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었고, 이내 설인아의 질문이 들려왔다.“오빠 성혜인이랑 사이가 좋은가 봐?”설우현은 조용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인아야, 너도 방금 반승제 그 득의양양한 말투 들었지? 반승제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이미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너 굳이 가서 소란을 피워야겠어?그러자 설인아가 피식 냉소하며 입가를 천천히 오므렸다.“오빠, 중요한 건 승제 여보가 나를 좋아하느냐 안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에 달렸어. 오빠가 안 도와주면 나는 큰 오빠한테 도움을 청할 거야.”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큰형은 막내 여동생을 무한대로 도와줄 것이고 게다가 설인아의 옆에는 엔디까지 있으니, 그녀는 성혜인의 목숨은 쉽게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오빠도 그 빌어먹을 년한테 홀린 거야? 이만 가봐, 앞으로 다시는 찾지 않을 거니까.”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설우현은 다시 실의에 빠졌다. 설인아는 가문의 보배이자 심장도 좋지 않아 모든 사람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약 먹었어? 엔디가 너 몸이 안 좋다던데? 오빠가 약 먹여줄까?”그는 능숙하게 탁자에 있는 약과 설인아에게 먹일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녀는 매몰차게 뿌리쳤다.“오빠 성혜인 좋아해?”“그냥 친구야.”그러자 설인아가 시선을 아래로 푹 늘어뜨렸다.“오빠한테는 성혜인이 나보다 더 중요해? 그년을 위해서라면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상관없어?”설우현은 손안의 따뜻한 물잔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리고 오빠 줄곧 나 별로 안 좋아했지? 내 병 때문에 식구들이 모두 나만 지켜보고 있으니까... 예전에 오빠 열났을 때 3일 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잖아. 모두 나를 병원에 데려가느라고 말이야.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나를 많이 미워할지도 모르겠네.”그 말에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설우현은 손에 든 물잔을 탁자 위에 놓고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인아야, 너는 내 친여동생이야. 나 지금까지 한
두 사람은 이제 막 사귀기 시작했고 그전에는 침대에서 하는 것 말고는 커플끼리 해야 할 일은 한 적이 없었다.“신분”이 갑자기 바뀌게 되자 성혜인은 약간 적응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녀 역시 연애를 한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그 아름다운 약속을 위해 다른 이성들을 거절해왔던 것이다.그다음에는 반승제에게 시집을 갔는데, 3년 동안 성혜인은 살아있는 “과부”로 지내며 역시 이성과 거리를 두었다.그녀는 반승제가 오기 30분 전에 커플들 간의 데이트 장소를 확인하기도 했다.하지만 요즘 너무 바쁜 나머지 밥을 함께 먹는 것 외에 영화를 보거나 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뒤로 다가가 몸을 구부려 그녀를 끌어안았고, 컴퓨터 모니터에 빽빽한 데이터가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정말 열심히 하네.”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칭찬을 받자, 성혜인의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수치심과 또 말하기 어려운 만족감이 동시에 들었다.사실 여자들은 대부분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자신을 칭찬해 줄 줄 아는 배우자가 있으면 될 뿐.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것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성혜인이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 하지 않자 반승제는 몸을 좀 낮추었다.“6시 반이야. 이제 출발해야지.”그러자 성혜인이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고 힘껏 밀어냈고 반승제는 웃으면서 몸을 똑바로 피더니 뒷걸음질 쳤다.이윽고 성혜인은 옆에 있던 가방을 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사무실을 나와서야 그녀는 꼭대기 층에 여전히 많은 직원이 야근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직원들은 이내 한데 모여 귓속말을 나누기 시작했다.그때, 반승제는 성혜인을 끌어당겨 볼에 뽀뽀하더니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조금 이따 제가 요리사를 모셔 와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그러니 야근하시는 분들은 30분만 더 남아주시길 바라요.”뒤이어 현장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바로 “감사드립니다, 반 대표님.”이라고 답하였다.그 말에
“성혜인, 내가 너랑 처음 잠자리를 가졌을 때, 나는 너한테 남편이 있는 줄 알았어. 설마 내가 남편하고 안 해봤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너랑 잤을 거라 생각해? 귀국해서 우리 했을 때 나는 네가 처음이 맞나 의심했었지. 그런데 네가 먼저 결혼한 몸이라고 인정했잖아. 그래서 나는 당연히 혜인이 네가 남편이랑 몇백 번은 해봤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이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 나는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거든.”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말했다.“예전에 화가 났던 건 네가 쉬운 여자인 것 같아서 그랬어. 그냥 선입견이었던 거지. 그때의 나는 네가 다른 남자들과 자발적으로 어울리는 줄 알았어. 네 마음속에 내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 당연히 화가 날 만하지 않았겠어?”반승제는 이런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푹 늘어뜨린 채 그녀를 꼭 붙잡고 있었다.“너에 대한 내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러니까 나랑 헤어지지 말자.”그가 말을 끝마치자, 성혜인은 순간 주변의 모든 산소가 사라진 듯 숨을 쉴 수 없었다.반승제는 매우 외로운 사람이라 누군가 그의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다만 교만한 성격이 문제라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성혜인은 순간적으로 그가 늘 무시당하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씨 집안사람들은 전부 천재 반승우만을 좋아했으니 말이다.심장이 찔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성혜인의 마음에 있던 죄책감이 사라졌다.그녀는 반승제의 손을 더욱 세게 꼭 잡았다. 그러자 반승제가 성혜인의 손에 또다시 입을 맞췄다.“네가 찾지 말라고 하면 나도 찾지 않을게. 그 남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나는 그저 네 말을 듣고 싶을 뿐이야.”성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예전에 그녀는 반승제라는 사람이 정말 끔찍할 정도로 나쁘다 생각했다. 특히 침대에 있을 때 독한 말이란 말은 전부 내뱉었으니 말이다.‘그런 것만 할 줄 알았더니 또 이렇게 섬세한 면도 있었네.
