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민아 너는 얼른 가. 좋은 시간 방해하지 말고.”방민기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단추를 마구 풀어제끼기 시작했다.방민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정신이 몽롱해서도 억지로 버티는 여자를 보며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래.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재밌게 놀아.”방민아는 이 말만 남기고 문을 닫고 나갔다. 옷을 입었을 땐 몰랐는데 윗옷을 벗으니 가려졌던 뽀얀 속살과 볼록한 배가 드러났다. 딱 봐도 운동한 적이 별로 없는, 향락에만 빠져있는 몸 같았다.방민기가 앞으로 다가가 소원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음침하게 웃었다.“우리 예쁜이, 재밌는 놀이 좀 해볼까?”소원은 머리가 윙 했고 의식이 끊겼다 이어지는 게 너무 흐리멍덩해서 방민기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보지 못한 채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뭐, 뭐 하는 거예요?”소원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챘고 유진을 죽여버리겠다던 그 여자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아니, 절대 안 되지. 누구든 유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바닥에서 깨진 유리 조각을 주어 손에 꽉 움켜쥔 소원은 피와 고통으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했다. 방민기가 쓰레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민기는 약을 탄 음료수를 소원의 턱을 잡고 억지로 먹이더니 이렇게 말했다.“마셔. 이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있다 재밌는 구경 좀 시켜줘.”방민기도 직접 즐기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 여자를 가지고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아무 반응이 없는데 놀려고 해도 놀 수가 없었다.소원이 얌전하게 협조할 리가 없었기에 일단 얌전해지게 하려면 ‘뽕’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 손을 든 소원이 음료수를 엎지르려는데 이를 눈치챈 방민기가 소원의 손을 잡고 뒤로 꺾는 바람에 손에 힘이 풀려 잡고 있던 유리 조각마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방민기가 대수롭지 않
방민기는 소원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한 치 앞을 모른 채 발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따가 물뽕 효과가 올라와도 저렇게 바락바락 성질을 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소원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는지 방민기도 딱히 급해하지 않고 헤벌쭉 웃으며 소원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반응이 전혀 없다면 다른 자극을 찾아볼 생각이었다.“소원아, 여자들이 왜 육경한을 좋아하는지 말해줄 수 있어?”방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허심탄회하게 물어봤다.“나도 그렇게 뒤처지는 건 아닌데 왜 여자들은 하나같이 진심을 내어주지 않고 내 돈만 바라보는 걸까? 젠장. 육경한 그 새끼는 얼음장 같아서 여자한테 어떻게 잘해줘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 여자가 많이 꼬이는 거지? 도대체 무슨 비법이 있길래 그런 거야? 설마 그쪽 방면으로... 여자를 훙분하게 하는 건가... 응?”그 원인이 아니라면 육경한도 왜 여자들이 육경한에게 그렇게 매달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분명 육경한에게 크게 뒤처질 건 없었고 육경한보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적어도 못생기지는 않는데 말이다.남자에겐 신분과 지위가 제일 좋은 미용이라고 했는데 방민기도 이름있는 재벌 2세였지만 그가 알고 지내는 있는 집 아가씨나 노래방 도우미들은 육경한만 보면 하나같이 걸음을 떼지 못했다. 분명 육경한은 별다른 눈빛이나 암시를 준 적이 없는데 껌뻑 죽는 여자들만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두 사람 다 인간이 아니라서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소원이 차갑게 말했다.“후. 역시 너는 보는 눈이 다르단 말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니까 생각나는 게 여자들은 나쁜 남자 좋아하지 않아? 내가 최대한 나빠지면 너도 푹 빠져서 경한은 둘째치고 경로를 못 찾을 수도 있잖아.”마지막 한마디는 육경한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방민기는 지금 자연스럽게 소원을 육경한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번에 그렇게 호되게 당했으니 잊으려 해도 도무지 잊히지가 않았다.방민기는 손끝으로 소원의 옷자락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마음을 할퀴는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웠다. 