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넌 이제 추신그룹이랑 약혼할 거니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신경 쓸 필요 없어.”위자영은 서유인의 손을 잡았다.“이제 추신그룹만 등에 업으면 최하준이니 강여름이니 깜도 안 돼.”서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이 모욕은 내가 천 배로 갚아 주겠어.’“엄마, 아빠가 정말 엄마랑 이혼할까?”“흥, 네 할아버지가 퍽도 내버려 두겠다.”*******최하준의 본가.아침 댓바람부터 최대범은 최하준의 혼인증명서 때문에 대노했다.“이놈의 자식, 강여름이랑 결혼을 했었어?”장춘자는 이마를 싸고 드러누워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그래, 이제 다 컸다 이거지. 아주 우리를 다 가지고 놀았구먼. 그 녀석을 결혼시키려고 그 애를 썼는데 아주 내가 바보지….”최민이 화를 냈다.“걔는 공개적으로 너무 말을 지나치게 하잖아. 우리가 걔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주 우리 집안을 그냥 권력에 눈 먼 이미지로 만들어 버렸어.”“뭘 또 그렇게 아닌 척을 해?”최윤형이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최윤형!”최진이 눈을 쌩글하게 뜨고 노려봤다.“저한테 뭐라고 할 생각하지 마시고 이제 FTT 이미지나 생각하세요. 이제 형 이미지가 완전 좋아졌으니 앞으로 FTT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우리만 웃음거리가 되게 생겼다고요.”다들 최양하를 쳐다봤다.“양하야, 이제는 제가 분발해 줘야겠다. 너는 날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하준이 녀석에게는 정말 너무나 실망했다.”최대범이 최양하에게 말했다.최양하가 웃었다.“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FTT는 거대 그룹인데 형이 지금의 우리 FTT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최씨 가문이 대대손손 쌓아온 인맥과 재력이 그 형을 키웠어요. 그리고 우리 집에 사람이 한둘인가요? 형 하나 없어도 끄떡없어요.”“네 말이 맞는다.최대범이 만족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하준이 녀석이 너무 날뛰어. 곧 후회하게 될 거다. 우리 FTT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데…”******검은 고급 승용차가 별장에서 나왔다.뒷자석에서 고개를 숙이
”아버지, 그게 다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쟁취해 내지 못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쫓겨날 거예요. 최씨 집안에는 이제 저 하나 남는 건데요.”최양하가 비웃었다.“나도 양하가 제대로 FTT를 장악했으면 해요. 하준이는 멋대로 그런 애랑 결혼하질 않나, 지난번에 민이 해치려고 한 거 봐요. 정신적으로도 불안하고 점점 더 마음에 안 들어요.”최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준을 낳지 않고 싶을 지경이었다.******점심을 먹고 나서.따스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여름은 눈을 감고 푹 잠이 들어 있다가 누군가가 얼굴에 입 맞추는 느낌에 깨어났다.‘누구지?’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오데코롱의 익숙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아직 졸린 듯한 눈을 뜨니 한껏 클로즈업된 듯한 하준의 비현실적으로 잘 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깼어요? 게으름뱅이네. 두 시간이나 잤어요.”하준이 여름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마치 한창 달달한 연애 중인 연인 같은 말투였다.여름은 잠시 동성에 와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가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하지만 동성에 있을 때도 이렇게 다정한 순간은 많지도 않았는데.’“언제 왔어요?”여름이 급히 일어나 앉았다. 마침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얼마 안 됐습니다. 1시간 정도? 덕분에 당신 코 고는 것까지 보고….”하준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거짓말! 난 코 안 곤다고요.”자신이 코 고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하준을 생각하니 어쩐지 강하게 부정하고 싶어졌다.“잠들었는데 본인이 코를 고는지 안 고는지 어떻게 압니까?”하준은 오랜만에 여름이 발칵 하는 모습을 보니 좋아서 더 놀렸다.“…뭐, 코 고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이제는 누구누구가 다시는 옆에서 같이 안 자겠네.”여름이 하준을 한번 흘겨봤다.“당신이 내 와이프인데 내가 당신이랑 안 자면 누구랑 잡니까?”하준이 씩 웃으며 여름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됐어요, 최하준 씨. 애진작에 이혼해 놓
