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쌍둥이입니다. 그래서 더 상태가 위험합니다.”의사가 걱정스럽게 말을 이었다.“다들 어른인데 좀 주의해 주십시오. 병원이어서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일단은 좀 안정시켜 두었습니다만, 어쨌든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감사합니다.”하준이 잠시 생각해 보니 그야말로 아찔했다.하준은 한동안 여름에게 아이를 가지자고 조르다가 지다빈이 오면서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예전에 동성에 있을 때 의사에게 여름이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하준은 그다지 기대를 많이 하지는 않았었다.그런데 여름이 지금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그것도 쌍둥이로!그러나 그 아이들을 지킬 수 있을 지가 미지수였다.그런 생각을 하니 하준은 천국까지 올라갔다가 지옥에 곤두박질친 기분이 들었다.“송영식….”하준은 분노에 영식을 한 대 치고 말았다.“아니, 강여름이 임신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송영식은 되려 분통을 터트리며 끝까지 자신이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다.“임신을 하고도 자기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아무데서나 미친 듯이 사람을 드잡이하고 다니다니, 본인이 스스로 행실을 주의했어야지.”“당장 나가.”하준이 소리질렀다.“지다빈 데리고 꺼져. 다시는 둘 다 병원에 나타나지 마, 알겠어?”그 오랜 세월 친구였는데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친구에게 그런 소릴 듣게 될 줄은 몰랐다.“오지 말라면 안 올게. 다빈아, 가자.”송영식은 다빈을 끌고 나갔다.고개를 숙인 지다빈은 눈을 번뜩이며 가만히 분을 삭였다.‘강여름이 임신을 했을 줄이야. 게다가 쌍둥이라니, 어쩜 운이 저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든 저 아이들을 처리해야겠다.’******강여름은 멍한 상태로 응급실에서 나왔다.예전 같았으면 무작정 기뻤겠지만, 지금은… 만감이 교차했다.‘어쨌든 내 혈육인데, 아이는 좋지. 하지만, 이 아이들을 낳으면 최하준은 영원히 못 떨어내는 거 아니야?’“자기
하준이 여름의 침대 곁으로 오더니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자기야, 나랑 지다빈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까 간호사 선생님이 찔러서 피가 났거든. 지다빈이 들어오다가 마침 그 장면을 보고 놀라서 간호사 선생님을 밀어낸 장면을 당신이 본 거야. 이제 툭하면 그러고 화내지 말아. 엄마가 될 사람인데.”여름이 비웃었다.‘엄마가 될 사람이 속이 뭐 그렇게 좁냐고 비꼬는 건가?이제는 내 기분도 내 잘못이라는 말이야?’“이모님 핸드폰 좀 가져다주시겠어요?”여름은 하준에게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시했다.이진숙이 휴대 전화를 가져왔다. 여름은 윤서에게 문자를 하나 보내고는 게임을 하며 일부러 하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하준은 잠시 앉아 있다가 의사가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따라갔다.이때 상혁이 서류를 한 무더기 안고 들어오다가 바로 하준에게 저지당했다.“나 지금 그런 거 볼 시간 없어. 가서 임신 출산 관련 책이나 좀 몇 권 사 오지.”상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아니, 이건 전부 지금 당장 처리해 주셔야 하는….”“아무리 급해도 내 아이보다 더 중요한가?”하준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아니, 본인이 의사도 아니시면서,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지, 정말….’******정오. 윤서가 급히 들어왔다. 침상에 앉은 여름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넌 이생에 최하준을 벗어나기는 글렀나 보다.”여름은 심란했다.여름도 막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임신 중절을 하자니 차마 그리는 못 하겠고, 아이를 낳자니 최하준이 딱 들러붙어 안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FTT에서도 핏줄이니 간여하려고 들 것이고 여름도 낳아놓고 돌보지 않을 수는 없을 터였다.“그 얘긴 냅두고 이리 와 봐.”여름이 윤서에게 손짓했다.윤서가 다가가니 여름이 윤서의 주머니에 뭔가를 쑤셔넣었다.윤서가 이상해서 손을 펴보았다.“너 나한테 지금 종이 준 거야?”여름이 윤서를 잡아당기더니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종이 안에