겪어보고 나니 왜 다들 물뽕을 그렇게 선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꾸만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게 누군가에게 엉겨 붙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더는 참기 힘들었던 소원은 시야마저 흐릿해지자 얼른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고 이에 방민기가 소원을 경계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손사래를 쳤다.“소원아, 우리 배운 사람답게 행동하자. 말로 하면 되는 걸 왜 힘을 쓰려 그래? 너도 알잖아. 네가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거. 술병을 들어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겠어? 지금 온몸이 모기에게 물린 것처럼 간지럽고 힘들지? 그런 몸으로 나를 다치게 하겠다고? 힘 빼지 마.”쨍그랑.부서지는 소리에 방민기가 깜짝 놀라더니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너... 너 정말...”소원은 들었던 술병을 그대로 자기 머리에 내리치더니 깨지면서 생긴 날카로운 부분을 손에 꽉 움켜쥐었다. 검붉은 피가 소원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와 눈과 속눈썹, 그리고 코가 뒤덮었고 따듯한 불빛 아래 너무 기괴해 보였다. 소원은 피로 물든 예쁜 입술로 이렇게 말했다.“당신을 어떻게 할 수 없을진 몰라도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어요. 정 그렇게 나와 놀고 싶다면 내 시신을 갖고 노는 건 어때요?”방민기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더니 연신 뒷걸음질 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X발. 이런 미친X을 봤나. 그 미친 X끼랑 다를 게 뭐야.”아무리 여자에 미쳤다 해도 시신을 가지고 노는 건 너무 섬뜩하고 미친 짓이었다.소원이 깨지고 남은 술병을 목에 찔러넣자 핏줄기가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려 너무 위험해 보였다.“놀고 싶다면서요?”소원의 빨간 입술이 움직였다.“그렇게 담이 작아서야 되겠어요? 방민기 씨... 무서운 게 없는 줄 알았는데.”“나도 안 무서워하는데 먼저 발 빼면 되겠어요?”소원의 목소리는 마치 뱀처럼 방민기의 귓가에 빙빙 맴돌았다. 방민기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계속 뒤로 물러나다가 구석으로 몰리고 말았다. 소원이 유리병을
한 시간 전.영숙이 몸을 돌리려는데 소원이 불러세웠다.“언니...”소원이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왜 그래?”영숙이 다시 몸을 돌리더니 소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음... 이따가 복잡한 상황에 휘말릴 수도 있는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소원의 말에 영숙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뭔데?”영숙은 고민에 잠겼다. 이 바닥에서 오래 있었으니 소원이 지금 출근하러 나온 게 이상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리 손님이 중요하다지만 밥벌이가 급하지도 않은 소원이 몸조리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이런 희생정신을 보이는 게 수상했기 때문이다.순간 모든 걸 알아챈 영숙이 얼른 이렇게 물었다.“혹시 룸에 무슨 일 있어?”소원이 침묵으로 대답하자 영숙이 소원의 손을 꼭 잡더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러면 가지 마. 아직 몸도 채 낫지 않았는데 들어가서 쉬어. 걱정하지 마.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내가 다 커버할 수 있어.”소원이 영숙의 손을 도로 잡으며 말했다.“한번은 피할 수 있어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어요. 언니, 유진이도 그렇고 유진이를 돌보는 아줌마도 그렇고 다 내가 필요해요. 내가 일어서서 싸우지 않으면 곧 후회할지도 몰라요.”소원이 영숙을 보며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언니, 내겐 언니가 필요해요. 언니만이 나를 도울 수 있어요.”소원은 이상하게 영숙이 믿음직스러웠다. 선의는 숨기려 해도 잘 숨겨지지 않는 법이라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선의가 어디서 온 건지 모르지만 소원은 지금 그 선의가 너무 필요했다.“그래. 말해 봐.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소원이 답했다.“지금 저 방에 들어가면 얘기가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어요. 만약 내가 술병을 깨트린다면 대신 전화 좀 해줘요...”소원이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육경한에게 전화 좀 해줘요.”깜짝 놀란 영숙이 되물었다.“육경한 대표에게 전화하라고?”“네.”소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육경한에게 전화 좀 해줘요.”영숙은 두 사람 사
