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것에 고집을 부리는 두 사람을 보며 소원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데 유치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육경한, 못 업겠다는 거지? 그러면 내가 업을게.”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원은 다치는 바람에 서현재가 아니라 유진이어도 업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육경한은 내키지 않았지만 소원이 쪼그리는 걸 보고 차가운 표정으로 몸을 숙였다.“됐어. 내가 해.”서현재가 그래도 얼굴을 굳힌 채 업히려 하지 않자 소원은 할 수 없이 서현재의 손을 육경한의 등에 올려놓았다. 그제야 서현재도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육경한의 목을 감쌌다.소원은 어정쩡하게 업힌 서현재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남자가 돼서 꽁하게 왜 그래.”서현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적 없어요.”서현재는 꽁한 게 아니라 그저 육경한에게 빚지는 게 싫을 뿐이었다. 이렇게 나가다가 소원과 관련된 일에서 입지가 좁아질까 봐 걱정이었다.오히려 육경한은 소원의 말에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이렇게 말했다.“꽁한 거 맞아.”188은 되는 키에 꽁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서현재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하얘졌다.두 사람의 말장난에 맞장구를 쳐줄 생각이 없는 소원이 차가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기나 해.”얌전해진 육경한이 소종과 다른 세 사람에게 말했다.“얼른 가자.”그때 소원이 잠깐 사이에 독벌레에 의해 잠식된 노인을 발견했다. 틈도 없이 노인의 몸에 다닥다닥 매달린 독벌레가 정말 너무 역겹고 섬뜩했다. 저 정도면 허준이 와도 살려내지 못할 것 같았다.소원은 함부로 동정심을 내보일 만큼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 온전히 노인의 선택이었다. 살고 싶다면 나무에 잘만 숨어있어도 숨 돌릴 시간은 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복수가 끝나기 살아갈 동력을 잃은 것 같았다.하늘이 점점 희끗해지는 걸 봐서는 동이 터오고 있었다.소종과 다른 세 사람이 육경한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 바닥에 누워있던 노인이 갑자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아찔하게 높은 나무 한 그루가 기우뚱하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독벌레가 뿌리를 전부 갉아 먹은 데다 산불까지 들이닥치니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나무가 넘어진 방향은 육경한과 보디가드의 부축을 받고 서 있는 서현재 쪽이었다. 빠른 속도로 상황을 읽어낸 보디가드는 얼른 서현재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소원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움직였다.“조심해.”말이 끝나기 바쁘게 소원은 서현재를 당기며 옆으로 굴러가는데 가슴이 철렁할 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소종이 똑같이 위험에 처한 육경한을 덮치자마자 나무가 그대로 무너졌고 바닥에는 큰 구덩이가 생겼다. 제때 피하지 못했다면 나무 아래 서 있던 사람은 그래도 뭉개졌을지 모른다.소원이 한시름 놓기도 전에 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보디가드 셋이 우르르 몰려갔다.“소 비서님, 소 비서님...”소종이 육경한을 밀어내느라 나무에 오른쪽 팔을 부딪친 것이다. 건장한 체구를 가진 소종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곧 죽을 것처럼 허약해 보였다. 깜짝 놀란 소원이 고개를 드는데 육경한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제야 소원은 나무 아래 육경한도 서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소종이 아니었다면 쓰러진 나무에 부딪힌 건 어쩌면 육경한이었을지도 모른다.사실 소원도 육경한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육경한은 솜씨가 좋았기에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상황에서 보디가드에게 버림받은 서현재를 구하지 않으면 납작없이 깔려 죽을 거라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서현재를 잡고 옆으로 구른 것이었다.소원은 실망이 잔뜩 묻어나는 육경한의 눈빛에 설명을 덧붙이려다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소종의 상처를 살피는 육경한이 어쩌면 듣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심하게 다친 소종은 지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팔과 어깨를 연결한 부분은 이미 뼈도 살도 없었고 얇은 살가죽으로 간신히 붙어있었다. 몇 명이 함께 그 나무를 옮기려 했지만 몇 톤이나 되는
