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연주는 다짜고짜 소원의 머리채를 붙잡아 탁자 위로 내리눌렀다.힘껏 눌러대며 외쳤다.“오늘 반드시 내가 그날 느낀 굴욕과 분노를 똑같이 느끼게 해줄 거야!”하지만 소원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이 정도의 고통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그녀는 그저 조용히 방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은 지키셔야죠. 우리가 한 대로 이행해주세요.”방민아는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 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한 말은 꼭 지킵니다.”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는 자기 이름이 거론될 일을 피하려고 애써 돌려서 말했다.소원은 방민아가 무슨 꾀를 부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약속만 지켜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그렇지 않다면 육연주가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육연주는 샴페인과 맥주를 들고 소원의 머리 위로 들이부었다.그러고는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다.“술 좋아한다며?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좋아하게 만들어 줄 테니 잘 마셔 봐!”알코올이 따갑게 소원의 머리와 얼굴을 적셨다.소원은 눈을 꼭 감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육연주는 더욱 흥분하며 소원의 뺨을 두 차례나 세게 때렸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술병을 집어 들어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려고까지 했다.그 순간, 방민아가 육연주의 손목을 꽉 잡아 멈췄다.“연주야, 내가 뭐라고 했어? 겉으로 티 나는 상처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러면 너한테도 안 좋아.”그들의 관심은 소원의 안전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벌가 자제 이미지가 더러워질까 하는 것이었다.그렇게 육연주는 힘없이 손을 풀었고 술병은 바닥으로 떨어져 몇 번 굴러갔다.방민아는 처음부터 이렇게 경고했다. 목숨을 앗아가선 안 되고 모욕하고 짓밟는 건 가능하지만 눈에 띄는 외상은 절대 안 된다고.처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육연주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소원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그날 결혼식에서 소원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됐는지, 모든 사람들에
육연주는 정말로 소원을 죽이고 싶어 했다.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채 소원은 머리에 씌워진 쓰레기봉투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손바닥에 힘을 실어 머리 주변에 약간의 공간을 만들며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그 와중에 방민아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소원은 속으로 방민아가 나서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직접 나서서 분노를 폭발시키고 자신을 때릴 것을 기대했다.하지만 방민아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소원은 실망스러웠다. 방민아가 나서지 않는다면 오늘 이 모든 고통이 헛된 일이 되어버릴 터였다.다행히 소원은 방민아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두 가지 대비책을 준비했다. 바로 이 방에서 벌어진 일을 몰래 촬영하는 것이었다.방민아보다 소원은 이곳이 더 익숙했고 카메라를 눈에 띄지 않게 숨길 방법도 알고 있었다.방민아가 한 번이라도 직접 손을 댄다면 그걸 증거로 삼아 이 여자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다는 걸 증명할 계획이었다.그러던 중 소원은 희미하게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다.방민아가 일어나 방을 나가 전화를 받으러 간 모양이었다.겨우 2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녀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날카로운 하이힐 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방민아는 소원에게 다가오더니 발끝으로 그녀의 손을 세게 짓밟으며 말했다.“소원 씨, 왜 안 죽어요?”그녀의 목소리엔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소원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조금 전까지도 여유롭게 보고만 있더니 왜 전화를 받은 뒤에 갑자기 이렇게 분노에 찬 모습이 된 거지?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야?’사실 방민아는 병원에 있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 내용은 육경한이 정관수술을 예약했다는 것이었다.정관수술이라는 말에 그녀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왜 정관수술을 하기로 결심한 거야? 그럼 난 이제 평생 경한 씨의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만약 아이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육경한이 곧 자신에
