 아직 병원에 있고 백지영이 사람을 시킨 거야.”‘백지영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감금당하지 않았었나? 누가 풀어준 거지?’“승제 씨, 누가 대체 백지영을 풀어준 거에요?”“도송애.”성혜인은 순간 도송애의 뒤에 설인아가 있으리라 생각했다.상대가 설씨 가문으로 바뀌면 그녀는 승산이 없다.하는 수 없이 성혜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반승제가 말했다.“언제 돌아와?”“장 비서가 열이 나서 오늘 저녁은 안 돌아가고 여기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이렇게 핑계를 대는 김에 그녀는 반승제의 “괴롭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이따 돌아가 또 밤새 반승제에게 눌려 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반승제는 소파에 앉아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백지영 일은 내가 처리해줄게. 도송애도 나한테 방법이 있어.”그 말인즉슨,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면 된다는 것이었
성혜인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니 확실히 열이 내린 것으로 보였다.“장 비서, 정말 집에서 안 쉴 거예요? 저는 사업가입니다. 장 비서와 함께 회사로 돌아갔으면 좋겠지만 일을 하는 전제는 먼저 자신의 몸을 잘 가꾸는 거예요.”“사장님, 저 이미 괜찮아졌어요.”성혜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서둘러 회사로 갔다.그다음 일주일 동안 성혜인은 거의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몇 번 돌아간다 해도 포레스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반승제를 보러 갔을 뿐.너무 바쁜 탓에 성혜인은 옷 몇 가지를 챙긴 뒤 매번 반승제의 볼에 뽀뽀하고는 서둘러 떠났다.처음에는 이해해주다가 반승제도 일주일간의 “방치” 끝에 침묵에 이르렀다.마지막으로 포레스트에 돌아갔을 때 성혜인은 반승제를 보지 못했다.따로 보러 갈 시간이 없어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차를 몰고 BH 그룹으로 가보려 했으나, 차에 타자마자 임원들이 전화를 걸어와 회의하러 오라고 재촉했다.성혜인은 지금껏 매일 거의 30분 정도의 휴식시간을 가졌는데, 이 30분은 바로 식사하는 데 쓰였다.그러다 문득 반승제가 떠올랐고, 성혜인은 그제야 두 사람이 3일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성혜인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어 반승제가 지금 회의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물어보려고 했다.하지만 전화를 채 걸기도 전에 회사 프런트에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사장님, 사장님 친부모님께서 회사에 오셨습니다. 한번 만나고 싶으시대요.”‘나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프런트 직원이 목소리 또한 전전긍긍해 하는 티가 났다.“그쪽에서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장님 출생증명서까지 보여주면서 말이에요. 한번 내려와서 보실래요?”그러다 순간 전에 진세운이 그녀의 출신을 물어봤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성혜인은 제대로 조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마음속으로 임지연이라는 어머니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확실히 버려진
성혜인은 그들이 마냥 우습기만 하여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말투도 한껏 차가워졌다.“결과 나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죠.”떠나려는 성혜인의 모습으로 보고 장영희는 바로 다가가 손을 덥석 잡았다.“혜인아, 너 설마 우리 형편 보고 외면하는 거야? 널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납치범이 널 유괴한 거였어. 나도 네 아빠도 눈물 마를 새도 없이 매일 울었어.”하지만 성혜인은 손을 확 뿌리치며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결과 나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어요.”그 말에 장영희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형세에서 밀리는 편이라 화를 꾹 참았다.“그럼 전화번호라도 남겨줘. 결과 나오는 대로 연락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네가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떡해.”두 사람과 단 1초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성혜인은 이미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이르렀다.하지만 장영희는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혜인아, 엄마 말 안 들려?”이에 성혜인은 발걸음을 멈췄고 두 사람을 향한 그녀의 시선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두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는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두 분을 여기로 보내셨는지 그게 뭐든 상관없어요. 저 두 분과 이렇게 허비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많이 바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건 결과가 나오고 나서 다시 얘기하시죠.”성혜인의 눈빛과 말투에 장영희는 사색이 되어 조금 전까지 날뛰던 모습은 가뭇없이 사라졌다.말리는 이가 더 이상 없자 성혜인은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성혜인이 떠나자마자 전태경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여보가 너무 성급했어. 이제 막 찾은 딸인데 좀 살갑게 말하지 그랬어. 그 누가 들어도 혜인이 돈 보고 찾아온 것처럼 보이잖아. 여보라면 앉아서 얘기하고 싶겠어?”“우리 딸 맞잖아. 친자 확인 유전자 검사도 이미 했잖아. 병원에서 실수했을 리도 없고 혜인이는 그냥 우리가 싫은 거야. 우리가 하도 가난하여 부모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저러는 거
공지민은 섬에서 한 달을 푹 쉬었고 그 사이 연승혁의 상처도 조금씩 나아졌다.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염정아의 판결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염정아는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분명히 이는 그녀가 선택한 결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까.판결 결과를 본 날 공지민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주변의 바람이 매우 거셌다. 그녀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염정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칼을 쥐여준 것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게 참았으며 고통에 젖어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연승혁이 다가왔다.“지민아, 오늘 밤에 해산물 바비큐 할 건데 저번에 먹었던 킹크랩 또 먹을래? 이따가 나랑 시장에 가서 사 오자.”연승혁은 공지민 앞에 서서 그녀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울었어?”최근 며칠 동안 연승혁은 매우 부드러워졌고 이전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친구들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바람이 너무 세서 눈에 모래가 들어갔어요.”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혹시 뉴스 때문에 그래? 봤었어? 사실 무기징역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법정 쪽에 말대로라면 법정에서 자기가 직접 자백하며 죽는 걸 원했대. 아무도 살릴 수 없었어. 지민아,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오늘 밤에 뭐 먹을지 생각해 보자.” 공지민의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오늘 밤 뭐 먹을지가 한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마음속에서 조롱이 커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감동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연승혁의 눈빛이 깊어지고 손은 그녀의 허리에 닿아 한껏 힘을 주었다. 공지민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일어나서 집을 나와 헬기를 타고 염정아의 집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집에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옆에는 두 사람이 따라왔고 모두 그의 사람들이었다. 