서현재가 말을 이어갔다.“헬기가 온다고 해도 큰 나무를 옮길 방법이 없고 어차피 팔을 끊어내야 하는 데 차라리 지금 하는 게 더 나을 거예요.”그는 육경한의 표정을 무시한 채 말했다.“오래 눌리면 가망이 없으니 그쪽이 해요. 내가 알려줄게요.”손과 발에 힘이 풀린 게 아니었으면 직접 했을 것이다.육경한은 의사가 아니었고 절단 수술은 조금만 어긋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기에 결코 쉬운 수술은 아니었다.육경한은 점점 하얗게 변해가는 소종의 얼굴과 창백한 입술을 바라보며 잠시 고심한 끝에 단검을 꺼냈다.서현재는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알코올을 꺼내 칼날에 붓게 한 다음 천 조각을 찢으라고 지시했다.“팔을 꽉 묶어요.”경호원이 손을 대려는 찰나 육경한이 직접 건네받아 소종의 팔을 단단히 묶은 후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오랜 세월 소종은 그에게 가족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직접 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단단히 묶은 후 서현재의 팔이 불편해 보여 소원은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를 부축해 더 잘 알려줄 수 있도록 앞으로 다가서는데 그 모습이 어떤 남자의 눈엔 무척 거슬렸다.마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 커플이고 자신은 이방인이 된 것 같았다.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소원은 진심으로 돕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조금 전 일에 죄책감이 들었지만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두 사람을 동시에 밀어낼 방법이 없었기에 한 사람을 선택한 것이고 지금 서현재의 상태로는 조금 전 그녀가 나서지 않았으면 목숨을 잃을 게 분명했다.반면 육경한은 적어도 손과 발이 민첩해서 나무에 눌리더라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소종처럼 팔이나 다리가 부러질 수는 있겠지...만약 그렇게 되면 소원은 평생 육경한을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서현재는 힘겹게 손을 들어 위치를 가리켰다.“여기요.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해요.”육경한은 한 번 쳐다보더니 그래도 칼끝에 피를 묻혀본 사람이라 그런지 이
말을 마친 그에게 고통이 밀려왔고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잠시 기절했던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줄 알았다.소종의 말에 소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경한을 끌어당기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서현재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원이 그런 그를 보고는 팔을 누르며 말렸다.육경한은 소종의 말에 개의치 않은 듯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다행히 소종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정신이 팔렸고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감각도 없이 마비된 자기 팔을 바라보며 순간 당황했다.“나... 왜 이래요?”“팔이 눌려서 괴사했어.” 육경한은 차분하게 알려주었다.“절단해야 해.”“...”주위에 적막감이 감돌았다.핏기 없는 소종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속으로는 분명 괴로울 거다.무려 오른손인데 왼손잡이도 아닌 소종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소종의 긴 침묵을 마주한 육경한이 침묵을 깨기 위해 먼저 말을 꺼냈다.“여기 마취제가 없으니까 조금만 참아.”육경한은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침착했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이건 장난이 아니었고 소종을 무척 소중히 여겼기에 그가 죽는 걸 원치 않는 거다.“알겠어요.” 소종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급박한 상황에서 1초라도 지체되면 그만큼 위험 요소가 많아진다.하지만...소종은 육경한 앞에서 팔이 없을 바엔 차라리 죽겠다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이건 남자의 자존심이고 신체 건강한 남자로서 팔이 하나뿐인 장애인이 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육경한이 살려준 목숨이니 그가 죽으라고 하지 않는 이상 죽을 수는 없었다.“형님, 시작하시죠.”육경한은 소종에게 마른 수건을 건네 입에 물게 하고는 서현재가 방금 말했던 그 자리를 찾기 위해 더듬었다. 위치를 찾았을 땐 신중하게 말하며 서현재를 힐끗 보았다.그가 여기에 남아있는 유일한 의사가 아니었으면 그에게 묻지도 않았을 거다.서현재는 아래를 내려
마침내 경호원이 돌아오고 헬기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자 소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헬기에 연락했으니 이제 소종도 구할 수 있다.헬기는 도킹할 수 없어 구조 로프와 매트를 내려야 했고 경호원이 소종을 구조 매트에 올려놓고 묶은 다음 로프를 조심스럽게 감았다.헬기에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 경호원 3명이 남아서 다음 헬기를 기다려야 했고 소원도 그들과 같이 탈 생각이었다.그런데 육경한이 헬기에 타기 전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말했다.“뭘 기다리는 거야?”“...”소원은 당황했다.“따라와.” 남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원은 사실 서현재를 이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독벌레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빠져나간 게 없다고 함부로 장담할 수는 없었다.경호원이 세 명이나 있었지만 그들 중 한 명은 서현재를 갑자기 떼어놓았기에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손을 떼지 않았으면 소원도 육경한에게 알려줄 시간이 있었을 텐데...하지만 이건 전부 일이 벌어진 뒷이야기고 육경한이 한번 마음속에 생각을 품으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모두 변명으로 듣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육경한은 냉정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오늘 밤 여기서 짐승들 먹이가 되고 싶지 않으면 따라와.”이렇게 말한 뒤 그는 소원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밧줄을 잡은 채 위로 올라갔다.소원은 남자의 강압적인 말을 알아듣고 입술을 꽉 깨문 채 여린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육경한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옆에 있던 서현재는 자신이 이곳에서 위험에 처할까 봐 소원이 망설인다는 걸 알고 나지막이 말했다.“누나, 난 괜찮으니까 육경한 씨 따라가요. 전 다음 헬기 타면 돼요.”서현재는 육경한의 위협이 두렵다기보다 소원이 곁에 있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곳은 깊은 산이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기에 최대한 빨리 나가는 게 좋았다.소원은 자신이 이곳에 있기를 고집하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고