방민아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너무 오래 억눌린 감정이, 희망이 무너지고 절망으로 변하면서 그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방민아는 소리쳤다.“그런 사생아는 세상에 나와선 안 됐어! 가장 큰 잘못은 네 뱃속에서 태어난 거야!”이어 소원의 귀에 대고 하나하나 똑똑히 말했다.“소원, 모든 건 네 잘못이야!”이 순간 육연주는 이미 술에 취해 방민아의 또 다른 면모를 알아챌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눈엔 오직 소원만 보였고 그저 소원을 미친 듯이 괴롭히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방민아!”갑자기 소원이 머리에 씌워진 쓰레기봉투를 확 벗어던졌는데 눈은 피로 물든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네가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유진이 건들 생각도 하지 마!”거의 고함치듯 외쳤다.그 말을 듣고 놀란 방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술병을 집어 들어 소원의 머리에 세게 내리쳤다.그 순간 소원의 이마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얼굴 위에 핏빛 꽃처럼 퍼졌다.핏자국과 함께 소원의 초췌한 모습은 더욱 처절하면서도 기묘하게 아름다워 보였다.방민아는 손에 든 술병을 천천히 소원의 얼굴에 대고 내렸다. 병 끝이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찌르며 고통을 가했다.소원은 얼굴이 분명 엉망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지쳐 있던 소원은 더는 저항할 힘이 없었고 바닥에 무기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이 모습을 본 방민아는 기고만장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소원, 네가 날 벌하겠다고? 대체 어떻게? 부모도 죽었고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잖아. 돈이 좀 있겠지. 하지만 네 돈이 우리 방씨, 육씨 가문의 재산보다 많을 것 같아? 네가 날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네.”소원은 천천히 말했다.“궁금해?”방민아는 코웃음을 쳤다.“흥미 없어. 너 같은 건 내 눈에 그냥 개미야. 잡아 죽이거나 살려두거나 그건 내 마음이지. 네가 감히 뭘 어쩌겠어?”그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덧붙였다.“내가 경한 씨랑 결혼한 후엔 더 봐줄
소원은 비록 초췌하고 기진맥진했지만 강한 의지로 벽에 기대며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방민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확신에 찬 웃음을 지었다.“보아하니 겁먹은 모양이구나? 아니, 겁먹었을 뿐 아니라 내가 네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믿고 있는 것 같아.”소원의 평온한 말투는 방민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금씩 무너지던 심리적 방어벽을 드러내게 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방민아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소원은 그저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자신을 겁주려는 것뿐이라고.그녀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경한 씨가 저런 여자를 받아들일 리 없어.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결혼식에서 난동을 부린 여자를 원한다고? 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그런 수치를 감수할 리 없잖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방민아는 마음을 다잡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속이려고 하지 마. 너 같은 게 그럴 힘이 어디 있겠어.”그러자 소원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내가 허세를 부리는지 아닌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내게 그 힘이 있는지 없는지도 네가 더 잘 알 거야.”방민아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그녀의 눈에 육경한은 마치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소원 같은 여자에게 계속해서 모욕당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곧 방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원의 손을 힐 신은 발로 짓밟으며 꾹 눌렀다.소원은 손끝에 힘을 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소원, 내가 너를 위해 선물 하나 준비했는데, 알아?”고통에 찡그린 얼굴로 소원이 자신을 쳐다보자 방민아는 비웃으며 말했다.“내 오빠가 널 좀 갖고 놀고 싶다더라. 잘 해줘 봐. 오빠 기분만 잘 맞춰주면 네 아들 죽기 전에 한 번쯤 볼 수 있게 해줄게. 어때?”소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방민아의 이복오빠, 방민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방민기는 몇 년 전 일이 터진 뒤로 몸이 망가져 본래의 기능을 잃었지만 그럴수록 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쪽으로 빠져
