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재가 뻔뻔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뭐 그럴 것까지야…. 그냥 우리 영식이의 평판을 건드렸으니 그것만 배상하면 되지. 이제는 다른 사람은 감히 결혼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테니 겁나면 네가 그냥 들어오거라.”“……”‘뭐라고? 저 노인네가 뭐라는 거야?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여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우리 윤서가 송영식 대표와 결혼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바로 그거다.”송우재가 끄덕였다.“우리도 어쩔 수가 없잖니? 영식이 에미가 그 애에게 선 자리를 주선하려고 했는데 온통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야.”그러더니 자기 며느리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전유미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그래요. 얼마나 괜찮은 아가씨를 소개하려고 했었다고요. 거의 결혼까지 다 성사된 판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영식이 결혼을 물어내야겠어요.”“못 해요.”임윤서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저희 집이 좀 가난하거든요. 아무래도 쿠베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집안이죠.”송우재가 콧방귀를 뀌었다.“우리도 다 알아봤다. 리마도 동성에서는 한가닥 하는 집이더구나. 예전 같으면 많이 기운다고 하겠지만 지금은 우리 영식이 평판이 영 아니니 억지로 끼워 맞추면 얼추 넘어갈 만하더군.”임윤서는 울고 싶었다.“송영식은 저를 싫어해요. 너도 송영식이 싫습니다. 일을 이렇게 억지로 밀어붙이시면 안 되죠.”“사랑은 이제 장차 키워나가면 된다.”전유미가 달랬다.“저는 송영식에게 맞지 않아요. 전에 백윤택이랑 어울렸었거든요. 뉴스도 나오고 그랬어요. 가서 물어보세요. 사람들이 다 알아요.”임윤서는 고육계를 쓰기로 했다.“우리가 다 알아봤다. 그건 가짜뉴스더구나.”송윤구가 유유히 덧붙였다.“……”‘아니,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되는 건데?’임윤서는 이를 갈았다.“어쨌든. 전 죽어도 송영식하고 결혼은 못 합니다. 평판을 떨어트린 일로 배상을 받고 싶다면 뭐든 다른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 백여시에게 뇌가 물들어서 세뇌된 인간하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오후에는 다시는 오지 말라더니 저녁이 되니 바로 날 찾아대다니….’여름은 하준의 눈에 떠오르는 득의양양함을 알아채고 하준을 매섭게 한 번 노려보았다.하준은 못 본 척하고는 고개를 돌려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렸다.“할아버지, 이분들은 불러서 뭐 하시게요?”송우재가 턱으로 임윤서를 가리켰다.“저 사기꾼 녀석이 우리 영식이 평판을 땅바닥에 떨어트렸으니 영식이는 이제 결혼도 못 하게 생겼잖니? 그래서 우리 애랑 결혼하라고 했다.”하준도 송우재의 생각에 흠칫 놀랐다.“영식이는 알고 있습니까?”“내가 얘기는 했지.”송우재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하준아, 나는 이제 늙었다. 계속 이러고 영식이 결혼을 미루고 있을 수만은 없다.”하준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송영식이 얼마나 임윤서에게 이를 가는지는 하준이 제일 잘 알았다.“할아버지, 이 두 분은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곤란하게 하시면 안 되죠.”“미리 구원의 손길을 구해놓고 들어왔구먼.”송우재가 짜증 난다는 듯 임윤서를 흘끗 쳐다봤다. “다음에는 다시 보자. 난 네가 손주며느리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영식이를 그렇게 다룰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 그 애랑 결혼만 해준다면 내가 쿠베라 주식의 10%를 너에게 주마.”임윤서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돈은 저도 버는데 굳이 쿠베라의 주식이 필요하겠나요? 필요 없습니다.”쿠베라쪽 사람들은 임윤서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하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아무래도 임윤서 씨를 설득하기는 힘드실 것 같네요.”하준이 웃더니 여름의 손을 잡고는 걸어 나갔다. 임윤서가 후다닥 따라 나왔다.임윤서의 대답을 듣고 한참을 꼼짝않고 있던 송우재가 마침내 테이블을 탕 쳤다.“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다니, 내 손주며느리 감으로 합격이다!”송윤구는 어이가 없었다. 전유미는 디테일한 애기를 했다.“방금 하준이가 그 강여름 손을 잡고 나가던데 무슨 뜻일까요? 두 사람이 재결합하고 백지안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인가?”“그 결혼 파투 나지 않았어요? 듣자니
