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지는 안 받을래. 급한 일이 생각났어. 먼저 가볼게.”여름은 후다닥 옷을 갈아입더니 집으로 차를 몰았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하준이 자기 집 소파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자기 마사지 받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일찍 왔네?”하준이 노트북을 내려 놓더니 일어났다.“밥 먹었…?”“동성에서 나중에 강여경 본 적 있어요?”여름이 하준의 말을 끊었다.“갑자기 그 사람은 왜?”하준의 조금 덤덤해져서 물었다.“강태환 부부가 수감되고 나서 강여경이 갑자기 실종됐거든요. 혹시 당신이 관련됐던 건 아니에요?”여름이 하준을 똑바로 쳐다봤다.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래. 내가 손을 좀 봐줬지, 강여경은….”하준은 갑자기 찌르는 듯 머리가 아팠다.“아아… 내가 어떻게 했지? 어떻게 했는지 생각이 안 나.”여름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간 하준의 기억력은 내내 문제가 없었는데….“김 실장에게 전화해서 물어 보지. 그 친구는 다 알고 있을 거야.”하준이 상혁에게 전화 걸었다.“어, 혹시 전에 강여경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 나나?”“시골 어디 두메산골에 보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상혁이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여름이 전화를 빼앗았다.“그 동네가 어디에요?”“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집에 들여보내 놨습니다. 평생 눈에 띄지 않을 겁니다.”상혁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아직 거기에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사모님….”“여러 소리 말고 한번 조사해 주세요.”여름이 꽤나 강경한 말투로 부탁했다.“알겠습니다.”상혁은 마지못해 대답했다.통화가 끝나자 하준이 불만스럽게 물었다.“집에 오자마자 강여경 일은 왜 물어?”“당신이 한 일인데 그럼 당신한테 물어야죠. 왜 기억을 못한담? 그리고, 갑자기 두통은 또 무슨 일이래?”“어? 나한테 관심 가져 주는 거야?하준의 눈이 반짝하더니 손을 뻗어 여름을 안았다.“이럴 줄 알았어. 당신은 날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최하준, 이거 놔요. 마음에 두긴 누가….”여름이
“최하준 씨, 나가요.”괜히 사람 비위 맞추려고 아무 소리나 한다고 생각한 여름은 화가 나서 하준을 걷어 차고는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하준은 다리를 문지르며 따라 올라갔다.여름은 샤워를 하기 전에 옷을 준비하려고 옷장 문을 열었다. 그런데 옷장 안에 남자 옷이 가득했다. 심지어 속옷까지 구색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이제 완전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누가 당신 물건 여기다 쑤셔 넣으라고 했어요?”“이사를 들어왔으니 옷도 빨고 갈아입을 옷도 있어야지.”하준이 뒤에 서서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여름이 하준의 옷을 마구 잡아 바닥에 집어 던졌다. 하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마음에 안 들면 버려도 돼. 내일 김 실장 시켜서 새로 사오라고 할게.”“……”눈곱만큼도 흔들리지 않는 하준을 보고 여름도 두 손 두 발을 다 드는 수 밖에 없었다.“좋아요. 이 집이 마음에 드시나 본데. 그러면 이사를 하셔야지. 하지만 이건 내 집이니까 당신은 옆집을 하나 사서 이사를 가시라고, 아시겠어요?”“그건 안 되지.”하준이 눈을 깜빡였다.“당신하고 같이 자려고 이사 온 건데 옆집으로 이사 가는 바보가 어디 있어?”“……”‘와… 남의 집에 가택 침입해 놓고 아주 당연한 듯 저런 소리를 하네?’여름은 더는 말을 섞기가 싫어서 그대로 샤워하러 가버렸다.막 씻고 나와서 보니 하준이 걸레를 들고 부엌을 닦고 있었다. 딱 봐도 대걸레를 처음 잡아보는 사람의 몸짓이었다.여름은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벗어놓은 옷을 세탁기에 넣었다.나와 보니 이번에는 거실을 닦고 있었다.10분 뒤 냉장고에 요구르트를 꺼내러 가니 다시 부엌을 닦고 있었다.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됐어요. 아까 부엌 걸레질 하는 거 다 봤어요. 이제 부엌 그만 문질러요.”“내가 언제 부엌을 닦았다고 그래? 아직 안 닦았는데.”“최하준 씨, 내가 두 눈 뜨고 봤는데, 이제 거짓말을 막 하시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고.”