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은 지금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힘껏 안지철의 얼굴에 펀치만 계속 날렸다. 그렇게 이가 전부 부서진 안지철은 잘못 삼켰다가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다.소원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육경한.”육경한의 주먹이 안지철의 얼굴에서 1cm 떨어진 곳에 멈췄다. 소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육경한의 얼굴에는 아까 돌에 맞아서 흘린 피와 안지철을 때리면서 튄 피가 섞여 유난히 음침해 보였다.이에 소원은 전에 호러물에서 봤던 얼굴 없는 남자가 떠올랐다. 육경한은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아무 표정 없이 소원을 바라봤다.“왜? 이 자식 손을 빌려서라도 나 무너트리게?”이 말에 소원은 말문이 막혔다. 안지철이 죽으면 증인도 사라지게 되니 소원은 안지철이 죽는 게 싫었다. 유시연도 찾을 수 없는 마당에 안지철이라도 살아 있어야 유진을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았다.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소원은 육경한에게 안지철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안지철이 나쁜 건 맞지만 법률로 제재해야지 육경한이 사적으로 재판해서는 안 되었다.육경한은 늘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생각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소원이 원하는 건 정의로운 재판밖에 없었다.안지철은 지은 죄는 법원에서 판결하는 게 맞았다.“육경한, 너...”소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부어올라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는 안지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당신이 그 사람이야?”육경한이 안지철을 힐끔 쳐다봤다.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는 얼굴이 부어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기에 육경한의 살기등등한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다.“당... 당신이 감정을 맡긴 사람이네. 당신이 그 사이코패스였어?”안지철은 그제야 육경한이 왜 자기를 폭행했는지 알게 되었다. 하긴, 아무 병도 없는데 샘플을 바꿔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안지철은 육경한이 어느 정도로 미쳤는지 모르지만 그 약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분노
소종 뒤로 방민아가 따라왔다. 육경한이 걱정되었던 방민아는 소종에게 무슨 소식이 있으면 바로 알리라고 했지만 소종은 차마 방민아에게 육경한이 소원을 구하러 갔다고 말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방민아는 몰래 소종의 뒤를 따라 병원에 온 것이었다.방민아를 발견한 순간 소종의 안색이 변하더니 잽싸게 앞으로 다가가 말리려는데 방민아가 소종의 손을 뿌리치더니 가져온 외투를 육경한에게 걸쳐줬다.“경한 씨, 도대체...”방민아는 육경한의 얼굴을 보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흙과 피가 마치 물감처럼 남자의 얼굴에 흩뿌려져 있었고 옷도 엉망진창이었다. 이 정도로 망가진 육경한은 방민아도 처음이라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심이 타올랐다. 다른 여자를 위해 이렇게 얼빠진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다만 밖으로 드러낼 엄두가 나지 않았던 방민아는 솟구쳐 올라오는 질투를 꾹꾹 참아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경한 씨, 일단 상처부터 처리해요. 이마가...”방민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이마는 어쩌다 다친 거예요?”육경한이 그제야 방민아를 발견한 듯 그쪽을 힐끔 쳐다봤다.“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육경한의 표정이 어딘가 언짢아 보였다. 방만아는 그런 육경한을 보며 기분이 상했지만 결국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경한 씨가 걱정돼서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육경한이 자기를 버리고 간 게 소원을 위해서였다는 걸 알고 방민아의 가슴에 난 틈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한계에 다다르는 것 같았다. 전에 육경한과 약속한 것처럼 유명무실한 결혼은 싫었다. 소원은 마치 가시처럼 육경한의 가슴에 박혀있었고 방민아가 아무리 빼내려 해도 빼지지 않았다.“여기 남아있을 필요 없으니까 이제 돌아가요.”간단한 한마디였지만 뜻은 명확했다.“하지만... 나는 경한 씨 옆에 있고 싶어요...”방민아는 너무 서러웠다. 육경한의 약혼녀는 분명 방민아인데 그가 다른 여자 곁을 이렇게 지키는 게 너무 싫었다.“방민아 씨, 돌아가요.”육경한이 성까지 붙여서 차갑게
소종을 바라보던 그녀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소 비서님, 별장으로 돌아가시는 길이신가요? 제가 지난번에 별장에서 귀걸이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혹시 같이 타고 가도 될까요?”소종은 당연히 거절할 수 없었다.그 별장은 유진이가 들어가기 전에도 방민아가 종종 방문해 육경한과 식사를 함께했던 곳이었으니 말이다.게다가 별장에는 방민아를 위해 마련된 전용 객실도 있었다.하지만 소종은 의아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방민아와 육경한이 여전히 각방을 쓰고 있는지 말이다.보통 성인 남녀라면 서로 끌리는 감정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런 상황은 다소 이상했다.방민아는 외모도 준수했고 몸매나 분위기 역시 상위권이라 할 만했다. 특히 그녀 특유의 재벌가 아가씨 같은 기품은 매우 매력적이었다.그런데도 육경한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심지어 자신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여자를 찾는 편인데 육경한은 아무런 욕구도 없는 듯했다.그래서 한동안 소종은 육경한이 혹시 어떤 신체적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었다.예전 소원과 함께할 때 육경한의 표정은 가장 매력적으로 빛났고 항상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하지만 방민아와 함께한 뒤로는 그런 열기가 사라지고 차가운 표정만 남았다.별장에 도착한 뒤 소종은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유진이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방민아도 뒤따라 올라왔는데 그녀가 귀걸이를 찾으러 가지 않고 자신을 따라오자 소종은 퍽 난감했다. 결국 그가 물었다.“민아 씨, 귀걸이는 안 찾으시나요?”그러자 방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도 아이를 좀 보고 싶어서요.”소종은 순간 멈칫했다. 육경한의 특별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방민아가 아이를 봐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이전에 방민아를 데리고 아이를 보러 간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이런 소종의 마음을 알아채서인지 방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경한 씨가 전에 저더러 아이 봐도 된다고 했어요. 믿기 어려우시면 경한 씨한테 전화해서 확인하셔도 돼요. 아니면
