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은 따라갔다. 단호한 여름의 등을 보니 여기서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영원히 여름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잠깐만, 난 사실… 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어.”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온전하게 전한 것이었다.여름을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하준은 고민스러운 듯 눌린 소리를 냈다.“하지만 난 지안이랑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고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어. 지안이를 져버릴 수 없었어. 그래서 당신이랑 이혼할 수밖에 없었어. 내 마음이 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당신이랑 있는 게 더 좋아. 당신이 양하나 서인천이랑 같이 있는 걸 보면 화가 나.”“그래?”여름은 살짝 눈시울을 붉힌 채로 하준을 노려보며 비웃었다.“당신은 백지안이랑 너무 깊게 얽혀 있었어. 날 좋아한다고는 해도 그게 백지안에 대한 당신의 죄책감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일까? 다음에 또 백지안의 말 한마디면 또 날 헌신짝처럼 버리겠지. 양치기 소년 얘기 알지? 아무리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쳐봤자 난 안 믿을 거야.”“아니야. 나랑 지안이는…이제 정말 끝이야.”하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을 하고 나니 뭔가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듯 마음이 가벼웠다.사실 하준은 진작부터 백지안을 사랑하지 않았다. 지안과 함께하면 어쩐지 말할 수 없는 피로감이 쌓이곤 했다.심지어 결혼식은 하준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어쨌든 못 믿어. 다시는 당신들 사이에 껴서 총알받이가 될 생각은 없거든. 다시는 찾아오지 마.”여름은 하준을 노려보고는 힐 소리만 남기고 빠르게 멀어져 갔다.하준이 따라올까 봐 두려운 듯한 모습이었다.하준은 괴로웠다.어렵사리 속마음을 모두 꺼내 놓았는데도 여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아마도 내가 너무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겠지.’----여름은 저녁에 밥을 먹으면서 임윤서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다.“뭐? 최하준이 정말로 널 좋아한다고 말했어?”임윤서가 기뻐했다.“잘됐잖아? 이제부터 죽도록 괴롭혀줄 수 있겠네?”“그렇게 만만하지 않을 거야.”여름이 한숨을
“너무 두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아무런 악의가 없습니다.”“내가 송영식의 평판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악감정이 없을 리 없잖아요!”임윤서는 그 집 식구들을 전혀 믿지 않았다. 전에 여름이 FTT 어르신에게 잡혀갔을 때는 얼굴을 다 상하지 않았던가?‘난 아직 남친도 없는데 얼굴이 엉망 되면 안 되지. 갇히고 싶지도 않아.’“협조해 주시지 않는다면 억지로 모시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집사가 한숨을 쉬었다.보디가드가 덤비려는 것을 보고 여름이 다가왔다.“윤서야, 같이 가 줄게.”“강 대표님…”집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름이 벨레스의 후계자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뭐, 쿠베라 집안 분들이 그렇게 경우 없는 분들은 아니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는 있겠죠. 하지만 제가 친구를 혼자 보내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여름이 솔직히 말했다.“그러시지요.”집사가 끄덕였다.그럼 같이 가실까요?”“여름아 정말 같이 가줄 거야?”임윤서는 불안했다. 쿠베라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호랑이 굴에 걸어 들어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괜찮아. 우리 아버지 체면을 봐서라도 그 집에서 우리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거야.”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여름도 확신은 서지 않았다.그래서 차에 타자 좀 양심은 없지만 하준에게 구조 요청 문자를 보냈다.‘어쩔 수 없지. 최하준은 꼴 보기 싫지만 그 인간이 와준다면 나랑 윤서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어쨌거나 지금 최하준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1시간 뒤.차가 송영식의 본가에 들어섰다. 최하준의 본가가 거대하고 장엄한 느낌이라면 쿠베라 본가는 정자에 소나무, 난간 등 꽤나 전통적이 느낌이었지만 적송 한 그루만 해도 집 한 채 값은 되어 보였다.아치문을 지나니 임윤서의 눈에 키가 크고 늘씬한 여자가 보였다. 빨리 지나가서 겨우 옆모습을 본 게 다지만 임윤서를 놀래키기에는 충분했다. “왜 그래?”여름이 윤서를 돌아보았다
