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처치가 늦었어. 이미 독소가 몸에 주입된 상태에서 하루 밤낮을 바다에서 표류했으니 그로 인해 독소의 작용이 더 빨라졌을 거야.”“더 빨라졌다고?”김성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처음의 고비까지는 한 달의 시간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그렇지 않아.”약간의 유감이 담긴 표정으로 여의사는 고개를 저었다.“만약 깨어나지 못하면, 첫 번째 치료 단계를 침대에서 보내게 될 가능성이 커.”김성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는 믿기지 않는 듯 여의사의 팔을 꼭 잡았고 무릎에 힘이 풀리면서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그러자 여의사가 급히 김성훈을 부축하며 말했다.“아이고... 성훈아, 이러지 마...”김성훈은 간절하게 부탁했다.“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 줘. 준혁이 이제 막 아내랑 화해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던 참인데...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안 돼.”“성훈아...”여의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김성훈과 오랜 친구 사이로 지냈어도 그녀는 그가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너 나 잘 알잖아?”여의사가 말했다.“준혁 씨를 살릴 생각이 없었다면 난 내 실험실로 데려오게 하지 않았을 거야.”그녀는 남자의 깎아지른 듯한 야윈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연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신종 사례를 놓치고 싶지 않아.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극복하고 싶어. 하지만...”말을 멈칫하더니 여의사가 다시 말했다.“지금으로선 준혁 씨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그 다음 단계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거야.”김성훈의 눈이 번쩍였다.‘이 말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인가...’그러나 다음 순간, 여의사는 그에게 찬물을 끼얹었다.“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최선을 다해볼 테지만 결과는 하늘의 뜻에 달렸어.”김성훈은 깊은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곧 여의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처음 여기 왔을 때 ‘혜...’라고 했던 말을 들었어. 그 후로는 깊은 혼수상
이를 갈 정도로 원지민은 분노했다.‘이 늙은이가... 분명 나를 구치소에 더 오래 가두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원지민은 문현미와의 면회를 요청했다.그리고 문현미는 이에 동의했다.그녀도 원지민이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원지민은 문현미 곁에서 수년 동안 순종적으로 행동해왔고 문현미도 그녀를 아끼고 보살펴 왔다.그런데도 원지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문현미에게 독을 먹이고 심지어 이천수와 손잡아 그녀의 외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다.이들이 생각하는 건 단순했다.자신들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일이라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 것이다.때문에 문현미는 분명히 그들에게, 특히 원지민에게 자신의 행동에 따른 대가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려줄 참이었다.구치소 면회실에서.원지민은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이고 얼굴에는 피곤함과 고통이 가득했다.“어머님...”그녀는 입을 떼자마자 목이 메었다. 익숙한 호칭을 사용해 문현미의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것이었다.하지만 문현미는 그 호칭을 듣자마자 원지민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어머님이라고 부르지 마!”그녀는 독하게 말했다.“연극은 그만둬. 할 말 있으면 빨리해!”“어머님... 저한테 이러시면 안 돼요...”하지만 원지민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울먹였다.“제 배에는 아직도 준혁이의 아이가 있다고요...”곧 문현미는 벌떡 일어나 원지민의 뺨을 세게 때렸다.“네 배 속의 그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쓰라린 뺨에 원지민은 눈앞의 문현미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다.이때, 교도관이 개입하여 상황을 중재했다.“주의하세요! 면회를 계속할 건가요?”결국 원지민은 억울함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교도관은 엄격하게 경고했다.“첫 번째 경고입니다.”원지민은 이를 갈았지만 애써 참으며 계속해서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도록 했다.“어머님, 저를 믿어주세요. 그 여자는 어머님을 속이고 있어요. 그 여자가 낳
