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테이블 위의 컵이 설인아에 의해 던져져 땅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그녀가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은 도송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인아 양은 모르겠지만 성혜인이 얼마나 많은 남자를 꼬드긴 줄 알아? 그도 그럴 것이지 그렇게 예쁜 얼굴로 먼저 들이밀기까지 하니 세상에 어떤 남자가 안 넘어가겠어? 반승제가 인아 양이랑 결혼했다고 해도, 성혜인이 자존심을 버리고 꼬신다면 반승제는 분명 넘어갈 거야.”설인아는 눈을 감고 덤덤하게 말했다.“우리 집안의 권력을 동원해서 도 대표님과 심복의 감옥살이는 면하게 해주죠. 하지만 TS 엔터의 주가는 분명 지킬 수 없어요. 성혜인이 공개적으로 발언을 한 이상 위에서도 분명 당신들을 조사할 거예요. 감옥에 가든지 아니면 충분한 돈으로 자유를 지킬 것인지 선택하세요.”“인아 양, 난 자유를 원해. 두 번째를 선택하지!”설인아는 차갑게 웃더니 엔디가 조용히 바닥에 앉아 부서진 컵 조각을 청소하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도 대표님은 이제 가보셔도 돼요. 저도 공짜로 구해 드리진 않아요. 돌아가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성혜인을 막으세요.”“그래, 인아 양 말 잘 기억하고 있을게.”도송애가 떠나자 홀 안은 조용해졌다.엔디는 컵 조각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설인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설인아가 뒤로 기대고 보니 1m 65㎝의 엔디가 더욱 아담해 보였다. 게다가 항상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어 더욱 작아 보였다.“엔디, 나 진짜 화가 나. 승제 오빠가 왜 성혜인 때문에 나섰을까? 지금 당장 성혜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네.”“아가씨, 말씀만 하시면 바로 움직이겠습니다.”설인아는 가볍게 웃더니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는 얼굴색이 약간 창백했다.엔디는 얼른 옆에서 약병을 꺼내 그녀에게 약 몇 알을 먹였다.설인아는 심장이 좋지 않아 감정 기복이 심하면 가끔 이러곤 했다.약을 먹고 난 후, 그녀의 눈은 더욱 매섭고 어두워졌다.“그 얄미운 년은 건강한 몸뚱이까지 갖고 있으니, 진짜 미워 죽겠
설인아의 거처를 떠난 도송애는 자신의 차에 탔다.핸들을 잡고서는 지금부터 반드시 성혜인을 곤경에 빠뜨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야 설인아가 그녀를 놓아줄 것이다. 설인아의 복수가 감옥에 가는 것보다 더 공포스러웠다.도송애는 바로 백지영이 떠올랐다.지금 백현문이 병원에 누워있으니 백지영을 지키고 있는 경비가 삼엄하지 않을 테니 가서 그녀를 건져내야 했다.백지영은 얼굴이 이미 망가졌고, 또 이렇게 오랫동안 갇혀 있었으니 마음속의 원한이 얼마나 깊을지는 뻔했다.도송애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곧 백씨 가문으로 향했다.입구에 있는 경호원에게 대충 얼버무렸다.“지영 씨를 찾아뵙겠다고 백 대표님께 미리 말씀드렸어요. 온 김에 백 대표님이 직접 고른 이 선물도 갖다 주려고요.”백지영이 갇힌 이후로 백현문은 어떤 선물도 주지 않았다.경호원은 도송애를 알고 있었고, 또 그녀가 강변에서 백현문과 만난 것도 보아서 의심하지 않고 바로 안으로 들였다.백지영은 이미 방안에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지만 백현문이 아직도 강가에서 시체를 인양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멘탈이 무너졌다.그녀는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며 단식까지 선언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백지영은 매일 이 방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밖을 향해 소리를 지른 탓에 목은 이미 쉬어버렸다.방의 창문도 굳게 닫혔다. 그녀가 창문을 통해 뛰어내릴까 봐 백현문이 사람을 불러 빈틈없이 막아 놓았다.너무 시달린 백지영은 침대에 앉아 더벅머리에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이미 희망을 잃고 있었다.그때, 밖에서 도송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영 씨, 괜찮아요?”백지영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도송애와 아는 사이는 맞지만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도송애가 어떻게 이 중요한 때에 찾아올 수 있을까?문이 열리고, 도송애가 문 앞에 나타나 방긋 웃으며 백지영을 보았다.“지영 씨 잘 못 지냈나 봐요. 오빠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서 두 달 후
