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여자가 서현재를 붙잡아 제단으로 끌고 갔다.그리고 연꽃 모양의 제단 한가운데에 그를 눕힌 뒤, 팔다리를 네 개의 모서리에 단단히 묶어 대자 형태로 만들었다. 그의 얼굴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족장은 거룩한 표정을 지으며 장엄하게 선언했다.“오늘 우리 무당가의 모든 구성원이 이 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성령께서 악령에게 오염된 이 자의 영혼을 정화하는 과정을 함께 목도할 것이다! 오직 성령님만이 그의 심장을 깨끗이 정화할 수 있으며 우리 성령께서는 백성을 위해 자신의 정수를 아낌없이 사용하신다. 그것은 오직 사방의 평안을 위함이다! 오늘의 이 의식을 통해 세상이 태평하기를 바라며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기원한다!”제단 아래에서 무녀들이 일제히 외쳤다.“세상에 평화를! 성령님 영원하소서! 세상에 평화를! 성령님 영원하소서! 세상에 평화를! 성령님 영원하소서!”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파도처럼 몰아쳤다.무녀들은 완전히 족장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마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하나같이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이 광경을 본 소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 사람들, 진짜 정신이 나갔군. 허무맹랑한 불사의 신앙 때문에 이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족장을 믿다니... 바보 같은 광신도들이야!’그때 족장이 손에 횃불을 들고 성스러운 제단으로 다가갔다.곧 불을 붙이고 그것을 연꽃 제단에 던지려는 찰나, 순식간에 움직인 소원이 군중의 혼란을 틈타 빠르게 뒤로 접근했다.그리곤 단검을 빼 들어 빨간 옷을 입은 여자의 목에 겨누고 외쳤다.“멈추지 않으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광기에 휩싸여 있던 무녀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넋을 놓고 얼어붙었다.모두가 숨을 죽이고 소원이 인질로 잡은 빨간 옷을 입은 여자를 바라보았다.족장 역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소원을 본 순간,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도망쳐놓고 다시 스스로 걸어 들어오다니... 손 안 대고 다시 잡을 수 있게 됐군.’족장은 조소하며 말했다.“우리 성녀를 감히 협박해? 네가
“말도 안 돼!”무녀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란을 피웠다.“맞아, 족장님께서 자비로워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것뿐이야!”그 말을 들은 족장은 이를 기회 삼아 덧붙였다.“그래, 나는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 거다. 하지만 이를 놓친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그러자 소원이 도전적으로 소리쳤다.“굳이 그럴 필요 없어. 지금 당장 나를 끔찍하게 죽여봐. 그쪽들 신도들이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말이야.”“이...!”족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에 띄게 화가 난 모습이었다.소원은 콧방귀를 뀌었다.“이는 무슨. 그럼 어떻게 할래? 지금 당장 나를 처형하든가 아니면 저 제단 위의 사람들을 풀어주든가. 이건 명백한 학살이야!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고 그쪽 만행이 가려질 것 같아? 이제 그쪽 멋대로 폭정을 휘두를 수 있는 시대는 끝났어!”무녀들은 자신들이 신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었기에 자신들이 나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들에게 있어 정화의식은 곧 선행이었고 제물 역시 축복받은 존재였다.족장은 소원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헛소리하지 마라! 감히 우리 무당가를 선동하려 들다니, 네 따위가 함부로 조종할 상대가 아니다!”그때, 인질로 잡혀 있던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족장님! 이 여자가 족장님의 권위를 도발하고 있습니다. 어서 이 여자를 처단해 주세요!”소원은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가장 심하게 세뇌된 인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리고 조금 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다.“아가씨... 아니, 동생이라고 불러야겠네. 넌 사실 나보다 나이가 어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누군가가 네게 너는 여든 살이다라고 반복해서 주입했지. 그러다 보니 네 스스로도 그렇게 믿게 된 거야. 하지만 네 기억 속에 여든 년 동안 살아온 흔적이 있어?”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녀는 과