말을 하면서 그녀는 몸을 숙여 여자의 상처를 간단히 응급처치로 지혈하려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피가 여전히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상처가 매우 깊은 게 분명했다.곧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들어와 원지민을 구급차에 실었다.사이렌 소리와 함께, 꽉 쥐고 있던 원지민의 손이 마침내 천천히 풀렸다.그녀의 입가에는 힘겹게 억지로 얹은 듯한, 희미하지만 만족스러운 미소가 살짝 번졌다....윤혜인이 이 소식을 들은 건 이미 다음 날 정오였다.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달밤 스튜디오에 큰 문제가 생겼으니 말이다.원자재부터 생산 라인까지 모든 공급망이 중단되었고 대량의 주문이 제때 납품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더 심각한 것은 회사 내 이미 완성된 제품들이 밤중에 두 명의 좀도둑에 의해 모두 파손되어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는 것이다.많은 고객이 주문 재촉을 하고 있는 가운데, 윤혜인은 급히 공동 고객 서비스 부서를 설립하여 환불 협상을 진행했다.하지만 많은 문제들이 단순히 환불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일부 고객들은 연회나 축제에 참석할 예정이라 현장에서 즉석 제작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심지어 두 배의 보상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고객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윤혜인은 할 수 없이 구지윤과 고위 임원들과 함께 나눠서 직접 고객들을 찾아가 사과하고 보상해 주었다. 스튜디오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더불어 그녀는 보상액을 세 배로 올리기로 결정했다.즉, 1억 원의 주문에 대해 3억 원을 보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대략적으로 계산해 본 결과, 스튜디오의 현재 파손된 주문 가치는 약 400억 원에 달했다.하지만 그녀들은 총 1200억 원을 보상해야 했다.‘달밤’이 개업한 이래 총 수익은 겨우 300억 원에 불과했기에 이 구멍을 메울 방법은 전혀 없었다.경찰서 쪽에서는 좀도둑들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하지만 그 둘은 너무 가난해서 보상할 돈이 전혀 없었고 자발적으로 감옥에 가겠다고 했다
사실 윤혜인은 오늘 송아영 외에도 여러 까다로운 상대를 만났다.그래서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송아영 씨, 저희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보상이고 다른 하나는 대체품을 제공하는 것입니다.”윤혜인은 태블릿을 꺼내 건네며 덧붙였다.“Vserand도 국제적인 브랜드입니다. 그쪽 제품을 구입해서 응급 상황에 사용할 수 있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사실 Vserand는 흠잡을 데 없는 명성 있는 브랜드였는데 달밤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유명한 브랜드였다.그러나 애초에 윤혜인을 고의로 곤란하게 하려 했기 때문에 송아영은 당연히 동의하지 않았다.그녀는 머리를 저으며 무시하듯 말했다.“혜인 씨, 말은 참 잘하시네요. 그런데 이미 저희 회사에서는 공식 발표를 했어요.”송아영은 바로 핸드폰에서 한 이미지를 내밀었다.날카로운 눈썰미로 윤혜인은 그 발표 시간이 정오였음을 알아챘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송아영 씨, 저희는 오전 9시에 이미 귀사에 전화로 모든 상황을 알렸습니다. 이미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오에 발표를 하신 이유가 뭡니까?”순간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송아영은 곧 침착하게 변명했다.“제가 몰랐던 거죠. 아마 전화는 저에게 걸린 게 아닐 겁니다...”그녀는 명백히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다.이성을 잃은 송아영은 이제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당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명백히 당신들이 잘못했는데 왜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지 않는 거냐고요. 달밤 스튜디오는 항상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해왔나요?”“저희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윤혜인은 담담하게 물었다.“그럼 송아영 씨는 어떻게 해결하고 싶으신지 방안을 제시해 주시겠어요? 제가 들어보고...”하지만 윤혜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송아영은 날카롭게 말했다.“이미 말했잖아요. 나한테 무릎 꿇으라고!”그녀는 귀 옆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후에 제 기분을 봐서
