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은 전혀 아프지도 않은지 고개를 숙여 여름을 내려다 보았다.“물어. 전에 그런 말 한 적 있지? 꼬집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한다고.”“……”여름은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대체 그게 언제 적에 했던 말인데 아직까지 기억을 하고 있어? 하마터면 기억력에 이상 생긴 줄 알 뻔했는데 아니네.’“왜 더 안 꼬집어? 나 아플까 봐?”하준이 아기 고양이를 쓰다듬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여름을 쓰다듬으며 귀에 착 감기는 저음으로 속삭였다.“괜찮아. 난 안 아파. 사랑하는 만큼 실컷 꼬집어.”여름은 마음이 답답했다.이제 꼬집으면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할 것이고 가만 두면 마음이 아파서 차마 꼬집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할 테니 아무리 해도 이 상황에서 말로는 하준을 이길 수가 없었다.“자자.”하준은 여름을 꼭 안은 채로 불을 끄더니 누웠다.여름의 몸에서 나는 채취를 맡으며 하준은 곧 잠에 빠졌다.그러나 여름은 잠이 오지 않았다.배가 고팠다.저녁에 백소영과 나가서 잔뜩 먹고 왔는데 11시도 안 된 시간인데 벌써 배가 다 꺼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다음날.여름이 일어나 보니 벌써 9시였다.처음으로 이렇게 늦잠을 잔 것이다. 여름은 급히 뛰어 내려갔다. 소파에서 신문을 보던 하준이 벌떡 일어났다.“오늘은 내가 된장 끓여놨는데 데워….”“최하준 씨, 내 알람 당신이 껐어요?”여름은 화가 나서 말을 끊었다.“아무리 울려도 안 일어 나길래 내가 껐지.”“거짓말! 난 알람 울리는 순간 바로 깬다고요.”여름은 있는 대로 화가 났다. 자신이 그렇게 알람도 못 듣고 자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막 깨서 부스스한 머리에 눈을 있는 대로 동그랗게 뜨고 화가 나서 발그레해진 여름의 뺨은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러웠다.하준은 웃음이 절로 났다.“어, 당신이 그럴 줄 알고 내가 아까 증거로 다 녹화해 두었지.”영상 속에서 여름은 하준의 팔을 베고 아주 달게 자고 있었다. 잠시 후 알림 소리가 울리자 여름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이불을 홱 감고는 하준의 품
‘역시나….’여름이 예상이 들어맞았다.최하준의 얼굴은 매우 좋지 않았다.“대체 어쩌다가 잡아두지도 못한 거야?”상혁이 민망해 했다.“그 남편 되는 사람이 처음에는 쫓아갔는데 중간에 승합차가 강여름을 태워갔다고 합니다.”“동료가 있는 게 분명하군. 찾아! 승합차부터 추적해 봐.”하준이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알겠습니다.”상혁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결국 또 한 마디했다.“사모님께서 어제 갑자기 강여경을 찾으라고 하셨는데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그러신 거 아닙니까?”하준이 의혹에 찬 얼굴로 여름을 쳐다봤다.“아직은 말할 수 없어요.”여름이 시선을 피했다.‘지금 바로 지다빈이 강여경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가는 안 믿을 지도 몰라.내가 지다빈을 모함한다고 의심할 수도 있고.’“말해 줘요. 당신이 나한테 뭐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 드는 거 별로야.”하준이 여름의 어깨를 잡더니 돌려세웠다.여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면 당신이 내게 지다빈의 정체를 숨기고 당신 곁에 두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기분을 이제 좀 알겠네요?"“……”‘또 시작이군. 또 그 얘길 하기 시작했어.’“밥 먹읍시다. 다 식겠어.”하준이 더는 묻지 못하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여름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걸로 괜히 하준의 기분이 안 좋아서 체면 깎는 일이 생길까 봐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참았다.그러나 찌개를 한 입 먹다가 결국 성질을 부리고 말았다.“아, 소금 가져오라니까.”“여기 있어, 여기.”하준은 한껏 여름의 비위를 맞추며 소금을 들고 왔다.옆에서 보고 있던 상혁은 속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카리스마 넘치던 하준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절절 매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심지어 며칠 전에는 채팅명까지 ‘여하간 love’로 바꾸는 바람에 회사에서도 다들 회장님 휴대전화가 해킹을 당했다며 직원들이 한바탕 난리였었다.‘그러니까 겉으로만 아닌 척 하다가 언젠가는 이렇게 다 들킬 줄 알았다, 내가.’“아 참, 어제 내가 사인해야