족장이 내려갈 리가 없었다. 속으로 방금 말한 무녀를 저주하며 ‘멍청한 것’이라고 이를 갈면서 말이다.그녀는 겉으로 노기를 띠며 소리쳤다.“내가 너희 말을 듣고 내려가야 한단 말이냐? 단순한 요녀의 망언 때문에 이 족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정신이 나갔구나!”그 말을 들은 무녀는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오랜 세월 동안 족장의 권위에 눌려 살아왔던 터라 그녀의 분노에 잔뜩 겁을 먹고 그 자리에서 움츠러들었다.다른 무녀들도 마찬가지였다.제멋대로 족장을 끌어내리려 한 그녀가 어리석다는 듯 모두 속으로 비웃었지만 정작 그 누구도 감히 족장을 의심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그러나 오직 한 사람, 빨간 옷을 입은 여자만이 흔들렸다.다른 무녀들은 족장을 가까이서 본 적도 없었고 그 모습조차 희미하게만 기억할 뿐이었지만 그녀는 달랐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유일하게 족장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리고 가끔씩 족장의 목에서 기괴한 모습을 보곤 했다.그곳의 살갗은 바싹 마른 가죽처럼 거칠었고 얇은 막처럼 뼈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심지어 피부가 늘어져 주름이 겹겹이 잡혀 있었는데 마치 벗겨지기 직전의 뱀 허물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가 평생 믿어온 것은 ‘족장은 초월적인 존재’라는 신념이었고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그녀 자신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족장은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었는지라 서늘한 눈빛으로 소원을 노려보며 위압적으로 말했다.“요망한 년, 네가 지금 하늘의 노여움을 샀다는 걸 아느냐?”그녀는 소원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결코 그녀를 놓아줄 수 없다고 확신했다.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곧 그녀는 손에 쥔 횃불을 가볍게 흔들었다.그러자 불꽃이 갑자기 치솟으며 거대한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순간 족장은 바닥에 엎드리며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성령님께서 노하셨다! 성령님께서 노하셨다! 용서
순간,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소원의 두 손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고 갑작스러운 사태에 제대로 반응할 수도 없었다.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을까.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이렇게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목을 칼날에 들이밀어 자결할 줄이야.“아...!”누군가 먼저 비명을 질렀고 곧 모든 무녀들이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성녀라서 죽지 않는 몸이 아니었나?그런데 왜 이렇게 피를 흘리는 거지? 게다가 상태도 위독해 보였다.소원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급히 몸을 낮춰 로브를 벗어 상처를 누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핏줄이 끊어지면서 피가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쏟아졌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크게 뜨였고 목에서 쉰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이미 성대가 베여 말을 할 수도 없었다.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소원이 다급하게 말했다.“말하지 마! 제발 말하려고 하지 마! 버텨야 해! 네가 내게 준 그 약, 그걸로 널 살릴 수 있어? 피를 멈출 수 있냐고?”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표정조차 지을 수 없었다.하지만 생명이 빠져나가는 건 본인도 알 수 있었다.그제야 후회가 밀려왔다.‘정말로 죽는 건가? 설마 내가 불사의 몸이라는 말이 거짓이었던 건가? 족장님이 날 속였던 건가?’믿고 싶지 않았다.아니,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그저 절망적으로 족장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흰머리의 노인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걸 본 순간, 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모든 걸 깨달았다.족장은 정말로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그것도 수년 동안을 말이다.오로지 족장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뿐,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속임수에 당해 목숨까지 잃게 된 것이다.“크... 억...!”피로 얼룩진 손이 족장을 가리키다 힘없이 떨어졌다.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소원은 급히 고개를 돌려 외쳤다.“그 약 어디 있
족장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다.지금 당장 이 요망한 여자를 없애야 했다.하지만 그 전에 겉치레라도 해야 했기에 족장은 횃불을 든 채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악령을 제거하고, 위대한 선을 쌓으리라!”그 아래 머리 없는 꼭두각시처럼 무녀들이 일제히 따라 외쳤다.족장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씩 올렸다.바로 이 효과를 원한 것이었다.이들이 있는 한, 무당가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사실 처음엔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자신의 뜻을 이어받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여겼기에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그러나 지금 보니 그녀는 신념이 부족했다그래서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그래, 오히려 잘됐어. 