소종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별장이 워낙 멀어 직접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게 빠를 것 같았지만 유진이를 혼자 두고 가는 것도 걱정이었다.집에는 어린아이에 대해 잘 모르는 도우미 두 명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그때 방민아가 자청하며 말했다.“소 비서님, 제가 아이 돌볼게요. 소 비서님은 아주머니를 병원에 데려다주세요.”소종은 잠시 망설였다. 방민아를 아이 곁에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러자 방민아가 덧붙였다.“걱정 마세요. 제가 잘 돌볼게요.”그녀는 고개를 숙여 유진이에게 말했다.“유진아, 네가 착하게 말을 잘 들어야 아저씨가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다줄 수 있어. 이모 말 들어줄래?”어린 유진이는 아직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고 그저 할머니를 살릴 수 있다면 뭐든 좋다고 생각했다.하여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말했다.“들을게요! 이모 말 잘 들을게요. 우리 할머니 구해주세요!”유진이의 말에 안심한 소종은 곧바로 아주머니를 업고 차에 태운 뒤 병원으로 향했다.방민아는 먼저 두 도우미에게 유진이가 혹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지 물었다.그런 다음 두 사람에게 자신이 아이를 돌볼 테니 밖에서 쉬라고 말했다.도우미들은 방민아가 자주 별장에서 육경한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봐왔고 그녀가 곧 유진이의 새어머니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따라서 그녀의 말을 거스르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그렇게 방민아는 아이의 방을 둘러보았다. 별장의 단순한 흑백 인테리어와 달리 이 방은 어린 소년에게 어울리도록 꾸며져 있었다.벽에 걸린 그림들과 책상, 침대까지 모두 소년의 방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육경한이 유진이를 정말 소중히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떠올리자 방민아의 마음속에서 불편한 감정이 점점 커져갔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유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이름이 뭐니?”“유진이요.”유진이는 조금 전보다 진정된 상태였다.그러나 방민아는 그에게 있어 낯선 이모일 뿐이었는지
유진이는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엄마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가가 붉어졌다.“엄마... 엄마다...”아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방민아를 애타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모, 저 언제 엄마 볼 수 있어요?”유진이는 엄마를 간절히 보고 싶었다. 엄마를 볼 수 있다면 그와 함께 보고 싶었던 서현재 삼촌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진이는 그 둘이 너무나 그리웠던 것이다.“이모 말 잘 들으면 엄마 만나게 해줄게.”아이를 달래듯 방민아는 부드럽게 속삭였다.“네. 유진이 말 잘 들을게요!”유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방민아는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그럼 이제 잠깐 자야겠네. 힘을 키워야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지, 맞지?”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방민아의 말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정도였는데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도우미들에게도 충분히 들릴 만큼이었다.육경한은 유진이를 절대 혼자 두지 말라는 특별 지시를 내린 바 있었다.그래서 방민아가 곁에 있더라도 도우미들은 문밖에서 대기하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비록 방민아가 곧 안주인이 될 사람처럼 행동했지만 도우미들은 그녀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결국 방민아는 새엄마일 뿐이었고 새엄마가 아이를 해쳤다는 뉴스를 수도 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만약 사고라도 생긴다면 도우미들은 자신들이 책임질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문밖에서 그녀들의 귀에 들리는 방민아의 말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녀가 아이를 다독이는 모습에 안심한 도우미들은 긴장을 조금 늦추었다.그러나 그녀들은 보지 못했다.방 안에서 방민아가 이미 얼굴이 붉어진 유진이를 이불도 덮여주지 않은 채 얇은 잠옷만 입힌 상태로 침대에 눕혔다는 것을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바람은 방 안으로 들어와 곧바로 유진이 쪽으로 불어닥쳤다.방민아는 침대 옆에 앉아 육경한을 꼭 닮은 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질투와 증오가 서려 있었다.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그녀는 소
의사는 몸이 스스로 회복하고 있는 중이라며 환자가 오랜 시간 제대로 잠을 못 잤기 때문에 이렇게 깊이 잠든 것이 오히려 좋은 징조라고 설명했다.육경한은 의사의 말이 정말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침대 옆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잠시 후,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 건 사람은 소종이였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육경한은 짧게 침묵하다 차갑게 말했다.“알아서 처리해.”그때였다.소원이 희미하게 정신을 차리며 들은 말은 바로 ‘처리’라는 한 단어였다.‘처리... 누구를 처리한다는 걸까?’그러다 소원은 안지철이 떠올랐다.‘그 사람을 처리한다는 거겠지?’육경한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다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원을 발견했다.그녀는 무표정하게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그 모습에 잠시 놀랐지만 육경한은 곧 안도와 함께 기쁨을 느꼈다.조금 전 소원이 쓰러졌던 모습이 떠올라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기 때문이다.“깨어났어?”짧게 말한 뒤, 육경한은 소원의 이마에 손을 대 체온을 확인하려 했다.그녀가 깨어난 뒤에는 체온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했고 발열이 있다면 즉시 조치를 취하라고 의사가 당부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손이 이마에 닿자마자 소원은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더러운 손으로 나 만지지 마!”순간 몸이 얼어붙더니 육경한이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뭐라고?”소원은 힘겹게 몸을 옆으로 돌리며 냉랭하게 말했다.“나가.”그녀는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육경한이 나타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지금의 소원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잠깐의 휴식 같았던 이번 실신 이후, 소원은 다시 싸울 방법을 찾아야 했다.이제는 육경한이 아닌, 그들과 싸워야 할 차례였다. 특히 방민아 말이다.그녀가 했던 말들은 아직도 소원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소원의 직감은 방민아가 단순히 위협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겉으로