”좋아요. 솔직하게 말하죠.”하준이 여름의 손을 잡아 턱 밑으로 가져갔다.“사실 서유인을 만났던 건, 당신하고 너무 닮아서였습니다. 동성에 간 이후로 나는 강여름을 마음에서 내려 놓아본 적이 없어요.”‘날 마음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다고…?’서울에 온 이후로 하준의 입에서 나온 말 중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말이었다.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다.여름도 처음 서유인을 만났을 때 자신과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하지만 최하준이 그것 때문에 서유인을 만났었다니 뜻밖인걸.어쨌든 최하준은 동성을 너무 갑자기 떠났어.날 믿어주지 않아서 너무 상처받았다고.’“날 속일 목적으로 접근했고, 당신이 날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면 그냥 당신과 닮은 사람과 결혼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당신과 배다른 자매였을 줄이야.”하준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비쳤다.“벨레스에서 강여름 씨를 보고 나니 더 이상은 서유인에게 아무런 마음도 들지 않았습니다.”“그러면서도 서유인이랑 별장에는 잘만 왔으면서. 아참, 지난번에는 할아버지 생신잔치에도 왔었지. 아주 옆에 서유인을 데리고 얼마나 거들먹거리고 왔었는지는 잊어버리셨나 봐.”그 일을 생각하니 여름은 부아가 치밀었다.“당신은 별 신경 안 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매번 모욕적이었다고요.”하준이 이상한 시선으로 여름을 쳐다봤다.“당신이 보고 싶어서 간 거 아닙니까? 내가 누구 생일 잔치 같은 데 다니는 사람인 줄 압니까? 당신이야말로, 이혼도 안 했는데 양유진을 약혼자라고 데리고 가서 부모님 만나고, 같은 테이블에서 애정 행각 벌이고 있는 두 사람 보는 내 기분은 생각이나 해 봤습니까?”“……”의기양양한 하준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그러는 당신은 내 앞에서 애정 행각 안 했어요?”“내가 벌이는 애정 행각을 신경 쓰기나 했습니까?"하준이 콧방귀를 끼며 물었다.“…난 별로!”여름이 시선을 피했다.하준은 화가 났지만, 여름의 그런 모습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
“잠깐만요….”여름이 갑자기 하준을 잡았다.“왜?”여름이 이렇게 사람을 오래 붙잡은 것은 오랜만이라 하준은 좋아서 놀리듯 웃음을 가득 띠고 물었다.“가니까 아쉽습니까?”여름이 입술을 깨문 채 하준의 왼쪽 소매를 젖혔다. 안에 감긴 붕대가 드러났다.‘정말… 다쳤잖아?’“그냥 조금 다쳤습니다.”하준의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표정이 스치고 지나가더니 바로 팔을 뺐다.“어쩌다 다쳤어요?”여름이 꼼짝도 않고 하준을 쳐다봤다. ‘별 거 아니면 왜 방금 살짝 부딪혔는데도 그렇게 아파서 몸을 떨지?’“나한테 관심을 가져주는 군요?”하준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즐거움을 띤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이렇게 날 아껴주다니?”“…흥!”여름은 짜증이 나서 화를 냈다.‘관심은 무슨…그냥 법적인 남편이니까 그런 거지.’하준은 다정하게 씩 웃더니 돌아서서 손을 씻으러 갔다.화장실로 들어간 하준의 얼굴은 바로 고통에 일그러졌다.겹겹이 싸인 붕대를 풀자 안에서 이제 막 딱지가 앉기 시작한 상처가 벌겋게 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보기에도 끔찍했다.하준은 밖에서 휴대폰 소리가 울릴 때까지 안에서 족히 6~7분은 앉아 있었다.“어머님이 전화하셨어요.”여름이 침대에 놓인 휴대폰을 보더니 말했다.하준은 여름의 코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건너편에서 최란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간 되니? 우리 모자가 밥이나 같이 먹자.”“흥, 모자 관계 끊은 거 아닙니까? 직접 말씀하셨잖습니까?최란이 울컥했다.“최하준, 적당히 해야지. 어쨌든 내가 널 낳았잖니?”“그렇죠. 낳기만 하고 기르진 않으셨죠. 그렇지만 아~주 훌륭한 어머니십니다.”하준이 비아냥거렸다.“날 찾아서 뭘 하고 싶으신지 다 알고 있으니 안 만날 겁니다.”“얘가….”최란이 거세게 한숨을 내쉬었다.“좋다. 네가 동의하지 않겠다면 강여름을 찾아가지. 네 병력을 듣고도 걔가 무서워하지 않을까?”“……”하준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최하준, 사람은 약점이 제일 무서운 거다. 넌 이제 약점을