전부 다 봤지만 유독 지금처럼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차가움이 배어 있을 정도로 싸늘한 모습은 처음이다.소종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는 안다. 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후 소종의 존재는 그에게 가족 못지않았다.그의 팔을 끊어낸 것에 그녀의 책임도 없지는 않았다.만약 제때 육경한에게 알렸다면 육경한의 기량으로 피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그녀의 눈에는 경호원들에게 뿌리쳐지는 서현재만 보였을 뿐이었다.서현재는 약을 먹어 온몸에 힘이 없던 터라 죽었을 게 분명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그런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죄악처럼 느껴졌다.소종이 아직 살아있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죄책감에 시달리며 힘들었을 거다.이 침묵은 병원에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의사는 소종의 상태를 살핀 후 고개를 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육경한 씨,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상처가 꽤 심각합니다. 그래도 제때 팔을 잘라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을 겁니다.”“꼭 살리겠다고 약속하세요.”육경한은 굳은 표정으로 이 말만 내뱉었고 그 후 수술실 문은 몇 시간 동안 굳게 닫혀 있었다.마침내 소원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수술이 끝났다는 의사의 말이 들리며 소종이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게 된 후에야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그 후 소종은 중환자실로 옮겨져 한동안 상태를 지켜봐야 했다.육경한은 사라지고 그를 따라다니던 다른 비서가 와서 소원에게 돌아가라고 말했다.육경한의 지시였을 거다. 깨어난 소종이 제일 만나길 원치 않는 사람이 그녀일 테니까.소원은 별장으로 돌아가 뜨거운 물로 목욕하며 더러움을 씻어낸 뒤 유진을 만나러 갔다.밤에 유진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후 그녀는 푸른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무술곡에서 나온 그녀는 족장이 바닥에 놓고 간 도자기 병을 집어 들었다.족장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여러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떨어진 것 중에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서현재에게 먹이던 것을 제외하고 재빨리 한 병을 집
“필요 없어요.” 소원이 손을 흔들었다.이 시간에 육경한은 분명 병원에 있거나 일하고 있을 텐데 전화해도 무슨 말을 하겠나.그가 이미 마음속으로 확정 지은 일이면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식사를 마친 후 잠시 유진과 놀아주다가 병원으로 향했다.아침에 그녀는 서현재로부터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현재 일행이 돌아왔고 육경한은 약속대로 서현재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종합검진을 위해 병원에 간 서현재는 소원에게도 언젠가 종합검진을 받으라고 말했다.그 약의 성분을 알 수 없어 혹시나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병원에 도착한 소원은 먼저 검진받으러 갔지만 결과는 며칠이 지나야 나온다고 하니 소종을 보러 갔다.병동 입구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소원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말했다.“사모님, 소 비서님 보러 오셨나요?”“네.” 소원이 물었다.“소 비서님은 쉬고 계세요?”“일어났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경호원이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려고 하자 소원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니요. 나 혼자 들어갈게요.”소원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소종이 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막 가려는데 갑자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깜짝 놀란 소원이 문을 확 열고 들어갔더니 온몸이 바닥에 쓰러진 채 무언가를 집으려고 몸부림치는 소종의 모습이 보였다.예리한 눈썰미로 소종이 집어 든 것이 단검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그는 망설임 없이 칼로 목을 그었다.그가 죽으려고 한다!소원이 달려들어 칼을 빼앗으려 했지만 소종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팔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년의 무공이 남아 있었고 여자인 소원은 힘으로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두 사람의 몸싸움 과정에서 칼날이 소원의 손에 깊은 상처를 내고 피가 솟구치듯 흘러내렸다.소종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젠장, 죽고 싶어요?”소원의 머릿속에는 소종이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뭐라 해도 절대