“돌아온 후 한 일 중에서 단 하나라도 네 목숨을 천 번이나 내놓기에 충분하지 않은 일이 있었어?”육경한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내가 널 그렇게 많이 봐줬는데 대체 어디가 부족했단 말이야!”그러자 소원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웃었다.“하하...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래? 다 네가 나를 억지로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잖아.”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육경한, 나는 그저 정정당당하게 너와 맞섰을 뿐이야. 그런데 넌 매번 온갖 비열한 술수를 부렸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잖아. 안지철, 네가 음모를 꾸며서 죽인 거지? 그다음은 누굴 죽일 건데?”“유시연?”육경한은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야. 난 안지철을 죽이지 않았어.”그러나 소원은 비웃었다.“물론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겠지. 너 같은 사람이 그런 자잘한 일에 손대겠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대신 처리해줄 사람들이 줄을 서 있잖아. 완벽하게, 빈틈없이 말이야.”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너한테 사람 목숨이라는 건 뭐야? 네가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긴 게 어디 한두 번이야?”이 말에 육경한은 분노에 차 소원의 손목을 단단히 잡아 쥐었다.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며 목소리조차 거칠어졌다.“내가 안 했다고 말했잖아!”“육경한!”소원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너 현재한테 손 써서 기억을 잃게 만든 건 물론 나한테서 유진이까지 빼앗아갔잖아. 그 순간부터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난 네가 역겨워.”이 말에 육경한의 몸이 굳더니 손에 들어갔던 힘도 점점 풀렸다.길게 이어진 침묵 후, 그는 문밖으로 발길을 돌렸다.곧 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침대마저 흔들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그는 지금 이 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소원을 찢어발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그렇게 미운 거야? 왜 뭘 하든 마음을 돌릴 수 없는 거지?’심지어 육경한은 나중에 나타난 서현재에게조차 자신이 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소원의 눈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안 요원은 소종의 말을 과장이라 생각했지만 절차대로 상부에 보고하기로 했다.잠시 후, 병원의 관리 책임자가 직접 내려왔다.그는 소종의 회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소종의 제안이 허언이 아님을 금세 알아챘다.책임자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더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그러고는 소종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며 말했다.소종은 공손하게 부탁했다.“이번 일은 단순한 오해입니다. 아래 직원들에게도 함부로 말을 퍼뜨리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저희 대표님이 가족이 입원 중이라 감정이 격해져 잠시 이성을 잃으신 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울 때가 있잖아요, 안 그렇습니까?”병원 책임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작은 일입니다.”병원 입장에서는 육경한이 문 하나를 부순 것이지만 실질적인 피해도 없었고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니었다.게다가 이 사건으로 병원은 건물 전체의 문을 방탄 문으로 교체할 예산을 얻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병원이 이득을 본 셈이었다.책임자는 다짐하듯 말했다.“안심하세요. 직원들에게는 절대 입을 닫으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소종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예산은 이미 배정해 두었습니다.”책임자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소종이 이렇게 신중하게 행동한 이유는 단순했다.최근 안지철 사건과 더불어 소원이 육경한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던 일이 계속해서 소문으로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여기에 오늘 사건까지 엮인다면 사람들이 육경한을 정말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될 위험이 있었다.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연결되면 예상치 못한 나비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하여 소종은 마치 소방관처럼 불이 더 번지기 전에 빠르게 진화하는 데 집중했다.육경한은 이미 차로 돌아와 있었다.손의 부상은 소종이 부른 의사가 차 안에서 직접 처치했다.처치가 끝난 후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차를 출발시키라는 명령도 하지 않았고 소종은 분위기를 읽고 말없이 기다렸다.소종은 지금까지 이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
연기가 제법인 황진수는 진짜로 배가 아픈 척했고 심지어 자신의 혀를 깨물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순간 멍해진 소원이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 의사를 부를까요?”황진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화장실 갔다 오면 될 것 같아요. 이것 좀...”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높이 들었다. 혹시라도 소원이 받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소원 씨,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육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의사가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황진수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사라졌다.죽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던 소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이 있는 VIP층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한 소원은 죽을 경호원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육경한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조금 전 황진수는 그녀와 육 대표를 만나게 하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철수하라고 했다.