그리고 나서 임경헌은 성혜인을 보며 건들건들 웃었다.“전에 제가 이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형은 제 전화도 받기 싫어서 그냥 끊었어요. 최근에는 반씨 가문에 일들이 생겨서 오늘 받은 거죠. 하지만 절대 현장에는 오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장담하건대, 1분도 안 돼서 다시 전화가 올걸요?”말이 끝나자마자 임경헌의 휴대폰이 울렸다.반승제가 걸어온 전화였지만 임경헌은 받지 않고 자신의 어깨로 성혜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이것 봐요. 절대 나한테 먼저 전화한 적이 없는 형인데 이번에는 아주 급했나 봐요.”임경헌은 성혜인이 보는 앞에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반승제는 또 전화를 걸어왔다. 임경헌의 말대로 그는 확실히 조급한 모양이었다.이번에도 임경헌이 전화를 끊자 반승제가 곧바로 영상통화를 걸었다.임경헌이 손에 든 술잔을 하마터면 땅에 떨어질 뻔했다. 반승제가 급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 급한 줄은 몰랐다.‘내가 이번 생에 승제 형이 걸어온 영상통화를 받게 되다니!’임경헌은 덜컥 겁이 났다. 조금 이따가 반승제가 도착하면 제대로 혼이 날까 봐 성혜인을 보며 말했다.“형이 저를 죽이려고 들면 꼭 도와주셔야 해요. 이 모든 건 페니 씨를 위한 거였어요. 형의 마음을 똑똑히 알려주려고요. 만약 형이 페니 씨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왜 이렇게 조급해하겠어요? 형은 이 시간에 회의 중이었어요. 아마 회의도 중단시킨 것 같아요.”성혜인이 믿기지 않아 하자 임경헌은 그녀의 휴대폰을 잡고는 말했다.“못 믿겠으면 바로 심 비서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요. 형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성혜인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임경헌이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고 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잡고 물었다.“심 비서님, 승제 씨 지금 뭐 해요?”심인우는 통창 앞에서 쉴 새 없이 전화를 거는 남자를 보고, 또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임원들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회의실에 있는데 대표님께서 지금 통화 중이셔서 페니 씨 전화를
성혜인은 뒤에서 남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키가 작은 그녀는 이마를 남자의 등에 대고 있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안고 있었다.반승제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손끝의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고 나서야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취했어?”‘그 술이 뒤끝이 강하다고 했으니 분명 취했을 거야.’성혜인은 더 꽉 껴안았다.순간, 반승제는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서로의 심장 박동 소리만 들렸다.그는 속눈썹을 드리우고 돌아서서 그녀를 벽에 세게 밀쳤다.성혜인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가 키스를 퍼부었다.남자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끝을 잡고 자신의 양복 단추에 얹은 채 키스를 하며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스카이웨어 꼭대기 층에는 반승제의 방이 있었다. 예전에 두 사람이 간 적 있었다.만약 엘리베이터 안에 CCTV가 없었다면 반승제는 여기서 그녀의 옷을 벗겨버렸을 것이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반승제는 아예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자기 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성혜인은 키스로 인해 정신이 혼미했지만 문을 차버리는 그의 힘이 유난히 다급하고 거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능숙하게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가 자신의 양복을 벗기도록 이끌었다.첫 번째 잠자리가 끝나고 성혜인은 그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정신이 들어?”그녀는 취하지 않았다. 단지 그를 원했을 뿐이었다.그래서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남자의 목젖에 키스했다.반승제는 뒤로 숨더니 그녀의 턱을 잡고는 유심히 관찰했다.“성혜인, 너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야?”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주동적일 수 있을까?“반승제.”그녀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고는 또 급히 그에게 키스하려 했다.반승제는 호흡이 약간 막히고 강한 불이 몸속에서 타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의 키스를 피하고 약간 쉰 목소