내가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고 말이야.’족장은 횃불을 내려 제단에 불을 붙이려 했다.그때였다.휙!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화살 하나가 족장의 어깨를 정확히 꿰뚫었다.핏방울이 로브를 적셨고 아래에 있던 무녀들은 일제히 술렁였다.놀란 족장이 비틀거리며 안색이 창백해질 틈도 없이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와 무릎을 관통했다.“아악!”족장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주변의 무녀들은 공포에 질려 허둥대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찾았다.고개를 돌린 순간, 모두가 숨을 삼켰다.나뭇가지 위에 선 한 노인이 손수 만든 활을 든 채 족장을 겨누고 있는 것이었다.뒤이어 거친 목소리가 숲을 가로질렀다.“이 늙은 악마야! 내 아들의 목숨을 내놔라!”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번째 화살이 날아갔다.이번에는 정확히 족장의 심장을 관통했다.족장의 손이 경련을 일으켰고 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그와 동시에 손에 쥔 횃불이 그녀의 로브 끝자락에 불을 붙였다.족장은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에 묶여 있던 약병을 풀어냈다.‘이 약만 있으면... 아직 살 수 있어...!’떨리는 손가락으로 힘겹게 병뚜껑을 열고 한 움큼 쏟아내 입에 털어 넣으려던 순간...퍽!공중에서 날아온 발차기로 인해 약병이 그대로 나뒹굴어 떨어졌다.
불사신, 영원한 젊음 따위는 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고 족장은 그야말로 야비한 사기꾼이었다. 불에 그을린 냄새가 족장 몸에서 뿜어져 나오자 나무에 달려 있던 독벌레가 놀랐는지 칵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껍데기가 부서지며 독벌레들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는데 숙주를 찾기 위해 사람의 기운을 따라 빠른 속도로 기어가기 시작했다.무녀들은 끔찍한 광경에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고 나뭇가지에 걸쳐있던 노인도 족장이 죽은 걸 보고 영혼을 뺏긴 사람처럼 중얼거렸다.“도망가. 다 도망가. 여긴 곳 잿더미가 될 거야...”허나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빠 그가 중얼거리는 걸 아무도 듣지 못했다. 노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껄껄 웃었다.“하하하하. 아들아, 봤니? 이 아비가 너 대신 복수했으니 이제 편히 눈 감아. 다음 생에 또 내 아들로 태어나야 한다. 그리해 줄 거지...”소원과 서현재는 아직 연꽃 제단에 묶여 있었다.서현재가 먹은 알약은 지금 그의 몸 안에서 다른 것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놀라운 효과가 있는 것 맞지만 바로 소화할 수는 없었기에 먹고 나서도 조용히 누워서 흡수해야 했다. 묶여 있는 상태라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없었던 서현재는 얼른 속박에서 벗어나 소원을 구하고 싶었지만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누나, 혹시 알아서 밧줄 끊어낼 수 있어요? 나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서현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소원도 노력하고 있었지만 철사로 묶여있어 벗어나려면 살가죽이 벗겨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는데 그건 상상만 해도 너무 아플 것 같았다. 그래도 서현재를 다독이기 위해 덤덤하게 말했다.“괜찮아. 할 수 있을 것 같아.”더 좋은 방법이 없었기에 소원은 말하자마자 눈을 질끈 감더니 이를 악물고 손을 힘껏 당겼다.우지직.뼈에서 살이 발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소원도 고통을 이기지 못해 비명을 질렀다.“아악...”고통스러운 소원의 절규에 서현재가 걱정하기 시작했다.“누나... 누나... 괜찮은 거예
“아악.”찢어질 듯한 절규가 무곡산을 가득 메웠다. 얼핏 들어도 비명을 지른 사람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서현재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누나...”상대가 겪고 있는 아픔을 조금도 나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든 다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큰 무력감에 휩싸인 서현재는 자기가 얼마나 쓸모없는지 다시 한번 자각했다.소원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지만 혀를 꽉 깨문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잠깐 진정한 소원은 이제 정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자각하고 살가죽이 벗겨져 피투성이인 손바닥으로 아직 묶여있는 다른 손을 풀었다. 움직일 때마다 아찔할 정도로 너무 아팠지만 소원은 비명을 질러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아무 소리 내도 내지 않았다.손을 푸는 데 성공한 소원은 숨돌릴 새도 없이 다치지 않은 손으로 묶였던 발을 풀기 시작했다. 그때 독벌레 한 마리가 소원의 손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맡고 소원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독벌레니 기어다니기만 하지 태어난 지 7일이 지나면 날 수 있었기에 1초 만에 바로 소원의 손바닥으로 날아와 피와 살을 갉아 먹으며 핏줄을 타고 소원의 몸에 파고들었을 것이다.