메뉴판을 건네받고 설우현은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러던 그때 반승제가 옆에서 비아냥거렸다.“설 대표 아직 솔로라고 들었는데, 솔로만을 위한 세트 요리가 있지 않을까요? 그걸로 추천해 드려요. 없다면 주방장한테 제가 특별히 부탁드려 볼게요.”그 말에 화가 불끈 난 설우현은 메뉴판을 한쪽으로 확 던지며 소리쳤다.“반 대표,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반승제는 눈썹을 올리며 이보다 더 심한 말을 하려고 했으나 성혜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설우현 씨,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그리고 그전에 우리가 했던 계약에 관해 얘기를 좀 나눠볼까 해서 오늘 뵙자고 한 거예요. 제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위반한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괜찮으시다면, 그에 마땅한 보상을 해드리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설우현은 지금 반승제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그 눈빛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반승제는 눈썹을 올리며 여유롭게 뒤로 몸을 젖혔다.“혜인아, 내가 배상하기로 했잖아.”그러자 성혜인은 몰래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고 밀려오는 아픔에 반승제는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보며 불만이 가득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이에 성혜인은 멋쩍은지 헛기침을 두 번 하더니 부드러운 손을 다시 내밀어 그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얼굴이 일그러졌던 반승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간 얼굴이 확 펴졌다.두 사람이 테이블 밑에서 꽁냥거리고 있다는 것을 설우현이 모를 리가 없다.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아니요. 배상할 필요 없어요. 페니 씨만 좋으시다면 할리우드 티오 세 명 정도는 얼마든지 선물로 드릴 수 있어요.”그 말에 반승제는 또다시 얼굴이 차가워졌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런 반승제의 반응을 보고 설우현은 주도권을 다시 앗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설우현은 기회를 틈타 성혜인에게 덧붙여 말했다.“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다고 봐요. 페니
반승제가 미처 그의 말에 반응을 하기도 전에 설우현은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떠났다.지금 반승제는 기분이 매우 언짢은데 그는 이럴 때마다 입을 오므리곤 한다.그런 그를 바라보며 성혜인은 주스 한 잔을 건네주며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계약을 위반한 사람은 저예요. 안 그래도 많이 불리한 상황인데, 왜 그런 말들로 자극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그냥 하는 말인데 설우현 씨 꽤 괜찮은 사람이에요.”반승제는 눈앞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고 있으나 입맛이 뚝 떨어졌다.그뿐만 아니라 설우현이 계산한 음식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더더욱 당기지 않았다.이때 성혜인이 그의 손등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왜 그래요? 입맛이 없어요?”“음.”반승제가 말하지 않아도 성혜인은 그가 왜 갑자기 입맛이 없어졌는지 뻔히 알고 있다.‘보아하니 또 밑도 끝도 없이 질투하고 있어.’‘저 정도면 병이야... 그것도 말기...’하지만 성혜인은 더 이상 자세히 물어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여유작작하게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반승제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성혜인은 그냥 그를 가만히 놔두기만 하면 스스로 풀리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과연 반승제는 한참 동안 삐쳐있더니 묵묵히 티슈를 뽑아 성혜인의 입을 정성껏 닦아 주었다.그렇게 8시 30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식당에서 나왔다.성혜인의 핸드폰 벨소리는 끊이지 않았는데 모두 회사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M에서 여러 업무를 새로 들이고 난 뒤,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모든 결책을 내려야 하는 성혜인은 숨을 고를 시간조차 없게 되었다.“승제 씨,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있어서 가 봐야 할 거 같아요.”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나서 갖게 된 첫 외식인데 마음껏 즐기지는 못했다.바삐 도는 성혜인과 달리 반승제는 마침 한가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얼마 전 BH 그룹을 제대로 바로잡았기에 그쪽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반태승에게만 신경 쓰면 되는 상황이다.세상 그 어
