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하러 말입니까?최하준의 못마땅한 시선이 느껴졌다.“술 마시러 갑니까, 아니면 또 집에 갑니까? 아, 선배랑 데이트하러 갑니까? 지오 산책시키는 건 잊지 않기 바랍니다.”“…….”여름은 뚜껑이 열리려 하고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윤서랑 쇼핑할 거예요. 요즘 추워졌는데 입을 옷이 없거든요. 옷 좀 보러 가려구요.”최하준은 여름을 쓰윽 훑어보더니 다시 저격했다. “사야겠군요. 좀 두꺼운 걸로 사십시오. 만날 내 앞에서 그렇게 시원하게 입고 다니지 말고.” “…….”‘아 진짜! 겨울이 다 됐는데 이런 얇은 옷을 왜 입고 있겠어? 관심 좀 가져라, 어? 얼마나 당신 안구에 축복이냐!’“마침 나도 옷이 부족하니 몇 벌 좀 사다 주십시오. 지난번 준 카드 쓰면 됩니다.”최하준이 만사 귀찮다는 듯 덧붙였다.'헉! 사실 나가서 윤서와 야식 사 먹을 생각이었는데....'결혼 후 외식을 별로 못 했는데 지금 마침 한창 꽃게가 살이 오를 때였다.“직접 사면 되잖아요. 내가 진짜 와이프도 아니고.”원망이 섞인 말투였다.최하준은 웃는 건지 마는 건지 미묘한 표정으로 미간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또 돌려까기 시전입니까?”“…….”여름이 또 완전히 졌다. 그저 순수하게 팩트를 얘기했을 뿐인데.“아, 알았어요, 사다 주면 될 거 아녜요? 사이즈 몇 입어요?”“내 사이즈도 모르면서 이런 자세로 어떻게 아내가 되겠다는 겁니까?”최하준은 불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이런 건가?“잘못했어요, 제가 많이 부족하네요.”여름이 의기소침하게 말했다.“가격대는 어느 정도로요?”“좋을 대로”옷 가격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다. 늘 세계 정상급 디자이너들이 직접 맞춤 제작한 옷만 입었으니까.10분 후, 윤서가 1층에서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여름은 기운 없이 차에 올랐다.“쇼핑몰 가자. 최하준 씨가 옷 사다 달래.”“꽃게찜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나 저녁밥도 안 먹었는데.”윤서는 무
“그 사람 아마 침대에서 날 발로 밀어낼걸.”“술 먹여. 꽐라됐을 때 그냥…. 임신이라도 하면 퍼펙트고. 그러면 더 힘 안 들이고도 여왕에 등극! 아 참, 배란기 계산해야겠네.”여름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직 연애도 성공 못 했는데 임신이라니.“하지만 그 사람 날 사랑하지도 않는데 이런 식의 가족은 아이한테…….”“혼인신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서 이런 마음의 준비도 안 했어?”윤서가 말을 가로막았다.“복수한다며? 하준 씨 부인이 돼서 그 인간들 바들바들 떨게 해주라고. 성공만 하면 얼마나 사이다냐? 걔들 네가 윗사람이 되면 욕도 못 하는 거야!”“하긴…. 그런데, 그건 그렇고 넌 뭘 또 그렇게 자세하게 아는 거야? 너 상원 오빠랑…….”“어딜, 어딜! 우린 그냥 뽀뽀에서 진도가 안 나가.”“부럽다.”‘나는 하준 씨랑 뽀뽀도 못 해봤는데, 인생 뭘까.’******30분 후, 두 사람은 동성에서 가장 큰 백화점을 거닐고 있었다.여름은 계속 투덜대는 중이었다.“여기 옷 너무 비싸. 왜 여기로 온 거야? 그 사람이 얼마나 짠돌인데. 차도 그냥 평범한 중형차 몰고 평상시 입는 옷도 품질은 좋지만 다 들어본 적 없는 브랜드더라구.”“사장님이 후줄근하게 입으면 되겠어? 봐봐, 저 집 옷 어때?”윤서는 여름을 떨쳐내고 옆에 있던 명품브랜드 샵으로 들어가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예쁘긴 한데, 마네킹 핏이 하준 씨만 못하네.”“으이구 그래 네 남편 몸짱이다 이거지? 좋겠다.”몸짱?여름은 그 표현이 최하준에게 딱이라 생각했다. 최하준은 여름이 본 남자 중에 몸매가 제일 좋았다. 옷을 벗었을 때도…….“너 무슨 깜찍한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빨개져?”윤서가 놀렸다.“크흡, 됐고, 가자. 여긴 너무 비싸.”여름은 민망해하며 윤서를 끌고 나가려 했다.그때 매장 점원이 나와 웃으며 말했다.“올 시즌 신상이에요. 전국에 딱 두 벌 들어온 리미티드 에디션이랍니다.”“헐, 그런 거 보여줄 필요 없어. 저런 거 살 능력 없는 애야.”