송아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항상 강자에게 아부하고 약자에게 가혹한 태도를 취해왔다.원씨 가문에서 지시를 내렸는데 송아영이 윤혜인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더군다나 그녀의 본래 그런 성격이 남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것이었고 말이다.곧 송아영이 비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이 몇 마디 한다고 해서 나와 지민이 사이를 이간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요!”“송아영 씨의 절친 원지민 씨가 벌써 이틀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거, 이상하지 않아요?”송아영은 살짝 의아해졌다.사실 요 이틀 동안 그녀와 연락을 취한 것은 원지민 본인이 아닌 원지민의 비서였다.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원지민을 찾을 수 없었다.“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윤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송아영 씨 절친이 지금 어디 있는지 조금만 알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결정할 수 있는 시간 5분 더 줄게요. 그때까지도 협상할 생각이 없다면 그만 끝냅시다.”원지민이 구금된 사실은 원씨 가문에서 철저히 숨기고 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다.송아영은 윤혜인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원지민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이자 원씨 가문의 대표인 그녀의 편에 서는 것이 절대 실수일 리 없다고 여겼다.그러나 윤혜인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자 송아영은 약간 불안해졌다.곧바로 원지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송아영의 전화를 받는 것은 여전히 원지민의 비서였다.“채 비서, 지민이는 없어요?”상대방은 능숙하게 대답했다.“안녕하세요. 송아영 씨. 대표님께서는 현재 국제 회의에 참석 중이셔서 전화를 받기 어렵습니다.”송아영은 전화를 끊고 다시 업계 대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원지민의 상황을 물어봤다. 그쪽에서는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기다리는 동안 송아영은 고개를 높이 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당신이 헛소리하는 게 틀림없어요. 지민이는 지금 해외에 있다고요.”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5분이 지나
이천수의 말은 명백히 위협으로 들렸다.이제 윤혜인의 회사만이 아니라 곽씨 가문의 사업까지 건드리려는 의도였다.윤혜인은 냉담하게 대꾸했다.“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희 집의 현금 흐름은 현재 전혀 문제없습니다.”이천수는 그녀가 그저 강한 척한다고 생각했다.곧 그는 진심으로 충고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혜인아, 삼촌이 하나 충고해줄게. 차라리 준혁이의 사망을 인정하고 사건을 철회하는 게 어때? 그 주식 부분을 내가 현금으로 줄게.”물론, 사건이 철회된 후에 얼마나 주겠다는 건 결국 이천수의 마음대로일 것이다.그는 단순히 몇 가지 수를 써서 이선 그룹의 주가를 크게 떨어뜨린 다음, 적은 금액으로 보상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은 그의 진짜 의도를 깨달았다.그가 원하는 것은 이준혁이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어 그의 야망을 실행에 옮기려는 것이었다.“삼촌, 준혁 씨는 죽지 않았어요.”윤혜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앞으로는 입조심해 주세요. 그 말 듣기 싫어요.”이천수는 분노로 폭발 직전이었다.‘고집이 왜 이렇게 세? 전혀 말을 듣지 않는군.’“곧 네가 어떤 고통을 겪게 될지 두고 봐!”아니나 다를까 오후에 몇몇 회사들은 달밤과의 협상을 어렵게 만들기 시작했다.분명 이천수가 손을 썼을 것이다.날이 어둑해질 무렵, 윤혜인은 지친 몸을 이끌고 스튜디오로 돌아왔다.이미 이틀째 스튜디오에서 먹고 자며 일을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돌아갈 시간도 없었다.다행히 집에는 홍 아줌마와 경호원이 있어서 그녀는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연이틀 동안 윤혜인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결과적으로 손실은 예상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특히 가장 큰 주문이었던 SY 미디어에서는 한 푼도 보상금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대체 방안을 마련해 주었다.이 덕분에 윤혜인은 상당한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그녀는 성준에게 보상금을 송금했지만 성준은 이를 거절하며 너무 격식을 차리지 말라고 했다.성준은 또 이렇게 말했다.