경호원이 소종을 놓아주려던 찰나에 그가 던진 찻잔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경호원은 그가 자신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서 다시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모두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차갑고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손 놔!”육경한이 걸어 들어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경호원들은 소종을 힐끗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형님, 저 좀 내버려두세요.” 소종은 조금 전처럼 미쳐 날뛰지 않았고 눈빛도 차츰 차분해졌지만 아직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난 살고 싶지 않아요. 정말 살고 싶지 않아요.” 산속에서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는 육경한이 그를 버리지도,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그러나 이제 완전히 깨어나 불구가 된 몸을 보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죽으려는 생각을 했지만 칼도 제대로 잡을 수 없다는 게 그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수년 동안 그는 국내외에 많은 적을 만들었는데 힘없이 적에게 잡혀 고문당해 죽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단번에 끝내면 남에게 모욕을 당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그는 체념한 모습으로 말했다.“형님, 저를 보내주세요. 평생 저를 지켜줄 수는 없잖아요.”소종의 뜻은 분명했다. 잠시는 가능해도 평생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며 이번에 죽지 못하면 또 시도하겠다는 말이다.언제든 죽을 기회는 있다.소종이 정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한쪽 팔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거다.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팔이 없어도 목숨은 온전하지 않나?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 세상 저마다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오랫동안 무력을 사용했던 소종에게 팔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잃는 것과 같았고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육경한은 자리에 서서 엉망이 된 소
소원은 육경한의 새로운 비서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소종 씨는 어떻게 됐나요?”비서는 놀란 듯 두 눈이 동그래진 채 소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모르셨나요? 선배님은 자살미수로 인한 뇌 산소 부족으로 지금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그 말을 들은 소원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믿기 어려운 사실에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소종 씨가 또 자살을 시도했다고? 이럴 수가? 소종 씨는 이미 회복되었다고 들었는데, 지난번 자살 시도도 육경한의 위로 덕분에 괜찮아졌는데, 무엇 때문에 또 자살을 시도해서 이런 심각한 상황이 된 걸까?’“소종 씨가 또 자살을 시도한 건가요?”소원은 그 소식이 믿기지 않아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비서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선배님이 약을 먹었대요. 낮에는 괜찮았는데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선택을 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2분만 더 늦었으면 살아날 희망이 없었다고 하셨어요.”소원의 머릿속은 얼어붙은 것처럼 멍해졌다.그녀는 이제야 육경한이 서현재를 그렇게 미워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모든 게 설명됐다. 육경한이 소중한 가족으로 여겼던 소종이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하며 생을 마감하려 하니 육경한은 끝없는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소종은 육경한을 구하려다가 절단 수술을 받았고 그 때문에 생의 희망을 잃고 자살을 시도했다.소종의 일이 이렇게 쉽게 지나갈 리 없다는 것을 눈치를 챈 소원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육경한이 오늘처럼 미친 짓을 할 것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며 내버려 두면 더 심각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이 폭풍은 오래 지속할 것이다.소원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었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소원은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결국 육경한의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넌 알고 있을 거야.