‘페니 씨는 과연 어떤 여자일까? 무슨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까?’눈앞에 증거가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혜인의 편을 들어주는 반승제의 모습에 온시환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만약 성혜인에 관한 나쁜 말을 계속하게 된다면 반승제와 친구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여 그는 생각을 접고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웃으면서 내려놓았다.“내가 알고 있던 반승제 맞아? 너 원래 이렇게 연애에 올인하는 사람이었어?”비아냥거리는 온시환의 말에 반승제는 대꾸하지 않았다.성혜인과 마음을 확인하고 난 뒤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변하게 되었다.모든 것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보이고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였다.진정한 연애를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바람둥이 온시환은 지금 반승제가 하고 있는 “진지한 연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뿐만 아니라 몹시나 깔본다는 듯이 그를 하찮아하며 뒤로 밀쳤다.“멀리 떨어져 앉아. 사랑에 푹 빠진 너한테서 악취가 나.”이에 반승제는 피식하고 웃더니 성혜인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절로 표정이 부드러워졌다.“너 그거 질투다.”“질투? 내가 뭘 질투하고 있다는 건데? 여자한테 단속받는 거? 아니면 앞으로 재산 절반 나눠서 가져야 하는 거?”“나 온시환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연애 따위 하지 않아. 그냥 지금처럼 원나잇이나 하면서 깔끔하게 서로 이용하는 사이가 좋아.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편한 세상이야.”온시환은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며 계속 비아냥거렸다.“그리고 끝까지 간다는 보장도 없잖아. 운명이었다면 이혼까지 가지 않았겠지. 잠깐, 엄격히 따져보면 이혼도 페니 씨한테 속아서 한 거 아니었어? 제3자인 거 뻔히 알면서도 관계를 유지한 너도 참 대단해. 만약 페니 씨가 정말로 네 아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너 순순히 이혼했을 거 같아?”이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반승제의 “아픈 곳”이다.말을 하고 난 뒤 온시환도 스스로 깨달으며 더는 말하
반승제는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와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배현우에 대해서 알아보세요.”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알아보지 않겠다고 성혜인과 약속을 했었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고 심지어 성혜인에게 약까지 먹였으니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반드시 찾아내서 갈기갈기 찢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같은 시각.성혜인은 아직도 포레스트에서 야근을 하고 있다.그녀 또한 반승제와 마찬가지로 배현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다.반승제에게 알아보지 말라고 당부했던 건 그 일을 잊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아니면 그 일은 영영 두 사람 가슴 속의 응어리로 남게 될 것이다.하여 반드시 어찌 된 일인지 알아내야만 했다.왠지 모르게 이상이 들었고 배현우가 자기한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그뿐만 아니라 그 칩은 또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성혜인은 심지어 포레스트의 개인 의사를 찾아보라고 시켰었다.만약 개인 의사가 아니라면 배현우는 포레스트에 들어갈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개인 의사는 배현우의 일에 대해서 일절 모른다고 했었다.다른 의사를 부른 건 사실이나 그 의사는 누군가에게 맞아 기절했다고 했다.같은 시각.제원과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습을 숨긴 작은 실험실이 있다.실험실 안에서 남자는 컴퓨터를 통해 데이터를 보면서 분노하며 테이블을 치고 있다.연구 실험에 관해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는 반승우와 달리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하여 데이터를 알아본다고 한들 직접 조작할 능력이 없다.실험에 관해 반승우는 제일 으뜸으로 가는 천재이다.고작 열 몇 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 나이에 막강한 실력을 지닌 연구원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었으니 말이다.“반승우 씨! 저 좀 도와주세요.”남자는 이미 칩을 손에 넣었다. 만약 칩 안에 들어있는 내용만 장악하게 된다면 반승우라는 인간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그가 이 몸의 주인이 된다.그럼 깨어날 때마다 왜 또 다른 곳에 있
남자는 소문을 퍼뜨리고 나더니 속이 다 시원해졌다.그는 칩을 작은 상자 안에 놓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왜 이딴 걸 연구하고 그래요? 난 또 무슨 세상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무기인 줄 알았는데, 쓸모없는 물건이잖아요. 이런 걸 연구하는 당신들도 참 변태가 따로 없네요.”“아니요, 그거 무기 맞아요. 여러 큰 나라들 사이에서는 화기로 전쟁을 벌릴 수 없어요. 모두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런 방면에서 손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만약 실험에 성공하여 한 사람에게 다른 인격이 나타날 수 있게 한다면 딱 마침 그들이 필요한 인격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럼, 그 인격은 아주 손쉽게 한 나라의 고관을 책동하여 모반할 수 있는 것이죠.”이에 남자는 피식하고 웃었다.“별 쓸데도 없네요.”반승우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럼, 저 또한 그들에게 컨트롤 당하고 이용당하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나타난 이유도 단지 그것 때문인가요?”“네.”“반승우 씨 말만 듣고 믿을 수 없어요. 어찌 된 일인지 저 혼자서 알아낼 거예요.”반승우는 한참동안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혜인이한테 상처 주지 마세요.”그러자 남자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상처 범벅인 당신이 걱정할 바는 아닌 것 같네요.”“제가 어떤 모습이든 혜인이 걱정하는 마음만은 변치 않을 거예요.”반승우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게 된다.뼛속까지 부드러움이 배 있는 반승우에게 언성을 높이면 마치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남자는 반승우의 부드러움을 무척이나 싫어하며 그가 내숭을 떨고 있다며반감했다.