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다기보다… 그냥 백지안 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신 거 아닌가요?”상혁은 속으로 한탄을 하며 덧붙였다.‘애초에 사랑하신 적도 없다고요. 그냥 최면술에 당하신 거지….’“사랑하지 않는다?”하준이 씁쓸하게 웃었다.“난 지안이를 평생토록 사랑할 줄 알았어.”“아무래도 두 분 사이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상혁이 말을 이었다.“두 분인 함께 하시면 즐거워야 하는데 요즘 별장에서 나오실 때 보면 별로 즐거워 보이시지 않습니다.”하준은 흠칫했다.‘내가 즐겁지 않다고?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은걸. 언제부터인지 주도적으로 회사에 남아 야근을 하고 있었지.’하준이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보며 상혁이 말을 이었다.“게다가…이번 일로 심리적인 압박을 심하게 느끼시는 듯합니다. 그날 경찰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백지안 씨를 잡아가는 바람에 소문이 있는 대로 퍼졌는데 결혼을 강행하신다면 어르신들 노하실 것은 뻔한 일이고 사람들이 회장님을 비웃을 겁니다.”“그만!”하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성대한 결혼식의 결과가 전국적인 웃음거리로 전락한 거라니….’----해변 별장.하준이 단호히 떠나버리고 백지안은 미친 사람처럼 온갖 물건을 다 집어 던지고 있었다.결혼식을 맞아 온 집안은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 장미가 하나하나 모두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지금쯤은 내가 FTT의 사모님이 되어서 온 국민이 부러움을 사고 있었어야 한다고!어쩌자고 이렇게 졸지에 지옥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거야?’주방에 있던 이모님은 놀라서 한참을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민정화 혼자서 당황한 듯 뛰어왔다.“진정하세요. 회장님이 그냥 화가 나서 그러신 거예요. 며칠 지나면 돌아오실 거예요.”“자기도 날 보면 혐오스럽지?”백지안이 울면서 물었다.“아니에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회장님이 너무 몰라 주시네요.”‘백지안 씨가 얼마나 회장님을 사랑하는데 저렇게 매정하게 구시는지 모르겠네.’“고마워
“내 임기응변이 아니었으면 나까지 잡혀 들어갔을 거요. 내 빚은 남았습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시지. 당신이 내게 이제 무슨 이용가치가 있을지. 최하준을 빼고 나면 당신은 내게 일말의 소용도 없는 존재라고.”저쪽에서 탕하고 전화를 끊었다. 백지안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휴대 전화를 꽉 쥐었다.‘저 인간들에게는 내가 아무리 훌륭한 정신과 의사라고 해도 그까짓 거 아무 의미도 없겠지. 영하의 네임 벨류는 이미 예전만 훨씬 못하고, 내 배경은 이제 겨우 최하준, 송영식, 이주혁 이 셋뿐이구나.’공포가 지나가자 백지안은 바로 송영식에게 전화를 걸었다.30분 뒤 송영식이 헐레벌떡 뛰어왔다.백지안은 이미 세수를 마치고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완전 자포자기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청순한 매력을 흘리고 있었다.“지안아, 그만 마셔.”송영식은 백지안의 손에서 잔을 빼앗았다. 자신의 짝사랑이 그렇게 처량한 꼴이 된 것이 사뭇 마음 아팠다.“넌 내가 혐오스럽지 않아?”백지안이 붉게 변한 눈을 들었다.“내가 역겹지 않냐고?”자신의 여신이 그런 늙은 놈과 자고 다녔다니 혐오스런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울먹이는 백지안을 보니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네가 너무 어리석었어.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거야? 예전에 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우리도 다 알잖아. 그래도 우리는 개의치 않았어. 하지만 이번에는 하준이를 두고 바람 피운 꼴이 되었으니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면 견디기 힘들 거야.”“난 너희들이 그 사진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어. 그저 내 마지막 존엄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이제는 한 줌의 존엄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네.”백지안은 처연히 웃었다. “하준이는 갔어. 다시 결혼식을 한다는 말도 없고. 이제 다들 날 손가락질 하고, 경멸하겠지. 난 이제 견딜 수가 없어. 예전에도 그렇게나 죽고 싶다가도 하준이를 생각하면서 버텨왔는데 이렇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죽는 건데.”