유리문 밖, 서현재는 그 조폭 같은 사람들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 사람들은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마치 서현재를 때려죽이려는 것처럼 잔인하게 굴었다. 서현재도 고집이 세서 매번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체력이 이미 바닥났는데도 그는 일어나려고 애를 쓰며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소원은 서현재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소리쳤다.“육경한, 넌 이미 날 의심하고 있잖아. 내가 뭐라 해도 넌 날 믿을 생각 없잖아.”“그러니까 보여달라고. 내가 널 믿을 수 있게. 넌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잖아.”육경한이 단호하게 말했다.“몰라... 난 모르겠어...”소원은 치밀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희망이 무너지는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분명히 일이 좋은 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희 와 비가 이렇게 반복되면서 소원은 완전히 기운을 잃었다. 그녀는 자포자기하며 말했다.“차라리 날 죽여. 육경한, 이렇게 나를 괴롭히지 말고 차라리 나를 죽여줘...”“죽고 싶어?”육경한은 아무런 감정 없이 차갑게 말했다. “그럼 넌 누굴 함께 데려가고 싶어?”그의 말에 놀란 소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울음을 멈췄다.“첫 번째는 서현재, 그러면 두 번째는 누구지? 네가 누구와 접촉했었지? 생각해보자.”육경한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아연이? 아니면 그 여경 강민혜 씨? 아니면 숙 매니저?”육경한이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자 소원은 잔뜩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소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물었다.“이게 민혜 씨와 영숙 언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진아연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죽어도 싼 사람이었지만 민혜 씨와 영숙 언니는 아니잖아. 이게 그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육경한은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그 사람들과 상관없다는 걸 알았다면 나한테 죽여 달라고 말하지 말았어
육경한이 원했던 대답은 서현재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서현재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틀린 대답을 했기 때문에 서현재가 다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소원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듯 무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점점 육경한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소원이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억지로 곁에 두고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고 그녀가 아끼는 사람을 괴롭히는 이런 악순환이 정말로 그를 기쁘게 할까?말을 마친 육경한은 소원을 잡아당기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어디로 가려는 거야?”소원은 남자의 손에 끌려 휘청거리며 따라갔다.육경한은 그녀를 연회장 뒷문으로 끌고 갔다. 뒷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두꺼운 유리 너머로 밖에서 서현재를 구타하는 여러 사람이 눈에 띄었다.조폭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방금 육경한에게 아부하던 남자였다. 이 사람들도 그 남자가 불러온 모양이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들에게 서현재를 죽도록 때리라고 명령했다.“그만해!”소원은 서현재를 구하려고 달려들었지만 굳게 잠긴 유리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유리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그만하라고! 당장 그만해! 이건 살인이라고! 이 나쁜 놈들아!”소원이 아무리 소리쳐도 밖의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심하게 때렸다.서현재는 원래 몇몇 사람 정도는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지만 여덟 명이 함께 덤비는 바람에 한 번 쓰러지면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사이에서 다시 일어날 방법이 없었다.소원은 피투성이가 된 서현재의 모습을 보며 분노가 극에 달했다.그녀는 앞문으로 돌아가서 서현재를 구하려고 했지만 육경한이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그녀를 유리문에 밀어붙였다.소원은 머리를 유리에 기댄 채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육경한은 그녀의 틀린 대답 때문에 더 비참해진 서현재의 운명을 지켜보게 하려 했다.소원은 그에게 서현재를 풀어달라고 애원해서는 안
이때 육경한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괜찮아요. 저도 이 일이 효도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서현재 씨는 서씨 가문의 사람이니 이런 행동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그는 소원을 바라보며 마치 농담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서현재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거야?”소원은 육경한의 말에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육경한의 속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평온해 보이는 가면 뒤에 이미 분노가 쌓여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옆에 있던 남자는 할 말을 잃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육경한의 여자 친구는 서현재의 편을 들고 있었지만 육경한은 아니었다.두 사람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남자는 더는 두 사람의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육경한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그곳을 떠났다 하지만 서현재 옆을 지나갈 때 일부러 팔꿈치로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 잔을 부딪치고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눈이 먼 거예요? 와인이 제 옷에 묻었잖아요.”서현재는 갑자기 나타난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상대방이 자신의 잔을 부딪쳤던 것이라 도둑이 도둑 잡으라고 소리치는 격이다.그는 조금이라도 화난 기색 없이 차분하게 말했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쪽이 저를 부딪친 거예요.”남자는 일부러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뭐라고요? 제가 부딪쳤다고? 누가 증명해 줄 수 있나요?”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아무도 서현재를 도와주려 나서지 않았다. 이 상황을 본 남자는 큰소리로 웃더니 웨이터 손에 들려 있던 와인 한 병을 가져와 서현재의 머리 위로 쏟아부은 뒤 비웃으며 말했다.“저희는 그쪽 같은 배은망덕한 사람을 환영하지 않아요. 알아서 꼬리 내리고 빨리 이곳에서 나가주세요!”그는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서현재를 한바탕 모욕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주변에서는 불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구경꾼들이 우르