여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아요. 지안그룹 이름도 당신이 생각한 게 아니겠지. 뭐 이주혁 선생이 생각했다던지? 꿈에서 백지안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다른 세상이 백지안이 벌이는 짓이라던지…”“……”아무리 말발 좋다는 변호사지만 처음으로 대체 뭐라고 변명해야 좋을지 몰라 말문이 턱 막혔다.차가 병원에 도착하자 여름은 가차없이 말했다.“내리세요. 난 회의가 있어서 출근해야 해요.”좀 무리해서라도 여름에게 같이 올라가 달라고 하려던 하준은 그저 입맛만 다시며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여름은 어쨌거나 이제 아픈 하준을 보면서 마음이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내가 진짜 힘들었을 때는 누가 날 위해서 마음 아파 해줬나, 뭐?’병원은 아침부터 차가 많았다. 입구로 나가는 길도 꽉 막혀있었다.여름이 무심코 창밖을 내다 보는데 지다빈이 파란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손에 꽃다발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하준이 병원에 왔다는 것을 알고 꽃다발까지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여름의 눈이 싸늘하게 반짝 빛났다.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바로 상혁에게 전화를 걸었다.“병실 호수가 어떻게 돼요?”“사모님 올라오시게요?”상혁은 사뭇 들뜬 목소리였다.“네.”“5층 VIP6실 입니다.”******VIP입원실. 상혁이 전화를 끊더니 하준을 돌아보며 눈빛을 반짝거렸다.“온대?”“네.”상혁이 싱글벙글 웃었다.“사모님이 말씀은 그렇게 냉정하게 하셨어도 마음 속으로는 회장님을 내려놓지 못하시는 모양입니다.”하준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어찌나 매력적인 웃음인지 링거를 꽂으려고 들고 있던 간호사가 반할 지경이었다.“좀 있다가 다시 찔러줘요.”하준이 갑자기 손을 뺐다.“조금 있다가 노크소리가 들리면 그때 찔러요. 아, 피나게, 아주 피가 줄줄 흐르게 잘못 찌르면 더 좋고.”“……”간호사는 당황해서 할말을 잃었다.국내 최고 그룹의 총수가 와이프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고육계까지 쓰다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해본
‘내가 안 보는 데서 둘이 몰래 만나고 있었던 거 아니야?’“자기야, 그, 그런 거 아니야.”하준은 저도 모르게 지다빈을 밀쳤다.“아니, 방금 링거를 잘못 찔려서 피가 났는데 지다빈 씨가….”“간호사 선생님도 계신데 지혈할 수 있잖아요? 지다빈이 왜 나서요?”분노에 찬 여름이 하준의 말을 끊었다.“그렇게 지다빈을 못 놓겠으면서 나한테는 왜 자꾸 질척거리는 거야? 사람 데리고 노니까 기분 좋아요?”하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피를 흘려서 그런 건지 여름이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지다빈이 다급히 해명했다.“회장님 말씀이 사실이에요. 와서 보세요, 아직도 지혈이 다 안 돼서….”“시끄러워!”여름이 지다빈을 노려보았따.“지다빈, 나도 이제 참을 만큼 참았어. 보자 보자 하고 자꾸 참아주니까 사람이 가마니로 보이냐?”뜻밖에도 여름이 와락 지다빈에게 달려들더니 머리채를 거머잡았다.“아악! 사, 사모님. 때리지 마세요. 회장님, 살려주세요!”지다빈이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분노한 여름을 당하지 못하고 병실 구석으로 몰렸다.“자기야, 진정해. 일단 놔 봐.”하준이 다가와 여름을 떼어놓으려고 애썼다.그러나 여름은 이미 지다빈의 머리채를 몇 번이나 손에 감아 쥐고 있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다빈은 아파서 비명을 질러댔다.“야, 강여름!”이때 송영식이 들어오다가 이 장면을 보고 여름에게 달려들었다.송영식이 거칠게 여름을 밀치자 여름은 하준의 침대 쪽으로 떠밀려 쓰러졌다.어찌나 아픈지 온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그런데 이상하게 뭔가 아래로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간호사가 여름을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출혈이에요!”여름이 내려다 보니 앉은 자리에 붉은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손으로 만져보니 아직 따끈따끈했다.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하준은 완전히 놀라서 다급히 여름을 안았다.“빨리 의사에게 가야겠어요.”하준은 의사를 찾으며 여름을 안고 그대로 응급실로 달렸다.의사가 곧 여름을 검사실로 데리고 들어갔
