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이 시간이면 할머니 전화기 꺼놓고 주무실 시간이거든.”하준이 의기양양하게 말하면서 여름을 와락 안았다. 왼손으로는 여름의 배를 문질렀다.“어디 보자. 오늘 우리 아기들은 얼마나 컸나?”“아니 이제 6~7주 된 아기들이 뭐 만져진다고.”여름은 어이가 없어서 하준을 밀어냈다.“가요. 난 잘 거야.”“아까 물어본 거 대답 안 해줬잖아.”하준이 눈빛을 빛내며 여름을 쳐다봤다.“누가 우리 아기들 이모가 돼 주냐고? 임윤서는 영 머리가 영리한 것 같지는 않으니 별로고, 백소영이면 더 동의할 수 없고….”“최하준 씨, 오밤중에 와서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예요?"여름은 화가 나서 베개를 집어 던졌다.“애는 내가 낳을 거니까 누가 이모가 되던 내 문제지.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다 그만둘 거야.”“뭐라고?”하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말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하면 안 되지. 아기가 아직 요만하다고 해도 우리 하는 말 다 들릴 텐데. 우리 아기들 기분이 어떻겠어?”여름은 임신으로 인해서 쉽게 흥분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했다. 하준에게 지적질을 당하자 갑자기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누가 막 그렇게 자극하라고 했나? 당신이 나랑 다시 같이 살고 싶다면 이제 내 친구도 다 받아줘요.”하준은 여름이 울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알았어, 알았어. 울지마.”여름은 그치기는커녕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소리를 질렀다.“그리고, 당신이 뭔데 내 친구를 두고 마음에 드니 안 드니 그래? 송영식은 머리가 좋아? 내가 보기에는 무식하던데. 이주혁은 완전 여자만 밝히는 바람둥이고. 당신 친구도 괜찮은 사람 하나도 없던데.”“……”하준은 여름의 팩트 폭격에 놀라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원래라면 이렇게 여름이 자기 친구를 모욕하면 화가 나야 정상인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름을 보니 그저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울지 마. 울면 아기한테 안 좋아.”“울 거야. 누가 오밤중에 내 방에 들어와서 나랑 싸우래? 나도 밤에 가만히 잠
第 “어라? 윤서 언니?”상대 차의 창문이 열리더니 여우 같은 신아영의 얼굴이 나왔다. 임윤서를 만나서 사뭇 반갑다는 표정이었다.임윤서는 울컥했다.‘와 씨, 동성에 오자마자 제일 짜증 나는 얼굴을 만난단 말이야?’“언니 동성에는 어쩐 일이에요? 새 남친 생겼다면서요? 언니가 상원이 오빠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신아영은 눈썹을 여덟 팔 자로 만들면서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남이사! 넌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안 들리니? 너 내 차 받을 뻔했잖아!”임윤서는 이제 참을 수가 없었다.신아영이 억울하다는 듯 우물쭈물했다.“미안해요, 그게….”“내가 대신 사과할게.”보조석 문이 열리더니 윤상원이 나왔다. 그 위풍당당하던 윤상원은 이제 파리하고 힘이 없었다. 미간은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그런 꼴을 보니 임윤서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그러나 얼른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걱정의 말을 꿀꺽 눌러 삼켰다.이미 헤어졌으니 윤상원이 어디가 아프던 이제 임윤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게다가 예전처럼 윤상원이 병이 나니 신아영이 곁에 붙어 있는 상황이 아닌가.“내가 너무 속이 안 좋아서 아영이가 급하게 자리를 찾느라고 그런 거야.”윤상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임윤서를 쳐다봤다. 하얀색 SUV를 끌고 옅은 화장을 한 임윤서는 너무나 근사했다.윤상원은 자신이 서울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내내 단 한 순간도 자신은 임윤서를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임윤서와 함께 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내내 우울하기까지 했다.전에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기회가 생기면 거절하지 않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이번에 속이 안 좋은 것도 어젯밤 너무 마셔서 위를 상했기 때문이었다.신아영은 윤상원이 내내 임윤서를 쳐다보는 것을 보고 질투심에 불타올라 억지웃음을 지었다.“언니, 언니가 오빠랑 먼저 들어갈래? 전에는 늘 언니가….”‘늘 언니가…?’임윤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말 이상하게 하네?그래. 늘 내가 윤상원하고 같이 있었지. 그런데 나만
