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손톱으로 마음을 할퀴는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웠다. 겪어보고 나니 왜 다들 물뽕을 그렇게 선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꾸만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게 누군가에게 엉겨 붙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더는 참기 힘들었던 소원은 시야마저 흐릿해지자 얼른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고 이에 방민기가 소원을 경계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손사래를 쳤다.“소원아, 우리 배운 사람답게 행동하자. 말로 하면 되는 걸 왜 힘을 쓰려 그래? 너도 알잖아. 네가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거. 술병을 들어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겠어? 지금 온몸이 모기에게 물린 것처럼 간지럽고 힘들지? 그런 몸으로 나를 다치게 하겠다고? 힘 빼지 마.”쨍그랑.부서지는 소리에 방민기가 깜짝 놀라더니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너... 너 정말...”소원은 들었던 술병을 그대로 자기 머리에 내리치더니 깨지면서 생긴 날카로운 부분을 손에 꽉 움켜쥐었다. 검붉은 피가 소원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와 눈과 속눈썹, 그리고 코가 뒤덮었고 따듯한 불빛 아래 너무 기괴해 보였다. 소원은 피로 물든 예쁜 입술로 이렇게 말했다.“당신을 어떻게 할 수 없을진 몰라도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어요. 정 그렇게 나와 놀고 싶다면 내 시신을 갖고 노는 건 어때요?”방민기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더니 연신 뒷걸음질 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X발. 이런 미친X을 봤나. 그 미친 X끼랑 다를 게 뭐야.”아무리 여자에 미쳤다 해도 시신을 가지고 노는 건 너무 섬뜩하고 미친 짓이었다.소원이 깨지고 남은 술병을 목에 찔러넣자 핏줄기가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려 너무 위험해 보였다.“놀고 싶다면서요?”소원의 빨간 입술이 움직였다.“그렇게 담이 작아서야 되겠어요? 방민기 씨... 무서운 게 없는 줄 알았는데.”“나도 안 무서워하는데 먼저 발 빼면 되겠어요?”소원의 목소리는 마치 뱀처럼 방민기의 귓가에 빙빙 맴돌았다. 방민기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계속 뒤로 물러나다가 구석으로 몰리고 말았다. 소원이 유리병을
한 시간 전.영숙이 몸을 돌리려는데 소원이 불러세웠다.“언니...”소원이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왜 그래?”영숙이 다시 몸을 돌리더니 소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음... 이따가 복잡한 상황에 휘말릴 수도 있는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소원의 말에 영숙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뭔데?”영숙은 고민에 잠겼다. 이 바닥에서 오래 있었으니 소원이 지금 출근하러 나온 게 이상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리 손님이 중요하다지만 밥벌이가 급하지도 않은 소원이 몸조리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이런 희생정신을 보이는 게 수상했기 때문이다.순간 모든 걸 알아챈 영숙이 얼른 이렇게 물었다.“혹시 룸에 무슨 일 있어?”소원이 침묵으로 대답하자 영숙이 소원의 손을 꼭 잡더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러면 가지 마. 아직 몸도 채 낫지 않았는데 들어가서 쉬어. 걱정하지 마.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내가 다 커버할 수 있어.”소원이 영숙의 손을 도로 잡으며 말했다.“한번은 피할 수 있어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어요. 언니, 유진이도 그렇고 유진이를 돌보는 아줌마도 그렇고 다 내가 필요해요. 내가 일어서서 싸우지 않으면 곧 후회할지도 몰라요.”소원이 영숙을 보며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언니, 내겐 언니가 필요해요. 언니만이 나를 도울 수 있어요.”소원은 이상하게 영숙이 믿음직스러웠다. 선의는 숨기려 해도 잘 숨겨지지 않는 법이라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선의가 어디서 온 건지 모르지만 소원은 지금 그 선의가 너무 필요했다.“그래. 말해 봐.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소원이 답했다.“지금 저 방에 들어가면 얘기가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어요. 만약 내가 술병을 깨트린다면 대신 전화 좀 해줘요...”소원이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육경한에게 전화 좀 해줘요.”깜짝 놀란 영숙이 되물었다.“육경한 대표에게 전화하라고?”“네.”소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육경한에게 전화 좀 해줘요.”영숙은 두 사람 사