진가은이 끌끌 혀를 차며 채시아에게 말했다.“너 쟤네랑 잘 끝낸 거야. 저런 진상을 친구라고 뒀어 봐. 언젠간 네 발목을 잡았지.”“그러게 말야. 살 능력도 안 되면서 친구 돈은 왜 빌리고 그럴까.”참을성 많은 여름도 이 둘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누가 돈이 없대? 그까짓 리미티드 에디션.”여름은 최하준의 카드를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저 두 벌 리미티드 에디션이랬죠? 둘 다 살게요. 내 남자가 다른 사람이랑 똑같은 옷 입는 건 참을 수 없죠.”점원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황급히 대답했다.“아 네, 두 벌 6천만 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여름의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자신의 입을 마구 때려주고 싶었다. ‘아우 입방정! 으흑, 카드 한도가 그만큼 안 되면 어쩌지?’옆에서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지켜보는 진가은과 시아를 보며 여름은 기도했다. ‘돼라. 제발 결제돼라.’“아, 이건 리미티드 에디션이라 환불이 안 되는데 괜찮으십니까?”점원이 말했다.여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안 그래도 조금 후에 와서 환불 할 생각이었다.채시아가 입을 가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혹시 다시 와서 환불하려던 거 아니지?”“그럴 리가!”여름은 웃기지도 않다는 듯 ‘흥!’하고는 덧붙였다.“그런 수준 낮은 짓 할 사람으로 보이니? 그리고 친한 척 내 이름 부르지 말아 줄래? 역겹거든.”그리고 점원을 재촉했다.“빨리 포장해 주시겠어요? 여기 너무 시끄럽네요.”“야!”채시아의 얼굴이 벌게졌다.진가은이 그런 채시아를 잡아당겼다.“관둬. 사라고 내버려 둬. 우린 옆에 명품 매장이나 구경 가자. 사실 여기 옷은 너무 저렴해서 우리 오빠는 싫어할 거야.”“하긴.”채시아는 눈치 빠르게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 잠시 뒤 여름이 카드에 돈이 없어 망신 당할 걸 생각하니 신이 났다.여름은 그들을 흘겨보고는 짐짓 태연한 척했다.결제가 끝나고 점원은 포장된 옷을 건넸다.“감사합니다. 영수증과 옷 포장해 드렸습니다.
윤서와 오랜만에 꽃게찜을 먹고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숨을 죽이고 눈치를 살피니 거실에 누군가 있었다. 여름은 차마 전등을 켜지 못했다.“참 일찍도 오십니다.” 침실 입구에 크고 다부진 몸매의 최하준이 불쑥 나타났다. 비꼬는 말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여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늘 저지른 짓 때문에 제발 저리는 중이었다. ‘설마 육천만 원의 행방을 추궁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건 아니겠지?’ “쇼핑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최하준이 거실 전등을 켜고 여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뻗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여름 숨을 쉴 수도 꼼짝할 수도 없었다. 최하준의 그림자가 여름을 감싸니 숨도 쉴 수 없었다. 최하준의 뜨거운 검지 손가락이 입술에 닿자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 설마 나한테?’ 최하준은 갑자기 놀리는 듯한 눈빛으로 검지를 다시 여름의 얼굴 앞으로 뻗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최하준의 손가락은 길고 섬세했다. 저 손가락이 나에게 닿으면…? 눈을 깜박이며 손가락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던 여름은 ‘이건가?’싶어 최하준의 손가락을 앙 깨물었다. 최하준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강렬하고 낯선 전류가 순식간에 온몸에 퍼지는 것 같았다. 최하준이 눈을 크게 뜨고 여름을 노려보았다. “뭐 하는 겁니까?”“깨물어 달라는 거 아니었어요?“여름이 입을 벌려 최하준의 손가락을 놓더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아니 입술에 손끝을 대더니만 손가락을….”최하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당최 여름의 뇌구조가 파악이 안 됐다.“강여름 씨, 대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여기 손끝에 기름 묻은 거 안 보입니까? 뭐 먹다 묻혀 놓고 제대로 닦지도 않고 말입니다.”여름은 귀까지 새빨개졌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남자 손가락이 뭐 그렇게 예쁘게 생겼어요? 눈 앞에 있으니 확 깨