“빈털터리로 쫓아내는 게 영 그러면 좀 줘서 쫓아내시던가요? 결혼할 때 나에게 똑 부러지게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혼하면 한 푼도 못 받을 줄 알라고.”여름이 까르르 웃었다.엄상인은 놀라서 하준을 흘깃 훔쳐봤다.‘세상 로맨틱 가이인 줄 알았더니, 뭐야? 완전 이기적인 양반이었네? 우리나라 최고 부자라며 이혼할 때는 돈 한 푼도 아까운 모양이야?두구쇠 같으니라고.’멸시의 시선을 느꼈는지 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지갑을 꺼내더니 큰소리쳤다.“앞으로 내 돈은 당신이 다 관리해요.”“됐어요. 요즘 진짜 부자들이 어디 자산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나? 다 투자하고 없지.”여름은 하준 쪽은 쳐다도 안 보고 말을 받았다.하준은 이제 완전히 말로는 여름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엄상인에게 말했다.“서류 가져오세요. 내가 처리하겠습니다.”이때 병실로 들어오던 상혁은 어이가 없었다.‘우리 회사 서류 처리할 시간도 부족한데 지금 남의 회사 일 처리해줄 시간이 어디 있으세요? 네?이제 우리 회장님이 완전히 와이프 바보가 돼버렸어.’하준은 서류를 받아 들고 소파에 자리를 잡더니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이진숙이 과일을 들고나오다가 깜짝 놀랐다.“회장님, 링거를 벌써 다 맞으셨어요? 보통 4시간씩 맞으시지 않았나요?”상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빨리 사모님 돌보러 가야 한다면서 수액 들어가는 속도를 최대한도로 조절해달라고 하셔서 빨리 끝났습니다.”이진숙은 할 말을 잃었다.여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링거 떨어지는 속도를 체크했다.‘조금만 빨라도 아프던데 최대한도로 빨리 넣으라고 했다고? 어우….’압도적인 하준의 존재감이 병실을 채우고 있으니 다들 자리를 피해 나가버렸다.10분이 지나 여름이 꿈지럭거리더니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하준이 벌떡 일어났다.“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요. 의사 선생님이 꼼짝 말고 쉬라고 했잖아.”“아무리 그래도 나도 화장실은 가야죠.”여름이 언짢은 듯 툭 뱉었다.“의사 선생님은 그냥 많이 움직이지 말라는 소리지
“비상시국이니까 그렇지. 우리 아가들을 위해서 그러는 거야.”그렇게 말하는 하준을 기어코 내보내고 여름은 뒷일을 처리했다.침대로 돌아왔는데도 여름은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에서 열기가 빠지지 않았다.이때 테이블에 놓인 과일이 눈에 들어왔다.과일이라도 좀 먹을까 싶어서 과도를 들자 또 하준이 벌떡 일어났다.“앉아 있어요. 내가 해줄게.”하준은 그러고 여름이 병실에 한나절을 버티고 앉아서 누워있거나 기대고 있거나 자는 것 말고는 여름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낮에 너무 많이 자는 바람에 여름은 다음 날 새벽 5시에 눈을 떠버렸다.깨어서 보니 하준이 자신과 같이 베개를 베고 누워있었다. 대체 최하준이 언제 침대로 기어들어 왔는지 기억도 없었다.어쨌거나 어제 하준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지다빈을 생각하니 새삼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그러나 어쨌거나 세상 모르고 잠에 든 하준은 마치 천사 같았다.기다란 속눈썹이며 모공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에 눈, 코, 입이 하나같이 예술이었다. 마치 신이 빚어낸 완벽한 예술품인 듯했다.그러고 반해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낀 하준이 갑자기 눈을 떴다.여름은 놀란 나머지 하준을 냅다 걷어찼다.“누가 남의 침대에 몰래 기어들어 오래요?”바닥에 떨어진 하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물었다.“여기 병원이잖아? 당신은 왜 환자복을 입고 있어?”여름의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요 며칠 같이 지내면서 보니 하준의 기억력이 급속도로 감퇴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깨어나서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도 기억을 못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거의 치매환자 수준으로 기억력이 나빠진 것 같은데?’“기억이 안 나면 그만둬요.”여름은 침대에서 내려가 세수를 하고 양치도 했다.“말해 봐.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당신 어디 아파?”하준이 따라와서 여름의 손을 잡았다.병실에 붙은 휴게실에서 주무시던 이모님이 소리를 듣고 얼른 나오셨다.“사모님, 아침 식사는 뭘로 하시겠어요?”“아무거나 먹죠.”“아이고,