반승우가 몸가짐을 깨끗이 하는 점도 무척이나 싫었다.여자와 잠자리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지만, 가장 관건이 되는 순간마다 그로부터 제재를 당했었다.그때 반승우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한없이 어둡고 무거웠었다.“저 여자들이 제 몸에 손대는 게 싫습니다.”두 사람은 같은 몸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는데 연승혁이 말한 대로 안전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연승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연승혁의 부하들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격정스런 눈빛을 지었다. “공지민 씨, 괜찮으신가요?”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는요?”“형님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오빠 보러 가고 싶어요.”그때 그녀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그를 몇 번 밀쳤고 기억에 의하면 그를 불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등은 아마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연승혁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탈출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공지민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그와 함께 그곳에서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승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연승혁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섬의 의료 수준은 제원에 미치지 못했다. 연승혁은 등 부상으로 인해 이미 이틀째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의사는 감염을 우려하며 그의 곁을 이틀 동안 지키고 있었다. 공지민의 눈빛에 조롱의 기색이 스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이 사람은 타 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가 붉어진 채 천천히 병상 옆에 앉았다.“오빠는 괜찮아졌나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공손하게 답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혁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병상 옆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의사는 곧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연승혁과 공지민 두 사람만 남았다.공지민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베개를 가져다 이 남자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려던 찰나
남자는 이미 죽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승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정리해. 난 먼저 간다.” 호텔 쪽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원래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직접 돌아가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승혁은 자신이 공지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걸 단순한 게임으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약 공지민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원래는 30분은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그는 1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은 이미 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 자신의 부하를 붙잡고 물었다. “공지민 어디 있어!” “형님, 공지민 씨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승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섬의 소방은 아직 빠르지 않아 불은 이미 1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번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승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밖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면 공지민이 운 좋게 스스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공지민! 공지민!”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곧 방 한구석에서 공지민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짙은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연승혁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공지민은 방구석에 웅
연승혁은 즉시 공지민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넌 이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처리하고 나서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자.”공지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위험하진 않겠죠?”“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있어.”연승혁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섬에서 가장 큰 호텔로 매우 호화로운 데다가 그의 부하들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지민은 안전했다.공지민은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연승혁은 겨우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안했고 심지어 공지민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건 결코 안전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혹시나 손에 총이 있다면 공지민은 위험할 수 있었다.