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반승우와 싸우고 싶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비록 그가 반승우의 덕을 보면서 자란 건 맞았다. 그리고 예전에 그를 이기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무모한 시기가 지나자 그 방면에서는 많이 담담해졌다.반승제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깐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반승우의 존재가 확실히 할아버지의 목숨에 위협이 된다면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그와 반승우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애가 돈독하지도 않았다.반승제는 고개를 숙여 성혜인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 사라졌던 웃음기가 다시 나타났다.그가 성혜인에게 답장했다.[내 SNS 봤어?]같은 시각, 성혜인은 반승제의 SNS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그가 그런 사진을 찍었을 줄은 몰랐다. 대표라는 그의 신분에 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마치 막 연애를 시작한 어린 소년 같았다.심지어 깍지를 낀 사진까지 있었다. 성혜인은 그 사진을 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러나 지난 이틀간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달콤함이 씁쓸함으로 변했다.[봤어요.][무슨 하고 싶은 말 없어?][잘 찍었네요.]그 다섯 글자에 반승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바로 앉았다.잘 찍었다고?일반인이라면 그 사진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성혜인은 당사자가 아닌가.[다른 할 말은 없어?]반승제와 마주 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성혜인은 그의 표정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그는 분명 차가운 얼굴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그의 옆에 있었다면 그는 분명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봤을 것이다. 만약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반승제는 그녀의 목을 조르려고 할지도 몰랐다.3분을 기다렸지만 새 메시지가 없자 반승제는 불쾌해졌다.[정말 다른 할 말은 없어? 후회하지 마.]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메시지를 보냈다. 굳이 이렇게 할 필요 없이 SNS 게시물을 삭제
반승제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서주혁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꼴불견이네. 사랑은 사람을 눈 멀게 만든다더니, 너도 결국엔 본심을 잃게 될 거야.”그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란 생물은 침대 위에서 성욕을 발산할 때만 쓰면 되지 진짜 보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이 점에 있어서 서주혁은 온시환과 같은 관점이었다. 그러나 온시환은 각자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침대에서는 신사적이었다.그러나 서주혁은 달랐다. 그는 능력도 없이 몸으로 이익을 보고자 하는 여자를 혐오했다.반승제는 그를 무시하고 몇 분 고민한 뒤 성혜인에게 답장했다.[좋아. 그러면 깨지 마. 일 다 끝내면 연락할게.]성혜인은 그 메시지를 보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거울을 통해 보이는 흔적에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썸을 탈 때 분위기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반승제는 이렇게 달콤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뒤에도 성혜인이 새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는지 이따금 휴대전화를 힐끗댔다.서주혁이 이때 미간을 구겼다.“어르신의 신호가 또 다른 나라에서 나타났어. 북아메리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데, 우리 농락당한 건 아닐까?”어떻게 이렇게 빨리 움직인 걸까?반승제는 바로 앉은 뒤 휴대전화를 거두어들였다.“그쪽에 대단한 실력의 해커가 있는가 봐. 서주혁, 넌 일단 귀국해.”서주혁은 이미 노려졌다. 이곳에 오래 남아있는다면 상부의 의심을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서씨 가문 전체가 감시받을 것이다.서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들고 있던 서류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그러면 난 먼저 돌아갈게. 난 심지어 이 신호들이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것인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 우리를 끌어내기 위해서 말이야. 설마 승우 형에게 칩에 관한 정보가 있는 걸까?”서주혁은 국내에 있을 때만 해도 칩을 주시했다.반승제가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난 내 사람을 시켜 신호가 나타난 곳