임윤서가 의미심장하게 하준을 훑어보았다.“여름아, 난 네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다. 나중에 송영식이 막 나한테 집에서 나가라고 했는데도 내가 안 나가고 버티고 있다가 정신병원에 갇힐지도 모르잖아. 그거 얼마나 억울하냐?”“……”하준은 정말 이 길로 임윤서를 영식이 품에 던져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이제 겨우 조금 진도를 나가나 했더니 이렇게 찬물을 끼얹을 일이냐고?’“그러게나 말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신중하게 골라야 해.”여름도 의미심장한 말투로 받았다.“특히 백여시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인간은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되지.”송영식의 본가에서 무사히 빠져나오자마자 하준은 둘에게 아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닦이는 중이었다.하준은 매우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라면 그 온갖 승냥이들을 물리치고 이날까지 FTT를 이 험한 재계에서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여자들 앞에서는 완전히 멍청이 취급을 받잖아….’하준의 얼굴이 축 처졌다.“회장님…”이때 상혁이 차를 몰고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왜 절 여기로 부르셨…?”“임윤서 씨 집으로 모셔.”그러더니 하준은 두말도 않고 여름의 손을 꽉 잡고 자기 차로 갔다. 애정전선에 방해가 되는 임윤서를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놔. 난 윤서랑 같이 산다고. 같이 타고 가면 돼.”여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손을 빼낼 수 없었다. 결국 하준의 손에 밀려서 조수석에 앉고 말았다.“당신이 뭐 라든 오늘 내가 구해줬으니까 밥은 한 끼 해줘. 배고프단 말이야.”사뭇 당당한 태도로 하준이 말을 받았다.하준의 그 강경한 얼굴을 보니 오늘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안전벨트를 매어주는 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뭐 먹고 싶은데?”“내가 먹고 싶은 건 아무거나 다 해줘?”여름의 말을 듣고는 하준이 눈빛을 빛내더니 답을 듣기도 전에 액셀레이터를 밟았다.가는 길에 전화를 한 통 했다.“돼지갈비랑 고기 각 15kg, 스타벨리로 가져와.”‘맙소사…’여름은 한숨을 쉬었다.
“……”여름의 태양혈에서 힘줄이 꿈틀거렸다.‘헐… 이거 뭐 완전히 밥해주는 이모님 취급이잖아. 난 어쩌다가 이딴 인간을 사랑했던 걸까?됐다. 내 계획을 위해서 조금만 더 참자고.’여름은 눈을 질끈 감고 앞치마를 두르고는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하준은 거실에서 TV를 보며 가끔 한번씩 돌아보았다.주방에서 분주한 여름을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혼자 와서 사는 동안에는 뭔가 빠진 듯 텅 빈 느낌이었는데 그게 뭔가 싶었더니 그건 바로 여름이었다.그런 텅 빈 느낌은 예전에 해변 별장에도 있었다. 거기는 지안도 있고 밥해주는 이모님도 있었지만 이렇게 꽉 찬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여름은 한참을 분주히 움직인 결과 갈비와 보쌈을 완성했다. 두 손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배도 고팠다.하준이 주방에 들어가 보니 갈비, 보쌈, 갈비탕, 매우 갈비찜에 탕수육까지 담겨 있었다.하준이 얼굴을 찌푸렸다.“갈비랑 보쌈 해달라니까?”여름이 하준을 흘겨보았다.“저기요, 음식을 골고루 드시라고요. 채소랑 같이 섭취할 수 있는 거 몇 가지 곁들였어. 혈압 조심해야지 말이야.”하준은 심장이 욱신거렸다.화가 나서 반짝이는 여름의 눈을 보니 마음이 녹아내렸다. 하준의 섹시한 입술이 기쁜 듯 씩 올라갔다.“나 신경 써주는 거야?”“……”‘관심 같은 소리 하네.’여름은 한숨을 쉬었다.“그런 건 그냥 상식이거든요. 제발 공부 좀 하고 살아.”“한 번에 다 먹을 거 아닌데.”하준이 유유히 입을 열었다.“냉동실에 얼려놨다가 하루에 하나씩만 꺼내 먹을 거야.”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한 가지만 매일 먹으면 안 된다고.”“알았어. 골고루 먹을게.”하준의 반짝이는 눈빛이 여름을 향했다. 얌전한 시바견 같았다.“……”여름은 그 시선을 피해 밥을 담고 먹을 준비를 했다. 여름도 저녁을 못 먹은 채로 끌려갔던 터라 배가 고팠다.그러나 고기 위주 식탁이라 아무래도 느끼했다.그러나 하준은 너무 좋아라 하며 먹었다. 아무래도 갈비와 보쌈이 제일 좋았지만 갈비탕이며 탕수육도