옷을 챙겨 입은 반승제는 몸을 숙여 잠들어 있는 성혜인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혜인아, 할아버지한테 단서가 생겨서 외국에 갔다 와야 해. 계속 자고 있어. 웨이터에게 아침 가져오라고 할게.”성혜인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반승제가 강하게 흔들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곤한 눈을 뜬 성혜인은 남자가 자신의 입술에 진하게 키스하는 것이 보였다.“나 외국에 갔다 올 테니까 밥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어. 알겠지?”“음.”그녀는 정신이 혼미하고 피곤해서 몸을 뒤척이며 또 자려고 했다.남자는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우리 다시 만나는 거 공식적으로 이미 발표했으니 번복하기 없기다?”“그래요, 좋아요.”성혜인은 혼미한 상태로 다시 잠을 잤다. 꼬박 이틀 밤을 새웠으니 아무런 힘도 나지 않았다.그녀를 두고 가는 것이 너무 아깝지만 반승제는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이라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점심에야 잠에서 깼지만 여전히 온몸에 힘이 없었다.그리고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가 아팠다.반승제가 옆에 있는 줄 알고 만졌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용기를 내어 그를 껴안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들려주려고 했지만,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반승제가 어젯밤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것이 느껴져 허리춤을 보니 역시 손자국이 몇 개나 더 생겼다.순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목욕을 하고 나서야 몸이 좀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이때 문밖에서 웨이터가 노크했다.“고객님, 대표님께서 아침 식사를 가져다드리라고 하셨는데 지금 들어가도 될까요?”성혜인이 문을 열자 웨이터가 푸드트럭을 밀고 들어와 반듯하게 음식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그녀는 반승제가 출근한 줄 알았다.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어쩔
설인아의 재촉을 받은 도송애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지금 인터넷상의 여론은 여전히 거센 상태였다. 어제 백지영을 내보냈지만, 어젯밤 그녀는 손을 쓰지 않았다.도송애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고 수소문 끝에 반승제가 출국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심호흡하고 즉시 이 소식을 백지영에게 전했다. 반승제가 없으니 지금이 성혜인을 상대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였다.백지영은 이미 흥분하기 시작했지만 도송애는 여전히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에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괜히 꼬리 잡히지 마세요. 성혜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그년은 반승제만 믿고 까부는 거잖아요!”백지영의 눈 밑에는 짙은 원한이 서려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성혜인을 차로 쳐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지영 씨가 해야 할 일은 성혜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몸을 해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거죠.”도송애도 이 단순한 바보에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일깨워줄 만한 것은 이미 일깨워 주었다.전화를 끊으려 할 때, 도송애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더 당부했다.“성혜인 그년이 반승제를 좋아하니까, 만약 반승제와 인연을 끊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그년의 정곡을 찌르는 일이에요.”백지영은 순간 눈이 번쩍였다.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놓을 수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그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더니 곧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다.회사에 앉아 있는 성혜인은 기분이 꽤 좋았다.장하리는 그녀의 몸에 늘어난 흔적을 보고는 어젯밤 또 반승제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비서로서 뭐라고 말하기 어려워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지난번에 못 만났던 감독님과 오늘 다시 약속을 잡았어요.”성혜인은 그제야 지난번 백현문에 의해 끌려가던 날 자신이 한 감독과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요 며칠 동안 반승제와의 일을 생각하느라 다 잊고 있었다.“몇 시 약속이죠?”“저녁 9시요. 감독님의 성