그러더니 백지안은 술을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회장님 몸매 좋지, 딱 봐도 침대에서도 절륜일 것 같은데 불만이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혹시 우리 회장님이… 겉보기는 좋은데 속 빈 강정이라든지…?”“……”말이 점점 산으로 가는 것을 보고 상혁은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하준의 사생활이 다 까발려질 판이었다.“어허, 시끄러워들. 비서실에서 회장님 뒷담화라니 일 그만두고 싶어?”상혁이 경고했다.다들 그제서야 너무 까불었다는 생각이 들어 식은땀이 흘렀다.이때 최란이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더니 들어왔다.“회장님은?”“사무실에 계십니다.”상혁이 얼른 다가가며 말했다.“요 며칠 쉬지도 않고 아주 죽도록 일만 하십니다. 좀 말려주세요.”최란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문을 가만히 닫았다.방해를 받은 하준은 핏발이 선 눈에 노기가 가득했다.“뭐 하러 오셨습니까?”“너는 퇴근을 안 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비서실 직원들까지 밤낮으로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다들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쉬어야지.”최란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얼굴에 비죽비죽 수염이 자란 하준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난 얘가 날 하나도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너무 날 닮았어. 어쩜 걸어가는 길도 나랑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어?’“백지안이랑은 대체 어떻게 할 셈이니?”하준은 입을 일자로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며칠 동안 백지안이 내내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있지만 전혀 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최란이 미간을 찌푸렸다.“구체적인 사안은 내가 모르겠다만 지금 걔랑 식을 다시 올리겠다는 얘기를 꺼내질 않는 걸 보니 그날 경찰이 한 말이 맞는 모양이지? 걔가 너에게 뭔가 미안할 짓을 한 거니?”“제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합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하준이 시큰둥하게 답했다.“정말 걔가 바람이 났었던 거라면 우리 식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최란이 사뭇 강경하게 말했다.“유경험자로서 말하는 거니까 새겨들어라. 넌 백지안이라는 애를 전혀 모르는 걸 수도 있
‘그래, 지안이가 외국에서 보낸 몇 년 사이의 일은 내가 거의 모르지.그동안 지안이가 그 이전의 지안이랑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어머니는 30년이 되도록 추동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난 지안이랑 이제 겨우 20년 된 거잖아?’“하준아, 넌 보통 사람이 아니잖니? 넌 FTT의 최고 결정권자다. 재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야. 네 결혼은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이미 한 번 이혼을 했는데 또 이혼하는 일이 생긴다면 별로 좋을 일이 없을 거다.”최란은 일어서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스스로 잘 생각해 보렴.”그러더니 최란은 자리를 떴다.하준은 그대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똑똑 하고 조그맣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여울이의 작은 얼굴이 쏙 하고 나타났다.“들어가도 돼요?”꼬맹이의 조심스럽고도 귀여운 얼굴을 보니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았던 하준이라도 심장이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오늘은 유치원 안 갔니?”하준은 여울이 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할머니가 큰아빠 기분이 안 좋으니까 오늘은 큰아빠랑 놀아주래요.”여울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하준은 갑자기 마음이 따스해졌다.최란이 이렇게 아들을 생각해 준 적이 있었나 싶었다.“이거 선물이에요.”여울이 쪼르르 다가오더니 뒤뚱뒤뚱 하준의 무릎으로 기어올라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난 기분이 안 좋으면 초콜릿 먹어요.”여울을 보고 있으니 빙그레 웃음이 지어졌다. 꼬맹이는 초콜릿을 까서 하준의 입에 넣어주었다.하준은 달달한 것을 거의 먹지 않았지만 지금은 입에 들어온 초콜릿이 너무나 달콤하고 좋았다.“이제 기분 좋아졌죠?”여울이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을 하고 물었다.“그러네. 고맙다.”여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으잉? 근데 큰아빠 오늘은 냄새난다.”여울이 갑자기 코를 잡았다.하준의 몸이 굳어졌다. 며칠 동안 매일 밤샘 작업을 하면서 잠도 안 잤지만 씻지도 않았더 ㄴ것이다.“일이 바빠서… 며칠 씻지를