그는 신이 아니었고 공지민을 100%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과실로 그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감히 모험할 수 없었고 그녀를 호텔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은 차에 올라탔고 차는 30분 동안 달리다가 암초가 있는 곳에 멈췄다.근처의 암초는 크고 새까맣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였다.연승혁은 옆에 있는 부하한테 물었다.“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 저희 쪽 사람들이 지금 수색하고 있어요. 늦어도 30분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고 휴가를 온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양측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연승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제 그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하들은 온몸이 새까만 남자를 붙들고 걸어왔다.어쩐지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더라니 그의 몸에는 검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마치 암초와 융합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연승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밤바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그는 심호흡한 뒤 그 남자
연승혁은 한동안 그녀와 꽁냥꽁냥하다가 해변의 경치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공지민은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구은우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았다.그녀는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연승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걸었다.“지민아, 어때? 여기 달이 특별히 예쁜 것 같지 않아?”공지민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뻐요.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 봐요.”연승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정말로 여기의 달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함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뭔가 더 특별했고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공지민은 내내 연승혁한테 맞춰줬고 그가 바닷물을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녀도 따라나섰다.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연승혁이 물었다.“이런 해변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공지민의 눈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연승혁은 구은우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공지민은 그때 구은우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구은우가 사망했는데 그녀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이상우가 최면술을 사용했음에 불구하고 연승혁은 그녀가 갑자기 기억해 낼까 봐서 걱정이었다.하지만 공지민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연승혁은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억 안 나면 됐어. 손 줘봐. 우리 여기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자.”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빠가 잡으려는 그 사람은요?” “아마 일주일 안에 잡힐 거야. 이 섬이 제국만큼 크지는 않지만 숨을 수 있는 동굴이 많아.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후 바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를 찾아내려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해.”그들이 며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이전에는 연승혁의 주변에 여자가 별로 없었고 오직 원아정 한 명뿐이었다. 원아정과는 단순히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만났던 거라서 그녀와의 경험은 그저 상쾌함만 느껴졌고 내면의 만족감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공지민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달랐다.연승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피부를 만지기 시작했고 무기력하게 기대어 있는 공지민이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연승혁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그는 공지민이 다 씻은 후 옆에 있던 타월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침대에 누운 공지민은 곧 잠이 들 것 같았지만 연승혁은 욕구를 참느라 너무 힘들었다.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무해한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고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이 손끝으로 그녀의 허리에서 가슴까지 쓰다듬을 때 공지민은 가끔 눈을 떠 그를 쳐다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연승혁은 더욱 불타올랐지만 그녀가 현재 아픈 상태라는 걸 잊지 않았다.연승혁은 몸을 숙여 그녀의 목에 흔적을 남겼고 공지민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낸 후 그한테 물었다.“오빠, 우리 정말 약혼한 사이에요?”그녀의 질문에 연승혁은 순간 몸이 굳었다.공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냥 우리 둘 사이가 너무 순수해 보여서요.”연승혁이 그녀의 목을 힘껏 깨물자 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소리 질렀다.연승혁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순수해 보여? 오늘 밤, 네 몸 전체에 흔적을 남겨줄게.”공지민의 볼이 빨개졌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연승혁은 그냥 말해본 거였는데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그가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자 공지민은 허리를 굽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연승혁이 그녀의 몸에 키스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비도덕적인 생각들이 떠올랐고 자신이 지금의 행위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간다면 벌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흔적을 하나하나 남길 적마다 그의 이성은 사라졌고 오늘 밤만은 그녀