이때 서현재의 아내 육연주도 이혼을 요구했고 이는 육씨 가문이 서현재의 적대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이렇게 된 이상 서울 전체가 어느 편에 설지 뻔한 일이었다.육연주의 삼촌인 육경한이 서현재에 대해 언급한 것은 분명히 서현재를 마음에 들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재빨리 상황을 눈치채고 침을 뱉으며 경멸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저런 비천한 사생아에게 그럴 자격이 있겠나요?”욕을 하고 나서야 육경한이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척 연기하며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제 말은 대표님에 비하면 저 녀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냥 발로 짓밟아 죽일 수 있는 작은 개미일 뿐이죠.”육경한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는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죠. 어쩌면 서현재 씨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을지도 몰라요.”“그럴 리가.”남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비록 늙은이를 무너뜨리긴 했지만 결국엔 공매 당한 회사만 남았잖아요. 들리는 얘기로는 집까지 모두 담보로 내주었다고 해요. 그런데 서씨 가문을 다시 일으킬 생각을 한다니. 그건 꿈꾸는 거랑 마찬가지죠!”소원은 그저 열흘 만에 서씨가문에 이런 큰 변고가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서진태는 죽었지만 그가 생전에 남긴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분명히 악독하고 나쁜 사람은 서진태였는데 바깥세상의 사람들은 왜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서진태는 자신의 혈육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서현재를 죽이려 했는데 어떻게 이런 가증스러운 사람이 자애로운 노인으로 포장되고 서현재는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서진태가 죽었으니 그가 여론을 조작할 수는 없었기에 여론을 조작한 사람은 서씨 가문이 사람이거나 서현재를 싫어하는 사람일 것이 틀림없다.소원 옆에 있는 이 사람도 그중 하나일 수 있었다.그녀는 소종이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확신할 수 없었다.“저는 이런 배은망덕한 쓰레기를 제일 싫어해요.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자업자득에 불과하죠
육경한의 여자 친구에게 이런 선물을 하는 건 배경 조사를 거쳐 소원이 그냥 평범한 여자 친구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이 미래에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헛수고가 될 테니까.소원이 거절하려고 입을 열려던 찰나 육경한이 먼저 말을 했다.“비취 좋아해?”육경한이 소원에게 물었다.남자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즉시 칭찬을 퍼부었다.“아가씨, 저희 가게의 그 비취는 천 년에 한번 나올법한 아주 진귀한 것인데 고급스러운 제왕록이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져요. 이런 비취는 여성분들에게 정말 좋죠.”소원은 육경한이 분명 남자의 의도를 알고 있었고 그와 일을 함께할 마음으로 이 말을 꺼낸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거절하려 입을 열었다.“감사하지만 저는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그녀의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오늘 밤 소원은 반짝이는 아름다운 드레스 외에 어떤 보석도 착용하지 않았고 머리도 간단히 묶었으며 머리 액세서리도 없었다.아주 간단한 스타일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꾸밈없는 모습이 그녀를 더욱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남자는 소원이 이렇게 눈치 없이 행동할 줄은 몰랐기에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분명히 육경한은 그 비취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소원이 거절하자 그는 불만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가씨, 먼저 한번 보시는 게 어때요? 그래도 마음에 안 드시면 그때 다시 돌려주셔도 돼요.”육경한의 사람에게 전달만 할 수 있다면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와 엮일 수 있었기에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소원은 계속해서 거절했다.“죄송하지만 전 정말 보석을 착용하지 않아요.”더 설득해 보려던 남자가 뭐라 말하기 전에 육경한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이분이 좋아하지 않으면 억지로 가져올 필요도 없겠네요. 다른 사람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아마 누군가는 좋아할지도 모르겠네요.”남자의 표정이 많이 굳어졌다.‘다른 사람이 좋아할
육연주는 겉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소원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가 나쁜 바보였기에 소원을 대처할 방법은 방민아에게 물어봐야 했다.이지애는 자신의 딸이 방민아에게 한번 당한 적이 있음에도 방민아를 다시 찾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정말 방민아 때문에 죽지 않으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다른 한편,육씨 가문 별장.소원은 육경한이 그날 밤 이후 며칠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을 줄 몰랐다. 날짜를 세어보니 열흘 정도 돌아오지 않았다.이건 정말 희한한 일이었다.비록 그녀도 육경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오지 않아 마음이 불안했다. 그뿐만 아니라 외부의 소식을 전혀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불안했다.그녀는 별장에서 나갈 수 없었지만 유진이와는 만날 수 있었기에 두 사람은 집에서 매일 바둑을 두고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생활을 보냈다.