여름의 목소리였다.하준의 심장이 욱씬 했다. 고개를 돌려 뒷좌석의 여울을 보니 여울은 키즈폰에 대고 답하고 있었다.“우리는 주차장이오. 금방 도착해요.”통화가 끝나자 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여름이 이모랑 약속했니?”“네.”여울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답했다.“…그런 건 미리 얘기를 해야지.”하준이 괴로운 듯 말했다.“말했으면 안 왔을 거면서.”여울이 혀를 날름했다.“할머니가 큰아빠 실연당해서 슬프대. 그래서 여울이가 아빠한테 실연당하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봤어요. 아빠가 새로 여자친구가 생기면 된대. 근데 나는 아는 이모가 여름이 이모밖에 없거든요.”“……”어이가 없었다.‘뭐, 그러네. 남들 눈에는 내가 실연당한 걸로 보이나 보군.’“저기…여름이 이모가 좋다고 하디?”“네.”여울이 끄덕였다.하준은 저도 모르게 핸들을 꽉 잡았다.‘내가 결혼 안 할 걸 알고 나와 재결합이라도 할 생각인가?’하준은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며칠 동안 답답했던 마음이 갑자기 스르륵 풀리는 것 같았다.이때 여울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우리 아빠랑 온다고 했거든요.”“……”‘그러니까, 최양하가 부른 줄 알고 얼씨구나 하고 나왔다?대체 내가 최양하보다 못한 게 뭐야?’하준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큰아빠랑 온다고 해도 여름이 이모는 좋다고 했을 건데.”하준이 툭 뱉듯 말했다.‘강여름의 마음속에는 내가 있으니까 분명 지금이 나와 재결합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아닌데.”여울이 입을 비죽거렸다.“전에 여름이 이모한테 큰아빠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졸랐는데 이모가 큰아빠 부를 거면 오지 말라던데요. 큰아빠 보면 짜증난대.”“……”하준은 갑자기 심장이 찌릿했다.‘이 녀석이 아주 날 들었다 놨다 하네.’“네가 굳이 우리를 연결시켜줄 필요는 없는데. 이러고 막 멋대로 사람을 연결시키면….”“여울이가 잘못했어요?”여울이 하준의 화난 얼굴을 보더니 가련하게 입을 비죽러렸다.“그러면 전화해서 아빠 부를 게요. 큰아빠
벌써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 눈이 여름에게로 향해 흘끗거리는 모습이 하준의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한 명은 아예 여름에게 가서 플러팅을 시전 하고 있었다.“누나, 연락처 하나 주실래요?”햇살 아래 순진해 보이는 남학생의 얼굴을 보니 약간의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물어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움찔했던 여름이 막 거절을 하려는 순간이었다.갑자기 귀에 착 감기는 저음이 들려왔다.“여보, 미안해. 내가 늦었지?”남학생은 고개를 돌렸다가 귀족적인 하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거의 또래로 보일 정도로 어려 보이는 여름이 결혼을 한 데가 그렇게 큰 아이까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죄, 죄송합니다. 저는 결혼하신지 모르고. 실례하겠습니다.”그러더니 남학생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갔다.여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를 노려보았다.“누굴 더러 여보래? 말조심하시지?”“맞아요. 이모가 왜 갑자기 여보가 됐어요?”여울이 솜사탕을 뜯어 먹으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아까 그 유치한 애를 쫓아주려고 그랬지.”하준은 시큰둥하게 비웃었다.“당신 나이가 몇 살인데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애한테 웃음을 흘리고 있어? 나이를 먹었으면 어른답게 행동을 해야지 말이야, 그런 소리 듣고 좋아서 헤실헤실 웃고 있어?”“내가 이제 겨우 스물일곱인데 뭐? 아까 걔 거의 내 또래로 보이던데? “여름이 부루퉁해서 말을 이었다.“요즘은 연상연하 연애도 유행이라고요, 아저씨.”“내가 왜 아저씨야?”하준이 저기압이 되었다.여름은 팔짱을 끼며 비웃었다.“나한테는 아저씨지? 아저씨가 한참 그림책 읽고 있을때 나는 죽어라 헤엄치고 있었을걸? 난자랑 만나려고.”“……”어두워지는 하준의 얼굴을 보며 여울이 궁금한 듯 물었다.“난자가 뭐야? 왜 헤엄쳐요?”하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애 앞에서 아무 말이나 막 하지 말라고.”“어….”당황한 여름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여울에게 말했다.“그게 좀 어려운 거라서 지금은
