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임기응변이 아니었으면 나까지 잡혀 들어갔을 거요. 내 빚은 남았습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시지. 당신이 내게 이제 무슨 이용가치가 있을지. 최하준을 빼고 나면 당신은 내게 일말의 소용도 없는 존재라고.”저쪽에서 탕하고 전화를 끊었다. 백지안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휴대 전화를 꽉 쥐었다.‘저 인간들에게는 내가 아무리 훌륭한 정신과 의사라고 해도 그까짓 거 아무 의미도 없겠지. 영하의 네임 벨류는 이미 예전만 훨씬 못하고, 내 배경은 이제 겨우 최하준, 송영식, 이주혁 이 셋뿐이구나.’공포가 지나가자 백지안은 바로 송영식에게 전화를 걸었다.30분 뒤 송영식이 헐레벌떡 뛰어왔다.백지안은 이미 세수를 마치고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완전 자포자기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청순한 매력을 흘리고 있었다.“지안아, 그만 마셔.”송영식은 백지안의 손에서 잔을 빼앗았다. 자신의 짝사랑이 그렇게 처량한 꼴이 된 것이 사뭇 마음 아팠다.“넌 내가 혐오스럽지 않아?”백지안이 붉게 변한 눈을 들었다.“내가 역겹지 않냐고?”자신의 여신이 그런 늙은 놈과 자고 다녔다니 혐오스런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울먹이는 백지안을 보니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네가 너무 어리석었어.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거야? 예전에 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우리도 다 알잖아. 그래도 우리는 개의치 않았어. 하지만 이번에는 하준이를 두고 바람 피운 꼴이 되었으니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면 견디기 힘들 거야.”“난 너희들이 그 사진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어. 그저 내 마지막 존엄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이제는 한 줌의 존엄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네.”백지안은 처연히 웃었다. “하준이는 갔어. 다시 결혼식을 한다는 말도 없고. 이제 다들 날 손가락질 하고, 경멸하겠지. 난 이제 견딜 수가 없어. 예전에도 그렇게나 죽고 싶다가도 하준이를 생각하면서 버텨왔는데 이렇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죽는 건데.”그러더니 백지안은 술을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회장님 몸매 좋지, 딱 봐도 침대에서도 절륜일 것 같은데 불만이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혹시 우리 회장님이… 겉보기는 좋은데 속 빈 강정이라든지…?”“……”말이 점점 산으로 가는 것을 보고 상혁은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하준의 사생활이 다 까발려질 판이었다.“어허, 시끄러워들. 비서실에서 회장님 뒷담화라니 일 그만두고 싶어?”상혁이 경고했다.다들 그제서야 너무 까불었다는 생각이 들어 식은땀이 흘렀다.이때 최란이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더니 들어왔다.“회장님은?”“사무실에 계십니다.”상혁이 얼른 다가가며 말했다.“요 며칠 쉬지도 않고 아주 죽도록 일만 하십니다. 좀 말려주세요.”최란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문을 가만히 닫았다.방해를 받은 하준은 핏발이 선 눈에 노기가 가득했다.“뭐 하러 오셨습니까?”“너는 퇴근을 안 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비서실 직원들까지 밤낮으로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다들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쉬어야지.”최란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얼굴에 비죽비죽 수염이 자란 하준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난 얘가 날 하나도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너무 날 닮았어. 어쩜 걸어가는 길도 나랑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어?’“백지안이랑은 대체 어떻게 할 셈이니?”하준은 입을 일자로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며칠 동안 백지안이 내내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있지만 전혀 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최란이 미간을 찌푸렸다.“구체적인 사안은 내가 모르겠다만 지금 걔랑 식을 다시 올리겠다는 얘기를 꺼내질 않는 걸 보니 그날 경찰이 한 말이 맞는 모양이지? 걔가 너에게 뭔가 미안할 짓을 한 거니?”“제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합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하준이 시큰둥하게 답했다.“정말 걔가 바람이 났었던 거라면 우리 식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최란이 사뭇 강경하게 말했다.“유경험자로서 말하는 거니까 새겨들어라. 넌 백지안이라는 애를 전혀 모르는 걸 수도 있