그 방 안은 조명이 아주 어두웠다. 너무 어두워서 상대방의 표정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혜인아, 따라와.”그의 목소리는 아주 온화했다. 그러나 성혜인은 어쩐지 그것이 꾸며낸 온화함 같았다.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선배, 저 나가고 싶어요. 저번에 제가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약속 기한이 이미 지났다고.”저번에 성혜인은 며칠 동안 기절해 있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설명도 없었기에 성혜인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비록 그가 과거의 가장 아름다운 꿈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혜인아, 저번에 잠들게 해서 미안해.”말로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말투에서는 미안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성혜인의 의심이 깊어졌다. 그녀는 몰래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나 술 때문에 약기운이 온몸을 흐르고 있어서 뜨거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성혜인은 몸을 돌려 조금 전 들어온 작은 문을 통해 나가 포레스트로 가서 찬물에 씻어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그러나 허리에 양손이 감겨오자 성혜인은 화들짝 놀라면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그 괴상하고 위험한 느낌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날카로워졌다.“혜인아, 일단 좀 자.”“전 자고 싶지 않아요! 자라고 하지 말아요!”그러나 이 일은 그녀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지난번의 꽃향기가 엄습해 오며 몸의 약기운까지 겹쳐 그녀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남자는 성혜인을 은밀한 방으로 데리고 갔고 일찌감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에게 분부했다.“몸속의 약효를 좀 진정시켜.”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나랑 잠자리를 가졌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여자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남자는 그곳을 떠나 더욱 어두운 곳으로 향했다. 누군가 그에게 따져 물었다.“이것이 바로 당신이 나를 상대하는 수단이야? 성혜인을 이용해 날 협박하는 거?”“그래. 난 당신이 걸려들 줄 알았어. 반승우, 내겐 시간이 많지 않아. 내
반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구석에 서서 오랫동안 침묵했다.남자의 미간에 드리워진 음울함이 더욱 짙어졌다.“저번에 난 성혜인을 대신해 전화를 받았어. 네 동생 반승제에게서 걸려 온 전화더라고. 내가 몇 번 더 받으면 내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반승제는 배현우를 조사하기 시작할 거야. 하지만 반승제는 지금 할아버지 일 때문에 발목이 잡혀서 그럴 정력이 없을 거야.”남자의 주먹이 거울에 닿았다. 그는 유도하듯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그러고 보면 네 감정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성혜인이 내 스타일처럼 느껴지더라고.”“내가 성혜인에게 얘기해서 그것을 네게 주라고 할게.”“일찍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그랬다면 저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반승제의 전화를 받지 않았을 거야. 하마터면 우리의 행적이 드러날 뻔했잖아.”남자는 의기양양해졌다.반승우는 온유한 외모에 말할 때도 부드러워서 그를 본 사람들은 절대 그의 얼굴을 잊지 않았다.그래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성혜인은 그의 외모에 한동안 놀라워했었다.그리고 또 그 이유로 그녀는 반승제와의 베팅 계약 기간에 그와 만나려고 한 것이다. 직접 만나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반승우, 내 몸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줄게. 하지만 쓸데없는 수작은 부리지 마. 너도 알다시피 나는 결과를 신경 쓰지 않거든.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진짜 관계를 가질 줄 알아.”대화가 끝났다....성혜인은 잠을 잘 잘지 못했다. 그녀는 꿈에서 문득 반승제의 목소리를 들었다.“이제 우리는 만나는 거야. 난 이미 대외적으로 발표했어. 그러니까 후회하지 마.”“알았어요.”성혜인은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그것이 잠을 잘 때 반승제가 했었던 말이라는 걸 떠올렸다.당시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그렇다. 반승제의 말처럼 두 사람은 만나고 있었다.그 일을 떠올려서였을까, 꿈속에서 성혜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지금 처지가 어떤지는 전혀 모른 채 말이다.잠에서 깼을 때는 낯선 천장이 보였다. 성혜인은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