윤혜인은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발끝에서부터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의자에 기대어 천천히 앉으며 애써 자신을 진정시킨 후, 다시 한번 모니터 화면을 반복해서 확인했다.마침내, 그녀는 홍 아줌마와 아름이가 사라진 그 모퉁이로 갔다.이곳은 홍 아줌마가 평소에 다니던 경로가 아니었으며 화면 속에서의 아름이가 작은 손으로 홍 아줌마를 잡아당기듯 이끌고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좁은 골목 입구에 서서 주변을 살펴봤다.이곳에는 하나의 도로 감시 카메라만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는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있었다.만약 홍 아줌마와 아름이가 이 모퉁이에서 납치된 것이라면 카메라에 포착될 가능성은 없었다.분명히 상대방이 사전에 계획을 세운 것이 틀림없었다.‘그런데 왜 아름이는 왜 낯선 경로로 홍 아줌마를 이끌었을까?’수많은 의문이 윤혜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금방이라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천수, 한구운, 원지민...’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 갔다.윤혜인은 이들 모두를 증오했다.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사람들을 미워했다.‘도대체 누가 아름이를 데려간 거냐고!’그녀는 곧바로 차에 올라타 이선 그룹 본사로 돌진했고 이천수의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이천수는 넓은 사장 의자에 앉아 여비서와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여비서는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그의 무릎에 앉아 있었고 이천수는 여자의 탱탱한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입을 맞추고 있었다.“자기야, 날 너무 괴롭히지 마. 빨리 줘... 더 이상 참기 힘들겠어...”그때, 문이 ‘쾅’ 하고 열렸다.이천수는 깜짝 놀라 여비서를 밀쳐냈고 그녀는 ‘아야’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윤혜인은 이천수에게로 달려가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소리쳤다.“당신이야? 당신이 데려갔어?”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이천수는 화가 나 있었다.“미쳤어? 뭐가 나라는 거야? 데려가긴 뭘 데려가?”
윤혜인은 몸이 경직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본능적으로 한구운의 손길을 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그렇게 한구운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섰다.잠시 후, 그는 갑자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혜인아, 내가 여러 번 말했잖아. 강하게 맞서봐야 결국 너만 손해일 뿐이라고.”윤혜인은 그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아름이의 행방을 찾으러 가려 했다.그러나 한구운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나한테 부탁하는 게 낫지 않겠어?”윤혜인은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뒤돌아보며 물었다.“아름이와 홍 아줌마의 행방을 알고 있어요?”한구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사람을 찾는 건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윤혜인은 한구운이 그녀가 절망에 빠진 틈을 타 자신을 조종하려는 의도를 알고 있었다.발길을 돌려 떠나려 했지만 한구운은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세상에 진짜 나비 요정이 있을까?”그 순간, 윤혜인의 눈앞이 아찔해졌다.이건 그녀가 아름이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였다.만약 길을 잃으면 여기저기 뛰어다니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춰 나비 요정이 와서 데려가도록 기다리라고 말이다.윤혜인은 한구운에게 달려가 그의 옷깃을 잡고 격하게 물었다.“우리 아름이를 어디에 숨겼어?!”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목소리는 마치 성대가 찢어진 것처럼 쉬어있었다.“당신이 맞지? 당신이 우리 아름이를 데려간 거야. 돌려줘. 내 아이를 돌려줘!”그러나 한구운은 태연하게 말했다.“너무 흥분하지 마. 계속 이렇게 나를 붙잡고 있으면 사람들이 네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면 너와 나 사이에 떠돌던 소문도 저절로 사라지겠지.”이제야 한구운의 속셈이 드러났다.하지만 윤혜인은 지금 그런 꿍꿍이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한구운을 쏘아보며 말했다.“당신들 인간이긴 해? 내 아이는 그냥 어린애야. 내 아이를 돌려주지 않으면 당신을 죽여버릴 거야!”그녀는 피를 토하듯 절박하게 외쳤다.“정말이야. 죽여버릴 거라고.”하지만 한구운은 그저 미소를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한 걸음 다가왔다.차갑고 섬뜩한 육경한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속으로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만약 그가 화를 낸다면 지금 그의 집에 있는 상황에서 소원이 저항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지금 나 위협하고 있는 거야?”육경한이 입을 떼자마자 강렬한 압박감이 그녀를 덮쳤다.소원은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며 평온한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대답했다.“위협이 아니야. 단지 거래지. 내가 현재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이유는 현재가 유진이의 생명의 은인이라서야. 