소원이 문을 두드리자 방안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고서를 보고 있는 육경한은 소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황진수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그냥 거기에 둬.”테이블 위에 놓여진 손도 대지 않은 음식과 손에 든 죽을 번갈아 본 소원은 육경한이 갑자기 죽을 먹고 싶어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이 죽 가게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제 샀던 죽 가게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았다.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손에 든 죽을 놓은 소원은 육경한이 여전히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자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육경한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소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황 비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나더러 대신 갖다 주라고 했어.”육경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나를 보러 온 줄 알았네.”약간 서운함이 담긴 말투에 소원은 이왕 온 김에 몇 마디 안부는 주고받아야
사생아가 많은 방현수는 여자아이인 방민아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었다.그리고 방민기는 이미 판결이 났고 방씨 가문이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여론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 일 이후, 방현수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기대하던 두 아이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방민아는 아마도 방현수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방현수가 돈과 힘을 들여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자신의 추측을 말한 황진수가 한마디 보탰다.“방민아 씨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방현수의 마음도 바꾸고요.”육경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방민아가 나오면 소원은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이 될 것이다. 여자들 사이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욱경한은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황진수에게 말했다.“방씨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 봐. 그리고 방민아가 나오면 반드시 24시간 내내 감시하여 소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황진수가 말했다.“알겠습니다.”육경한이 또 물었다.“진아연 쪽은 어때, 소식이 있어?”진아연이 또 도망쳤다. 지난번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후 몸이 나아지자 간호사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빠져나갔다.아마도 육경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래서 육경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기회를 잡아 도망친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 일도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경한은 그녀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이때 황진수가 말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 출입국 사무소에 다 물어봤지만 아직 다른 데로 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긴장을 놓치면 안 돼. 진아연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황진수가 알겠다고 하자 육경한도 조금 지쳤는지 한마디 했다.“이만 나가 봐.”황진수는 집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육경한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말했다.“육 대표님,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병실 밖에 있던 황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감정적 가치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지애는 가스라이팅에 정말 능숙했다.육경한에게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육경한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런 감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탐욕스러워지다니...솔직히 말해서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황진수가 소리 지르는 이지애를 끌어내어 경호원들에게 넘기자 이지애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육경한의 누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나를 무례하게 대한 일, 나중에 분명 후회할 때가 있을 거야.”황진수는 냉정하게 말했다.“여사님, 더 이상 자신을 육 대표의 누나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저 사촌 누나일 뿐인데 왜 항상 ‘사촌’이라는 말을 잊으시는 건가요? 밖에서 본인을 육 대표의 친누나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못 고치는 건가요?”황진수는 이지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육경한의 누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 대표들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또 육경한과도 자주 만났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진짜로 육 대표의 누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지애는 결국 자업자득의 꼴이 되었다.이지애가 분노하며 말했다.“너 같은 놈은 평생 이 꼴로 살 거야. 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잘 들어, 경한이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나를 누나로 생각할 거야. 그때면 널 첫 번째로 해고할 테니 두고 봐!”“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황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정말!”이제 육경한이 그녀의 뒤를 봐주지 않으니 황진수도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이지애를 무시하며 바로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세요. 앞으로 육 대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세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지애는 욕을 하면서 문을 잡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지애를 보더니 통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