“진정해, 하준아. 닥터 류는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라고.”이주혁이 나서서 달랬다.“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젠장, 난 지금 와이프가 임신한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 있는데! 내일이면 와이프 얼굴도 못 알아보는 거 아니야?”하준은 곧 폭발할 것 같았다.닥터 류는 입술을 움찔움찔할 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준은 이미 자신이 했던 말이 핵심을 찔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침대 위에 풀썩 앉더니 갑자기 침대 머리 맡의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하준아, 진정해!”이주혁과 닥터 류가 하준을 잡으려고 했지만 하준은 두 사람을 밀쳐버렸다.여름이 이를 악 물고 다가갔다.“나랑 우리 아이들 놀라잖아요.”치켜들었던 하준의 손이 공중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여름과 여름의 배를 보더니 두 손을 공손히 내려 모았다.“난 이런 병이 있어서 나중에 아이들이 눈 앞에 있어도 알아보지도 못할지도 몰라.”“아니야. 내가 이미 해외에 나드자를 수소문하고 있어. 나드자만 찾으면 널 치료할 수 있을 거야.”이주혁이 하준의 어깨를 두드렸다.“나드자는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해.”하준의 눈이 순해졌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인 지도 모른다.“자기야, 난 신경 쓰지 마. 당신은 가서 좀 쉬어.”여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 병실로 돌아갔다.잠시 후 이주혁이 들어왔다.“여름 씨, 지금 하준이에게 불만이 있는 건 알겠는데, 지금 걔 상태 여름 씨도 알잖아요? 한동안은 하준이랑 싸우지 말아줬으면 해요. 아이를 위해서도, 하준이를 위해서도.”“지금 또 나 때문에 최하준 씨 상태가 안 좋아진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여름은 이주혁이 하준의 상태가 나빠지는 원인을 자신에게 덮어씌우는 것이 은근히 기분 나빴지만 꾹 참았다.이주혁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덧붙였다.“강여름 씨가 이혼하자는 말을 꺼내고 나서부터 하준이 상태가 확실히 급속도로 나빠졌어요.”“난 지다빈이 오고 나서부터 상태가 악화됐다고 생각하는데요.”여름이 담담하게 말했다.이주혁이 미간을 찌
“오늘은 별장에 있니? 집에 포도가 다 익었길래 좀 땄거든. 포도도 좀 주고 싶고, 너도 좀 나아졌나 궁금한데, 나는 굳에 네 집에 가지는 않으마. 할미도 볼겸, 네가 좀 건너오련?”“포도 좋네요. 임산부가 포도를 먹으면 포도처럼 까맣고 커다란 눈을 가진 애가 태어나겠군요.”하준이 중얼거렸다.“뭐, 뭐라고?”장춘자가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생각하시는 그거 맞습니다. 제가 아빠가 될 거예요.”하준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목소리가 고양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게다가 쌍둥이라네요.”“얘, 그렇게 중요한 얘기를 왜 이제서 하니?”장춘자가 얼마나 소리를 지르는지 하준은 귀가 다 얼얼했다.‘쌍둥이라고? 세상에나….’하준의 집안에서는 아직 쌍둥이가 태어난 적이 없었다.옆에서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읽던 최대범도 다가앉으면서 전화기에 쫑긋 귀를 갖다 댔다.“제가 뭐 한다고 말씀드립니까? 우리 여름이를 예뻐하지도 않으시는데….”하준이 다리를 꼬았다.“눈에만 띄면 우리 여름이가 수모를 당할 텐데….”“……”장춘자가 핵심을 찔리자 당황했다.“그, 그건 예전 얘기 아니냐? 걔가 쌍둥이를 임신했으면 당연히 잘 해줘야지. 내가 지금 당장 가서….”“별장에 없습니다.”하준이 갑자기 우물쭈물거렸다.“병원에 있어요. 유산기가 조금 있어서요.”“뭐라고? 대체 무슨 일이라니? 내 새끼들은 다 무사한 게냐? 엄마라는 사람이 좀 조심하지 않고….”“아닙니다. 여름이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좀 잘못했습니다."하준이 슬쩍 에둘러서 답했다.장춘자가 전화를 끊고 40분도 안 돼서 최대범과 함께 병원에 나타났다.두 노인네가 나타나자 여름은 놀라서 펄쩍 뛰었다.장춘자와는 두 번 만나봤고, 최대범은 한 번 만나봤는데 모두 다 좋은 인상을 남긴 적이 없었다.그런데 두 분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고 들어오니 이상할 따름이었다.“할아버지, 할머니, 오셨어요…?”여름이 막 일어서려고 하자 최대범이 위엄 있게 말했다.“어어, 거 움직이지 마라. 우리 같은
