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준, 당신이 너무 미워.”여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일단 몸조리 합시다. 회사도 가지 말고. 화신그룹 일은 내가 직접 당신 대신 처리해 줄게. 우리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날 때까지는.”하준은 도저히 여름의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애써 힘을 짜내 입을 열었다.말을 마치고 하준은 현관으로 걸어갔다.“거기 서요….”여름이 쫓아가려고 했지만 상혁이 상당히 괴로운 얼굴로 여름을 막아섰다.“사모님, 제발 회장님과 다투지 말아 주십시오. 요즘 사모님을 위해서 송 대표에게 대응해야 하지, 지다빈의 부모님은 딸을 살려내라며 매일 와서 야단이시지…. 지금 회장님이 정말 힘드십니다.”여름은 멈칫했다. 도저히 상혁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사망한 사람이 진짜 지다빈이 확실해요?”“네. 부검의와 감별을 진행한 검사원이 모두 우리 쪽 사람들이니 확실합니다. 정말 사모님께서 잘못 아신 겁니다.”‘잘못 알다니?틀릴 수가 있나?다들 내가 백소영에게 속았다고 하지만 난 그게 강여경의 눈빛이란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어.그런데 어떻게 최하준이 가져온 감별 결과는 그 사람이 지다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지?그래, 강여경은 가짜 지다빈이니까 내가 진상을 파악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진짜 지다빈을 내보낸 거야. 지다빈을 연기하기 위해서 진짜 지다빈은 그쪽에서 잡고 있었겠지.’여름의 심장이 철렁했다.생각할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즉시 임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있지, 너 친자 감별하러 갔을 때 혹시 누구 아는 사람에게 친자 감별하러 간 걸 들키지 않았어?”“네가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당연히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 강태환의 머리카락을 얻으려고 우리 오빠한테 부탁한 거 말고는. 그치만 우리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여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임준서라면 믿을 수 있다.“그러면 센터에 가던 도중에 아는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어? 예전에 강여경이랑 사이가 좋았던 사람이라든지?”“아닐 걸… 결과지 받으러 갔을 때 윤
통화 시간은 겨우 몇 분이었다.그러나 모든 것이 여름의 예상대로였다.신아영이 강여경에게 말한 것이었다.신아영이 강여경은 도망치고 백소영이 누명을 쓰도록 만든 것이다.임윤서는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어떻게 택시를 불러서 윤상원의 회사로 갔는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났다.신아영은 내내 윤상원의 회사에 다녔다.회사에 도착해서 임윤서는 그대로 위로 올라갔다.우아하게 차려입고 있던 신아영은 깜짝 놀랐다.“어머, 윤서 언니! 어쩐 일이에요? 상원 오빠를….”“너 찾아왔다!”임윤서가 바로 달려들어 신아영의 어깨를 쳤다.진작부터 이러고 싶었지만 내내 상원의 얼굴을 봐서 참고 있었는데 드디어 폭발해 버린 것이다.‘얘 때문에 소영이가 감옥에 가게 생겼어.얘 때문에 여름이가 최하준에게 오해를 샀고.얘 때문에 내가 업계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고.’“신아영, 내가 다른 건 다 참았지만, 강여경하고 연락은 하지 말았어야지. 대체 걔한테 뭐라고 했어? 너 때문에 우리가 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신아영은 워낙 작고 말라서 덩치로는 임윤서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구석으로 한껏 밀리고 있었다. 회사에는 임윤서를 알아보는 직원들이 많았다. 다들 임윤서가 윤상원의 지인인 줄 알아서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신아영은 완전히 구석에 몰려 멱살을 잡혔다.”“이거 놓고 말해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신아영이 몸을 빼려고 애쓰며 말했다.“모르는 척 하지마. 네 핸드폰 보여줘 봐. 그러면 알겠지. 분명 강여경 전화번호랑 톡이 있을걸.”임윤서가 막 휴대전화를 빼앗으려고 하는데 뒤에서 윤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윤서,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윤상원이 있는 힘껏 임윤서를 밀어냈다.무방비 상태였던 윤서는 바닥에 넘어졌다.윤상원은 바로 신아영을 당겨 얼굴을 쓰다듬고 흩어진 머리를 쓰다듬더니 품에 안았다.“오빠, 너무 무서워.”“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상원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신아영을 보니 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