하준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하준은 전혀 아프지도 않은지 고개를 숙여 여름을 내려다 보았다.“물어. 전에 그런 말 한 적 있지? 꼬집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한다고.”“……”여름은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대체 그게 언제 적에 했던 말인데 아직까지 기억을 하고 있어? 하마터면 기억력에 이상 생긴 줄 알 뻔했는데 아니네.’“왜 더 안 꼬집어? 나 아플까 봐?”하준이 아기 고양이를 쓰다듬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여름을 쓰다듬으며 귀에 착 감기는 저음으로 속삭였다.“괜찮아. 난 안 아파. 사랑하는 만큼 실컷 꼬집어.”여름은 마음이 답답했다.이제 꼬집으면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할 것이고 가만 두면 마음이 아파서 차마 꼬집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할 테니 아무리 해도 이 상황에서 말로는 하준을 이길 수가 없었다.“자자.”하준은 여름을 꼭 안은 채로 불을 끄더니 누웠다.여름의 몸에서 나는 채취를 맡으며 하준은 곧 잠에 빠졌다.그러나 여름은 잠이 오지 않았다.배가 고팠다.저녁에 백소영과 나가서 잔뜩 먹고 왔는데 11시도 안 된 시간인데 벌써 배가 다 꺼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다음날.여름이 일어나 보니 벌써 9시였다.처음으로 이렇게 늦잠을 잔 것이다. 여름은 급히 뛰어 내려갔다. 소파에서 신문을 보던 하준이 벌떡 일어났다.“오늘은 내가 된장 끓여놨는데 데워….”“최하준 씨, 내 알람 당신이 껐어요?”여름은 화가 나서 말을 끊었다.“아무리 울려도 안 일어 나길래 내가 껐지.”“거짓말! 난 알람 울리는 순간 바로 깬다고요.”여름은 있는 대로 화가 났다. 자신이 그렇게 알람도 못 듣고 자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막 깨서 부스스한 머리에 눈을 있는 대로 동그랗게 뜨고 화가 나서 발그레해진 여름의 뺨은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러웠다.하준은 웃음이 절로 났다.“어, 당신이 그럴 줄 알고 내가 아까 증거로 다 녹화해 두었지.”영상 속에서 여름은 하준의 팔을 베고 아주 달게 자고 있었다. 잠시 후 알림 소리가 울리자 여름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이불을 홱 감고는 하준의 품
‘역시나….’여름이 예상이 들어맞았다.최하준의 얼굴은 매우 좋지 않았다.“대체 어쩌다가 잡아두지도 못한 거야?”상혁이 민망해 했다.“그 남편 되는 사람이 처음에는 쫓아갔는데 중간에 승합차가 강여름을 태워갔다고 합니다.”“동료가 있는 게 분명하군. 찾아! 승합차부터 추적해 봐.”하준이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알겠습니다.”상혁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결국 또 한 마디했다.“사모님께서 어제 갑자기 강여경을 찾으라고 하셨는데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그러신 거 아닙니까?”하준이 의혹에 찬 얼굴로 여름을 쳐다봤다.“아직은 말할 수 없어요.”여름이 시선을 피했다.‘지금 바로 지다빈이 강여경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가는 안 믿을 지도 몰라.내가 지다빈을 모함한다고 의심할 수도 있고.’“말해 줘요. 당신이 나한테 뭐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 드는 거 별로야.”하준이 여름의 어깨를 잡더니 돌려세웠다.여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면 당신이 내게 지다빈의 정체를 숨기고 당신 곁에 두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기분을 이제 좀 알겠네요?"“……”‘또 시작이군. 또 그 얘길 하기 시작했어.’“밥 먹읍시다. 다 식겠어.”하준이 더는 묻지 못하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여름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걸로 괜히 하준의 기분이 안 좋아서 체면 깎는 일이 생길까 봐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참았다.그러나 찌개를 한 입 먹다가 결국 성질을 부리고 말았다.“아, 소금 가져오라니까.”“여기 있어, 여기.”하준은 한껏 여름의 비위를 맞추며 소금을 들고 왔다.옆에서 보고 있던 상혁은 속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카리스마 넘치던 하준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절절 매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심지어 며칠 전에는 채팅명까지 ‘여하간 love’로 바꾸는 바람에 회사에서도 다들 회장님 휴대전화가 해킹을 당했다며 직원들이 한바탕 난리였었다.‘그러니까 겉으로만 아닌 척 하다가 언젠가는 이렇게 다 들킬 줄 알았다, 내가.’“아 참, 어제 내가 사인해야