“네, 쌍둥이입니다. 그래서 더 상태가 위험합니다.”의사가 걱정스럽게 말을 이었다.“다들 어른인데 좀 주의해 주십시오. 병원이어서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일단은 좀 안정시켜 두었습니다만, 어쨌든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감사합니다.”하준이 잠시 생각해 보니 그야말로 아찔했다.하준은 한동안 여름에게 아이를 가지자고 조르다가 지다빈이 오면서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예전에 동성에 있을 때 의사에게 여름이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하준은 그다지 기대를 많이 하지는 않았었다.그런데 여름이 지금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그것도 쌍둥이로!그러나 그 아이들을 지킬 수 있을 지가 미지수였다.그런 생각을 하니 하준은 천국까지 올라갔다가 지옥에 곤두박질친 기분이 들었다.“송영식….”하준은 분노에 영식을 한 대 치고 말았다.“아니, 강여름이 임신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송영식은 되려 분통을 터트리며 끝까지 자신이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다.“임신을 하고도 자기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아무데서나 미친 듯이 사람을 드잡이하고 다니다니, 본인이 스스로 행실을 주의했어야지.”“당장 나가.”하준이 소리질렀다.“지다빈 데리고 꺼져. 다시는 둘 다 병원에 나타나지 마, 알겠어?”그 오랜 세월 친구였는데 이렇게 대놓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친구에게 그런 소릴 듣게 될 줄은 몰랐다.“오지 말라면 안 올게. 다빈아, 가자.”송영식은 다빈을 끌고 나갔다.고개를 숙인 지다빈은 눈을 번뜩이며 가만히 분을 삭였다.‘강여름이 임신을 했을 줄이야. 게다가 쌍둥이라니, 어쩜 운이 저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든 저 아이들을 처리해야겠다.’******강여름은 멍한 상태로 응급실에서 나왔다.예전 같았으면 무작정 기뻤겠지만, 지금은… 만감이 교차했다.‘어쨌든 내 혈육인데, 아이는 좋지. 하지만, 이 아이들을 낳으면 최하준은 영원히 못 떨어내는 거 아니야?’“자기
하준이 여름의 침대 곁으로 오더니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자기야, 나랑 지다빈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까 간호사 선생님이 찔러서 피가 났거든. 지다빈이 들어오다가 마침 그 장면을 보고 놀라서 간호사 선생님을 밀어낸 장면을 당신이 본 거야. 이제 툭하면 그러고 화내지 말아. 엄마가 될 사람인데.”여름이 비웃었다.‘엄마가 될 사람이 속이 뭐 그렇게 좁냐고 비꼬는 건가?이제는 내 기분도 내 잘못이라는 말이야?’“이모님 핸드폰 좀 가져다주시겠어요?”여름은 하준에게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시했다.이진숙이 휴대 전화를 가져왔다. 여름은 윤서에게 문자를 하나 보내고는 게임을 하며 일부러 하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하준은 잠시 앉아 있다가 의사가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따라갔다.이때 상혁이 서류를 한 무더기 안고 들어오다가 바로 하준에게 저지당했다.“나 지금 그런 거 볼 시간 없어. 가서 임신 출산 관련 책이나 좀 몇 권 사 오지.”상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아니, 이건 전부 지금 당장 처리해 주셔야 하는….”“아무리 급해도 내 아이보다 더 중요한가?”하준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아니, 본인이 의사도 아니시면서,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지, 정말….’******정오. 윤서가 급히 들어왔다. 침상에 앉은 여름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넌 이생에 최하준을 벗어나기는 글렀나 보다.”여름은 심란했다.여름도 막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임신 중절을 하자니 차마 그리는 못 하겠고, 아이를 낳자니 최하준이 딱 들러붙어 안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FTT에서도 핏줄이니 간여하려고 들 것이고 여름도 낳아놓고 돌보지 않을 수는 없을 터였다.“그 얘긴 냅두고 이리 와 봐.”여름이 윤서에게 손짓했다.윤서가 다가가니 여름이 윤서의 주머니에 뭔가를 쑤셔넣었다.윤서가 이상해서 손을 펴보았다.“너 나한테 지금 종이 준 거야?”여름이 윤서를 잡아당기더니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종이 안에