사실 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언제까지 가둘 생각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매일 매일을 초조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었다.이렇게 계속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으니 그녀는 반드시 외부와 연락할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그녀가 한창 고민에 빠져있을 때 육경한에게서 새로운 비서를 통해 소식이 전해졌다.“소원 씨, 대표님께서 준비를 마친 뒤 함께 나가서 식사하자고 하셨습니다.”비서는 은색 보석이 달린 피시테일 드레스를 소원에게 전해주었다. 소원은 이렇게 눈에 띄는 드레스를 입고 싶지 않았지만 비서가 고집스럽게 말했다.“대표님께서 만약 입지 않으시면 나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소원은 나갈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드레스를 갈아입었다.드레스는 허리를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이었기에 섹시하면서도 요염한 느낌을 주었고 소원의 외모와도 잘 어울렸다.육경한이 갑자기 그녀더러 꾸미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소원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식사 장소로 향했다.목적지에 도착한 그녀는 눈앞의 연회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육경한이 그녀를 사람 많은
육연주는 방민아와 거의 같은 시각에 풀려났다.이지애가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그녀는 육연주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연주야, 고생했어. 너무 많이 야윈 거 아니야? 걱정돼서 잠도 잘 못 잤어.”“엄마...”육연주는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보낸 보름 동안,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처음에 아가씨 행세를 했다가 같은 방 사람들에게 맞기까지 했다. 그들은 경험이 많았기에 CCTV에 찍히지 않는 곳만 골라서 그녀를 때렸고 겉으로 보면 큰 상처가 보이지 않았지만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서는 아무리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고 소리를 지르며 원망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삼촌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절 저런 곳에 가둬두고 구해주지 않을 수 있어요?”육연주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지애는 더욱 속상해져서 그녀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네 삼촌 많이 변했어. 다 그 여자 때문이야. 게다가 너 나올 때쯤 되면 해외로 유학 보내겠다고 하더라고.”“뭐라고요?”육연주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엄마, 전 해외로 가고 싶지 않아요!”여행을 가는 것과 유학을 하러 가는 건 완전히 달랐다. 육경한이 보내주는 유학이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철저히 감시당할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자유라고는 조금도 없을 터였다.“엄마도 어쩔 수 없어. 네 삼촌도 내 말도 들으려 하지 않거든. 네 삼촌 눈에는 그 여우 같은 년이랑 사생아밖에 안 보이나 봐.”이지애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그녀는 끝까지 유진이가 육씨 가문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이지애는 소원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 여자의 아이도 미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항상 유진이를 사생아라고 부르며 경멸했다.육연주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불안해졌다.“엄마, 유학은 안 돼요. 저 해외 안 갈래요. 그건 저더러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너무 조급해하지 마. 엄마가 방법을 생각
기사는 방민아가 구치소에 구속되어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현재 방씨 가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아가씨, 아직 모르실 겁니다만 방씨 가문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차를 팔아서 그 프로젝트의 구멍을 메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는 몸이 매우 편찮으셔서 요즘 계속 병원에 계세요.”방민아는 자신이 구치소에 있을 때 방씨 가문에 이렇게 큰 재난이 닥쳤다는 소식에 많이 놀랐다. 사실 그녀는 구치소에서 나오면 소원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제는 먼저 방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조사해 봐야 했다.방민아는 방현수를 만나러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병원에서 방현수를 만난 방민아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방현수는 예전보다 안색이 아주 나빠 있었고 얼굴에 주름도 많아져서 이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방민아를 보자마자 방현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민아야, 우리 집은 육경한때문에 이젠 망했어...”방민아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떻게 그럴 수가...”방현수는 방민아가 구치소에 갇혀 있을 동안 방씨 가문에 일어난 일을 전부 이야기한 뒤 한숨을 쉬며 말했다.“육경한이 너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구나. 정말로 감정이 없나 보네. 육경한은 우리 방씨 가문을 다 이용한 후 버린 거야. 나는 이제 나이도 많아서 방씨 가문을 지킬 수 없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구나. 내가 죽고 나면 조상님들 얼굴을 어떻게 보겠어...”방민아는 손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고 방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리 없어요. 제가 육경한 뜻대로 되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그만두렴. 네가 무슨 방법이 있겠니?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하지 않잖아. 지금 육경한이 신경 쓰는 건 그 여자랑 병든 아들뿐이야.”방현수가 머리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웃기고 있네. 그는 병든 아이를 위해서 더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정관 절제술을 하겠다니. 그 아이가 그에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심장병은 기증자를 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