“임윤서! 글쎄 병원 유전자 감별 센터에 들어가더라. 어디 가서 누구 혼외자식이라도 임신한 거 아닌지 몰라?”“유전자 감별 센터?”저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임윤서가 동성에 있어?”“그래, 왜 갑자기 여기 나타났는지 나도 이상하더라니까. 또 상원 오빠를 뺏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그 꼴은 못 보….”“아영아, 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다음 얘기는 나중에 해야겠다.”전화를 끊고 나니 강여은은 아직도 따끔따끔한 두피가 떠올랐다. 강여름에게 머리를 잡아 뜯긴 자리가 아직도 욱신욱신했다.그러고 나니 가슴이 철렁해서 바로 미스터리의 인물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여름의 친구인 임윤서가 갑자기 동성의 한 병원 유전자 감별 센터에 갔대요. 강여름이 나와 아버지의 친자 감별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요.”“내가 알아보지.”“최하준 쪽에서 내가 가짜 지다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날 죽이려고 할 거예요.”“걱정하지 마. 우리를 위해서 일해주고 있는데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지.”----병원.임윤서가 금방 유전자 보고서를 받게 되었다. 위에 커다랗게 쓰인 ‘친자 확인’이라는 글씨를 보고 임윤서는 강여경의 조상님 무덤에라도 절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얼른 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우와, 정말 네 말이 맞았어. 지다빈하고 강태환 유전자 감식결과 둘이 친자로 확인됐어. 걔가 강여경이야.”여름은 이마를 짚었다. 정말 바라지 않던 결과였다.그러나 지다빈을 만나고 점점 심각해지는 병세와 매일 하준에게 따라주던 우유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그게 다 제대로 된 약이었을까?’그런 생각을 하니 몸에 한기가 들었다.“결과서 찍어서 보내줄게. 빨리 최하준한테 보여줘.”여름은 사진을 받자마자 하준의 서재로 들어갔다.요즘 하준은 거의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서재에서 일했다.여름이 서재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하준은 여름을 보더니 눈이 반짝했다. 최근 여름이 주동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나 보고 싶어서 왔어?”“왜 그래?”하준이
여름이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잘 생각해 봐요. 당신 친구들은 자꾸 내가 당신을 자극해서 당신 증상이 나빠졌다고 말하는데, 백지안이 죽었을 때도 정서적으로 크게 타격 입지 않았나요?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이전에도 이렇게 기억력에 문제 있고 머리가 아팠던 적 있었어요? 왜 지다빈이 당신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기억력이 급속도로 나빠졌을까요?”하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확실히 최근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난 걔가 지다빈이라고100% 확신해요. 걔가 당신 주변에 나타난 이유가 뭘까? 당신이 평소 마시던 우유랑 약에 뭘 넣지는 않았을까? 이런 생각해본 적 있어요?”여름의 눈에 의혹이 가득했다.“그렇게 매일 약을 먹고 치료를 받는데 전에는 호전이 됐었는데 요즘은 왜 하나도 안 들을까?”하준은 말문이 꽉 막혔다.드디어 여름의 말에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지금 당장 걔 잡아다가 강태환이랑 유전자 검사해 봐도 좋아요. 지다빈의 부모님은 살아 계신가요? 난 걔가 강여경이라는데 다 걸겠어요.”여름이 덧붙였다.“하지만 지금은 섣불리 움직이면 안 돼요. 걔를 데려간 사람이 걔를 당신 주변에 심어둔 거예요. 당신과 맞서려는 사람이 배후에 있는 거야.”“그래.”하준은 바로 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가서 지다빈 잡아와. 24시간 내에 지다빈하고 지영수 친자 감별해 봐.”여름은 살짝 실망했다.결국 하준은 여름이 보여준 친자 검사 결과를 믿지 못하니 직접 해보아야 믿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어쨌거나 ‘그 지다빈’은 강여름이 성형한 가짜라는 점은 사실이니 여름은 상관없었다.----밤 12시.갑자기 상혁에게서 전화가 왔다.“회장님, 큰일입니다. 지다빈이 사망했습니다.”“어떻게 된 일이야?”하준이 벌떡 일어났다.“제가 사람을 시켜서 교외 별장에 데리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새벽에 침입자가 있어서 지키고 있던 사람이 지다빈을 먼저 구하려고 놈을 쫓았는데 돌아와 보니 두 사람이 기절해 있고 집에는 불이 붙었더