‘그래, 지안이가 외국에서 보낸 몇 년 사이의 일은 내가 거의 모르지.그동안 지안이가 그 이전의 지안이랑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어머니는 30년이 되도록 추동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난 지안이랑 이제 겨우 20년 된 거잖아?’“하준아, 넌 보통 사람이 아니잖니? 넌 FTT의 최고 결정권자다. 재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야. 네 결혼은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이미 한 번 이혼을 했는데 또 이혼하는 일이 생긴다면 별로 좋을 일이 없을 거다.”최란은 일어서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스스로 잘 생각해 보렴.”그러더니 최란은 자리를 떴다.하준은 그대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똑똑 하고 조그맣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여울이의 작은 얼굴이 쏙 하고 나타났다.“들어가도 돼요?”꼬맹이의 조심스럽고도 귀여운 얼굴을 보니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았던 하준이라도 심장이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오늘은 유치원 안 갔니?”하준은 여울이 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할머니가 큰아빠 기분이 안 좋으니까 오늘은 큰아빠랑 놀아주래요.”여울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하준은 갑자기 마음이 따스해졌다.최란이 이렇게 아들을 생각해 준 적이 있었나 싶었다.“이거 선물이에요.”여울이 쪼르르 다가오더니 뒤뚱뒤뚱 하준의 무릎으로 기어올라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난 기분이 안 좋으면 초콜릿 먹어요.”여울을 보고 있으니 빙그레 웃음이 지어졌다. 꼬맹이는 초콜릿을 까서 하준의 입에 넣어주었다.하준은 달달한 것을 거의 먹지 않았지만 지금은 입에 들어온 초콜릿이 너무나 달콤하고 좋았다.“이제 기분 좋아졌죠?”여울이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을 하고 물었다.“그러네. 고맙다.”여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으잉? 근데 큰아빠 오늘은 냄새난다.”여울이 갑자기 코를 잡았다.하준의 몸이 굳어졌다. 며칠 동안 매일 밤샘 작업을 하면서 잠도 안 잤지만 씻지도 않았더 ㄴ것이다.“일이 바빠서… 며칠 씻지를
여름의 목소리였다.하준의 심장이 욱씬 했다. 고개를 돌려 뒷좌석의 여울을 보니 여울은 키즈폰에 대고 답하고 있었다.“우리는 주차장이오. 금방 도착해요.”통화가 끝나자 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여름이 이모랑 약속했니?”“네.”여울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답했다.“…그런 건 미리 얘기를 해야지.”하준이 괴로운 듯 말했다.“말했으면 안 왔을 거면서.”여울이 혀를 날름했다.“할머니가 큰아빠 실연당해서 슬프대. 그래서 여울이가 아빠한테 실연당하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봤어요. 아빠가 새로 여자친구가 생기면 된대. 근데 나는 아는 이모가 여름이 이모밖에 없거든요.”“……”어이가 없었다.‘뭐, 그러네. 남들 눈에는 내가 실연당한 걸로 보이나 보군.’“저기…여름이 이모가 좋다고 하디?”“네.”여울이 끄덕였다.하준은 저도 모르게 핸들을 꽉 잡았다.‘내가 결혼 안 할 걸 알고 나와 재결합이라도 할 생각인가?’하준은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며칠 동안 답답했던 마음이 갑자기 스르륵 풀리는 것 같았다.이때 여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우리 아빠랑 온다고 했거든요.”“……”‘그러니까, 최양하가 부른 줄 알고 얼씨구나 하고 나왔다?대체 내가 최양하보다 못한 게 뭐야?’하준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큰아빠랑 온다고 해도 여름이 이모는 좋다고 했을 건데.”하준이 툭 뱉듯 말했다.‘강여름의 마음속에는 내가 있으니까 분명 지금이 나와 재결합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아닌데.”여울이 입을 비죽거렸다.“전에 여름이 이모한테 큰아빠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졸랐는데 이모가 큰아빠 부를 거면 오지 말라던데요. 큰아빠 보면 짜증난대.”“……”하준은 갑자기 심장이 찌릿했다.‘이 녀석이 아주 날 들었다 놨다 하네.’“네가 굳이 우리를 연결시켜줄 필요는 없는데. 이러고 막 멋대로 사람을 연결시키면….”“여울이가 잘못했어요?”여울이 하준의 화난 얼굴을 보더니 가련하게 입을 비죽러렸다.“그러면 전화해서 아빠 부를 게요. 큰아빠