앞으로 작은 사모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집사가 덧붙였다.“큰아가씨가 지금 쿠베라 회장이십니다. 평소에는 굉장히 바쁜 분이세요.”“큰아가씨라….”임윤서는 멍해졌다.여름이 피식 웃으며 임윤서를 쳐다보았다.“와, 네 오빠의 전 여친이 쿠베라 회장이라니.”“…아니야. 내가 그냥 잘못 본 것 같아.”임윤서의 입이 비죽거렸다.‘우리 오빠가 그런 사람을 사귈 정도 능력자일 리가 없지.’거실에 들어가서 보니 세 사람이 소파에 앉아있었다.가장 상석에는 백발의 온화한 노인이 앉아 있고 양옆으로 훤칠한 중년 남자와 단정한 차림의 중년 부인이 있었다. 부인이 송영식과 꽤 닮아서 한눈에 두 사람이 송영식의 부모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안녕하세요.”임윤서와 여름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집사가 옆에서 소개했다.“이분은 강여름 대표십니다. 벨레스 서경주 회장의 따님이십니다. 강여름 대표와 임윤서 님은 친구라서 함께 오셨습니다.”할아버지인 송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재계에서 강여름 이름이 종종 거론되고는 했다. 여름의 능력과 미모를 다들 칭송했다.‘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건축 회사의 디자이너라니. 보통내기가 아니야. 저런 인물과 친구라니 임윤서도 그렇게 우스운 아가씨는 아닌 모양이군.’세 사람의 시선이 임윤서에게로 향했다.윤서는 퇴근 후 화장도 지운 상태인데다 평범하기 짝이없는 청바지와 티를 입고 있었다.그러나 피부는 깨끗하고 눈은 또렷했으며 이국적인 이목구비는 시원스러웠다. 세 사람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제…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세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임윤서는 불편했다.“다 해명할 수 있습니다. 송 대표가 3년 전 제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그 누명으로 뷰티분야에서 절 블랙리스트에 올려 제가 이 바닥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도록 만들었어요. 이번에 제가 벌인 일은 그냥…’이에는 이’같은 수준이었다고나 할까요.”송우재가 콧방귀를 뀌었다.“우리 쿠베라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건드려도 된다고 생각
송우재가 뻔뻔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뭐 그럴 것까지야…. 그냥 우리 영식이의 평판을 건드렸으니 그것만 배상하면 되지. 이제는 다른 사람은 감히 결혼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테니 겁나면 네가 그냥 들어오거라.”“……”‘뭐라고? 저 노인네가 뭐라는 거야?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여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우리 윤서가 송영식 대표와 결혼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바로 그거다.”송우재가 끄덕였다.“우리도 어쩔 수가 없잖니? 영식이 에미가 그 애에게 선 자리를 주선하려고 했는데 온통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야.”그러더니 자기 며느리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전유미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그래요. 얼마나 괜찮은 아가씨를 소개하려고 했었다고요. 거의 결혼까지 다 성사된 판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영식이 결혼을 물어내야겠어요.”“못 해요.”임윤서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저희 집이 좀 가난하거든요. 아무래도 쿠베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집안이죠.”송우재가 콧방귀를 뀌었다.“우리도 다 알아봤다. 리마도 동성에서는 한가닥 하는 집이더구나. 예전 같으면 많이 기운다고 하겠지만 지금은 우리 영식이 평판이 영 아니니 억지로 끼워 맞추면 얼추 넘어갈 만하더군.”임윤서는 울고 싶었다.“송영식은 저를 싫어해요. 너도 송영식이 싫습니다. 일을 이렇게 억지로 밀어붙이시면 안 되죠.”“사랑은 이제 장차 키워나가면 된다.”전유미가 달랬다.“저는 송영식에게 맞지 않아요. 전에 백윤택이랑 어울렸었거든요. 뉴스도 나오고 그랬어요. 가서 물어보세요. 사람들이 다 알아요.”임윤서는 고육계를 쓰기로 했다.“우리가 다 알아봤다. 그건 가짜뉴스더구나.”송윤구가 유유히 덧붙였다.“……”‘아니,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되는 건데?’임윤서는 이를 갈았다.“어쨌든. 전 죽어도 송영식하고 결혼은 못 합니다. 