염정아의 집을 알아낸 후 그는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아래층 슈퍼마켓 사장님은 그들을 보고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염정아에게 부탁받고 왔다는 걸 듣고 몇 마디 더 묻고 나서야 방 열쇠를 건넸다. 온시환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문에는 작은 광고들이 잔뜩 붙어 있었고 집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렇게 크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열쇠를 꽂고 들어갔을 때 방 안에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일부는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일부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온시환은 입을 열려고 하다가 이 아이들이 아마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아이만이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저씨, 엄마 아빠가 우리 보러 오라고 하신 건가요? 우리는 언제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어요?”온시환은 웃어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웃어지지 않았다. 염정아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곧 처형될 예정이다. 그는 정말 이 아이들을 모두 복지관에 보내야 할까? 그는 잠깐 망설였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아이들 챙겨. 제원으로 간다.”만약 아이들을 이곳 복지관에 두면 이곳은 너무 멀어서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해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차라리 제원 복지관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온시환은 이 아이들을 직접 돌볼 고민도 했었지만 그들을 보면 염정아의 인생이 떠올랐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그걸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했다.그는 제원의 복지관에 기부할 수 있었고 매주 사람을 보내 아이들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자라도록 챙기고 학교에 보내어 나중에 직장을 찾아서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는 늘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가장 막장 같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문득 공지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의 쓰라림도 점점 더 커졌다. 그때 VIP룸의 문이 열리고 반승제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우리 다 같이 시간 내서 놀러라도 가자. 마침 혜인이도 요즘 놀러 가고 싶어 하던데.” 한때 온시환은 노는 걸 가장 즐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갈 생각만으로도 힘이 빠졌다. 그는 멍하니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반승제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그때 그는 우습게 느껴졌다. 반승제처럼 완벽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이 부족할 리가 있나? 세상에 여자는 넘쳐나는데 이 여자가 아니면 다른 여자를 찾으면 될 일 아닌가.하지만 세상일은 돌고 도는 법이라더니 그도 결국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물며 그 사람은 그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남자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려 들었다. 그날 경찰서 앞에서 연승혁을 봤을 때 온시환은 공지민의 대략적인 계획을 알 것 같았다. 그때 연승혁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은 분명히 순수하지 않았고 연승혁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빠졌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온시환은 질투가 아니라 씁쓸함을 느꼈다. ‘연승혁 너도 참. 평생을 거만하게 살아온 네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가 오히려 네 목숨을 노리다니.” 온시환은 술을 또 한 모금 마시며 자신과 연승혁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서주혁은 손을 천천히 내밀어 그가 마시려던 술을 가로챘다. “그만 마셔. 위 출혈 나서 병원에 실려서 가고 싶어?” 온시환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
연승혁의 상처가 조금 나아졌을 때 공지민은 그를 데리고 해변을 거닐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섬에 왔을 때처럼. 연승혁은 체력이 좋아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다. 이 섬에 와서 부상을 당한 그날을 제외하고 그는 매일 자신과 공지민이 연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이 다시 여기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승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민아, 여기서 돌아가면 나랑 함께할래?” 공지민은 잠시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우리가 이미 함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우리가 미혼 부부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긴 한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그 문제들은 내가 모두 해결할 거야.” 김경자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한 일이 기존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예전처럼 말이다. 어차피 김경자도 그가 하는 방식에는 이미 익숙해졌을 터였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만 원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렸다. 머릿속에는 연승혁과의 일보다는 염정아가 떠올랐다.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사건이 그렇게 커졌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온시환은 염정아를 도왔을까?’ 그녀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온시환은 슬퍼할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살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제원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 연승혁이 자신과 함께 여기 남아있게 할 것이다. 마치 그때 구은우가 영원히 바닷가에 남았던 것처럼. 제원 쪽에서 온시환은 더 이상 공지민과 연락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공지민은 이미 연승혁과 함께 그 섬으로 갔고 그 섬에는 그가 배치해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는데 연승혁이 말한 대로 안전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연승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연승혁의 부하들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격정스런 눈빛을 지었다. “공지민 씨, 괜찮으신가요?”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는요?”“형님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오빠 보러 가고 싶어요.”그때 그녀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그를 몇 번 밀쳤고 기억에 의하면 그를 불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등은 아마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연승혁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탈출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공지민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그와 함께 그곳에서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승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연승혁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섬의 의료 수준은 제원에 미치지 못했다. 연승혁은 등 부상으로 인해 이미 이틀째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의사는 감염을 우려하며 그의 곁을 이틀 동안 지키고 있었다. 공지민의 눈빛에 조롱의 기색이 스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이 사람은 타 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가 붉어진 채 천천히 병상 옆에 앉았다.“오빠는 괜찮아졌나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공손하게 답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혁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병상 옆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의사는 곧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연승혁과 공지민 두 사람만 남았다.공지민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베개를 가져다 이 남자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려던 찰나