“너무 비싼 걸 질러서 쭌이 당연히 화낼 줄 알았어요. 평소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수수해 보여서요. 아하하, 오해하지 말아요. 나쁘다는 뜻은 아니니까. 튀지 않고 검소한 모습. 난 쭌의 이런 점이 특히 좋아요.”여름은 실수하지 않았나 조심스러워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존심을 건드린 건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최하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여름은 최하준이 싸구려를 입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최하준은 잠시 혼란스러웠다.“명문가 출신인 줄 알았더니 아무것도 모르는군요?”‘뭐가 ‘테일러메이드 수제 양복’인지도 모르는 바보야, 난 원래 세상에 한 벌 뿐인 옷만 입는다고.’여름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죠.”안됐다는 듯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여름은 혼란스러웠다. ‘내 얼굴은 왜 꼬집고 머리는 또 왜 만지는 거야? 이런 건 애인한테나 하는 행동 아닌가?’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다음 날, 브라운색 싱글 수트를 입은 최하준을 보고 여름은 기절할 뻔했다. 그동안 최하준이 정장을 입은 모습은 많이 봐 왔지만, 자신이 직접 사다 준 옷을 입은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더 친밀하고, 더 짜릿하고 더 황홀한 느낌이었다.지금 이 순간 만큼은 최하준이 진짜 남편처럼 느껴졌다.최하준이 힐끗 여름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름의 얼굴 표정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기성복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저렇게 좋아하니 가끔 입어줘야겠군.’현관문을 나서면서 갑자기 뭔가 생각 난 듯 최하준이 물었다.“어제 강여름 씨 옷은 안 샀습니까?”“안 샀어요. 사랑하는 남편 옷 사려고 나간 거라서.” 여름은 ‘사랑하는 남자의 옷을 직접 구매한 여자’의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야식 먹으러 나갔던 거 아닙니까?” 최하준이 피식 웃으며 뼈 때리는 말을 날렸다.“아잉~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오~”여름은 궁색함을 감추기 위해 잔뜩 애교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최하
‘나만 취하고 쭌은 안 취하면?’혼란스러운 머리를 쥐 뜯고 있을 때 최하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어딥니까?”“회사예요.”“주소 보내 봐요. 20분 후에 사무실 1층으로 데리러 갈게요. 생일 파티에 같이 가줘야겠습니다.”기회가 왔다.여름의 눈이 반짝였다. 다만 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우리 할머니 팔순 잔치에는 안 가겠다고 하면서 나는 왜 가야 하는데요?”“싫습니까? 그럼 됐습니다. 어디 다른 사람을….”최하준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여름이 얼른 꼬리를 내렸다.“가요, 간다고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더니. 나 자기한테 완전히 졌어요!”말을 마치고 텀블러에 든 따뜻한 차 한 모금을 홀짝였다. 좀 직설적이긴 했지만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나 이런 거 너무 잘한단 말이야?’짧은 침묵 후 핸드폰 저쪽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최하준의 음성이 들렸다.“내 핸드폰 지금 차에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 들립니다. 옆에 이지훈 씨 앉아 있어요.”“풉!”당황한 나머지 입에 머금었던 차를 컴퓨터 모니터에 모두 뿜었다. 이어서 이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제수씨, 쫌 하네요? 그렇게 안 봤는데 원래 이렇게 도발적이었구나. 어쩐지 우리 하준이가….”“바로 갑니다.”전화가 갑자기 뚝 끊겼다.여름은 창피해서 책상에 힘없이 엎어졌다. 비척비척 물건을 챙겨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번엔 윤서의 전화다. “어떻게 됐어? 어젯밤에 남편하고 역사적인 밤을 만드셨나?”“아니. 오늘 저녁에 누구 생일 파티에 같이 가재. 오늘이 기회인 거 같은데 방법이 없네. 쭌은 저녁 약속이 있어도 한 번도 취한 걸 본 적이 없어.”여름이 한숨을 쉬었다. ‘인간이 너무 이성적이야.’“생일 파티?”윤서가 얼떨떨해서 되물었다.“지훈 씨 할아버지께서 팔순 잔치 가는 거 아냐? 나도 거기 가거든.”“쭌이 지훈 씨와 엄청 친한가 보네.”“차라리 잘 됐어. 오늘 밤에 하준 씨를 꽐라 만들자.”“…….”“꺄! 외숙모 프로젝트를 위해서 내가 오늘 기어코 그 남