소원은 자신을 향해 기어 오는 독벌레를 보며 당황한 나머지 끈조차 제대로 풀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묶인 발을 풀기도 전에 독벌레는 어느새 발치까지 기어 왔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원의 발을 타고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손으로 쳐내려 했지만 독벌레는 들어가지 못하는 구멍이 없었다. 특히 밖으로 드러난 피부를 파고드는데 능했다.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절망한 소원이 이제 하늘에 맡기려는데 발치로 날아든 화섭자가 몹쓸 짓을 하려는 독벌레를 잿가루로 만들어 버렸다.한시름 놓고 고개를 든 소원은 바람막이를 단단히 챙겨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바람막이로 중무장했다 해도 소원은 잘빠진 체격을 보고 그 사람이 육경한임을 한눈에 알아봤다.‘육경한이 여긴 어떻게 알고
이런 상황에서는 안는 것보다 업는 게 더 맞았다.“잠깐만.”소원이 육경한에게 일단 기다리라고 했다.“현재도 있잖아. 현재 구하는 거 좀 도와줘.”육경한이 서현재를 구해주고 싶을 리가 없는데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육경한이 들고 있는 단검이 철사도 그대로 끊어내는 걸 보고는 상처를 입은 자신보다는 더 빨리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일단 부탁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이제 이곳은 독벌레 대군으로 점령당한 상태였다. 독벌레가 있던 우리가 모두 터져버리는 바람에 독벌레가 많아지면서 상황이 점점 더 위험해졌다.사람의 힘으로도 독벌레를 전부 소멸할 수 없는데 화섭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화섭자는 그저 임시방편일 뿐 큰 작용을 하지 못했기에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소원이 나지막한 소리로 애원했다.“제발 좀 도와줘. 내가 빚진 걸로 할게.”소원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육경한의 도움을 받으려면 이렇게 약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갑기만 하던 육경한의 표정이 이 말에 살짝 풀리는가 싶더니 소원의 손에 화섭자를 한 웅큼 쥐여주며 말했다.“주변 잘 봐. 조심하고.”육경한이 아직 제단에 묶여있는 서현재에게로 다가갔다. 다져온 솜씨가 있어서 그런지 아주 손쉽고 빠르게 서현재를 묶고 있던 철사를 끊어냈다.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구해준 것에, 그리고 소원을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것에 다시 한번 놀라 일단 원망이든 원수를 다 내려놓고 진심으로 말했다.“고마워요.”아직 칼을 거두지 않은 육경한이 갑자기 서현재의 목에 칼을 겨누더니 낮지만 매서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내 와이프 넘볼 생각하지 마. 아니면 다음번에는 여기에 찔러넣을 거야.”서현재는 입술을 꼭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경이 온통 독벌레에 팔려있는 소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끝났어?”육경한이 서현재를 힐끔 쳐다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검을 거뒀다.“끝났어.”소
소원은 얼굴에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에 있었던 많은 일과 두 가문의 원한이 아마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해라도 과거의 상처는 사실이잖아.”그녀는 육경한이 조금이라도 변했다고 해서 과거의 고통을 잊을 수는 없었다. 자기 자신이 더욱 비참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그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육경한, 내가 쉽게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정말로 우리 두 사람을 위한 거라면 날 그만 보내주고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해. 지금처럼 나를 네 곁에 가두려 하지 말고.”소원이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널 이대로 놓아달라고?”육경한의 표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그다음엔? 네가 내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남자랑 같이 떠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그만해. 난 결혼할 마음 없어.”소원이 정중한 태도로 약속했다.그녀는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버리려 했던 물건이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육경한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내가 널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현재 두 사람 사이에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육경한은 소원이 아버지와 서현재의 일을 조사하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신의 곁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유진이 때문에 참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 무엇도 육경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려 했지만 소원이 서현재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순간부터 더는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계속 현실을 회피하기만 한다면 결국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소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육경한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바다처럼 깊고 어두웠다.“소원아, 앞으로 내 앞에서 그 남자 얘기 꺼내지 말고 그 남자랑 접촉하지도 마. 그렇지 않