“이주혁 선생님네 병원 연구소에 의뢰한 결과이니 잘못됐을 리 없습니다. 부검을 할 때 성형 여부도 확실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그래.”하준이 머리 양옆을 꾹 눌렀다.“어젯밤에 침입한 자는 누구 보낸 건지도 좀 알아봐.”“찾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 데도 강여름을 감싸고 도는 거냐?”송영식이 소리쳤다.“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악독할 수가 있어? 다빈이는 눈곱만큼도 널 유혹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고. 그런데도 강여름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다빈이를 못 잡아 난리더니….”“여름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하준은 부인했다.“여름이도 분명 누구한테 속은 거야.”“정말 속았다면 그건 강여름이 멍청하고 그만큼 속이 좁다는 뜻이잖아!”“송영식, 말 다했냐?”하준은 이제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었다.“아니, 다 못했다. 그래도 강여름이 네 와이프라고, 내가 내내 참아왔어.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송영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그만들 해.”차에서 내리다가 둘의 대화를 들은 이주혁이 다가왔다.“어쨌든 이번 일은 내가 그냥 이렇게 넘어가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하준이가 보호한다고 해도 내가 이번 사건 배후의 인물을 잡아서 가만두지 않을 거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이주혁이 하준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여름이가 질투심은 있는지 몰라도 그렇게 막 돼먹은 인간은 아니야.”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백소영이 여름이에게 지다빈이 가짜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그런 의심을 품지도 않았을 거야.”“백지영!”이주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또 그 녀석이야?”잠시 후 이주혁이 차갑게 내뱉었다.“이번 일에는 끼어들지 않았기만 바란다.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면 반드시 복수할 거야.”----오후가 되어 부검ㅜ결과가 나왔다.“회장님, 현장에서 나온 시신은 확실히 지다빈 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부모님들과 전면적인 유전자 검사를 거쳐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상혁이 말을 마치자 하준이 온몸을 떨며 옆머리를 꾹 눌렀다.
“알겠어요.”백소영은 부모님의 다정한 말씀에 가슴이 따뜻해졌다.“한 번만 더 노력해 보고 영 부품 조달이 어려우면 회사는 매각해야죠. 나중에 우리 다 같이 서울을 떠나서….”백소영이 말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경찰이 들이닥쳤다.“백소영 씨, 백소영 씨가 살인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파악되었습니다. 함께 경찰서로 좀 가주셔야겠습니다.”경찰 한 명이 다가서며 수갑을 채웠다.백소영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완전히 어리둥절해졌다.“살인 사건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지다빈 씨가 사망했습니다. 차대풍과 진소인 등이 방화와 살인에 대해 모두 시인했습니다.”백소영은 머리가 윙윙 울렸다.“그럴 리 없어요. 차대풍이랑 진소인은 제가 부리는 사람들은 맞지만 난 그런 일을 지시한 적이 없는데요.”“본래 처음부터 자기가 했다고 순순히 시인하는 범인은 별로 없죠. 하지만 우리가 이미 정황을 다 확보했습니다.”경찰 두 사람이 다가와 그대로 백소영을 끌고 갔다.“아닙니다. 내 딸은 사람을 죽이는 그런 애가 아닙니다.”서인수가 따라가며 경찰을 막으려고 했다. 경찰이 서인수를 막아섰다.“따님은 살인을 교사하는 등 죄질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서인수는 충격으로 바닥에 쓰러졌다.“여보!”연화정이 놀라서 달려와 구급차를 불렀다.백소영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고용인들은 몇 년 동안 따스했던 그 집안의 분위기가 연기처럼 사라져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요 며칠 여름의 눈꺼풀이 계속 떨렸다.여름이 지다빈이 가짜라는 증거를 찾았으니 하준도 분명 뭔가를 알아냈을 터였다.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하준은 집에 돌아오지도 않고 심지어 전화 통화도 되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백소영도 전화가 되지 않았다.일종의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임윤서가 전화를 걸어올 때까지 불안은 점점 더 커졌다.“아이씨, 짜증나 죽겠어. 송영식 그 인간이 오슬란에서 날 쫓아냈어. 돌았나 봐, 진짜.”“어떻게 된 일이야? 계약서 쓰고 들어간 거 아니야?”“그렇지. 계약도 5년이나