동영상을 찍으려면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는데 영숙이 룸으로 들어오는 순간 일을 그르치게 될 것 같아 일단 영숙에게 이렇게 귀띔했다.“내가 술병을 깨면 그때 전화해요.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절대 들어오면 안 돼요.”영숙이 말했다.“알았어. 네가 말한 대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소원이 들어간 뒤로 영숙은 너무 불안했고 안에서 들려오는 매질 소리에 가슴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다.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때마다 소원이 했던 말이 떠올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영숙은 소원이 총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다 계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절대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말자고 다짐했다. 소진용의 딸이니 무조건 믿고 협조해 줘야겠다고 속으로 되뇌는데 안에서 드디어 술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영숙은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여러 번 울리자 영숙은 혹시나 육경한이 받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영숙의 능력으로 육경한의 개인 번호 하나 얻어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기에 영숙은 바로 육경한의 개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개인 번호라 해도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거나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육경한이 영숙의 번호를 기억할 리는 없었다.연결음이 일고여덟 번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자 다급해진 영숙은 정말 당장이라도 차를 운전해 육경한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고 싶었다. 마지막 연결음이 끝나려던 찰나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누구시죠?”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적어도 소종의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붕 떠 있던 영숙의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다. 천만다행으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대표님, 저는 KB 클럽의 유영숙이라고 합니다.”샤워를 마친 육경한은 진한 갈색의 비단 잠옷을 입고 침대에 기대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갑자기 전화드려 죄송하지만 일단 제 말씀 좀 들어주세요...”영숙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저녁에 육연주 씨와 방민아 씨가 클
영숙은 잰걸음으로 달려가 얼른 차 문을 열어줬다.“대표님, 빨리 오셨네요...”반짝거리는 구두로 땅을 밟은 남자는 긴 다리로 신속하게 차에서 내리더니 영숙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대답을 듣지 못한 영숙은 난처한 기색 없이 매우 덤덤했다.‘왔으면 된 거지...’오히려 육경한을 뒤따라온 소종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영숙을 바라보며 말했다.“숙 매니저님, 직원을 이렇게 관심하는지 몰랐네요. 혹시 체리라는 직원과 특별한 관계라도 있는 건가요?”가시가 돋친 말에 영숙이 바짝 긴장했지만 이내 태연하게 말했다.“소 비서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육씨 가문을 걱정한 것뿐이에요. 두 분 다 있는 집 아가씨라 특수한 존재인데 스캔들에 휘말려서야 되겠어요?”영숙이 소종에게로 다가가더니 온갖 신비로운 척은 다 하며 이렇게 속삭였다.“위에서 요즘 불시 검문하는 거 아시면서. 다른 손님이었으면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데 대표님 손님은 저 따위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대표님 뜻을 먼저 여쭤봐야죠.”영숙의 해명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소종은 믿지 않았다. 오랫동안 재계와 유흥가를 오간 소종은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유흥가에서 아가씨를 거닐고 다니는 마담이라면 눈에 뵈는 게 돈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돈이 없으면 마담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부품과도 같아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아가씨를 위해 손님에게 밉보이는 건 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영숙이 몸담고 있는 이곳은 돈 많은 사람들의 천국이었다.소원이 이런 곳에서 몸을 사릴 수 있었던 건 소원이 운 좋아서가 아니라 영숙이 미리 손님을 선별해서 줬기 때문이었다. 업무를 성사하기 위해 오는 사장님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런 손님들은 이곳의 아가씨들을 건드리는 법이 거의 없었고 그저 업무 수요 때문에 형식적으로 아가씨를 불러 분위기를 띄울 뿐이었다.소종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둘러대는 영숙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숙 매니저님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나