육경한은 그날 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내 생각은 안 해? 서현재 편을 들 때마다 네가 나한테는 얼마나 함부로 대하는지 생각 안 해봤냐고.”침대 머리맡에 밀쳐진 채 그에게 잡힌 턱에 고통이 밀려왔다.“육경한, 이것 좀 놓고... 얘기해...”하지만 육경한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서현재를 언급할 때마다 온몸에 화가 솟구치며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남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육경한...”소원이 몸부림치며 해명했다.“그날 당신 경호원이 서현재를 갑자기 밀쳐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밀어낸 거야. 약을 먹어서 온몸에 힘이 없는 사람이 죽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맹세코 당신이 죽길 바란 건 아니야. 그 순간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야. 적어도 당신은 그 사람보다 몸이 멀쩡하니까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소원의 해명을 듣고 육경한의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들었지만 오랫동안 그녀에게 냉대받고, 몇 번이고 상처받은 마음이 한 번에 치유될 수는 없었다.육경한이 조롱하듯 말했다.“그 자식 때문에 나한테 거짓말까지 해?”“거짓말 아니야...”소원이 반박했다.“아니라고?” 육경한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내가 죽길 바라지 않았다지만 진아연이 준 미션은 수행하지 않았어?”소원은 당황했다.다 알고 있었구나.진아연과의 거래에 대해서 그는 이미 알고 있었고 진아연이 얼굴을 바꾸고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속으로 삭이며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소원은 소름이 돋았다. 상대는 여전히 모든 걸 손에 쥐고 들여다보는 육경한이었다.“아니야. 그 약을 당신에게 먹이지 않았어. 진아연이 준 약은 내가 침실 세 번째 서랍에 넣어뒀어. 가서 확인해 봐.”소원은 처음부터 육경한에게 약을 먹일 생각은 없었지만 순전히 진아연이라는 사람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진아연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다.진아연의 배후에 있는
육경한은 생각에 잠겼다.“죽이지 마.”소종은 깜짝 놀랐다.“형님, 그 자식까지 지켜줄 거예요?”“약속했어.” 육경한이 말하자 소종은 이를 악물었다.“죽이지만 않을게요.”사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서현재를 죽이고 싶었다. 사지만 발달하고 생각은 단순했던 그는 서현재가 죽으면 그 여자가 착해져서 형님을 더 이상 화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두 사람을 갈라놓는 건 서현재 한 명이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서현재보다 더 심각한 일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많은 오해도 섞여 있지만 오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에 균열을 자아내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육경한은 묵인했다. 그 또한 서현재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뿐 그가 전혀 다 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소종이 없었으면 팔을 잃은 사람은 그가 됐을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독한 그 여자와는 팔 하나로도 눈물 한 방울을 바꾸지 못할 거다.육경한은 냉정하게 말했다.“나도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만 했어.”소종은 금방 알아들었고 육경한의 의미심장한 말에 다시 살아갈 희망까지 타올랐다.“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빨리 나을 거예요.”그래서 서현재 그 자식을 혼내줄 거다.형님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면 아직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육경한은 소종의 눈에서 타오르는 야망을 보며 옳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종에게 서현재를 상대하게 시키면 그는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이 순간 그는 소종의 이기심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이 죽든 살든 상관이 없다는걸.살게 내버려두어도 반드시 고통을 동반한 삶이 지속되길....소원은 진료실에서 상처를 치료했고 상처를 감싼 뒤 간호사가 나가자 그녀도 나가려는데 육경한이 들어왔다.그의 깊은 시선이 만두처럼 감싸진 소원의 손으로 향하며 이렇게 물었다.“더 불편한 데는 없는지 이참에 검사해 봐.”“아니, 방금 다 검사했어.”