“하준이가 말을 안 한다면 저도 말하기는 곤란한데요.”이주혁이 우아하게 웃었다.“쓸데없는 생각 너무 하지 말아요. 하준이가 여름 씨를 사랑한다는 것만 알면 돼요.”‘이제 보니 다들 최하준이 날 사랑한다고 알고 있네.’여름은 천천히 눈을 내리 깔았다. 다만 왜인지 마음 속에 불안한 예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냥 누가 다치게 했나 싶어서 그래요. 나 때문에 그 집에서 하준 씨를….”“하준이는 그렇게 만만한 친구가 아닙니다. FTT에서도 하준이는 어쩌지 못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최하준에게 상처줄 수 있는 사람은 강여름 씨뿐이에요.”이주혁은 문까지 걸어가서 돌아보더니 웃었다.“이제 하준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용서할 준비도 된 것 같군요.”여름은 잠시 흠칫했다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이주혁이 가볍게 웃었다.“잘 해주세요. 하준이 그 폭발하는 성질도 다 성장 환경이랑 상관이 있어요. 봐서 알겠지만 재벌가 사람들이라는 게 다들 이익만 따지고 되게 이기적이거든요. 하준이도 한때는 굉장히 안쓰러웠어요.”이주혁이 나가고 여름의 머릿속에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하준이도 한때는 굉장히 안쓰러웠어요.’그런 금수저가 안쓰러울 수도 있다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그러나 하준의 본가를 떠올리고 모두에게서 고립되고 버려진 하준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그때 이진숙이 들어오셨다.“사모님, 저녁에 전복죽 어떠세요?”여름이 끄덕이다가 잠시 후 물었다.“삼 잔뜩 넣고 삼계탕도 좀 끓여주시겠어요?”이진숙이 의아해했다.“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지금 소화가 잘 안 된다고….”“… 그런 게 아니고요. 하준 씨랑 이모님 좀 드시라고요.”여름은 말을 마치더니 얼른 휴대폰을 들여다 보며 난처한 얼굴을 감추었다.이진숙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두 분이 정든 건 진작 알았지만. 이제 정말 잘 됐구나. 이제 사모님도 드디어 회장님을 배려하기 시작했어. 이제 점점 더 좋아졌으면 좋겠네.’“예, 삼계탕 준비할게요. 저녁에는 사모님이 준비하라고
여름은 얼른 전등을 껐다. 가뜩이나 망가진 얼굴까지 빨개져서 추하지 싶었다.“내가 언제….”“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던가.”하준이 여름에게 얼굴을 들이대고는 응큼하게 웃었다.“그럼 한 번 더 차보고요”여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다리를 들어 올렸다.하준이 잽싸게 여름의 다리를 붙들었다.“워워, 착하지, 우리 애기”닭살 돋는 멘트에 여름은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얼굴이 이 지경인데 정말 신경이 쓰이지도 않나?’여름은 진심으로 궁금했다.“이제 그만 해요. 나 잘래요.”“부부는 같이 자는 거예요.”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듯, 하준은 혼인관계증명서를 베개 옆에 두었다.여름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한밤중에 내 얼굴 보면 악몽 꿀까 봐 겁 안 나요?”“겁은 무슨, 다른 데가 안 변했으니 됐습니다.”하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여름은 곧 귀까지 빨개졌다.“진짜 제대로 혼나볼래요?”“당신이 어떤 모습이건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줘요.”하준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여름을 꼭 껴안았다. 진심을 느낀 여름의 마음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이 사람은 정말… 뭐지? 지금 내 모습이 이런데 정말 싫지 않다는 거야? 대단하네, 정말.’“이제 믿으려나? 계속 못 믿으면 행동으로 보여주지.”하준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 여름은 화들짝 몰라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요, 믿으니까 그만 해요.”“뽀뽀.”하준이 다가오더니 쪽 입을 맞췄다.순간, 여름의 마음이 요동쳤다.‘아니 정말.... 이 얼굴이 전혀 상관없다고?”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그 키스… 영원히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 하준의 말이 가식이 아니라는 걸 여름은 알 수 있었다.******사흘째 되던 날, 여름은 퇴원 후 곧바로 화신으로 갔다.보름만의 출근이라 긴급 회의부터 소집했다.여름의 모습을 본 임원들은 모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여름도 자기 모습이 흉측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의