방민기는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연신 신음했다. 옷을 입지 않아서 그런지 그 모습이 너무 얍삽해 보였고 누가 봐도 여자가 특수한 서비스를 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들어온 사람이 육경한이라는 걸 발견한 방민기가 입을 열었다.“매부, 드디어 왔네. 이 여자...”미친 여자라고 말하기도 전에 화가 치밀어오른 육경한이 아무 이유도 없이 방민기에게 발차기를 날렸다.“아악.”발차기를 정통으로 맞은 방민기가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에서 한 바퀴 빙 굴렀다. 찢어질 듯이 아픈 건 둘째 치고 너무 억울했다.저 미친 여자를 더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하려는데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얻어맞은 것이다. 나오기 전에 운수라도 보고 나왔으면 이런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육경한이 여자 앞으로 다가가서는 쪼그리고 앉아 축 늘어진 여자의 턱을 들어 올리며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비꼬기 시작했다.“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왜 또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소원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너무 흐리멍덩했고 몸이 불타올라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았다.육경한은 무슨 생각하는지 한참 동안 소원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갑자기 손을 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서 보고 있는 영숙을 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이에 소종이 얼른 물었다.“대표님, 여긴 어떻게 할까요?”육경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여기 내 사람은 없는데.”그 뜻인즉 안에 있는 소원과 방민기는 그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니 어떻게 처리할지는 클럽에서 알아서 정하라는 말이었다.마음이 다급해진 영숙이 입을 열려는데 육경한의 질문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숙 매니저, 여기 내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 있지?”육경한이 말한 내 사람은 당연히 육연주와 방민아였다. 영숙이 전화했을 때 분명 육연주와 방민아가 취했다고 했는데 정작 두 사람은 여기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영숙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방민아는 종래로 그녀의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던 육경한이 갑자기 이렇게 묻자 한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그게...”잠깐 뜸을 들이던 방민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연주랑 클럽에 갔었어요.”방민아는 더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육경한이라면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더 깊이 물어보지 않았다.아니나 다를까 육경한은 이 말을 듣고 더 캐묻지 않았지만 방민아가 오히려 되물었다.“경한 씨, 이건 왜 묻는 거예요?”“별거 아니에요.”육경한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일찍 쉬어요.”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다. 방민아도 더는 매달리지 않고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요. 경한 씨도 일찍 쉬어요.”통화가 끝나자 소종이 육경한에게 물었다.“대표님, 방민기 대표는... 어떻게 할까요?”사이가 좋든 나쁘든 방민기는 결국 육경한의 미래의 형님이었기에 그가 팬티만 입고 이곳에 발라당 누워있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육경한은 처참한 꼬락서니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방민기를 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차에 던져넣고 방씨 저택으로 보내.”“네, 알겠습니다.”소종도 그렇게 생각했다. 방씨 가문과 정략결혼을 한 상태라 방민아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손 놓고 볼 수는 없었다. 이 일이 밖으로 새 나가는 날엔 방민아만 난처해질 것이다.소종이 방민기를 밖으로 끌어내려는데 술에 취한 방민기는 축 늘어져 있었고 아까 깜짝 놀라서 그런지 돼지보다 더 무거웠다. 일단 문 앞까지 끌어내고 영숙에게 사람을 찾아와 처리하라고 하려는데 영숙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 소원을 살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숙은 소원을 챙겨야 했다. 매니저로서 아가씨를 관리하고 있는 영숙은 소원을 챙기는 게 당연했고 이를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영숙이 소원을 부축해 문 쪽으로 걸어갔다. 볼이 발그레한 소원은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지만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아름다웠다. 그렇게 육경한 옆을 지나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육경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