백지영은 반승제와 설인아에 대해 말하고 나서 다시 성혜인에 관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이 반승제한테 차인 건 바로 깨끗하지 못해서야. 남자관계가 복잡했거든. 몰래 얼마나 많은 남자랑 만났는지 몰라.”“반승제랑 이혼하기 전에도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하는 걸 몇 번이나 봤어.”“반씨 집안 회장님도 지금 성혜인 편이 아니야. 듣자 하니 최근에 또 한 남자랑 이틀 동안 뒹굴었다 하더라고. 원인은 바로 반승제한테 차여서 스스로 타락한 거지.”백지영은 성혜인에게 약을 먹여 몸도, 명예도 전부 망가뜨릴 생각이었지만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그때문에 그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모두들 “씹고 뜯을” 가십거리가 필요하지 진실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니 말이다.그렇게 눈 깜짝하는 순간 반승제와 설인아의 소문뿐 아니라, 성혜인의 사생활 논란도 급속도로 퍼져나갔다.이 단톡방에서 저 단톡방으로, 마지막에는 결국 임경헌이 있는 단톡방에도 이 소문이 전달되었다.임경헌은 단톡방 속 여자들이 거리낌 없이 성혜인에 대한 험담을 나누는 것을 보고, 곧장 화가 치밀어올랐다.“누가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거야?! 성혜인은 내 미래 사촌 형수 될 사람이야. 만약 우리 사촌 형이 보게 된다면, 그 유언비어를 퍼뜨린 사람은 반시체가 되어버릴걸?”최근 반씨 집안의 혼란한 내부 상황을 다들 알고 있었는지라, 어떤 사람들은 임경헌에게 더 이상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설인아가 직접 SNS에서 인정했어. 그날 밤 반승제랑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웃기고 있네! 이 여자 왜 이렇게 뻔뻔해?!”계속해서 올라오는 문자들에 임경헌은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 단톡방에 분노를 표출했다.“우리 사촌 형이 그 여자를 좋아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거야. 이렇게 저급한 수단을 써서 아직도 성혜인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니... 허허. 그날 밤 사촌 형이랑 함께 있었던 건 분명히 성혜인이었어. 형은 처음부터
다음 날 아침, 반승제가 탄 비행기가 제원에 착륙했다.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마중 나오라 하거나, 서주혁과 함께 가지 않고 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나 공항에 도착했는데, 데리러 와줄 수 있어?”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빨리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다그치는 듯한 느낌이 가득했다.하지만 그 전화는 성혜인이 받지 않았다. 이 시각 그녀는 회의 중에 있었고 핸드폰은 장하리의 손에 있었으니 말이다.장하리는 반승제의 말에 그저 화가 치밀어올랐다.‘뭐가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그녀의 말투도 따라서 많이 차가워졌다.“반 대표님, 사장님은 지금 회의 중에 계십니다. 회의는 점심까지 계속될 거예요.”그 말에 반승제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조금 실망스러워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할 수 없이 반승제는 심인우에게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다. 그러던 중 온시환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무리 안에 돌고 있는 소문을 아느냐고 물었다.“무슨 소문?”“성혜인 씨에 관한 거 말이야. 첫사랑이 있다던데?”잠시 흠칫하더니, 반승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누가 그래?”“글쎄, 그런 소문이 돌던데? 그리고 네가 출국한 이틀 동안 혜인 씨 호텔에 묵었어. 그동안 포레스트도, 회사도 가지 않고 말이야. 다들 말로는 첫사랑을 만났대.”반승제는 순간적으로 핸드폰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려?”“승제야, 그게 유언비어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백지영 쪽에서 호텔 체크인한 증거를 제시했고 나도 호텔에 전화해서 확인했어. 진짜 이틀 동안 혜인 씨 호텔에 묵은 거 맞아. 요즘 회사 일도 그렇고 도송애 쪽이랑 분쟁도 심해서 바쁜 줄 알았는데, 호텔에 갈 틈은 어떻게 생겼는지...”이윽고 반승제는 차가운 말투로 온시환에게 경고했다.“백지영의 말은 믿으면 안 돼.”“승제야, 백지영의 말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직접 성혜인 씨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잖아.”통화를 마친 후, 반승제는 손을 들어 미간을 어루만졌다.이