‘이런 우연이 있을까?’전화를 끊고 나서 여름은 하준에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여전히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결국 상혁에게 전화했다.한참을 울리고서야 상혁이 느릿느릿 전화를 받았다.“네, 사모님. 무슨 일이십니까?”“하준 씨가 왜 전화를 안 받죠?”“회장님이… 회의 중이시라서요.”“그러면 어제랑 그제는요? 계속 내 전화 안 받던데?”여름이 다소 짜증스럽게 물었다.“어쨌든 오늘 밤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오라고 전해주세요. 안 그랬다가는… 오늘 밤에 내가 직접 찾아간다고.”“저한테 이러셔도 회장님이 일이 있으면....”“아무리 일이 바빠도 이렇게 며칠을 연속으로 밤샘할 일은 아니겠죠. 아니면 밖에 여자가 생겨서 내 전화 안 받는 건가요?”여름이 차갑게 웃었다.“이번에도 백지안을 닮은 여자가 나타났나 봐요?”“…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오후 2시가 되니 윤서에게서 전화가 왔다.“큰일 났어. 소영이 난리 났더라. 경찰에 잡혀갔대. 지다빈 살인 사건에 연루됐다네? 걔네 아버지는 심장병이 도져서 입원하시고 어머니는 여기저기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아무도 손을 안 내민다네. 최하준, 송영식, 이주혁 셋이 손을 써놨대. 백소영 도와주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한다면서.”“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여름은 머리가 굳어서 안 돌아가는 느낌이었다.“지다빈이 죽어?”“그래.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걔는 지다빈이 아니라 강여경이잖아. 그런데 강여경이 죽은 거랑 소영이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임윤서가 말을 이었다.“나 지금 병원에서 소영이 아버지 간호하고 있거든. 고용인들도 다들 도망갔고 영하는 지금 부도 직전이야.”여름은 머릿속이 온통 엉켜버렸다. 도저히 저녁에 하준이 퇴근하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바로 차를 끌고 나왔다. 그러나 대문 수위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사모님, 어르신들 허락을 받지 못하시면 혼자서는 못 나가십니다.”수위가 사뭇 곤란한 얼굴로 해명했다.“이러지 마세요. 저 지금 당
“당신이 직접 봐봐.”하준이 검사 결과 2부를 여름의 손에 쥐여주었다.“하나는 모근에서 추출한 DNA 감별 결과고 하나는 지다빈 시신 부검 결과야. 지다빈이 지영수의 친자이고 부검 결과 지다빈은 성형수술을 한 적이 없다는 내용이야. 백소영이 당신을 속인 거야.”여름은 즉시 검사 결과를 펼쳐보았다. 자신의 두 눈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나자 여름은 머리가 터져나갈 듯 아팠다.“내가 보니까 당신 지금 완전히 백소영에게 세뇌당했어. 당신하고 백소영이 친한가, 내가 친한가? 백소영의 말은 믿고 내 말은 못 믿겠다는 거야? 걔는 괜찮은 인간이 아니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여름이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하준은 화가 폭발했다.“당신 말을 듣고 지다빈을 일단 잡아뒀었지. 그런데 누군가가 불을 질러서 지다빈이 죽어버렸어. 방화점을 잡고 봤더니 백소영을 위해서 일하던 녀석이더라고.”“……”여름은 비틀비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다가 그대로 소파에 부딪히며 쓰러져 버렸다.하준이 급히 여름의 허리를 받치면서 주의를 주었다.“자기야, 당신은 지금 임신한 몸이라고, 조심해야….”여름은 하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준을 확 밀쳐버렸다.“지다빈은 강여경이에요. 난 알아. 처음 개를 만났을 때 그 익숙한 눈빛….”“그만! 당신이 질투에 눈이 멀어서 그래. 그래서 걔가 강여경이라는 이유를 찾아낸 거야.”하준의 무거운 눈빛에 실망이 스쳤다.“왜 이렇게 날 안 믿어 주는 거야?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질투에 눈이 멀어서 백소영에게 이용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지다빈이 세상을 떠나서 그 친구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몰라. 거기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당신은 날 그렇게 생각하는구나.”여름은 등줄기로 오한이 들었다.“당신이야말로 왜 나를 믿어주지 않는 건데? 이번 사건의 내막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그리고 윤서, 윤서는 대체 뭘 잘못했다고 애한테 그러는 거예요?”“임윤서는 잘못한 거 없지. 당신 대신 친자 감별하러 갔던 것 때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