“그런가 보다. 생각해보니 맨날 둘이 같이 출퇴근 했잖아.”“그러니까 임윤서 입장에서는 남친이 바람난 거네.”윤상원은 직원들이 소곤거리는 말을 알아듣고 얼굴이 화끈해졌다.“말은 정확하게 하십시오. 임윤서가 쳐들어와서 폭력을 행사한 겁니다. 저하고 임윤서는 헤어진지 오래 됐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그러면 임윤서는 왜 갑자기 그렇게 폭력을 행사했을까요? 임준서의 날카로운 시선이 윤상원에게 떨어졌다.“상황이야 어쨌든 사람을 때리는 것은 옳지 않죠.”임윤서가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과히 보기 좋지는 않았다.‘원래 저런 인간이었어. 내가 눈이 삐었지. 저런 인간을 좋아했다니.’마음 아파진 임준서가 임윤서의 어깨를 토달였다.“사람에게 폭력은 행사하면 안 되지. 하지만 전 남친이라는 사람이 윤서를 그렇게 모르나? 아마도 애초에 우리 윤서를 이해할 생각해볼 생각조차 안 해본 거겠지. 우리 윤서가 네 품에 있는 그 사람 머리카락 한 올만도 못하거나, 자네가 우리 윤서를 처음부터 부도덕한 인간으로 낙인찍어 놓고 보고 있거나.”윤상원은 그 말을 듣자 몸이 굳어졌다.“형님, 우리는 지금 임윤서가 폭력을 행사한 사실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일을 여기서 왜 들먹입니까 윤서와 저는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습니다.”“그야 그렇긴 한데, 나는… 내 동생이 자네 같은 사람에게 청춘을 낭비한 것이 너무 보기 안타까워서 말이지.”임준서가 냉랭한 눈빛을 드러냈다.“잘 들어. 윤서가 폭력을 행사했는지는 몰라도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경찰에 신고하고 싶다고? 해. 경찰이 와서 과연 내 식구를 잡아갈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그러더니 임준서는 윤서를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지금 걔 버릇 망치고 있는 겁니다.”윤상원은 울컥하기도 하고 직원들 앞에서 부끄럽기도 했다.“그래. 내가 오냐오냐했지. 내 귀여운 동생이니까. 누군가를 아끼면 오냐오냐하는 게 당연하잖아?”임준서는 콧방귀를 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임윤서는 오빠의 품에 안겨서
“오빠….”임윤서는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내가 너무 멍청했어. 그까짓 일도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친구들 인생을 망가트렸어, 내가.”“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이번 건에서 넌 그렇게 핵심적 역할은 아니었어.”“……”안심이 되는 건지 아니면 충격을 받은 건지 알 수 없었다.“난 있는 대로 말하는 거야.”임준서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상대는 막강한 존재야.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가 금수저들이라고. 내로라하는 집안 자재들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 수 있는 인간들이야. 너 같은 애들 몇 명쯤이야 말할 것도 없지.”“그럼 나는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임윤서가 고민되는 듯 물었다.“동성으로 돌아와서 우리 회사에서 일을 하든지 아니면 외국 나가서 유학을 좀 하지, 뭐.”임준서가 윤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네가 세계 최고의 조향사가 되면 송영식이 블랙리스트에 올렸거나 말거나 오슬란에서 먼저 어서옵쇼하고 모셔갈걸.”그 장면을 상상해 보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윤서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아니야. 내가 어떻게 여름이를 호랑이 입 속에 넣어 두고 혼자 나가. 소영이도 감옥에 있고…. 난 차마 그렇게는 못 하겠어.”“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냐.”임준서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최하준의 본가.여름은 임윤서의 문자를 받자 옆방의 하준을 찾아갔다.그러나 문을 열고 보니 하준의 방은 텅 비어 있고 이모님이 걸레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하준 씨는요?”“회장님은 옆 동으로 가셨는데, 모르셨어요?”이모님이 의아한 듯 물었다.“……”여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예전에 하준은 무슨 수를 쓰든 여름의 곁에서 자려고 했었다. 심지어 야밤을 틈타 몰래 여름의 방으로 숨어들기도 했다.‘지다빈이 죽은 다음부터였던가?나에게 뭔가 불만이 있나?나 때문에 지다빈이 죽어서 송영식과 의를 상했다고 이러는 건가?’여름은 쓴웃음을 짓고 자신이 얼마나 모순된 인간인지 생각했다.하준이