평판을 떨어트린 일로 배상을 받고 싶다면 뭐든 다른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 백여시에게 뇌가 물들어서 세뇌된 인간하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오후에는 다시는 오지 말라더니 저녁이 되니 바로 날 찾아대다니….’여름은 하준의 눈에 떠오르는 득의양양함을 알아채고 하준을 매섭게 한 번 노려보았다.하준은 못 본 척하고는 고개를 돌려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렸다.“할아버지, 이분들은 불러서 뭐 하시게요?”송우재가 턱으로 임윤서를 가리켰다.“저 사기꾼 녀석이 우리 영식이 평판을 땅바닥에 떨어트렸으니 영식이는 이제 결혼도 못 하게 생겼잖니? 그래서 우리 애랑 결혼하라고 했다.”하준도 송우재의 생각에 흠칫 놀랐다.“영식이는 알고 있습니까?”“내가 얘기는 했지.”송우재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하준아, 나는 이제 늙었다. 계속 이러고 영식이 결혼을 미루고 있을 수만은 없다.”하준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송영식이 얼마나 임윤서에게 이를 가는지는 하준이 제일 잘 알았다.“할아버지, 이 두 분은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곤란하게 하시면 안 되죠.”“미리 구원의 손길을 구해놓고 들어왔구먼.”송우재가 짜증 난다는 듯 임윤서를 흘끗 쳐다봤다. “다음에는 다시 보자. 난 네가 손주며느리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영식이를 그렇게 다룰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 그 애랑 결혼만 해준다면 내가 쿠베라 주식의 10%를 너에게 주마.”임윤서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돈은 저도 버는데 굳이 쿠베라의 주식이 필요하겠나요? 필요 없습니다.”쿠베라쪽 사람들은 임윤서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하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아무래도 임윤서 씨를 설득하기는 힘드실 것 같네요.”하준이 웃더니 여름의 손을 잡고는 걸어 나갔다. 임윤서가 후다닥 따라 나왔다.임윤서의 대답을 듣고 한참을 꼼짝않고 있던 송우재가 마침내 테이블을 탕 쳤다.“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다니, 내 손주며느리 감으로 합격이다!”송윤구는 어이가 없었다. 전유미는 디테일한 애기를 했다.“방금 하준이가 그 강여름 손을 잡고 나가던데 무슨 뜻일까요? 두 사람이 재결합하고 백지안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인가?”“그 결혼 파투 나지 않았어요? 듣자니
임윤서가 의미심장하게 하준을 훑어보았다.“여름아, 난 네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다. 나중에 송영식이 막 나한테 집에서 나가라고 했는데도 내가 안 나가고 버티고 있다가 정신병원에 갇힐지도 모르잖아. 그거 얼마나 억울하냐?”“……”하준은 정말 이 길로 임윤서를 영식이 품에 던져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이제 겨우 조금 진도를 나가나 했더니 이렇게 찬물을 끼얹을 일이냐고?’“그러게나 말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신중하게 골라야 해.”여름도 의미심장한 말투로 받았다.“특히 백여시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인간은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되지.”송영식의 본가에서 무사히 빠져나오자마자 하준은 둘에게 아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닦이는 중이었다.하준은 매우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라면 그 온갖 승냥이들을 물리치고 이날까지 FTT를 이 험한 재계에서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여자들 앞에서는 완전히 멍청이 취급을 받잖아….’하준의 얼굴이 축 처졌다.“회장님…”이때 상혁이 차를 몰고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왜 절 여기로 부르셨…?”“임윤서 씨 집으로 모셔.”그러더니 하준은 두말도 않고 여름의 손을 꽉 잡고 자기 차로 갔다. 애정전선에 방해가 되는 임윤서를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놔. 난 윤서랑 같이 산다고. 같이 타고 가면 돼.”여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손을 빼낼 수 없었다. 결국 하준의 손에 밀려서 조수석에 앉고 말았다.“당신이 뭐 라든 오늘 내가 구해줬으니까 밥은 한 끼 해줘. 배고프단 말이야.”사뭇 당당한 태도로 하준이 말을 받았다.하준의 그 강경한 얼굴을 보니 오늘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안전벨트를 매어주는 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뭐 먹고 싶은데?”“내가 먹고 싶은 건 아무거나 다 해줘?”여름의 말을 듣고는 하준이 눈빛을 빛내더니 답을 듣기도 전에 액셀레이터를 밟았다.가는 길에 전화를 한 통 했다.“돼지갈비랑 고기 각 15kg, 스타벨리로 가져와.”‘맙소사…’여름은 한숨을 쉬었다.