동영상을 찍으려면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는데 영숙이 룸으로 들어오는 순간 일을 그르치게 될 것 같아 일단 영숙에게 이렇게 귀띔했다.“내가 술병을 깨면 그때 전화해요.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절대 들어오면 안 돼요.”영숙이 말했다.“알았어. 네가 말한 대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소원이 들어간 뒤로 영숙은 너무 불안했고 안에서 들려오는 매질 소리에 가슴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다.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때마다 소원이 했던 말이 떠올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영숙은 소원이 총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다 계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절대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말자고 다짐했다. 소진용의 딸이니 무조건 믿고 협조해 줘야겠다고 속으로 되뇌는데 안에서 드디어 술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영숙은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여러 번 울리자 영숙은 혹시나 육경한이 받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영숙의 능력으로 육경한의 개인 번호 하나 얻어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기에 영숙은 바로 육경한의 개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개인 번호라 해도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거나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육경한이 영숙의 번호를 기억할 리는 없었다.연결음이 일고여덟 번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자 다급해진 영숙은 정말 당장이라도 차를 운전해 육경한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고 싶었다. 마지막 연결음이 끝나려던 찰나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누구시죠?”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적어도 소종의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붕 떠 있던 영숙의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다. 천만다행으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대표님, 저는 KB 클럽의 유영숙이라고 합니다.”샤워를 마친 육경한은 진한 갈색의 비단 잠옷을 입고 침대에 기대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갑자기 전화드려 죄송하지만 일단 제 말씀 좀 들어주세요...”영숙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저녁에 육연주 씨와 방민아 씨가 클
영숙은 잰걸음으로 달려가 얼른 차 문을 열어줬다.“대표님, 빨리 오셨네요...”반짝거리는 구두로 땅을 밟은 남자는 긴 다리로 신속하게 차에서 내리더니 영숙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대답을 듣지 못한 영숙은 난처한 기색 없이 매우 덤덤했다.‘왔으면 된 거지...’오히려 육경한을 뒤따라온 소종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영숙을 바라보며 말했다.“숙 매니저님, 직원을 이렇게 관심하는지 몰랐네요. 혹시 체리라는 직원과 특별한 관계라도 있는 건가요?”가시가 돋친 말에 영숙이 바짝 긴장했지만 이내 태연하게 말했다.“소 비서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육씨 가문을 걱정한 것뿐이에요. 두 분 다 있는 집 아가씨라 특수한 존재인데 스캔들에 휘말려서야 되겠어요?”영숙이 소종에게로 다가가더니 온갖 신비로운 척은 다 하며 이렇게 속삭였다.“위에서 요즘 불시 검문하는 거 아시면서. 다른 손님이었으면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데 대표님 손님은 저 따위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대표님 뜻을 먼저 여쭤봐야죠.”영숙의 해명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소종은 믿지 않았다. 오랫동안 재계와 유흥가를 오간 소종은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유흥가에서 아가씨를 거닐고 다니는 마담이라면 눈에 뵈는 게 돈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돈이 없으면 마담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부품과도 같아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아가씨를 위해 손님에게 밉보이는 건 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영숙이 몸담고 있는 이곳은 돈 많은 사람들의 천국이었다.소원이 이런 곳에서 몸을 사릴 수 있었던 건 소원이 운 좋아서가 아니라 영숙이 미리 손님을 선별해서 줬기 때문이었다. 업무를 성사하기 위해 오는 사장님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런 손님들은 이곳의 아가씨들을 건드리는 법이 거의 없었고 그저 업무 수요 때문에 형식적으로 아가씨를 불러 분위기를 띄울 뿐이었다.소종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둘러대는 영숙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숙 매니저님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나