그때 그 해변 절벽에서 현재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유진이와 함께 떨어져 죽었을 거야. 현재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 유진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소원은 육경한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그를 자극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서현재에게도 불리했다.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유진이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육경한에게 서현재의 안전도 지켜달라고 하는 것이다.이건 육경한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변화무쌍한 서울에서 뿌리 없는 두 사람이 스스로 살아남으려면 정말 쉽지 않았다.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수많은 적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으니 말이다.비록 그 적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맞서야만 했다.지난밤 만약 영숙의 말이 아니었다면 소원은 지금 이토록 빠르게 마음을 고치지 못했을 것이다.영숙이 말했다.“스스로 살아가는 게 고결하게 보일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 오히려 스스로만 의지해서 초라하게 산다면 사람들의 조롱거리밖에 안 될 거야. 똑똑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모든 기회를 붙잡는 법이지. 법을 어기지만 않으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옳은 길이야. 쓸데없는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 없어...”영숙의 위로에 소원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그동안 수없이 부딪혀 왔던 벽들, 이제는 좀 더 똑똑하게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소원은 눈앞에 놓인 담백하고 향긋한 보양식을 보며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몸이 다쳤을 때는 보양식으로 보충할 수 있다지만 마음은 어떡해야 하지? 상처 입은 마음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비록 입맛은 없었지만 그녀는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건강한 몸이 필요했다.절식하며 저항하는 건 미성숙한 아이들이나 할 짓이었다.약해진 몸으로는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없고 제대로 된 판단도 할 수 없었다.억지로 먹긴 했지만 그 양은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에 불과했다.정상적인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양에는 한참 못 미쳤다.남은 음식을 도우미가 들고 나갈 때, 육경한은 그 모습을 흘낏 보며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연근을 좋아하니까 다음 끼니엔 연근 요리를 준비해.”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지만 도우미는 속으로 생각했다.‘연근 같은 사소한 취향까지 기억하다니... 이 여자는 정말 육 대표님께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어.’다음 날 아침, 소원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도우미에게 말했다.“육 대표님을 불러주세요.”그녀에게는 삼일이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유진이의 안전은 단 한순간도 미룰 수 없는 문제였다.곧이어 육경한이 방 안에 들어서자 방 안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소원이 입을 열었다.“조건 받아들일게.”이 결정에 육경한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사람은 약점이 있으면 잡히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소원의 약점은 언제나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그녀는 어머니를 포기할 수도, 아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소원을 굴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동안 그런 수를 쓰지 않았다.자신에게 아직 그 알량한 자신감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결국 육경한은 그 자신감이 얼마나 허망한지 깨달았고 소원은 그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소원이 덧붙였다.육경한은 그녀가 조건을 제시하는 일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히려 조건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건 소원
육경한은 눈앞의 여자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와 욕망이 뒤섞였다.조금 전의 짧은 접촉만으로도 그의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 듯했다.그녀를 지금 이 자리에서 눌러 제 몸 어디 한 부분에라도 붙여두고 싶었다.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더는 다른 남자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말이다.특히 그녀가 술에 취해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던 ‘현재야’라는 말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처럼 그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그는 지금 당장 서현재를 붙잡아 바다 깊숙이 가라앉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육경한, 양심에 손을 얹고 우리 모자에게 부끄럽지 않아? 