바닥에 드러누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덕분에 방민기는 술을 조금 깰 수 있었다. 클럽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집에서 소장했던 술을 조금 마시고 나온 터라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는데 육경한에게 맞아 속까지 뒤틀린 방민기는 어제 먹었던 것까지 다 토해냈다. 더 중요한 건 얼굴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피가 자기 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 피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역시 방민아 그 X은 믿는 게 아니었는데.’방민기는 정말 너무 후회되었다. 방민아에게 골탕을 먹일 생각이긴 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육경한의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것 같으니 일단은 몸을 사리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민기에게 육경한은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바닥에 누운 방민기는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지 못했기에 분위기가 어느새 청소년 관람 불가가 되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소종이 육경한을 부축하고 영숙이 소원을 부축한 덕에 드디어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었다. 소종은 기괴한 눈빛으로 소원을 힐끔 째려봤다. 눈빛이 흐리멍덩한 걸 봐서는 연기는 아닌 것 같았다.‘뭐야, 왜 저래...’아까 벌어진 상황은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종은 소원을 밀어내지 않고 소원이 하고 싶은 대로 가만히 놔둔 육경한이 더 이상했다.영숙이 겨우 소원을 안고 고개를 돌려 육경한에게 사과했다.“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체리가 아마 방민기 대표님에게 당해서 실례를 범한 것 같네요. 제가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뒤에 정신 차리면 직접 찾아뵙고 사과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은 너그럽게 넘어가 주세요. 게다가 지금은 뭘 하려고 해도 의식이 없으니...”육경한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섹시한 입술은 어느새 껍질이 까진 채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는데 어딘가 사악하면서도 음침해 보였다.소종이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얼른 가요. 사과는 무슨. 대표님 눈 버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데리고 내려가요.”영숙이 떨떠름하게 웃으며 말했다.“네. 지금 바로 데리고 물
영숙은 엘리베이터 문을 막는 커다란 손을 보고 악개인 소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손목에 찬 몇억짜리 시계가 눈에 들어오자 이내 누군지 알아채고 기분이 좋아졌다.사실 영숙은 육경한이 소원의 매력을 이겨내지 못할 거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키스였지만 싸늘하게 식었던 남자의 마음에 불씨를 심어주기엔 충분했다.영숙은 육경한을 보며 헤벌쭉 웃었다.“대표님, 내려가시려고요?”육경한이 대꾸하지 않아도 영숙은 딱히 난처해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잠깐만 기다려주실래요? 이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거지 내려가는 게 아니에요. 2층이니까 잠깐만 기다리시면 될 거예요.”육경한이 차가운 표정으로 영숙의 품에 안긴 소원을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올라간다고?”영숙은 어두워진 유경한의 얼굴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순진한 척 웃었다.“네. 위층이 남자 도우미 대기실이라서요. 그쪽으로 가려고요.”남자 도우미 대기실이라는 말에 육경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영숙은 소원을 꼭 끌어안은 채 자꾸만 엉겨 붙는 소원에게 보란 듯이 이렇게 말했다.“체리야. 이러지 마. 조금만 참았다가 이따가 가서 골라... 착하지? 좋은 놈으로 골라줄게.”이렇게 말하며 영숙이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데 소종이 발로 엘리베이터 문을 막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감히 우리 대표님을 기다리게 해요? 무슨 자격으로?”그러면서 콧방귀를 세게 뀌었다.“얼른 나와요. 우리가 먼저 갈라니까.”밝기만 하던 영숙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클럽에서 오래 일해 수많은 부를 끌어모으긴 했지만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래도 클럽 덕분에 많은 귀인을 만나게 되었고 대부분 영숙을 보면 체면을 봐주며 숙 매니저라고 부르거나 영숙 씨라고 불러주기 일쑤였다.하지만 영숙과 신분이 별반 다를 바 없는 소종이 말끝마다 영숙을 무시하고 있었다. 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면 그래도 서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참았을 텐데 소종이 모욕하는 건 정말 참기 힘들었다.복수에 때가 없