벌써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 눈이 여름에게로 향해 흘끗거리는 모습이 하준의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한 명은 아예 여름에게 가서 플러팅을 시전 하고 있었다.“누나, 연락처 하나 주실래요?”햇살 아래 순진해 보이는 남학생의 얼굴을 보니 약간의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물어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움찔했던 여름이 막 거절을 하려는 순간이었다.갑자기 귀에 착 감기는 저음이 들려왔다.“여보, 미안해. 내가 늦었지?”남학생은 고개를 돌렸다가 귀족적인 하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거의 또래로 보일 정도로 어려 보이는 여름이 결혼을 한 데가 그렇게 큰 아이까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죄, 죄송합니다. 저는 결혼하신지 모르고. 실례하겠습니다.”그러더니 남학생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갔다.여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를 노려보았다.“누굴 더러 여보래? 말조심하시지?”“맞아요. 이모가 왜 갑자기 여보가 됐어요?”여울이 솜사탕을 뜯어 먹으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아까 그 유치한 애를 쫓아주려고 그랬지.”하준은 시큰둥하게 비웃었다.“당신 나이가 몇 살인데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애한테 웃음을 흘리고 있어? 나이를 먹었으면 어른답게 행동을 해야지 말이야, 그런 소리 듣고 좋아서 헤실헤실 웃고 있어?”“내가 이제 겨우 스물일곱인데 뭐? 아까 걔 거의 내 또래로 보이던데? “여름이 부루퉁해서 말을 이었다.“요즘은 연상연하 연애도 유행이라고요, 아저씨.”“내가 왜 아저씨야?”하준이 저기압이 되었다.여름은 팔짱을 끼며 비웃었다.“나한테는 아저씨지? 아저씨가 한참 그림책 읽고 있을때 나는 죽어라 헤엄치고 있었을걸? 난자랑 만나려고.”“……”어두워지는 하준의 얼굴을 보며 여울이 궁금한 듯 물었다.“난자가 뭐야? 왜 헤엄쳐요?”하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애 앞에서 아무 말이나 막 하지 말라고.”“어….”당황한 여름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여울에게 말했다.“그게 좀 어려운 거라서 지금은
여름은 얼른 꼬맹이를 안아 올렸다. 여울이의 눈물을 보더니 하준을 매섭게 노려봤다.“우리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소리는 지르고 난리람? 할 거면 백지안한테 가서 해. 뻑하면 그렇게 소리나 지를 거면 가. 여울이는 내가 데리고 놀 테니까. 괜히 우리 따라다닐 필요 없어.”그러더니 여울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졸지에 버려진 하준은 뒤에 남아서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점점 멀어져 가는 둘을 보고는 후다닥 따라갔다.“여울이는 내 조카니까 놀아도 내가 놀아줄 거야.”“싫어. 큰아빠 무서워.”여울은 가차 없이 거절했다.하준은 패배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말했다.“여울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이모한테 해요.”여울이 진지하게 답했다.여름 쪽을 쓱 쳐다봤다. 여름은 하준 따위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가버렸다.하준은 마음이 답답했다.여울이 격려하듯 하준을 바라보았다.“선생님이 잘못했으면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용기있는 사람이랬어.”“……”어린애의 순진한 시선을 마주하니 도저히 사과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하준은 할 수 없이 조용히 한숨을 쉬고 여름의 팔을 잡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과했다.“미안해. 요즘 내가 기분이 좀 안 좋아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어. 너무 마음에 두지 마.”그말을 듣고 여름은 좀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 이때 여울이 덧붙였다.“이모, 용서해 줘요. 우리 큰아빠 실연해서 엄청 불쌍하잖아요. 우리 아빠한테는 나처럼 귀여운 딸이라도 있지….’하준은 다시금 졸지에 여울의 팩트 폭행에 정통으로 당하고 얼굴이 축 처졌다.‘예전에 내가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너만한 애가 있었을 건데….’이제는 잃어버린 그 아이들 이야기는 꺼낼 수도 없었다.여름은 풀죽은 하준의 모습을 보니 또 살짝 짠한 마음이 들었다.“알았어. 여울이를 봐서 이번은 넘어가 주지. 하지만 우리랑 같이 다닐 거면 입은 다물고 지갑만 열어.”그러더니 여름은 꼬맹이를 데리고 비행기 어트렉션으로 가버렸다