왜 내가 당신에게 빌어야 하지? 유진이는 당신 아들 아니야?!”소원은 눈가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격분하며 그를 노려보았다.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을 위협하는 모습에 깊은 증오를 느꼈다.육경한은 차분히 말했다.“내가 두 사람에게 잘못한 건 인정해. 하지만 네가 나한테 그걸 만회할 기회를 준 적이 없었잖아.”그의 말은 소원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렸다.그렇지만 육경한은 개의치 않았다.소원을 곁에 둘 수만 있다면 비웃음을 사는 것쯤은 상관없었다.“네가 유진이의 엄마로 돌아와 내 곁에 머문다면 내가 필요한 권리를 줄 거야. 하지만 네가 유진이의 엄마가 아니라면 그 권리는 너와 아무 상관없어.”육경한의 말은 현실적이고도 냉정했다.교환을 원하는 것이었다.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고 그는 분명히 했다.곧 소원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육경한, 당신 왜 이래? 이건 사랑이 아니야! 우리 둘 사이엔 사랑 따윈 없어!”극도로 지친 소원은 무력감을 느꼈다.육경한은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그를 이길 수 없었고 심지어 서현재조차 위험에 빠져 있었다.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눈빛이 어두워진 채 육경한은 그녀의 상처를 조심스레 손끝으로 쓰다듬었다.“이제 와서 사랑이니 뭐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남자는 소원의 손가락을 단단히 얽으며 열 손가락을 맞물렸다.그리고 조금씩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키스는 어젯밤 일에 대한 대가야. 이제부터가 내가 내놓을 조건이야.”소원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이번엔 또 뭘 하려는 거야!”“뭘 하겠어? 당연히...”눈을 가늘게 뜨더니 육경한은 고개를 숙였다.“널 가질 거야.”뒤이어 거칠고 압도적인 키스가 다시금 그녀에게 덮쳐왔다.이번 키스는 이전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더 거침없었다.조금 전의 키스는 단순한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소원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남자의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그녀의 손톱이 등과 목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남겼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남자는 소원을 침대 위로 강제로 밀어 눕히고 그녀의 다리를 가슴 위로 억누르며 반항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했다.그의 뜨겁고 거친 키스는 소원의 입술에서 목덜미로 이어졌고 술에 취한 듯한 짙은 욕망이 가득했다.남자의 손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타고 내려가며 탐욕스럽게 그녀를 더듬었다.서로 뒤엉킨 숨소리는 남자가 흥분했을 때만 내뱉는 거친 숨결이었다.정신이 아득해지며 소원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육경한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분명 최근에는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였던 그가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눈빛에 진한 욕망의 빛이 서린 채 육경한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를 잠시 놓아주었다.“아까 나한테 물었었지?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내 조건은 간단해. 널 내게 줘. 그러면 내가 유진이의 엄마로 만들어줄게.”소원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멍해졌다.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진이의 엄마’라니. 유진이는 원래부터 그녀의 아이다.‘난 이미 유진이의 엄마잖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의 말뜻을
소원의 숨이 순간 멎었다.물론이다. 당연히 유진이의 양육권을 원했다.그것만이 유진이의 안전을 완벽히 보장할 수 있는 길이었으니 말이다.유진이는 원래부터 몸이 약하고 허약했다.다른 사람이 조금만 속임수를 써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소원이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걸고 방민아를 육경한 대표 부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것이었다.유진이의 몸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게다가 의사는 유진이의 건강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며 적합한 기증자를 찾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이런 상황에서 유진이를 반드시 자신의 곁으로 데려와야 했고 이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소원은 평생을 후회할 것이었다.“나는 당연히...”하지만 소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육경한이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으며 조용히 ‘쉿’하고 말했다.약간 거친 그의 손가락 끝은 마치 사포처럼 꺼끌꺼끌한 촉감을 남겼고 전류가 흐르는 듯한 낯선 감각이 스쳤다.몸에 소름이 돋으며 소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육경한은 가볍게 비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원한다면 진심을 보여야지.”소원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 한 발 더 물러섰다.“원하는 게 뭔데?”그녀가 다시 묻기도 전에 육경한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육경한은 소원을 옷장 문에 밀어붙였고 열기가 느껴지는 입술이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가에 닿았다.