공지민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곳은 온시환이 차를 세워둔 위치였다.오후부터 그녀는 강한 시선이 느껴졌고 신기하게도 그녀는 그 시선의 주인이 온시환이라는 걸 알았다. 온시환은 열 몇 시간 동안 은밀한 곳에 숨은 채 그녀의 곁을 지켰다.공지민은 연승혁를 향해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연승혁은 그녀를 안아 들고 곧장 차로 돌아간 후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그녀의 몸에 덮어줬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그는 공지민을 안고 안방으로 데려갔다.공지민은 악몽을 꾸는 듯 이마에 땀이 맺힌 채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가지 마요.”“날 괴롭히지 마요.”그런 공지민의 얼굴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는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중간에 공지민이 눈을 떴지만 그가 돌아온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도우미가 몸보신하는 죽을 들고 오면서 물었다.“도련님, 제가 지민 씨 먹여드릴까요?”연승혁은 손을 들어 죽을 건네받으며 말했다.“제가 할게요.”도우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연승혁은 공지민을 일으켜 세우고 흔들어 깨웠다.“지민아, 얼른 일어나서 이거 좀 먹어. 너 지금 열도 나고 저녁에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공지민은 어렴풋이 눈을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오빠 돌아왔네요.”연승혁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한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네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데 내가 어떻게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어?”공지민은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말했다.“역시 오빠밖에 없어요. 근데 또다시 나갈 건가요?”연승혁은 늦어도 날이 밝은 후 일 보러 다시 나가봐야 했다. 하지만 공지민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고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그렇다고 이상우를 불러 공지민의 기억을 되돌리고 온시환 곁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걸 생각만 해도 연승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 없이 그녀한테 죽을 먹여준 다음 옆에 있던 휴지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염정아는
염정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지민은 그녀의 표정을 통해 그녀가 그다지 나오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면회가 끝나갈 무렵 염정아는 갑자기 공지민한테 다가가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지민 언니, 나는 내가 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공지민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눈이 따가워졌다.염정아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경찰을 따라 다시 들어갔다.홀로 남은 공지민은 몸과 마음이 너무 괴로웠고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그녀의 심장을 갉아 먹는듯한 느낌이었다. 경찰서 문 앞까지 나온 그녀는 속이 울렁거려서 토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복수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해 망설이기 시작했다.마침 연승혁의 전화가 걸려 와 그녀의 위치를 물었다.공지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있었고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연승혁은 드디어 도망간 사람에 관한 단서를 얻게 되어 그 사람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공지민이 걱정되고 마음에 걸려 전화를 한 거였다.“나 지금 경찰서에요. 내 친구가 사람을 죽였어요. 오빠, 나 걔랑 있었던 일이 기억났어요. 고등학교 때 우린 둘 다 괴롭힘을 당했었어요. 근데 우리를 괴롭힌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연승혁은 그녀들을 괴롭힌 사람이 이미 죽은 원아정이란 걸 알고 있었다.그가 목을 가다듬고 그녀를 위로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공지민이 울기 시작했다.“오빠, 보고 싶어요. 왜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예요? 너무 보고 싶어요. 나 지금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숨이 멎을 것 같아요.”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자 연승혁의 심장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헬리콥터에 올라탔고 원래는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러 가야 했지만 그녀가 걱정되어 조종사한테 목적지를 바꾸라고 말했다.“우린 먼저 제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추적하라고 해.”조종사는 조금 놀랐다. 보스가 도망친 그 사람을 잡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고 이제 겨우 단서를 얻었는데 제국으로 돌아간다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