소종의 말은 독사처럼 치명적인 곳을 제대로 공격했다.“소 비서님!” 소원은 소종이 이처럼 도발할 줄은 몰랐다.“그만해!” 육경한이 갑자기 입을 열더니 피가 흐르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경호원에게 말했다.“데려가서 치료해.”소원은 할 말이 남았지만 육경한은 경호원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라며 명령했다.문이 닫히고 소종은 조금 전 막무가내로 몰아붙인 것과 달리 단번에 화가 사그라들었다.“네 뜻은 잘 알아.”육경한은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전 그냥 형님이 제대로 알았으면...”“알아. 나도 똑똑히 보고 있어. 그런데...”육경한은 쓴웃음을 지었다.“난 못 하겠어.”“형님,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만나는데 왜 꼭 그 여자한테 매달리는 거예요?”소종은 무척 이해되지 않았다..매달려도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저런 양심 없는 여자는 그럴 가치가 전혀 없었다.“소종, 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본 적 있어?” 육경한이 갑자기 물었다.“아니요.”사실이었다. 소종은 사랑에 마음을 돌린 적도 없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난 적도 없었다.눈이 높은 건 아니지만 천성적으로 거친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은 그의 돈을 바라거나 다른 목적이 있을 뿐, 그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진 않았다.예전에도 없었는데 지금은 장애인까지 됐으니 더 그럴 일이 없을 거다.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는 건 원하지도 않았다. 적이 그렇게 많은데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없고 아이가 생기면 약점이 되는 데 그건 원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혈혈단신으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게 제일 편하고 자유로웠다.육경한이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만나면 알게 될 거야. 호랑이가 있다는 걸 알고도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뛰어드는걸. 앞에 큰길이 있는데도 굳이 진흙탕으로 발을 내딛는걸. 넌 이번 생에 생사를 함께할 형제고 그 여자는 내가 평생 놓지 못할 사람이야.”육경한은 한 마디로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다.소종은 자신이 어
소원은 소종의 불똥이 그녀에게까지 튈 줄은 몰랐다. 하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소종의 눈에 그녀가 육경한을 먼저 구하지 않은 건 잘못으로 보일 수 있었다.소종이 그녀를 비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터무니없는 질책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녀나 서현재의 목숨은 아무렇게나 버려도 될 정도로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육경한의 표정이 살벌해지며 입술을 다물자 소종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전 이 팔 따위 상관없어요. 형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명예로운 일이죠. 절 구해준 날부터 제 목숨은 형님의 것이라고 말했지만 형님께 마음도 없는 여자 때문에 형님이 희생할 필요는 없어요.”소종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육경한의 마음에 꽂히는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똑똑한 그가 소원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리가 있을까.그러나 한번 잃었다가 다시 찾은 사람이라 눈앞에 깊은 심연이 놓여 있어도 되돌아갈 수가 없었고 그는 지금 도박꾼처럼 백만 분의 1인 가능성에 베팅하고 있었다.“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결정해. 이 팔은 내가 빚진 걸로 해. 네가 뭘 원하든 다 들어줄게.”소종은 화를 낼 힘도 없는지 암울한 표정으로 말했다.“형님, 저 여자는 건드리지 않겠지만 서현재는 팔 하나를 내놔야 해요.”소종의 표정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 소원이 정신을 차리고 매섭게 쏘아붙였다.“따지고 싶으면 나한테 따지면 되지 서현재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이 모든 사건에서 제일 억울한 건 서현재였다. 그때 그녀가 육경한을 살렸으면 서현재는 지금 온전한 시신조차 없이 나무에 깔려 흙더미가 되었을 거다.나무가 무너진 것은 재난이었고 육경한 일행이 그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그런 참사를 겪지 않아도 됐을 거다.마지막에 쏜 화살 때문에 그들이 알아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해도 육경한이 그들을 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이제 소종이 그녀 때문에 팔을 잃은 것이라 탓해도 인정하겠지만 그 책임을 서현재에게 돌리는 건 다소 억지였다.그녀가 사람을