여름은 얼른 꼬맹이를 안아 올렸다. 여울이의 눈물을 보더니 하준을 매섭게 노려봤다.“우리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소리는 지르고 난리람? 할 거면 백지안한테 가서 해. 뻑하면 그렇게 소리나 지를 거면 가. 여울이는 내가 데리고 놀 테니까. 괜히 우리 따라다닐 필요 없어.”그러더니 여울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졸지에 버려진 하준은 뒤에 남아서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점점 멀어져 가는 둘을 보고는 후다닥 따라갔다.“여울이는 내 조카니까 놀아도 내가 놀아줄 거야.”“싫어. 큰아빠 무서워.”여울은 가차 없이 거절했다.하준은 패배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말했다.“여울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이모한테 해요.”여울이 진지하게 답했다.여름 쪽을 쓱 쳐다봤다. 여름은 하준 따위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가버렸다.하준은 마음이 답답했다.여울이 격려하듯 하준을 바라보았다.“선생님이 잘못했으면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용기있는 사람이랬어.”“……”어린애의 순진한 시선을 마주하니 도저히 사과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하준은 할 수 없이 조용히 한숨을 쉬고 여름의 팔을 잡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과했다.“미안해. 요즘 내가 기분이 좀 안 좋아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어. 너무 마음에 두지 마.”그말을 듣고 여름은 좀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 이때 여울이 덧붙였다.“이모, 용서해 줘요. 우리 큰아빠 실연해서 엄청 불쌍하잖아요. 우리 아빠한테는 나처럼 귀여운 딸이라도 있지….’하준은 다시금 졸지에 여울의 팩트 폭행에 정통으로 당하고 얼굴이 축 처졌다.‘예전에 내가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너만한 애가 있었을 건데….’이제는 잃어버린 그 아이들 이야기는 꺼낼 수도 없었다.여름은 풀죽은 하준의 모습을 보니 또 살짝 짠한 마음이 들었다.“알았어. 여울이를 봐서 이번은 넘어가 주지. 하지만 우리랑 같이 다닐 거면 입은 다물고 지갑만 열어.”그러더니 여름은 꼬맹이를 데리고 비행기 어트렉션으로 가버렸다
하준은 누군가가 심장을 확 움켜쥔 듯 찌릿했다.얼른 손을 뻗어 여름을 품에 안아 들였다.하준의 몸에서 온기가 느껴지자 여름은 무의식적으로 하준의 옷깃을 잡았다.그리고 살짝 정신이 돌아오자 하준이 그렇게 사람을 놀래킬지 몰랐던 여름은 주먹을 쥐고 하준의 가슴팍을 콩 내리쳤다.“최하준, 누가 그렇게 사람 놀래키래!”하준은 갑작스런 공격에 깜짝 놀라서 헉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아픈데도 여름의 애교 섞인 불평을 들으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여름의 머리에서 올라오는 샴푸 냄새와 보드라운 몸이 주는 촉감에 가슴이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여울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흥! 나만 버려놓고, 둘이서만 껴안고 있고!”여름이 얼굴을 붉히더니 여울에게 건너가려고 했으나 아직 높이가 너무 높은 것을 보고는 다시 다리에 힘이 풀려 꼼짝을 못 했다.“됐어요. 난 밖에 보면서 구경하면 되니까.”여울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여름은 미안한 듯 시선을 떨구었다.하준은 고개를 숙여 파닥이는 여름의 속눈썹을 내려다보았다.관람차가 2/3쯤 내려오자 여름은 바로 하준의 품에서 벗어나 여울 곁으로 갔다.하준은 품이 확 비자 불만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겨우 한 바퀴 돌았어. 한 바퀴 더 남았다고.”“안 해. 둘이나 타.”여름은 정말 너무나 무서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때는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는데 어쩐 일인지 어른이 되고 나서는 정말 관람차가 너무나 무서웠다.“나도 그만 탈래. 재미없다. 배 타러 갈래.”여울이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서 재미있는 어트렉션을 발견하고는 외쳤다.하준의 얼굴이 축 처졌다. 하지만 결국 둘을 따라 내릴 수밖에 없었다.셋은 한바탕 놀고는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하준은 그런 곳에는 거의 가지 않았지만 오늘은 여울이 너무나 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여름이 주문했고 셋은 창가 자리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하준은 패스트푸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콜라를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