이주혁은 여름을 한 번 쳐다보더니 하준에게 물었다.“다빈이 장례식이 일요일인데, 갈 거야?”“……”“가자. 네가 안 가면 영식이가 또 난리 날 거야.”이주혁은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간다….”“기다려요.”여름이 일어섰다.“보여드릴 게 있어요”여름이 신아영의 통화기록을 둘에게 보여주었다.“윤서가 동성의 병원에서 지다빈과 강태환의 친자 감별 결과를 받던 날, 윤서가 신아영이라는 애랑 만났어요. 걔가 강여경이랑 아는 사이거든요. 윤서가 결과지를 받아왔을 때 누군가가 서울에서 신아영에게 전화를 걸었어요….”“무슨 뜻입니까?”이주혁은 안색이 변해서 말을 끊었다.“그러니까, 신아영이 전화를 건 상대는 강여경일 가능성이 있고, 강여경은 내가 자기 머리카락으로 강태환과 친자 감별을 해서 자기가 지다빈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하준 씨가 잡아들이려고 하니까 본인은 빠져나가고 진짜 지다빈을 잡히게 만든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가서 이 번호를 한 번 추적….”“이 일에 더는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하준이 여름의 손을 놓았다. 서리처럼 찬 기운이 눈에 어렸다.여름은 이를 물었다.“하지만 이번 사건은 정말 수상하다고요. 가서 조금만 파보면….”“그만, 이 일은 이제 손 떼세요. 전에 하준이에게 이 일을 조사해 보라고 해서 하준이가 지다빈을 잡아 놓는 바람에 멀쩡하게 살아 있던 사람 생목숨만 잃었잖습니까?”이주혁이 짜증스럽게 말을 끊었다.그렇다. 이전까지 그래도 이주혁에게 여름의 이미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으나 이번에 지다빈의 죽음으로 하준과 친구들은 친구를 잃었으니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작은 의혹이라도 남겼다가 진정한 막후의 검은 손이 이대로 빠져나가게 될지 몰라요. 소영이도 사람인데 걔가 모함에 빠진 거라면 감옥에서 일생을 망치게 되는 거잖아요. 전에 사귄 적도 있는 사이면서….”“난 평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 그 독한 여자랑 사귄 겁니다.”이주혁이 냉정하게 말했다.“걔 악독한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요.”
장례식장.우울한 분위기에서 장례식이 거행 중이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하준과 이주혁이 차에서 내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둘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검은 세단에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이번 사태에서 목숨을 구한 강여경이었다.“훗, 내가 미리 알아서 진짜 지다빈하고 바꿔치기했기 망정이지. 너희들은 내가 가짜 지다빈이었다는 건 꿈에도 모를 거다.”강여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최하준, 강여름, 너희들이 날 괴롭힌 만큼 모두 되갚아 주겠어.”“잘했어.”보조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이제 지다빈이 죽고 백소영이 감옥에 가면서 최하준, 강여름, 송영식 사이에 틈이 생겼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결과가 나왔군. 아주 만족스러워.”강여경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하지만 이 얼굴은 이제 못쓰게 되었네…”“일단 해외로 나가. 나중에 당신을 쓸 데가 또 있을 거야.”남자가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울리자 기사가 시동을 걸었다.“왜 그래?”이주혁이 물었다.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방금 누가 몰래 우릴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우리나라 최고의 기업 총수인데 언제 어디서든 누가 훔쳐보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냐?”“… 들어가자.”하준이 돌아섰다.장례식장에 들어서서 향을 피우던 송영식과 마주쳤다. 송영식이 싸늘하게 하준을 한번 노려보더니 시선을 피했다.이주혁은 다가가 인사말을 건네고 하준은 조용히 다가가 묵념했다.지다빈의 어머니가 대놓고 무례하게 말했다.“최 회장은 향 피웠으면 가요.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지영수도 화가 나서 한마디 하려는 참에 밖에서 들어오던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손에 들고 있던 초를 떨어트리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지…지안이? 백지안이 돌아왔어….”“무슨 헛소리니? 지안이 죽은 지가 언제인데?”지다빈의 어머니가 돌아보다가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송영식, 이주혁, 최하준 세 사람도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검은 원피스는 입구에서 걸어 들어오