경호원이 소종을 놓아주려던 찰나에 그가 던진 찻잔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경호원은 그가 자신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서 다시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모두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차갑고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손 놔!”육경한이 걸어 들어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경호원들은 소종을 힐끗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형님, 저 좀 내버려두세요.” 소종은 조금 전처럼 미쳐 날뛰지 않았고 눈빛도 차츰 차분해졌지만 아직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난 살고 싶지 않아요. 정말 살고 싶지 않아요.” 산속에서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는 육경한이 그를 버리지도,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그러나 이제 완전히 깨어나 불구가 된 몸을 보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죽으려는 생각을 했지만 칼도 제대로 잡을 수 없다는 게 그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수년 동안 그는 국내외에 많은 적을 만들었는데 힘없이 적에게 잡혀 고문당해 죽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단번에 끝내면 남에게 모욕을 당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그는 체념한 모습으로 말했다.“형님, 저를 보내주세요. 평생 저를 지켜줄 수는 없잖아요.”소종의 뜻은 분명했다. 잠시는 가능해도 평생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며 이번에 죽지 못하면 또 시도하겠다는 말이다.언제든 죽을 기회는 있다.소종이 정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한쪽 팔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거다.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팔이 없어도 목숨은 온전하지 않나?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 세상 저마다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오랫동안 무력을 사용했던 소종에게 팔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잃는 것과 같았고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육경한은 자리에 서서 엉망이 된 소
“필요 없어요.” 소원이 손을 흔들었다.이 시간에 육경한은 분명 병원에 있거나 일하고 있을 텐데 전화해도 무슨 말을 하겠나.그가 이미 마음속으로 확정 지은 일이면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식사를 마친 후 잠시 유진과 놀아주다가 병원으로 향했다.아침에 그녀는 서현재로부터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현재 일행이 돌아왔고 육경한은 약속대로 서현재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종합검진을 위해 병원에 간 서현재는 소원에게도 언젠가 종합검진을 받으라고 말했다.그 약의 성분을 알 수 없어 혹시나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병원에 도착한 소원은 먼저 검진받으러 갔지만 결과는 며칠이 지나야 나온다고 하니 소종을 보러 갔다.병동 입구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소원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말했다.“사모님, 소 비서님 보러 오셨나요?”“네.” 소원이 물었다.“소 비서님은 쉬고 계세요?”“일어났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경호원이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려고 하자 소원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니요. 나 혼자 들어갈게요.”소원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소종이 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막 가려는데 갑자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깜짝 놀란 소원이 문을 확 열고 들어갔더니 온몸이 바닥에 쓰러진 채 무언가를 집으려고 몸부림치는 소종의 모습이 보였다.예리한 눈썰미로 소종이 집어 든 것이 단검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그는 망설임 없이 칼로 목을 그었다.그가 죽으려고 한다!소원이 달려들어 칼을 빼앗으려 했지만 소종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팔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년의 무공이 남아 있었고 여자인 소원은 힘으로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두 사람의 몸싸움 과정에서 칼날이 소원의 손에 깊은 상처를 내고 피가 솟구치듯 흘러내렸다.소종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젠장, 죽고 싶어요?”소원의 머릿속에는 소종이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뭐라 해도 절대