하준은 누군가가 심장을 확 움켜쥔 듯 찌릿했다.얼른 손을 뻗어 여름을 품에 안아 들였다.하준의 몸에서 온기가 느껴지자 여름은 무의식적으로 하준의 옷깃을 잡았다.그리고 살짝 정신이 돌아오자 하준이 그렇게 사람을 놀래킬지 몰랐던 여름은 주먹을 쥐고 하준의 가슴팍을 콩 내리쳤다.“최하준, 누가 그렇게 사람 놀래키래!”하준은 갑작스런 공격에 깜짝 놀라서 헉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아픈데도 여름의 애교 섞인 불평을 들으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여름의 머리에서 올라오는 샴푸 냄새와 보드라운 몸이 주는 촉감에 가슴이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여울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흥! 나만 버려놓고, 둘이서만 껴안고 있고!”여름이 얼굴을 붉히더니 여울에게 건너가려고 했으나 아직 높이가 너무 높은 것을 보고는 다시 다리에 힘이 풀려 꼼짝을 못 했다.“됐어요. 난 밖에 보면서 구경하면 되니까.”여울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여름은 미안한 듯 시선을 떨구었다.하준은 고개를 숙여 파닥이는 여름의 속눈썹을 내려다보았다.관람차가 2/3쯤 내려오자 여름은 바로 하준의 품에서 벗어나 여울 곁으로 갔다.하준은 품이 확 비자 불만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겨우 한 바퀴 돌았어. 한 바퀴 더 남았다고.”“안 해. 둘이나 타.”여름은 정말 너무나 무서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때는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는데 어쩐 일인지 어른이 되고 나서는 정말 관람차가 너무나 무서웠다.“나도 그만 탈래. 재미없다. 배 타러 갈래.”여울이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서 재미있는 어트렉션을 발견하고는 외쳤다.하준의 얼굴이 축 처졌다. 하지만 결국 둘을 따라 내릴 수밖에 없었다.셋은 한바탕 놀고는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하준은 그런 곳에는 거의 가지 않았지만 오늘은 여울이 너무나 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여름이 주문했고 셋은 창가 자리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하준은 패스트푸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콜라를
여름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옆에 있는 연인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방금 두 사람이 하던 이야기는 전에 자신과 하준이 동성의 어느 패스트푸드점에서 나누었던 이야기와 비슷했다.‘뭔가를 떠올린 것은 아니겠지?’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가게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괜찮으세요? 저기요!”“누군가 쓰러졌어요. 일행분 계세요?”“……”화장실 쪽을 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얼른 가서 사람들을 헤치고 보니 하준이 쓰러져 있었다.“최하준, 하준 씨!”여름은 하준을 부르며 흔들어 보았지만 하준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서둘러 119를 불렀다.곧 구급차가 왔다. 여름은 여울과 함께 하준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여울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엄마, 아빠 왜 그래요? 왜 갑자기 쓰러졌어요?”여름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옆에 앉아 있던 연인들 때문에 하준이 뭔가를 떠올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전에 들었던 정신과 의사의 말로는 최면에 걸린 사람은 거의 회복되는 확률이 없고 혹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바보가 된다고 했었다.이때 응급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나왔다.“환자분은 며칠은 안 주무신 것 같던데요. 너무 휴식을 취하지 않으셔서 자율신경계에 문란이 와서 실신하신 거 같습니다.”“그렇군요.”여름은 어이가 없었다.‘과거의 기억을 떠올려서 기절한 줄 알았더니, 뭐야? 그냥 내가 오버한 거잖아?’이때 이주혁과 송영식이 도착했다. 하준이 이송될 때 응급실 직원이 이주혁에게 연락을 해고 마침 송주혁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달려온 것이다.그러나 여름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송영식은 열이 뻗쳤다.“강여름! 또 당신이야? 어째서 이렇게 질척거리는 거야? 하준이랑 지안이 결혼식이 취소됐다고 그 틈을 파고들려는 건가? 경고하는데, 하준이에게서 떨어지라고!”“왜 이모한테 무섭게 해요?”여울이 버럭 화를 내면서 송영식을 노려보았다.“조그만 게 어른 일에 끼어들지 마.”송영식은 강여름을 노려보았다.“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