그것은 마치 시험하듯 시작되었고 이내 그녀의 입술로 깊숙이 파고들었다.술 냄새가 코를 찌르자 소원은 한순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소원이 손발을 모두 사용해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육경한은 무릎으로 그녀의 두 다리를 꽉 누르고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거칠게 키스했다.그의 입술은 거칠었고 심지어는 물기까지 했다.소원은 그의 강압적인 키스에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키가 190cm에 육박하는 남자의 힘 앞에서는 그녀의 저항은 무력할 뿐이었다.결국 육경한의 입술이 소원의 것을 물어 피가 묻어났고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동안 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그는 담담하게 소원의 얼굴빛을 살폈고 소원은 태연하게 말했다.“당신이 유진이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엄마인 내가 할 수밖에 없지. 내일...”“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 모두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거야.”소원의 단호한 말투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육경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쩌면 그녀가 정말로 백업 파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물었다.“그리고 나면?”소원은 잠시 멈칫했다.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육경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공개한다고 해도 연주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거야. 우리 누나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최악의 경우 해외로 나가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면 그만이지. 연주의 이후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방민아와 방민기도 마찬가지야. 방씨 가문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네가 벌이는 이 작은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만약 돈과 인맥을 써서 이슈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어?”육경한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냉담하게 말했다.“그들의 대응 방식은 연주와 다를 게 없어. 이런 일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할 거야.”그리고 그는 냉랭하게 덧붙였다.“소원, 꿈같은 소리 하지 마. 난 방민아와 결혼하지 않아도 다른 여자와 결혼할 거야. 근데 내가 그 여자들이 유진이에게 나쁜지 좋은지 일일이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육경한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점들이 속속 보였다.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지금 그녀가 가진 영상은 방민아를 육경한 대표님 부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다음은? 또 그다음은?그녀가 그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겠는가.결국 육경한이 유진이를 놓아주지 않는 이상 양육권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으며 잠재적인 위험은 피할 수 없었다.그녀는 잠시 혼란에 빠
하지만 곧 그녀는 이 생각을 부정했다.영숙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영숙을 그렇게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만약 영숙이 소원을 해치려 했다면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도와줄 필요도 없었고 지금 같은 시점에 와서 그녀를 해칠 이유도 없었다.그렇다면 이건 분명 육경한이 알아챈 것이다.소원은 육경한이 이렇게까지 똑똑할 줄은 몰랐다.‘내가 육연주와 방민아를 몰래 찍어둘 줄 어떻게 알아챘지?’소원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 초소형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고 겨우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의 조용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이미 소용없어.”확인해 보니 과연 카메라 안의 저장카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육경한이 이걸 손에 넣고 안에 있는 내용을 봤다면 그녀에게 돌려줄 리 없었다.그 안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의 조카, 약혼녀, 그리고 그의 큰처남이었다.그들과의 관계가 워낙 가깝기에 육경한이 이들을 곤경에 빠뜨리도록 놔둘 리 없었다.소원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저장카드를 가져갔다면 그 안의 내용도 이미 보셨겠죠, 육 대표님.”“응, 봤어.”육경한은 솔직히 인정했다.“봤다면 당신 약혼녀가 한 말을 들었을 텐데요?”소원은 약간 흥분하며 물었다.“그 여자가 정말 유진이 새엄마로 적합하다고 생각해요?”육경한은 그 영상을 보고 난 뒤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하지만 이 순간, 문득 어젯밤 무의식중에 소원이 흘린 한마디가 떠올랐다.“현재야...”그리고 그동안 소원이 자신에게 얼마나 냉담했는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장난처럼 다루었는지, 그 안에 조금의 연민조차 없었던 것들이 떠올랐다.그래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바꾸었다.“그 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될 거야. 유진이는 어쨌든 새엄마가 필요하니까. 누구도 유진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필 수 없다면 차라리 나에게 가장 유리한 사람이 낫지.”이 말은 그야말로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자신의 아이를 이익의 발판으로 삼