전부 다 봤지만 유독 지금처럼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차가움이 배어 있을 정도로 싸늘한 모습은 처음이다.소종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는 안다. 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후 소종의 존재는 그에게 가족 못지않았다.그의 팔을 끊어낸 것에 그녀의 책임도 없지는 않았다.만약 제때 육경한에게 알렸다면 육경한의 기량으로 피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그녀의 눈에는 경호원들에게 뿌리쳐지는 서현재만 보였을 뿐이었다.서현재는 약을 먹어 온몸에 힘이 없던 터라 죽었을 게 분명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그런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죄악처럼 느껴졌다.소종이 아직 살아있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죄책감에 시달리며 힘들었을 거다.이 침묵은 병원에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의사는 소종의 상태를 살핀 후 고개를 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육경한 씨,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상처가 꽤 심각합니다. 그래도 제때 팔을 잘라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을 겁니다.”“꼭 살리겠다고 약속하세요.”육경한은 굳은 표정으로 이 말만 내뱉었고 그 후 수술실 문은 몇 시간 동안 굳게 닫혀 있었다.마침내 소원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수술이 끝났다는 의사의 말이 들리며 소종이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게 된 후에야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그 후 소종은 중환자실로 옮겨져 한동안 상태를 지켜봐야 했다.육경한은 사라지고 그를 따라다니던 다른 비서가 와서 소원에게 돌아가라고 말했다.육경한의 지시였을 거다. 깨어난 소종이 제일 만나길 원치 않는 사람이 그녀일 테니까.소원은 별장으로 돌아가 뜨거운 물로 목욕하며 더러움을 씻어낸 뒤 유진을 만나러 갔다.밤에 유진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후 그녀는 푸른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무술곡에서 나온 그녀는 족장이 바닥에 놓고 간 도자기 병을 집어 들었다.족장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여러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떨어진 것 중에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서현재에게 먹이던 것을 제외하고 재빨리 한 병을 집
마침내 경호원이 돌아오고 헬기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자 소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헬기에 연락했으니 이제 소종도 구할 수 있다.헬기는 도킹할 수 없어 구조 로프와 매트를 내려야 했고 경호원이 소종을 구조 매트에 올려놓고 묶은 다음 로프를 조심스럽게 감았다.헬기에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 경호원 3명이 남아서 다음 헬기를 기다려야 했고 소원도 그들과 같이 탈 생각이었다.그런데 육경한이 헬기에 타기 전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말했다.“뭘 기다리는 거야?”“...”소원은 당황했다.“따라와.” 남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원은 사실 서현재를 이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독벌레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빠져나간 게 없다고 함부로 장담할 수는 없었다.경호원이 세 명이나 있었지만 그들 중 한 명은 서현재를 갑자기 떼어놓았기에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손을 떼지 않았으면 소원도 육경한에게 알려줄 시간이 있었을 텐데...하지만 이건 전부 일이 벌어진 뒷이야기고 육경한이 한번 마음속에 생각을 품으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모두 변명으로 듣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육경한은 냉정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오늘 밤 여기서 짐승들 먹이가 되고 싶지 않으면 따라와.”이렇게 말한 뒤 그는 소원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밧줄을 잡은 채 위로 올라갔다.소원은 남자의 강압적인 말을 알아듣고 입술을 꽉 깨문 채 여린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육경한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옆에 있던 서현재는 자신이 이곳에서 위험에 처할까 봐 소원이 망설인다는 걸 알고 나지막이 말했다.“누나, 난 괜찮으니까 육경한 씨 따라가요. 전 다음 헬기 타면 돼요.”서현재는 육경한의 위협이 두렵다기보다 소원이 곁에 있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곳은 깊은 산이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기에 최대한 빨리 나가는 게 좋았다.소원은 자신이 이곳에 있기를 고집하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