여름의 생각이 점점 농후한 상상으로 확장되고 있을 때,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고개를 들다가 익숙한 사람의 실루엣에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만 하이힐을 신은 한쪽 발을 삐끗했다.여름이 휘청하는 순간, 최하준이 손을 뻗어 여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여름은 어느새 최하준의 품에 폭 안겨 있었다.평소 같았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머릿속으로 최하준이 벗은 모습을 상상하던 찰나였다. 코끝이 최하준의 가슴에 닿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내가 그렇게 놀라게 했습니까?” 최하준이 눈썹을 치켜 뜨며 물었다.“아뇨. 정신줄을 잠시 놓고 있었나 봐요.”재빨리 품 안에서 벗어나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차에 타십시오.”최하준이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여름은 조수석에 누군가 앉아 있는 걸 보고 뒷좌석에 앉았다. 조금 전 연출했던 민망한 장면 때문에 누구인지 살펴보지도 못했다.“안녕?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여러 번 빵빵거려도 못 들을 정도로?”이지훈이 웃는 얼굴로 여름을 살살 놀리고 있었다.“우리 하준이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죠?”“맞아요. 이 사람 생각하고 있었어요.”‘어차피 다 들켜버린 거… 에라 모르겠다.’여름은 대충 얼버무리고 고개를 팍 숙여버렸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최하준은 간질간질한 마음이 들어 눈을 들어 백미러로 여름을 보았다. 푹 숙인 머리카락 틈으로 보이는 빨개진 귀에 왠지 입이 말랐다.최하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이지훈이 “와우!”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괜히 물어봐서 나만 상처받았네요. 그런데 하준이가 까칠하기가 이를 데 없고 성격은 또 얼마나 더럽게요. 대체 이 녀석 어디가 그렇게 좋습니까?”여름이 내심 박수를 쳤다. ‘지훈 씨 말이 백 번 맞아요.’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단점도 다 좋게 보인대요. 다정한 남자는 오히려 더 불안해서요. 저는 하준 씨 그런 점이 더 좋
‘다른 남자의 벗은 몸을 본다고? 아, 열 받네. 도대체 창피한 것도 모르나?’최하준의 마음을 읽은 건지 이지훈이 반박했다.“너무 몰아붙이지 마. 제수씨가 다 널 위해 공부하는 걸 수도 있다고.”여름은 속으로 ‘그렇지, 그렇지’ 하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해야 말이지. 써먹을 일이 없는데.”최하준이 냉랭하게 말하긴 했지만 내심 의기양양했다.‘그럴 일이 있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할 건데, 굳이 자기가….’여름은 최하준의 속마음을 전혀 모고 있었다. 최하준이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생각에 급 실망하여 고개를 떨구었다.이지훈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여름을 돌아보았다. ‘남녀상열지사라고는 1도 모르는 녀석 같으니. ‘ 이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30분쯤 달려 차가 멈췄다.여름이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미라클VIP샵’여름도 들어는 봤다. 유명인들만이 드나든다는 동성시 최고의 스타일 샵이다. 최하준이 뒷좌석을 돌아보며 말했다.“일단 메이크업이랑 헤어 받아요. 나는 일을 좀 마무리하고 데리러 오겠습니다.”얼떨떨한 여름이 우물쭈물했다.“쭌, 동성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나 본데…, 여긴 최소한 한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하는 곳이에요.”“쭈~운?”이지훈이 박장대소했다. 최하준이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 얼른 입을 꽉 다물었다. 이지훈이 얼른 말을 이었다.“우리가 있는데 무슨 예약이 필요해요? 올라가요. 내가 원장님께 얘기해 놨어요.”“와! 그렇군요.”여름이 감동한 눈빛으로 이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 씨가 재력가 집안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확실히 ‘어나더레벨’이네.’2층으로 올라가자 원장이 직접 고객을 맞이했다. 직접 여름의 스타일링을 해준다고 했다.한 시간쯤 지나 최하준이 돌아왔다. 여름을 기다리며 잠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VIP룸의 문이 열리고 여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아몬드로 포인트를 준 아쿠아블루 롱드레스는 적당히 볼륨이 있는 여름의 몸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