말을 마친 주석훈은 손에 감았던 삼각 머플러를 풀어 칼을 깨끗이 닦은 뒤 다시 넣고는 진아연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참혹하게 죽은 채 혼자 남겨진 진아연은 숨이 멎는 순간에도 눈을 크게 뜬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지 못한 채로 죽어버렸다....집에서 하룻밤을 쉰 소원은 다음 날 오후가 되자 서둘러 병원으로 유진을 보러 갔다. 다행히 점점 좋아지는 유진의 상태에 소원은 안도했다.육경한은 그녀를 만나 최근에 확인한 소식을 알려주었다.“진아연이 죽었어.”청천벽력 같은 한 마디에 소원은 자리에 얼어붙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어떻게...”소원은 단서가 이렇게 쉽게 끊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진아연은 아버지를 죽인 진범을 알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었는데 이제 그녀가 죽었으니 그동안 애써 찾아낸 다른 단서들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었다.순간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범인은 안상철과 같은 방식으로 진아연을 죽였어. 똑같이 67번을 찔렀어. 범인은 인체 해부에 아주 숙련된 사람이야.”소원은 경계심을 품으며 물었다.“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상철 삼촌을 죽인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말이야...?”만약 정말 같은 사람이라면 이 범인이 아마도 아버지를 죽인 진범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누구도 이 두 사람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응, 내 추측도 그래. 너도 조심하고 경계심을 잃지 마.”육경한은 반지를 꺼내 소원에게 건넸다.“이거 받아.”반지를 본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게 뭐야?”소원이 손을 내밀지 않자 그녀가 오해한 것임을 눈치챈 육경한은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이건 호신용 반지야. 끼고 있어. 안에 바늘이 있는데 그 바늘에는 독이 있어서 이 바늘로 찌르면 상대방은 온몸의 힘이 빠지게 돼.”반지의 기능을 들은 소원은 그제야 이 작은 물건이 유용한 곳에 쓰인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받아서 손에 꼈다. 하지만 결혼반지를 끼는 곳에 아니라 독신임을 상징하는 손가락에 꼈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지만 주석훈은 여전히 온화하고 젠틀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이런 장면에 익숙해진 듯 별 반응이 없었다.마지막 몇 번의 칼질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진아연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칼날이 그녀의 살을 천천히 파고들며, 생명은 마치 촛불이 꺼지듯 서서히 소멸해 갔다.죽을 수 있을 만큼의 고통, 그러나 죽지 못하게 만드는 고통. 그야말로 가장 잔혹한 죽음이었다.기운이 다 빠진 진아연은 주석훈의 차분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알겠어... TV 뉴스에 나왔던 안상철의 죽음도 당신...”진아연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진작 알아차려야 했다.“당신... 맞지...”이제야 모든 진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늦어도 너무 늦었다...그날 현장에 있었던 그녀는 안상철이 도망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상철이 돈을 숨겨둔 곳까지 몰래 따라갔다. 그녀는 그 돈이 신비로운 인물이 준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신비로운 인물이 주석훈인지 몰랐다.안상철을 따라간 진아연은 그 돈을 손에 넣어 자신의 도피 자금으로 쓰려고 했다.그래서 안상철이 돈을 파내는 것을 보고 망치를 들어 안상철의 머리를 내리친 뒤 돈을 챙겨 차를 타고 도망쳤다.그 후 며칠 동안 숨어 지내며 안상철에 대한 소문을 기다렸고 그러다가 안상철이 칼에 여러 번 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강하게 내리쳤을 뿐이었고 힘도 많이 들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안상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얻는 것이었다.살인이 두려워서 안상철을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살인죄까지 뒤집어쓰면 도주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 시점에서 살인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스스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하지만 안상철을 죽인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 이렇게 점잖은 주석훈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진아연이 물었다.“왜... 왜 그 사람을 죽이고... 나까지... 죽이는 거야...”주석훈이