남자는 이미 죽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승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정리해. 난 먼저 간다.” 호텔 쪽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원래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직접 돌아가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승혁은 자신이 공지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걸 단순한 게임으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약 공지민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원래는 30분은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그는 1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은 이미 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 자신의 부하를 붙잡고 물었다. “공지민 어디 있어!” “형님, 공지민 씨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승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섬의 소방은 아직 빠르지 않아 불은 이미 1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번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승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밖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면 공지민이 운 좋게 스스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공지민! 공지민!”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곧 방 한구석에서 공지민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짙은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연승혁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공지민은 방구석에 웅
연승혁은 즉시 공지민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넌 이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처리하고 나서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자.”공지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위험하진 않겠죠?”“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있어.”연승혁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섬에서 가장 큰 호텔로 매우 호화로운 데다가 그의 부하들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지민은 안전했다.공지민은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연승혁은 겨우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안했고 심지어 공지민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건 결코 안전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혹시나 손에 총이 있다면 공지민은 위험할 수 있었다.그는 신이 아니었고 공지민을 100%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과실로 그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감히 모험할 수 없었고 그녀를 호텔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은 차에 올라탔고 차는 30분 동안 달리다가 암초가 있는 곳에 멈췄다.근처의 암초는 크고 새까맣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였다.연승혁은 옆에 있는 부하한테 물었다.“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 저희 쪽 사람들이 지금 수색하고 있어요. 늦어도 30분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고 휴가를 온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양측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연승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제 그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하들은 온몸이 새까만 남자를 붙들고 걸어왔다.어쩐지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더라니 그의 몸에는 검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마치 암초와 융합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연승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밤바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그는 심호흡한 뒤 그 남자
연승혁은 한동안 그녀와 꽁냥꽁냥하다가 해변의 경치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공지민은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구은우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았다.그녀는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연승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걸었다.“지민아, 어때? 여기 달이 특별히 예쁜 것 같지 않아?”공지민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뻐요.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 봐요.”연승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정말로 여기의 달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함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뭔가 더 특별했고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공지민은 내내 연승혁한테 맞춰줬고 그가 바닷물을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녀도 따라나섰다.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연승혁이 물었다.“이런 해변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공지민의 눈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연승혁은 구은우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공지민은 그때 구은우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구은우가 사망했는데 그녀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이상우가 최면술을 사용했음에 불구하고 연승혁은 그녀가 갑자기 기억해 낼까 봐서 걱정이었다.하지만 공지민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연승혁은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억 안 나면 됐어. 손 줘봐. 우리 여기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자.”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빠가 잡으려는 그 사람은요?” “아마 일주일 안에 잡힐 거야. 이 섬이 제국만큼 크지는 않지만 숨을 수 있는 동굴이 많아.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후 바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를 찾아내려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해.”그들이 며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