백지안은 마음이 괴로운 듯 입술을 꽉 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만하자, 영식아. 지안이도 무슨 고충이 있겠지.”이주혁이 송영식의 말을 끊었다.송영식은 물끄러미 백지안을 바라보더니 결국 한숨을 쉬었다.“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돌아왔어?”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하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 익숙한 얼굴을 보니 백지안은 얼굴이 울컥했다. 백지안은 서서히 시선을 그 뒤의 영정사진으로 옮겼다.“다빈이가 죽을 줄은 몰랐거든. 내가 가장 아끼던 사촌 동생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서.”다들 할 말이 없었다.지영수가 갑자기 다가와 백지안을 안더니 대성통곡했다.“지안아! 왜 이제서야 왔니? 다빈이가 얼마나 억울하게 죽었는지 모른다.”“삼촌, 지안이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어요?”백지안이 울먹이며 물었다.그 말을 듣더니 지영수가 하준을 노려보았다.“다 저 인간의 와이프와 백소영이 우리 애를 모함해서 생긴 일이다.”백지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눈을 깜빡이며 하준을 돌아보았다.“하준아….”하준은 백지안의 눈을 피했다.“백소영이….”“네 와이프라고 강여름 감싸는 것도 이제 작작 해!”송영식이 화를 냈다.“강여름은 너무 못된 인간이라 너에게는 안 어울린다고 내가 한두 번 얘기했냐? 이제 지안이도 돌아왔고, 이제 걔랑은 헤어져.”하준의 미간에 세로줄이 생겼다. 막 한 소리 하려는데 백지안이 급히 끼어들었다.“영식아, 그런 소리 그만해. 어떻게 결혼을 한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이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이제 나하고 하준이는 이미 끝난 사이야.”“끝나긴 뭐가 끝나? 하준이 마음속에는 여전히 너밖에 없는데. 설마 너 이제 하준이를 사랑하지 않…”“됐어.”하준이 굳은 얼굴로 송영식의 말을 잘랐다.“지안이가 살아 돌아온 것은 기쁘지만 난 이제 아내가 있는 사람이야.”“싸우지들 말고, 지안이가 돌아왔으니 기쁜 일이잖아. 밤에 우리 환영식하러 가야지.”이주혁이 말했다. “고마워,
백지안이 와인잔을 꽉 잡았다.“그렇지만 그런 생각해 본 적 있니? 젊은 여자가 납치되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세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술잔을 쥔 하준이 손이 떨렸다.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백지안을 쳐다봤다.“세세한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을게. 너무 힘드니까.”백지안은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당하고 또 당하고… 얼마나 당했는지 모르겠어. 한참 만에야 겨우 기회를 잡아서 탈출했지만 난… 난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 비자도 취소되고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방법이 없었어. 식구들에게 간신히 연락을 했었는데 식구들은 날 모르는 사람 취급하면서 그냥 그대로 외국에서 사라졌으면 하더라고.”“너무 하잖아.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에게!”송영식이 벌떡 일어섰다.“하준이에게 연락할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 난 이미 하준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백지안이 눈을 깜빡이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하준이는 하늘의 별 같은 존재인데 나는… 그런 몸이 되어버려서 하준이가 날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으면 했어.”하준은 두 눈을 감았다. 심장이 기름에 덴 것 같았다.자신이 백지안을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지안이 겪었을 마음의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러나 이제는 여름이 아이를 가졌고 하준의 마음도 달라졌다.“됐어. 거기까지만 얘기하자.”이주혁이 손수건을 건넸다.송영식은 심장을 에는 것 같았다.“지안아, 걱정하지 마. 네가 어떤 모습이 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널 버리지 않아. 넌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순수한 소녀야.”“고맙다.”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백지안이 웃었다.“사실은 이번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돌아왔어.”그러더니 백지안은 명함을 석 장 내밀었다.하준은 백지안의 명함을 받아 들고 흠칫했다.“네가 그 글로벌한 명성을 떨친다는 정신의학 박사 나드쟈야?”“명성까지는 좀 과장이지만 이쪽 방면에서 나쁘진 않은 편이야.”백지안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최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