하준의 눈이 어두워졌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여름을 보고 서둘러 따라가 팔을 잡았다.“설거지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지 왜 말을 그렇게…”“그만 해! 오늘 그 집에서 구해준 건 몇 시간 동안 내가 밥 한 거로 다 갚은 거야. 게다가 솔직히 어제는 내가 당신 목숨을 구해준 건 내가 그냥 좋은 일 한 셈 치고 넘어갔잖아.”여름이 냉랭하게 웃었다.“다시는 나 찾아오지도 마. 다시는 당신한테 밥해주고 청소하고 빨래해주며 살고 싶지 않아. 앞으로는 여기로 전화하도록 해.”여름은 핸드폰에서 번호를 하나 찾아서 하준에게 보여주었다.목록에 저장된 이름을 보니 ‘XX 가사도우미’였다.하준의 얼굴이 시커멓게 되었다.여름은 한 마디 덧붙였다.“잘 찾아보면 나이 든 분 말고 젊은 분들 일하는 데도 있어. 하나하나 찾다 보면 잘 맞는 분 찾을 수 있을 거야.”그러더니 여름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쳐다보기도 짜증 난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다시금 울화가 치민 하준이 잠시 후 따라 나가 보았더니 여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집으로 돌아와 테이블에 놓인 밥그릇과 수저를 보니 마음이 답답했다.‘그냥 밥그릇 몇 개 씻는 거잖아? 저렇게까지 흥분할 일이냐고? 씻기 싫으면 말면 그만이지. 얘기를 하면 되잖아. 내가 막 억지로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하준은 휴대 전화를 꺼내 들고 이주혁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갑자기 그만두었다.이주혁은 백지안의 친구이니 이런 때 자신이 여름을 좋아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한 소리 듣게 될 것이 분명했다.하준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온라인에서 물어보기로 했다.-좋아하는 여자를 집에 초대해서 밥을 해달라고 하고 다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라고 했더니 도망갔습니다. 제가 잘못한 건가요, 아니면 여자가 너무 쩨쩨한 건가요?질문을 올리고 30분도 되지 않아서 댓글 창은 폭발직전이 되었다.-아이고, 이런 걸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니…. 여자분 빨리 도망쳐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어쩌다가 이런 남자에게 걸렸대?-여자한테 쩨쩨하
여름이 성운빌로 돌아가자 샤워를 마친 임윤서가 후다닥 뛰어왔다.“어디 보자, 어디 보자. 옷매무새는 안 흩어졌나? 키스 마크는? 옷에 주름은 좀 졌고, 머리는 왜 이렇게 헝클어졌냐? 피곤한 기색을 보니… 너희들 설마….”임윤서의 입가에 음흉한 웃음이 떠올랐다.여름은 얼음처럼 싸늘한 시선을 돌려주었다.“그 지저분한 생각 당장 넣어둬. 그 인간 집에 가서 몇 시간 동안 고기 삶고 찌고 끓이다가 왔다. 내가 고기를 얼마나 썰었는지 그냥 손이 다 떨려.”“……”벌겋게 부은 여름의 손을 보고 임윤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여름은 울고 싶었다.“그 인간이 글쎄, 온갖 고기랑 갈비를 30kg이나 주문한 거 있지? 내가 그걸 일일이 다 잘라서 소분해가지고 냉동실에 얼려주고, 갈비에, 보쌈에 갈비탕에 매운 갈비에 탕수육에…그걸 다하고 좀 먹고 앉아서 쉬고 있는데 날더러 설거지를 하라는 거야!”여름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아이고, 이제 생각해 보니 나 그 집에 들어가서부터 지금까지 물 한 컵도 못 마셨다.”임윤서가 가련하다는 듯 여름의 어깨를 두드렸다.“에휴, 그런 인간하고 사랑에 빠졌었다니 너 대체 얼마나 미쳤었던 거야?”“너도 이제 알았구나?”여름이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내가 그 집구석에서 나오자 마자 차단했어. 아오 짜증 나.”“잘했어. 피곤하겠다. 얼른 들어가 좀 자라.”임윤서가 위로했다.“이번 일만 지나가고 나면 이제 너는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찾아서 다시는 그 인간 때문에 흔들리는 일 없을 거다.”여름이 피식 웃었다.“분노에 부들부들 떨리기는 할걸?”----FTT 사무실.다음날 8시.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하준은 상혁과 비서실 직원들이 복도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김 실장님, 어제 커뮤에 진짜 웃기는 질문 올라왔잖아요. 어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불러서 밥을 해달라고 했는데 설거지를 하라니까 도망갔어요. 내가 잘못한 건가요, 여자가 쩨쩨한 건가요?’라고 질문을 올린 거 있죠? 진짜 세상에는 별별 인간 다 있