“……”여름의 태양혈에서 힘줄이 꿈틀거렸다.‘헐… 이거 뭐 완전히 밥해주는 이모님 취급이잖아. 난 어쩌다가 이딴 인간을 사랑했던 걸까?됐다. 내 계획을 위해서 조금만 더 참자고.’여름은 눈을 질끈 감고 앞치마를 두르고는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하준은 거실에서 TV를 보며 가끔 한번씩 돌아보았다.주방에서 분주한 여름을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혼자 와서 사는 동안에는 뭔가 빠진 듯 텅 빈 느낌이었는데 그게 뭔가 싶었더니 그건 바로 여름이었다.그런 텅 빈 느낌은 예전에 해변 별장에도 있었다. 거기는 지안도 있고 밥해주는 이모님도 있었지만 이렇게 꽉 찬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여름은 한참을 분주히 움직인 결과 갈비와 보쌈을 완성했다. 두 손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배도 고팠다.하준이 주방에 들어가 보니 갈비, 보쌈, 갈비탕, 매우 갈비찜에 탕수육까지 담겨 있었다.하준이 얼굴을 찌푸렸다.“갈비랑 보쌈 해달라니까?”여름이 하준을 흘겨보았다.“저기요, 음식을 골고루 드시라고요. 채소랑 같이 섭취할 수 있는 거 몇 가지 곁들였어. 혈압 조심해야지 말이야.”하준은 심장이 욱신거렸다.화가 나서 반짝이는 여름의 눈을 보니 마음이 녹아내렸다. 하준의 섹시한 입술이 기쁜 듯 씩 올라갔다.“나 신경 써주는 거야?”“……”‘관심 같은 소리 하네.’여름은 한숨을 쉬었다.“그런 건 그냥 상식이거든요. 제발 공부 좀 하고 살아.”“한 번에 다 먹을 거 아닌데.”하준이 유유히 입을 열었다.“냉동실에 얼려놨다가 하루에 하나씩만 꺼내 먹을 거야.”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한 가지만 매일 먹으면 안 된다고.”“알았어. 골고루 먹을게.”하준의 반짝이는 눈빛이 여름을 향했다. 얌전한 시바견 같았다.“……”여름은 그 시선을 피해 밥을 담고 먹을 준비를 했다. 여름도 저녁을 못 먹은 채로 끌려갔던 터라 배가 고팠다.그러나 고기 위주 식탁이라 아무래도 느끼했다.그러나 하준은 너무 좋아라 하며 먹었다. 아무래도 갈비와 보쌈이 제일 좋았지만 갈비탕이며 탕수육도
하준의 눈이 어두워졌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여름을 보고 서둘러 따라가 팔을 잡았다.“설거지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지 왜 말을 그렇게…”“그만 해! 오늘 그 집에서 구해준 건 몇 시간 동안 내가 밥 한 거로 다 갚은 거야. 게다가 솔직히 어제는 내가 당신 목숨을 구해준 건 내가 그냥 좋은 일 한 셈 치고 넘어갔잖아.”여름이 냉랭하게 웃었다.“다시는 나 찾아오지도 마. 다시는 당신한테 밥해주고 청소하고 빨래해주며 살고 싶지 않아. 앞으로는 여기로 전화하도록 해.”여름은 핸드폰에서 번호를 하나 찾아서 하준에게 보여주었다.목록에 저장된 이름을 보니 ‘XX 가사도우미’였다.하준의 얼굴이 시커멓게 되었다.여름은 한 마디 덧붙였다.“잘 찾아보면 나이 든 분 말고 젊은 분들 일하는 데도 있어. 하나하나 찾다 보면 잘 맞는 분 찾을 수 있을 거야.”그러더니 여름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쳐다보기도 짜증 난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다시금 울화가 치민 하준이 잠시 후 따라 나가 보았더니 여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집으로 돌아와 테이블에 놓인 밥그릇과 수저를 보니 마음이 답답했다.‘그냥 밥그릇 몇 개 씻는 거잖아? 저렇게까지 흥분할 일이냐고? 씻기 싫으면 말면 그만이지. 얘기를 하면 되잖아. 내가 막 억지로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하준은 휴대 전화를 꺼내 들고 이주혁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갑자기 그만두었다.이주혁은 백지안의 친구이니 이런 때 자신이 여름을 좋아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한 소리 듣게 될 것이 분명했다.하준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온라인에서 물어보기로 했다.-좋아하는 여자를 집에 초대해서 밥을 해달라고 하고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라고 했더니 도망갔습니다. 제가 잘못한 건가요, 아니면 여자가 너무 쩨쩨한 건가요?질문을 올리고 30분도 되지 않아서 댓글 창은 폭발직전이 되었다.-아이고, 이런 걸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니…. 여자분 빨리 도망쳐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어쩌다가 이런 남자에게 걸렸대?-여자한테 쩨쩨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