방민기는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연신 신음했다. 옷을 입지 않아서 그런지 그 모습이 너무 얍삽해 보였고 누가 봐도 여자가 특수한 서비스를 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들어온 사람이 육경한이라는 걸 발견한 방민기가 입을 열었다.“매부, 드디어 왔네. 이 여자...”미친 여자라고 말하기도 전에 화가 치밀어오른 육경한이 아무 이유도 없이 방민기에게 발차기를 날렸다.“아악.”발차기를 정통으로 맞은 방민기가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에서 한 바퀴 빙 굴렀다. 찢어질 듯이 아픈 건 둘째 치고 너무 억울했다.저 미친 여자를 더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하려는데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얻어맞은 것이다. 나오기 전에 운수라도 보고 나왔으면 이런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육경한이 여자 앞으로 다가가서는 쪼그리고 앉아 축 늘어진 여자의 턱을 들어 올리며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비꼬기 시작했다.“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왜 또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소원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너무 흐리멍덩했고 몸이 불타올라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았다.육경한은 무슨 생각하는지 한참 동안 소원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갑자기 손을 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서 보고 있는 영숙을 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이에 소종이 얼른 물었다.“대표님, 여긴 어떻게 할까요?”육경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여기 내 사람은 없는데.”그 뜻인즉 안에 있는 소원과 방민기는 그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니 어떻게 처리할지는 클럽에서 알아서 정하라는 말이었다.마음이 다급해진 영숙이 입을 열려는데 육경한의 질문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숙 매니저, 여기 내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 있지?”육경한이 말한 내 사람은 당연히 육연주와 방민아였다. 영숙이 전화했을 때 분명 육연주와 방민아가 취했다고 했는데 정작 두 사람은 여기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영숙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방민아는 종래로 그녀의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던 육경한이 갑자기 이렇게 묻자 한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그게...”잠깐 뜸을 들이던 방민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연주랑 클럽에 갔었어요.”방민아는 더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육경한이라면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더 깊이 물어보지 않았다.아니나 다를까 육경한은 이 말을 듣고 더 캐묻지 않았지만 방민아가 오히려 되물었다.“경한 씨, 이건 왜 묻는 거예요?”“별거 아니에요.”육경한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일찍 쉬어요.”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다. 방민아도 더는 매달리지 않고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요. 경한 씨도 일찍 쉬어요.”통화가 끝나자 소종이 육경한에게 물었다.“대표님, 방민기 대표는... 어떻게 할까요?”사이가 좋든 나쁘든 방민기는 결국 육경한의 미래의 형님이었기에 그가 팬티만 입고 이곳에 발라당 누워있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육경한은 처참한 꼬락서니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방민기를 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차에 던져넣고 방씨 저택으로 보내.”“네, 알겠습니다.”소종도 그렇게 생각했다. 방씨 가문과 정략결혼을 한 상태라 방민아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손 놓고 볼 수는 없었다. 이 일이 밖으로 새 나가는 날엔 방민아만 난처해질 것이다.소종이 방민기를 밖으로 끌어내려는데 술에 취한 방민기는 축 늘어져 있었고 아까 깜짝 놀라서 그런지 돼지보다 더 무거웠다. 일단 문 앞까지 끌어내고 영숙에게 사람을 찾아와 처리하라고 하려는데 영숙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 소원을 살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숙은 소원을 챙겨야 했다. 매니저로서 아가씨를 관리하고 있는 영숙은 소원을 챙기는 게 당연했고 이를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영숙이 소원을 부축해 문 쪽으로 걸어갔다. 볼이 발그레한 소원은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지만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아름다웠다. 그렇게 육경한 옆을 지나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육경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