성혜인은 그와 함께 누웠지만 여전히 긴장한 듯 온몸이 굳어있었다.얼마 뒤, 귓가에 가벼운 숨소리가 들리고서야 그녀는 반승제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았고.반승제는 성혜인의 어깨에 턱을 대고 두 손으로 그녀를 꽉 안은 채 잠이 들었다.창문 밖의 풍경과 따스한 햇빛을 보며 성혜인의 심장이 시큰거려왔다.반승제라는 사람은 걸핏하면 화를 낼 정도로 성격이 매우 나쁘다.외부인에게는 덧없이 냉담하지만, 반승제에게는 쉽게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특히 반승제는 무방비한 상태일 때 더욱 사람의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곧이어 성혜인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몸에 난 흔적 때문에 어젯밤 줄곧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반승제의 기운이 느껴지니 성혜인은 안도감이 들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이 2인용 소파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도중에 사무실로 들어온 장하리는 성혜인이 없는 것을 보고 그녀가 쉬러 갔을 것으로 추측했다. 휴식실 문도 여전히 닫혀 있으니 말이다.장하리는 손에 든 서류를 책상 위에 놓고, 휴식실 문을 열려고 하며 성혜인을 불렀다.벌써 두 시간이 훌쩍 넘었으므로 이제는 오후의 서류들을 처리해야만 했다.하지만 살짝 열린 문틈을 향해, 장하리는 한 남자가 여자를 품에 꼭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은 얇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반승제에게 완전히 덮인 것처럼 성혜인은 앙증맞게 잠들어있었다.그러자 장하리는 뱉으려던 말을 즉시 삼키며 재빠르게 문을 닫고 사무실을 떠났다.오후에 웬 사람이 성혜인을 찾아오자 장하리는 “사장님이 몸이 불편하셔서요, 무슨 일 있으시면 내일 다시 얘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그렇게 성혜인은 밤 8시까지 푹 잤고 꼭대기 층의 사람들이 전부 떠나가고 나서야 유유히 잠에서 깼다.하지만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반승제는 여전히 그녀를 꼭 안고 있었다.‘영원히 이 손 풀지 않았으면 좋겠다...’성혜인은 덧없는 안도감을 느꼈다.바깥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네온사인이 온 도시를
그녀는 갑자기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승제 씨.”아직 차 밖에 서 있던 반승제는 갑자기 그녀에게 안기자 마음이 나른해졌다.“혜인아, 어쩐지 이번에 돌아온 이후로 너 나한테 많이 달라붙는 것 같다?”‘이 바보.’성혜인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그를 놓아주었다.반승제는 차 밖에 서 있었고 조수석의 차 문은 닫히지 않았다.이내 그는 성혜인의 얼굴을 받쳐 들고 1분 동안 바라보다가 머리를 숙여 살짝 입을 맞췄다.“혜인아, 나는 단지 너를 믿으려고 노력할 뿐이야.”이 한마디 말에 성혜인은 온몸이 굳어졌고 반승제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뽀뽀했다.“너를 내 품에 안았을 때 내 모든 세포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어. 이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나도 너를 믿어야지, 안 그래? 나는 너와 더 이상 어떠한 예외의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아.”뒤이어 조수석의 문을 닫자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어두워졌다.“네가 첫사랑을 만났든 만나지 않았든 상관 안 할 거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부터 너는 그 사람이랑 선을 그어야 해! 지난번의 일은 더 말하지 않을게. 앞으로는 나 속이지 마.”성혜인은 억울하고 난감했지만, 더 말을 꺼낼 수 없었다.반승제는 차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가 네이처 빌리지로 차를 몰았다.시간이 이미 새벽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한 시간 뒤에는 또 일어나야 했다.욕조에서 성혜인은 반승제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해 매우 편안했지만, 다른 남자와 보낸 이틀 밤은 그녀의 마음에 있는 가시였다. 생각만 해도 아플 정도였으니 말이다.침대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괴로움에 이리저리 뒤척이었다. 사실을 고백하고 싶었지만, 그가 곧 헤어지자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사람은 가진 것이 없을 때 더욱 강해지며 일단 한번 가지면 누구나 다 잃기 싫어한다.반승제는 그녀를 꼭 안고 눈을 감았다.“6시 반에 일어나자. 아직 한 시간은 더 잘 수 있어.”...한편.반승제가 귀국했다는 소식에 모두 그와 설인아가 꽁냥대는 모습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던 반승제는 성혜인에게 이렇게 뽀뽀를 받자 입꼬리가 한껏 구부러진 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심인우는 반승제의 옆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떨어뜨리려 애썼다.