‘방을 따로 쓰다니, 말도 안 돼! 하루도 못 참아!’여름은 설명해 드릴까 하다가 할머니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본가로 들어가고 싶어요. 할머니는 자식도 여럿 낳으셨고 경험도 풍부하시니까 할머니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그럼, 그럼.”장춘자가 마음에 든다는 유감없이 드러냈다.이번에는 여름이 마음에 쏙 들었다.하준의 어두운 눈빛이 여름에게로 향했다.왜 이렇게 죽자 하고 자신을 피하면서 한사코 같이 안 자려고 하는지 여름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나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네가 찬성하거나 말거나.”최대범이 명령하듯 말했다.“우리 집안의 첫 쌍둥이니 무조건 몸조리 잘해서 순산해야 한다.”“……”‘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말씀드리지 않는 건데.’두 노인네가 떠나자 하준은 축 처져서 여름을 쳐다봤다.“일부러 그랬지?”“네.”여름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받았다.“최하준 씨는 잊어버렸나 본데, 난 내가 어쩌다가 유산할 뻔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거든요. 지금 나에게는 당신 본가가 가장 안전한 곳인지도 몰라요. 최소한 당신 친구가 당신 병세 악화된 것이 내 탓이라며 날리는 경고 같은 건 안 들어도 될 거 아녜요?”하준의 눈에 짜증이 확 지나갔다.듣자마자 이주혁과 송영식이 또 여름을 찾아가서 한소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둘은 아무래도 내 수십 년 친구이다 보니 나에게 좋을 것이라고 한 짓이겠지.’“미안해요….”“미안할 것 없어요. 난 그럴만한 가치가 없으니까. 당신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건 나도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 마음 속에는 나 말고 지다빈도 있는데 왜 당신의 병세가 나빠진 게 전부 내 탓인지 모르겠네. 심지어 그런 소리를 듣고 기분이 나빠도 참아야 한다니까.”여름은 그런 말을 하고 나니 더는 최하준을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불현듯 이주혁이 여름을 협박하면서 자기 아버지의 치료를 들먹였던 일이 떠올라 더 울컥했다.******다음 날 아침.본가에서 직접 여름을
최민은 강여름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강여름 때문에 하준이가 날 FTT보험 사장 자리에서 날 끌어내리는 바람에 졸지에 내가 백수가 돼버렸다고.’그래서 최민은 여름을 생각하기만 해도 이가 갈렸다.“전 최하준의 아내인데, 왜요? 전 여기 오면 안 되나요, 이모님?”여름이 눈썹을 올리며 웃었다.“흥! 감히 날 이모님이라고 부르지도 마. 네까짓 게 FTT 사모님이라니 가당치도 않다.”“그러니까 말이야. 혼외자식 주제에. 우리는 인정 못하지.”최정도 아무렇지 않게 멸시의 말을 했다.“괜히 저를 건드리지 않으시는 게 좋을 텐데요.”여름은 타격감 없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그 말을 듣자마자 최민이 웃었다.“내가 널 자극하면 또 어쩔 거고, 내가 널 한 대 치면 또 어쩔 거야?”그러면서 손을 쳐 드는데 최정이 최민의 손을 잡았다.“엄마, 저기 할머니….”최민이 멈칫하고 돌아보니 장춘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멀어서 이쪽 상황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을 가능성은 있었다.“할머니가 오시면 또 어쩔 거야? 어쨌든 할머니도 이딴 애 마음에 안 들어 하신다고.”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손을 쳐 드는데 여름이 최민의 손목을 딱 잡았다.최민이 힘을 주어 뿌리치자 여름이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저만치 다가오던 장춘자는 깜짝 놀랐다.“아이고, 우리 아가. 괜찮으냐?”장춘자가 다급히 뛰어왔다.최민의 입꼬리가 의기양양하게 올라갔다.“엄마, 난 괜….”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장춘자가 긴장해서 여름을 부축했다. 귀한 보물이 뭐에라도 닿을세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할머니, 지금….”최정은 기함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할머니가 지금 강여름을 ‘우리 아가’라고 부르신 거야?’“전 괜찮아요.”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뭔가 불편해 보이는 여름이 배를 만지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여기 계속 살아도 아기를 무사히 낳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임신했어?”최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조용히 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