“빈털터리로 쫓아내는 게 영 그러면 좀 줘서 쫓아내시던가요? 결혼할 때 나에게 똑 부러지게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혼하면 한 푼도 못 받을 줄 알라고.”여름이 까르르 웃었다.엄상인은 놀라서 하준을 흘깃 훔쳐봤다.‘세상 로맨틱 가이인 줄 알았더니, 뭐야? 완전 이기적인 양반이었네? 우리나라 최고 부자라며 이혼할 때는 돈 한 푼도 아까운 모양이야?두구쇠 같으니라고.’멸시의 시선을 느꼈는지 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지갑을 꺼내더니 큰소리쳤다.“앞으로 내 돈은 당신이 다 관리해요.”“됐어요. 요즘 진짜 부자들이 어디 자산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나? 다 투자하고 없지.”여름은 하준 쪽은 쳐다도 안 보고 말을 받았다.하준은 이제 완전히 말로는 여름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엄상인에게 말했다.“서류 가져오세요. 내가 처리하겠습니다.”이때 병실로 들어오던 상혁은 어이가 없었다.‘우리 회사 서류 처리할 시간도 부족한데 지금 남의 회사 일 처리해줄 시간이 어디 있으세요? 네?이제 우리 회장님이 완전히 와이프 바보가 돼버렸어.’하준은 서류를 받아 들고 소파에 자리를 잡더니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이진숙이 과일을 들고나오다가 깜짝 놀랐다.“회장님, 링거를 벌써 다 맞으셨어요? 보통 4시간씩 맞으시지 않았나요?”상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빨리 사모님 돌보러 가야 한다면서 수액 들어가는 속도를 최대한도로 조절해달라고 하셔서 빨리 끝났습니다.”이진숙은 할 말을 잃었다.여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링거 떨어지는 속도를 체크했다.‘조금만 빨라도 아프던데 최대한도로 빨리 넣으라고 했다고? 어우….’압도적인 하준의 존재감이 병실을 채우고 있으니 다들 자리를 피해 나가버렸다.10분이 지나 여름이 꿈지럭거리더니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하준이 벌떡 일어났다.“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요. 의사 선생님이 꼼짝 말고 쉬라고 했잖아.”“아무리 그래도 나도 화장실은 가야죠.”여름이 언짢은 듯 툭 뱉었다.“의사 선생님은 그냥 많이 움직이지 말라는 소리지
“비상시국이니까 그렇지. 우리 아가들을 위해서 그러는 거야.”그렇게 말하는 하준을 기어코 내보내고 여름은 뒷일을 처리했다.침대로 돌아왔는데도 여름은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에서 열기가 빠지지 않았다.이때 테이블에 놓인 과일이 눈에 들어왔다.과일이라도 좀 먹을까 싶어서 과도를 들자 또 하준이 벌떡 일어났다.“앉아 있어요. 내가 해줄게.”하준은 그러고 여름이 병실에 한나절을 버티고 앉아서 누워있거나 기대고 있거나 자는 것 말고는 여름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낮에 너무 많이 자는 바람에 여름은 다음 날 새벽 5시에 눈을 떠버렸다.깨어서 보니 하준이 자신과 같이 베개를 베고 누워있었다. 대체 최하준이 언제 침대로 기어들어 왔는지 기억도 없었다.어쨌거나 어제 하준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지다빈을 생각하니 새삼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그러나 어쨌거나 세상 모르고 잠에 든 하준은 마치 천사 같았다.기다란 속눈썹이며 모공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에 눈, 코, 입이 하나같이 예술이었다. 마치 신이 빚어낸 완벽한 예술품인 듯했다.그러고 반해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낀 하준이 갑자기 눈을 떴다.여름은 놀란 나머지 하준을 냅다 걷어찼다.“누가 남의 침대에 몰래 기어들어 오래요?”바닥에 떨어진 하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물었다.“여기 병원이잖아? 당신은 왜 환자복을 입고 있어?”여름의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요 며칠 같이 지내면서 보니 하준의 기억력이 급속도로 감퇴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깨어나서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도 기억을 못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거의 치매환자 수준으로 기억력이 나빠진 것 같은데?’“기억이 안 나면 그만둬요.”여름은 침대에서 내려가 세수를 하고 양치도 했다.“말해 봐.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당신 어디 아파?”하준이 따라와서 여름의 손을 잡았다.병실에 붙은 휴게실에서 주무시던 이모님이 소리를 듣고 얼른 나오셨다.“사모님, 아침 식사는 뭘로 하시겠어요?”“아무거나 먹죠.”“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