그 덕분인지 반승제도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얼굴에 줄곧 웃음기를 띤 채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오전 회의가 열리고, 임원들은 웬일로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최근 BH 그룹에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라 모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특히 갓 발탁된 임원들은 지난번 회의에서 반승제가 도중에 뛰쳐나갔기 때문에 대표가 자신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늘 회의는 내내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반승제의 말투 역시 매우 부드러웠다.그렇게 반승제가 사무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다른 임원들이 심인우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대표님한테 요즘 무슨 경사라도 생기셨어요?”“그러게 말이에요. 조금 전에 제가 한 줄의 데이터들을 잘못 말해서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께서 그냥 바로잡으시고 계속하라 말씀하신 거 봤죠? 평소 같으면 진작에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저를 죽이셨을 분인데...”한 무리의 임원들에게 둘러싸여 아예 나갈 수 없게 되자 심인우는 부득이하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연애 중이십니다.”“어머! 어쩐지! 정말이에요?”몇 명은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심인우에게 그 여자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했다. 나중에 다른 장소에서 만나게 되면 실수할 일을 만들지 않도록 말이다.“요즘 회사에 자주 나오는 그 설씨 집안 작은딸인가요?”“아니요. 페니 씨입니다.”예상 밖의 인물에 사람들은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또 그럴 줄 알았다며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대표가 항상 그 디자이너를 특별하게 대했으니 말이다....설인아는 BH 그룹 로비에서 그 장면을 본 후 바로 도시락을 들고 돌아갔다.그러고는 몸을 숙여 자신의 차 안에 들어가려고 할 때,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눈빛이 한껏 어두워지더니 설인아는 곧
그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었고, 이내 설인아의 질문이 들려왔다.“오빠 성혜인이랑 사이가 좋은가 봐?”설우현은 조용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인아야, 너도 방금 반승제 그 득의양양한 말투 들었지? 반승제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이미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너 굳이 가서 소란을 피워야겠어?그러자 설인아가 피식 냉소하며 입가를 천천히 오므렸다.“오빠, 중요한 건 승제 여보가 나를 좋아하느냐 안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에 달렸어. 오빠가 안 도와주면 나는 큰 오빠한테 도움을 청할 거야.”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큰형은 막내 여동생을 무한대로 도와줄 것이고 게다가 설인아의 옆에는 엔디까지 있으니, 그녀는 성혜인의 목숨은 쉽게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오빠도 그 빌어먹을 년한테 홀린 거야? 이만 가봐, 앞으로 다시는 찾지 않을 거니까.”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설우현은 다시 실의에 빠졌다. 설인아는 가문의 보배이자 심장도 좋지 않아 모든 사람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약 먹었어? 엔디가 너 몸이 안 좋다던데? 오빠가 약 먹여줄까?”그는 능숙하게 탁자에 있는 약과 설인아에게 먹일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녀는 매몰차게 뿌리쳤다.“오빠 성혜인 좋아해?”“그냥 친구야.”그러자 설인아가 시선을 아래로 푹 늘어뜨렸다.“오빠한테는 성혜인이 나보다 더 중요해? 그년을 위해서라면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상관없어?”설우현은 손안의 따뜻한 물잔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리고 오빠 줄곧 나 별로 안 좋아했지? 내 병 때문에 식구들이 모두 나만 지켜보고 있으니까... 예전에 오빠 열났을 때 3일 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잖아. 모두 나를 병원에 데려가느라고 말이야.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나를 많이 미워할지도 모르겠네.”그 말에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설우현은 손에 든 물잔을 탁자 위에 놓고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인아야, 너는 내 친여동생이야. 나 지금까지 한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