심지어 진아연은 얼마 전까지도 주석훈을 젠틀한 문화인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보니 큰 착각을 한 것 같았다.진아연은 주석훈을 향해 아첨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변호사님, 어떤 일이든 할게요. 제발...”“쉿!”주석훈은 두 번째 손가락을 입가에 올리며 ‘쉿’하는 소리를 냈다.‘쉿’하는 그 소리에 온몸에 식은땀이 난 진아연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번뜩이는 칼날을 휘두르던 남자는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찔렀다.“안녕, 나는 주석훈이야.”“으악!”진아연은 하늘을 향해 비명을 내질렀다.칼은 급소를 찌르지 않았지만 충분히 고통스러웠다.이어서 또 한 번 칼을 휘두른 주석훈은 이번에도 급소가 아닌 뼈 사이를 정확히 찔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조금씩 몸을 파고들자 진아연은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주석훈이 친절하게 말했다.“여긴 무릎뼈가 있는 곳이야. 다음은 발목뼈, 아마 통증이 다를 거야.”“왜... 왜, 왜 이러는 거예요?”진아연은 쉰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세상 일에 꼭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네가 저지른 일에는 인과응보가 따르는 법이지. 지금 겪는 건 그저 그 대가일 뿐이야.”말을 하면서 그녀의 뼈 사이를 정확히 찌른 주석훈은 날카로운 칼날로 진아연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또다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주석훈은 들리지 않는 듯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하나만 말해줄게. 나는 사실 법의학자가 될 뻔했어. 예전에 인체 해부하는 것을 좋아했거든. 변호사가 될 생각은 없었어. 변호사가 된 이유는 돈을 빨리 벌기 위해서야.”주석훈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진아연에게 이야기했다.고통에 죽을 지경인 진아연은 울며 말했다.“나를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육경한을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렇게 말했지. 하지만...”주석훈은 뼈관절을 해부하며 말을 이었다.“너를 믿을 수 없어. 쓰레기 주제에 두 번째 기회를 바라다니, 꿈 좀 그만 꿔!”무자비하게 조롱하는 주석훈의 말에
진아연의 이름을 들은 육경한은 매우 침착하게 천천히 말을 뱉었다.”괜찮아, 아마 걔는 살 수 없을 거니까.”“...”황수진은 육경한이 진아연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고 매우 놀랐다. 그가 보기엔 이 신비한 사람이 진아연을 구출한 것을 보면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한 패거리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하였지만 뜻밖에도 육경한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육경한은 동네 정문 쪽 동영상을 보면서 이리저리 보다 지프차량이 진아연을 돌격하는 곳에서 멈추었다.차량은 아무런 인정사정이 없이 그 자리에서 사고를 내려고 했다.하지만 아마도 진아연 단지 입구에서 죽는다는 것이 정말 번거롭고 또 잠재된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방안을 바꾼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이 방안은 집행될 것이고 이 신비한 사람은 절대 진아연의 목숨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황수진이 지프차를 보았는데, 분명히 가짜 번호판이었지만 조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그가 한국 본토에서 활동하는 한 날 중에는 언제든지 증거가 남게 될 것이다.반대편 차 안에서 진아연은 그곳을 본 후 안색이 어두워졌다."제트 씨, 왜 저를 이렇게 황량한 교외에 두셨어요? 택시를 타고도 돌아가기도 곤란해요."“여기 안 오고 들키고 싶어요?"제트의 기분은 나빠지자 진아연은 감히 말하기 무서웠다."그럼 제가 내려가도 되나요?"진아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후에야 천천히 진아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내려요.“진아연은 기쁜 마음으로 차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아주 쉽게 차 문이 열렸다. 그녀는 일종의 재난을 모면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매우 기뻤다는데 한 발이 발밑의 땅을 금방 밟았을 때, 뒤에서 누가 등이 세게 걷어찼다.진아연은 멀리 차여 입에서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고 마치 자신의 몸이 해체되는 것처럼 느껴졌다.차근차근 차에서 내려 진아연의 앞에 다가와 걸음을 멈춘 남자를 보고 진아연은 어리둥절해졌다.“왜... 왜 저를 발로 차요?"제트는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