방민아는 가벼운 말투로 비웃었다.“어쨌든 오빠는 경한 씨의 매형인데 그 사람이 이런 하찮은 여자 때문에 오빠를 곤란하게 하겠어?”방민기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네 말이 맞아. 내가 육 대표님의 매형이니 그분이 날 곤란하게 하면 네가 책임지고 해결해야겠지.”하지만 방민기는 방민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예전에도 소원 때문에 육경한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협박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로 인해 몸에 문제가 생겼던 방민기는 아무리 육경한 측에서 부정한다고 해도 분명히 그의 짓이라고 확신했다.다른 누가 그런 일을 벌였을 리 없었다.그저 소원을 두어 마디 농담 삼아 희롱했을 뿐인데 육경한이 미친 듯이 사람을 보내 협박한 것이다.만약 이번에 소원을 건드린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그 남자는 진짜 건드려선 안 돼. 이건 내가 겁이 많아서가 아니야.’방민기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육경한 같은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한눈에 돋보이는 사람이었다.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오랜 배고픔에 시달린 늑대처럼 사람을 단숨에 집어삼킬 것 같은 위협감을 주었다.방민아는 비웃으며 말했다.“오빠, 겁쟁이라더니 진짜로 겁먹었네. 이 여자가 뭔데? 경한 씨가 놀다 버린 여자잖아. 오빠가 진지하게 볼 가치가 있어?”그녀의 말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육경한이 이 여자를 버렸다는 사실에 방민아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그저 소원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 싶을 뿐이었다.그녀는 계속해서 생각했다.‘다 이 여자 때문이야. 이 여자가 없었다면 경한 씨가 아이에 대한 혐오감을 갖지 않았을 거야. 아니면 왜 아이를 싫어해서 정관수술까지 받겠어?’점점 이런 생각에 방민아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곧 방민기가 천천히 말했다.“민아야, 오늘 네가 한 말 기억해둘 거야.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께 네 계획이라고 보고할 거야. 내 비서가 다 듣고 있으니까 발뺌하지 마.”방민아는 방민기의 지나친 신중함에 화가 치밀었다.“오빠, 왜 그
“됐어. 민아 너는 얼른 가. 좋은 시간 방해하지 말고.”방민기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단추를 마구 풀어제끼기 시작했다.방민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정신이 몽롱해서도 억지로 버티는 여자를 보며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래.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재밌게 놀아.”방민아는 이 말만 남기고 문을 닫고 나갔다. 옷을 입었을 땐 몰랐는데 윗옷을 벗으니 가려졌던 뽀얀 속살과 볼록한 배가 드러났다. 딱 봐도 운동한 적이 별로 없는, 향락에만 빠져있는 몸 같았다.방민기가 앞으로 다가가 소원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음침하게 웃었다.“우리 예쁜이, 재밌는 놀이 좀 해볼까?”소원은 머리가 윙 했고 의식이 끊겼다 이어지는 게 너무 흐리멍덩해서 방민기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보지 못한 채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뭐, 뭐 하는 거예요?”소원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챘고 유진을 죽여버리겠다던 그 여자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아니, 절대 안 되지. 누구든 유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바닥에서 깨진 유리 조각을 주어 손에 꽉 움켜쥔 소원은 피와 고통으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했다. 방민기가 쓰레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민기는 약을 탄 음료수를 소원의 턱을 잡고 억지로 먹이더니 이렇게 말했다.“마셔. 이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있다 재밌는 구경 좀 시켜줘.”방민기도 직접 즐기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 여자를 가지고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아무 반응이 없는데 놀려고 해도 놀 수가 없었다.소원이 얌전하게 협조할 리가 없었기에 일단 얌전해지게 하려면 ‘뽕’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 손을 든 소원이 음료수를 엎지르려는데 이를 눈치챈 방민기가 소원의 손을 잡고 뒤로 꺾는 바람에 손에 힘이 풀려 잡고 있던 유리 조각마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방민기가 대수롭지 않