여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아요. 지안그룹 이름도 당신이 생각한 게 아니겠지. 뭐 이주혁 선생이 생각했다던지? 꿈에서 백지안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다른 세상이 백지안이 벌이는 짓이라던지…”“……”아무리 말발 좋다는 변호사지만 처음으로 대체 뭐라고 변명해야 좋을지 몰라 말문이 턱 막혔다.차가 병원에 도착하자 여름은 가차없이 말했다.“내리세요. 난 회의가 있어서 출근해야 해요.”좀 무리해서라도 여름에게 같이 올라가 달라고 하려던 하준은 그저 입맛만 다시며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여름은 어쨌거나 이제 아픈 하준을 보면서 마음이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내가 진짜 힘들었을 때는 누가 날 위해서 마음 아파 해줬나, 뭐?’병원은 아침부터 차가 많았다. 입구로 나가는 길도 꽉 막혀있었다.여름이 무심코 창밖을 내다 보는데 지다빈이 파란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손에 꽃다발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하준이 병원에 왔다는 것을 알고 꽃다발까지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여름의 눈이 싸늘하게 반짝 빛났다.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바로 상혁에게 전화를 걸었다.“병실 호수가 어떻게 돼요?”“사모님 올라오시게요?”상혁은 사뭇 들뜬 목소리였다.“네.”“5층 VIP6실 입니다.”******VIP입원실. 상혁이 전화를 끊더니 하준을 돌아보며 눈빛을 반짝거렸다.“온대?”“네.”상혁이 싱글벙글 웃었다.“사모님이 말씀은 그렇게 냉정하게 하셨어도 마음 속으로는 회장님을 내려놓지 못하시는 모양입니다.”하준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어찌나 매력적인 웃음인지 링거를 꽂으려고 들고 있던 간호사가 반할 지경이었다.“좀 있다가 다시 찔러줘요.”하준이 갑자기 손을 뺐다.“조금 있다가 노크소리가 들리면 그때 찔러요. 아, 피나게, 아주 피가 줄줄 흐르게 잘못 찌르면 더 좋고.”“……”간호사는 당황해서 할말을 잃었다.국내 최고 그룹의 총수가 와이프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고육계까지 쓰다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해본
‘내가 안 보는 데서 둘이 몰래 만나고 있었던 거 아니야?’“자기야, 그, 그런 거 아니야.”하준은 저도 모르게 지다빈을 밀쳤다.“아니, 방금 링거를 잘못 찔려서 피가 났는데 지다빈 씨가….”“간호사 선생님도 계신데 지혈할 수 있잖아요? 지다빈이 왜 나서요?”분노에 찬 여름이 하준의 말을 끊었다.“그렇게 지다빈을 못 놓겠으면서 나한테는 왜 자꾸 질척거리는 거야? 사람 데리고 노니까 기분 좋아요?”하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피를 흘려서 그런 건지 여름이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지다빈이 다급히 해명했다.“회장님 말씀이 사실이에요. 와서 보세요, 아직도 지혈이 다 안 돼서….”“시끄러워!”여름이 지다빈을 노려보았따.“지다빈, 나도 이제 참을 만큼 참았어. 보자 보자 하고 자꾸 참아주니까 사람이 가마니로 보이냐?”뜻밖에도 여름이 와락 지다빈에게 달려들더니 머리채를 거머잡았다.“아악! 사, 사모님. 때리지 마세요. 회장님, 살려주세요!”지다빈이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분노한 여름을 당하지 못하고 병실 구석으로 몰렸다.“자기야, 진정해. 일단 놔 봐.”하준이 다가와 여름을 떼어놓으려고 애썼다.그러나 여름은 이미 지다빈의 머리채를 몇 번이나 손에 감아 쥐고 있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다빈은 아파서 비명을 질러댔다.“야, 강여름!”이때 송영식이 들어오다가 이 장면을 보고 여름에게 달려들었다.송영식이 거칠게 여름을 밀치자 여름은 하준의 침대 쪽으로 떠밀려 쓰러졌다.어찌나 아픈지 온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그런데 이상하게 뭔가 아래로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간호사가 여름을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출혈이에요!”여름이 내려다 보니 앉은 자리에 붉은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손으로 만져보니 아직 따끈따끈했다.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하준은 완전히 놀라서 다급히 여름을 안았다.“빨리 의사에게 가야겠어요.”하준은 의사를 찾으며 여름을 안고 그대로 응급실로 달렸다.의사가 곧 여름을 검사실로 데리고 들어갔