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약간 놓이는 듯했다.하지만 지금은 육경한과 이런 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어젯밤, 소원이 영숙에게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게 한 것은 방민아의 수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 외에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방민아의 수를 깨뜨리지 못하면 유진이를 지킬 방법은 없었다.그녀는 오로지 이 방법밖에 없었기에 육경한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고 이것이 아니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이후 소원은 영숙에게 부탁해 숨겨 둔 소형 카메라를 가져오게 했다.현재 그 증거는 영숙의 손에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그녀는 서둘러 그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그래야만 육경한과 조건을 논할 수 있었다.그녀는 확신했다. 이 증거를 본다면 육경한도 미우 그룹의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방민아와 결혼을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설사 결혼을 강행하려 해도 그녀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었다.소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나가야겠어. 내 옷 줘.”지금 입고 있는 이 잠옷은 너무 헐렁해 입고 나가면 거의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민망했다.육경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네 옷? 그 찢어진 천 조각들을 다시 입고 나가겠다고?”소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싸움으로 옷이 모두 찢겨나갔던 것이다.“그럼 부탁할게. 내가 입을 수 있는 옷 좀 찾아줘.”그러나 육경한은 냉소하며 말했다.“왜 내가 널 위해 옷을 찾아줘야 하지? 나가고 싶으면 그냥 지금 입은 채로 나가.”소원은 그의 말에 화가 치밀어 곧바로 이불을 걷어내고 지금 입은 그대로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하지만 문까지 걸음을 떼기도 전에 육경한이 발로 문을 차며 문을 닫아버렸다.소원은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뜻이야?”“정말 그렇게 나가려는 거야?”육경한의 눈빛은 차가웠고 말투는 뭔가 숨은 의도를 담고 있는 듯했다.속이 덜컥 내려앉았
피가 끝없이 번져가 끝내는 눈까지 뒤덮자 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눈이 핏발로 가득 차 있었고 머릿속은 웅웅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낯선 방을 둘러보며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이전의 일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문득 기억이 되살아났다.방민아가 쉽게 자신을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는 그 룸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었다.그리고 영숙이 약속된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고 그다음은 육경한이 그녀를 데려간 장면이 이어졌다.머리를 감싸 쥐고 문질렀지만 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정신도 완전히 맑지 않았다.공기 중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맴돌았다.순진무구한 소녀가 아닌 소원은 그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저절로 미간도 찌푸려졌다.‘어젯밤...’소원은 서둘러 이불을 걷어내고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방민아, 방민기와 몸싸움을 벌이며 생긴 상처들 외에 민감한 곳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하지만 허리에 남은 손자국이 의심스러웠다.그 자국은 너무 깊어서 마치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흔적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분명 싸움에서 생긴 자국은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생각하려니 겁이 났다.옷차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본래 소원이 입고 있었던 옷이 아니었다.그때, 문이 갑자기 열렸다.육경한이 성큼 들어오더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소원을 보고 무심히 말했다.“깼네.”말을 끝내자마자 커다란 베개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육경한은 손을 살짝 들어 그것을 쳐냈고 베개는 그의 얼굴을 살짝 스치며 바닥에 떨어졌다.곧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구해줬더니 이렇게 보답하는 건가?”“나한테 무슨 짓 했어?”소원은 이를 악물고 날카롭게 물었다.육경한은 그녀가 화가 난 모습을 보며 얇은 입술을 살짝 비틀어 웃었다.그러고는 침대 머리맡에 도우미가 가져다 놓은 얼음이 담긴 위스키를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느긋하게 말했다.“내가 뭘 했다면 네가 아무 느낌도 없었을 것 같아?”순간 멍해졌지만 소원은 이내 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