하준은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헛소리 그만해.”상혁의 고개는 거의 가슴팍까지 떨어질 판이었다. 그냥 쥐구멍을 파서 사라지고 싶었다.‘나 혼자서만 떠든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이러시는 거야, 진짜…’“그러면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해 봐.”하준이 책상을 톡톡 치며 무거운 말투로 물었다.“강여름은… 왜 화를 내고 갔을까? 정말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이제부터 난 어떡해야 돼?”“……”상혁은 눈이 번쩍 띄었다.‘아하, 강 대표 이야기였구나. 아이고 불쌍한 우리 강 대표님. 왜 도망갔냐니? 내가 여자라도 도망친다고요.’“저기, 제 말씀이 너무 다이렉트하더라도 조금 이해하십시오. 지금… 회장님이 따라다니는 입장이신 거죠?”상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하준이 흥 하더니 상혁을 훑어보았다.“내가 따라다닐 필요가 있나? 강여름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 진작부터 날 좋아했다고. 내가 너무 상처를 주니까 마음이 불편했던 것뿐이지.”상혁은 ‘헐…’하는 기분이 되었다. 하준의 뻔뻔함에 기가 막혔지만 그렇다고 있는 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두 분이 서로 사랑하시든 어쩌시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해 주셔야죠. 집으로 사람을 초대해서 밥을 시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손님이 밥을 했는데 설거지까지 하라니요? 여자 친구를 사귀는 거지 집에 일할 이모님 구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음식도 회장님이 하시고 설거지도 회장님이 하셨어야죠. 강 대표님의 마음을 얻고 싶으셨다면 그렇게 하셨어야 합니다. 회장님하고 있을 때 자기가 헬퍼 같은 기분이 든다면 누구라도 불편한 마음이 들 겁니다.”“지안이는 안 그랬는데.”하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상혁은 어이가 없었다.‘당연히 안 그랬겠죠. 그러면 백지안 씨에게 해달라고 하시지 그랬어요?’그러나 상혁은 속마음은 숨겼다.“백지안 님이 설거지를 하셨던가요? 요리도 설거지도 이모님이 다 하시지 않았던가요?”“……”하준은 흠칫했다.‘확실히 그러네. 지안이가 가끔
“고마워. 하지만 당신이 한 밥은 사양하겠어. 먹다가 죽으면 어떡해?”하준의 음식 솜씨는 여름이 잘 알았다. 절대적으로 존중해주기 힘든 취향이었다.“그러면 영화 보러 가자.”“딱히 영화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여름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계획대로 진행하려면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어젯밤 일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하준의 사무실.하준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컴퓨터를 켰지만 한 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오후 3시가 되었다. 하준은 차를 몰고 유치원으로 갔다.입구의 경비 아저씨가 하준을 알아보고 그대로 안으로 안내했다.아이들은 이제 막 낮잠에서 깨서 과일 주스를 마시는 중이었다. 여울은 웬 남자아이와 함께 앉아 있었다. 남자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고 여울은 몰래 남자아이의 주스를 가져다 마시고 있었다.남자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경고하듯 여울을 한 번 흘겨보았다.여울은 한껏 짖궂게 메롱을 해 보였다. 이때 입구에서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울은 놀란 나머지 혀를 깨물뻔했다.하늘은 여울의 시선을 따라가 봤다가 심장이 철렁했다.‘큰일 났네. 아빠가 내 얼굴을 봐 버렸어. 너무 엄마를 닮아서 아빠한테 얼굴 보여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이때 하늘은 완전히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밖에 서있던 하준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방금 여울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아이를 가만히 보다 보니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보았더니 이목구비가 완전히 강여름과 똑같았다. 그냥 강여름의 미니어처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남자아이의 눈썹이 살짝 더 날카로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여울과 그 남자아이가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온갖 경악스러운 생각이 다 마음속을 헤집고 지나갔다.‘예전의 그 쌍둥이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내 아이들도 딱 저 정도 컸겠지?그런데 이건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해.’“큰아빠 왜 왔어요?”이때 여울이 달려 나왔다. 약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