“상관없어요. 얼굴로 회사 경영하는 거 아니잖아요. 자, 이제 각 지역 프로젝트 진행 상황 보고해주시죠.”한 시간 후, 회의는 끝이 났다.대표이사실로 돌아온 여름의 눈에 책상 위에 놓인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유인과 추성호가 보낸 초대장이었다. 내일 무진 인터내셔널호텔에서 약혼식을 한다는 내용이었다.‘서유인이 나한테 초대장을? 뭐 하자는 거지?’그때, 알 수 없는 발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 초대장 봤어, 언니?”“언니 같은 소리 하네, 남의 남편 뺏으려고 안달 난 게 동생인가?”이제 혼인증명서까지 있겠다, 서유인 앞에서 움츠러들 이유가 없었다.“어이없어, 누가 누구 남편을 뺏어?”서유인은 발끈하더니, 심호흡을 한번 하고 말을 이었다.“됐고, 나도 이제 드디어 내 행복을 찾았어. 어쨌든 가족이니까. 동생 약혼식이니 참석할 거라 믿어.”“초대한 정성을 봐서 참석은 하지.”여름이 흔쾌히 온다고 하니 서유인은 잠시 당황했다.“완전히 환영이지. 아참, 얼굴 다쳤다며? 내일 하객들 안 놀라게 얼굴은 가리고 와. 그럼 내일 봐.”말을 마치더니 서유인은 키득거리며 전화를 끊었다.여름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속셈을 알 것 같았다.하지만, 여름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얼굴이 어떻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디, 진짜 혐오스러운 사람이 누군지 한번 보자고.’******퇴근 후, 차윤이 차로 데리러 왔다.“회장님께서 오늘 야근하셔서 제가 대신 모시러 왔습니다.”뒷좌석에 앉자,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차윤이 설명해주었다.그러고 보니, 하준이 회장직에서 쫓겨난 후에도 다른 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여름은 아는 바가 없었다.“어느 회사에서 야근한다는 거죠?”차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말하기 싫으면 됐어요. 그냥 생각난 김에 물어본 것뿐이에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딘지 꺼림칙했다.병원에 입원해 있던 동안, 하준의 달달한 고백이 여
뉴빌가든으로 돌아온 여름은 샤워 후 노트북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각 부서에서 지역별 매물의 판매 실적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잠시 자료를 보다가 어느새 무언가에 홀린 듯 인터넷으로 지안그룹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있었다.검색하던 여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직 5년이 되지 않은 회사인데 시장 가치가 놀라웠다. 게다가 지안그룹과 FTT에서 가장 수익이 큰 자회사는 모두 주력 상품이 전자제품이었다.물론, 업계에서 FTT의 규모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지안의 실적은 단연 돋보였다. FTT 시장을 무려 4분의 1이나 점유하고 있었다.5년 전, 하준은 이미 암암리에 이 모든 걸 다 계획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FTT에서 내쳐지게 될 걸 예측했던 걸까?’여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최하준이란 사람은 정말 가늠할 수가 없었다.“지안 그룹 공부 중입니까?”갑자기 문에서 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깜짝 놀라 황급히 노트북을 닫고는 도깨비처럼 뒤에 나타난 남자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됐습니다, 다 봤어요. 차 실장이 말해주던가요?”하준이 몸을 책상에 기대며 말했다.“네.”여름은 하준이 차윤을 나무랄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내가 물어봤어요….”“좋은 자세네, 이제 남편한테 관심도 가지고.”하준이 허리를 숙였다. 입술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하지만, 앞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검색하지 말고 나한테 물어봐요.”“…….”여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하준이 그런 여름의 뺨을 쓰다듬었다.“지금 내가 FTT에 대적하려고 5년 전에 지안그룹을 설립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이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나’ 하면서….”“무슨, 그냥 보험 들어둔 거겠죠, 이해해요.”“당신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예전엔 FTT에서 제일 잘 나가던 자회사가 전자 쪽이 아니었어요. 처음엔 금융으로 시작했고 전자 쪽은 별 볼 일 없었지. 내가 회장직 맡은 후에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회사도 위기를 맞았고 그래서 전자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했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