“네, 쌍둥이입니다. 그래서 더 상태가 위험합니다.”의사가 걱정스럽게 말을 이었다.“다들 어른인데 좀 주의해 주십시오. 병원이어서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일단은 좀 안정시켜 두었습니다만, 어쨌든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감사합니다.”하준이 잠시 생각해 보니 그야말로 아찔했다.하준은 한동안 여름에게 아이를 가지자고 조르다가 지다빈이 오면서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예전에 동성에 있을 때 의사에게 여름이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하준은 그다지 기대를 많이 하지는 않았었다.그런데 여름이 지금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그것도 쌍둥이로!그러나 그 아이들을 지킬 수 있을 지가 미지수였다.그런 생각을 하니 하준은 천국까지 올라갔다가 지옥에 곤두박질친 기분이 들었다.“송영식….”하준은 분노에 영식을 한 대 치고 말았다.“아니, 강여름이 임신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송영식은 되려 분통을 터트리며 끝까지 자신이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다.“임신을 하고도 자기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아무데서나 미친 듯이 사람을 드잡이하고 다니다니, 본인이 스스로 행실을 주의했어야지.”“당장 나가.”하준이 소리질렀다.“지다빈 데리고 꺼져. 다시는 둘 다 병원에 나타나지 마, 알겠어?”그 오랜 세월 친구였는데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친구에게 그런 소릴 듣게 될 줄은 몰랐다.“오지 말라면 안 올게. 다빈아, 가자.”송영식은 다빈을 끌고 나갔다.고개를 숙인 지다빈은 눈을 번뜩이며 가만히 분을 삭였다.‘강여름이 임신을 했을 줄이야. 게다가 쌍둥이라니, 어쩜 운이 저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든 저 아이들을 처리해야겠다.’******강여름은 멍한 상태로 응급실에서 나왔다.예전 같았으면 무작정 기뻤겠지만, 지금은… 만감이 교차했다.‘어쨌든 내 혈육인데, 아이는 좋지. 하지만, 이 아이들을 낳으면 최하준은 영원히 못 떨어내는 거 아니야?’“자기
하준이 여름의 침대 곁으로 오더니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자기야, 나랑 지다빈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까 간호사 선생님이 찔러서 피가 났거든. 지다빈이 들어오다가 마침 그 장면을 보고 놀라서 간호사 선생님을 밀어낸 장면을 당신이 본 거야. 이제 툭하면 그러고 화내지 말아. 엄마가 될 사람인데.”여름이 비웃었다.‘엄마가 될 사람이 속이 뭐 그렇게 좁냐고 비꼬는 건가?이제는 내 기분도 내 잘못이라는 말이야?’“이모님 핸드폰 좀 가져다주시겠어요?”여름은 하준에게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시했다.이진숙이 휴대 전화를 가져왔다. 여름은 윤서에게 문자를 하나 보내고는 게임을 하며 일부러 하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하준은 잠시 앉아 있다가 의사가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따라갔다.이때 상혁이 서류를 한 무더기 안고 들어오다가 바로 하준에게 저지당했다.“나 지금 그런 거 볼 시간 없어. 가서 임신 출산 관련 책이나 좀 몇 권 사 오지.”상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아니, 이건 전부 지금 당장 처리해 주셔야 하는….”“아무리 급해도 내 아이보다 더 중요한가?”하준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아니, 본인이 의사도 아니시면서,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지, 정말….’******정오. 윤서가 급히 들어왔다. 침상에 앉은 여름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넌 이생에 최하준을 벗어나기는 글렀나 보다.”여름은 심란했다.여름도 막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임신 중절을 하자니 차마 그리는 못 하겠고, 아이를 낳자니 최하준이 딱 들러붙어 안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FTT에서도 핏줄이니 간여하려고 들 것이고 여름도 낳아놓고 돌보지 않을 수는 없을 터였다.“그 얘긴 냅두고 이리 와 봐.”여름이 윤서에게 손짓했다.윤서가 다가가니 여름이 윤서의 주머니에 뭔가를 쑤셔넣었다.윤서가 이상해서 손을 펴보았다.“너 나한테 지금 종이 준 거야?”여름이 윤서를 잡아당기더니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종이 안에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