방민기는 소원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한 치 앞을 모른 채 발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따가 물뽕 효과가 올라와도 저렇게 바락바락 성질을 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소원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는지 방민기도 딱히 급해하지 않고 헤벌쭉 웃으며 소원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반응이 전혀 없다면 다른 자극을 찾아볼 생각이었다.“소원아, 여자들이 왜 육경한을 좋아하는지 말해줄 수 있어?”방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허심탄회하게 물어봤다.“나도 그렇게 뒤처지는 건 아닌데 왜 여자들은 하나같이 진심을 내어주지 않고 내 돈만 바라보는 걸까? 젠장. 육경한 그 새끼는 얼음장 같아서 여자한테 어떻게 잘해줘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 여자가 많이 꼬이는 거지? 도대체 무슨 비법이 있길래 그런 거야? 설마 그쪽 방면으로... 여자를 훙분하게 하는 건가... 응?”그 원인이 아니라면 육경한도 왜 여자들이 육경한에게 그렇게 매달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분명 육경한에게 크게 뒤처질 건 없었고 육경한보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적어도 못생기지는 않는데 말이다.남자에겐 신분과 지위가 제일 좋은 미용이라고 했는데 방민기도 이름있는 재벌 2세였지만 그가 알고 지내는 있는 집 아가씨나 노래방 도우미들은 육경한만 보면 하나같이 걸음을 떼지 못했다. 분명 육경한은 별다른 눈빛이나 암시를 준 적이 없는데 껌뻑 죽는 여자들만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두 사람 다 인간이 아니라서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소원이 차갑게 말했다.“후. 역시 너는 보는 눈이 다르단 말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니까 생각나는 게 여자들은 나쁜 남자 좋아하지 않아? 내가 최대한 나빠지면 너도 푹 빠져서 경한은 둘째치고 경로를 못 찾을 수도 있잖아.”마지막 한마디는 육경한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방민기는 지금 자연스럽게 소원을 육경한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번에 그렇게 호되게 당했으니 잊으려 해도 도무지 잊히지가 않았다.방민기는 손끝으로 소원의 옷자락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마음을 할퀴는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웠다. 겪어보고 나니 왜 다들 물뽕을 그렇게 선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꾸만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게 누군가에게 엉겨 붙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더는 참기 힘들었던 소원은 시야마저 흐릿해지자 얼른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고 이에 방민기가 소원을 경계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손사래를 쳤다.“소원아, 우리 배운 사람답게 행동하자. 말로 하면 되는 걸 왜 힘을 쓰려 그래? 너도 알잖아. 네가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거. 술병을 들어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겠어? 지금 온몸이 모기에게 물린 것처럼 간지럽고 힘들지? 그런 몸으로 나를 다치게 하겠다고? 힘 빼지 마.”쨍그랑.부서지는 소리에 방민기가 깜짝 놀라더니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너... 너 정말...”소원은 들었던 술병을 그대로 자기 머리에 내리치더니 깨지면서 생긴 날카로운 부분을 손에 꽉 움켜쥐었다. 검붉은 피가 소원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와 눈과 속눈썹, 그리고 코가 뒤덮었고 따듯한 불빛 아래 너무 기괴해 보였다. 소원은 피로 물든 예쁜 입술로 이렇게 말했다.“당신을 어떻게 할 수 없을진 몰라도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어요. 정 그렇게 나와 놀고 싶다면 내 시신을 갖고 노는 건 어때요?”방민기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더니 연신 뒷걸음질 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X발. 이런 미친X을 봤나. 그 미친 X끼랑 다를 게 뭐야.”아무리 여자에 미쳤다 해도 시신을 가지고 노는 건 너무 섬뜩하고 미친 짓이었다.소원이 깨지고 남은 술병을 목에 찔러넣자 핏줄기가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려 너무 위험해 보였다.“놀고 싶다면서요?”소원의 빨간 입술이 움직였다.“그렇게 담이 작아서야 되겠어요? 방민기 씨... 무서운 게 없는 줄 알았는데.”“나도 안 무서워하는데 먼저 발 빼면 되겠어요?”소원의 목소리는 마치 뱀처럼 방민기의 귓가에 빙빙 맴돌았다. 방민기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계속 뒤로 물러나다가 구석으로 몰리고 말았다. 소원이 유리병을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