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닙니다. 몸매도 모델 같으시고 머릿결도 찰랑찰랑해서 너무 매력이세요.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요.”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점장의 찬양을 듣다가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장사하는 사람답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뭐 하나를 놓치지 않고 줄줄 읇잖아.’곧 온갖 화려한 예물이 줄줄 나왔다. 어찌나 화려한지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좋아하는 걸로 편하게 골라봐요. 다 가져가도 상관없고.”하준이 시원스럽게 말했다.“…….”여름은 큰 다이아에 작은 다이아들이 박힌 반지를 골랐다. 그러나 하준은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핑크색 꽃잎 모양 반지를 여름에게 끼웠다. 손가락이 희고 가늘어서 끼워보니 화사하게 잘 어울렸다.점장이 웃었다.“역시 보는 눈이 높으시네요. 13.14캐럿짜리입니다.“이건 너무 무거워서….”여름은 슬쩍 거절하려고 했다.“그냥 하고 있어요. 빼지 말고.”하준이 단호하게 말했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나더러 고르라더니?’그러나 하준은 확실히 보는 안목이 있었다. 여름은 확실히 핑크색을 좋아하기도 했다. 동성에서였다면 분명 무척 기뻤을 것이다.“보는 김에 내 반지도 하나 골라줘요.”하준이 말했다.하준은 큼직한 걸 좋아하지만 여름은 일부러 조그만 다이아몬드가 잔뜩 박힌 반지를 골랐다.자칫하면 촌스러워 보일 디자인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하준의 손가락에 끼워놓고 보니 그렇게 패셔너블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여름은 멍하니 하준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하준은 그렇게 매혹된 여름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만족스럽다는 듯 여름의 머리카락을 쓸었다.“보는 눈이 있군요.”“그게….”‘이런 젠장, 이렇게 잘 어울릴 일이 아닌데….’두 사람이 막 쥬얼리 샵을 나오자 플래시가 번쩍였다. 기자였다.하준이 여름의 허리를 감더니 물었다.“이런 거 신경쓰입니까?”“당신 때문에 하도 당해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여름이 되려 놀렸다.“최하준 씨야말로 여자친구가 서유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괜찮겠어요?”“난 한
여름은 심지어 최하준이 투자한 회사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것까지 보았다.한때 국민 사위감으로 칭송받던 최하준이 이제는 온 국민의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여름은 복잡한 눈으로 테이블 맞은편에서 신문을 읽는 하준을 바라보았다. 느슨하게 묶은 잠옷은 앞섶이 살짝 벌어져 보이는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는 보일락 말락 남성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오늘도 일하러 안 나갈 건가 보네.’사실 서유인과 결혼하고 여름과 헤어졌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여름은 아직도 하준이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 최고의 지위와 명예를 버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아침 댓바람부터 왜 그렇게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봅니까?”하준이 갑자기 신문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여름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그렇게 오래 쳐다봤나? 왜 난 몰랐지?’“보긴 뭘 봤다고 그래요?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여름은 급히 당황한 모습을 수습하며 얼버무렸다.하준은 신문을 접더니 일어나 여름 뒤로 왔다. 두 손으로 의자를 꾹 누르더니 물었다.“무슨 생각을 했습니까?”“무슨 상관이에요?”여름은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내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네.”하준이 허리를 숙이더니 여름의 목덜미에 얼굴을 댔다. 면도하고 뿌린 오드뜨왈렛이 코끝을 시원하게 간질였다.여름은 하마터면 우유 컵을 놓다가 엎지를 뻔했다.‘이 와중에도 장난칠 정신이 있어? 미쳤나 봐.’여름은 그런 마음을 꾹 누르며 뻔뻔하게 말했다.“최하준 씨, 정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날 놔줘요. 그러면 모두 다 제자리로 돌아갈 텐데.”“모두 다가 뭡니까? 명예? 지위?”하준이 빙긋 웃었다.“다 알면서 그래요?”“알지. 잘 모르는 건 당신인 것 같은데?”하준이 손가락으로 여름의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았다.“강여름, 아직도 몰라? 강여름을 위해서라면 뭐든 걸어 볼만 하지.”‘날 위해서라면 뭐든 걸어 볼 만하다….’그 몇 마디 말에 여름은 그간 어렵사리
하준은 흠칫하더니 얼른 여름을 풀어주고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부들부들 두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여름이 돌아보더니 두려운 듯 하준을 쳐다봤다.“당신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난 최하준 씨와 있을 때는 언제나 조심스러워져요. 난폭하고 멋대로에 억지를 부리니까. 조금이라도 잘못해서 성질을 건드리면 악마처럼 변하는데, 누가 그렇게 악마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그만, 그만 해요.”하준은 테이블에 있던 그릇을 모두 바닥으로 쓸어버렸다. 눈에는 시뻘겋게 핏발이 섰다.‘강여름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하지만 왜 이렇게 자꾸 날 건드리는 거야?’최하준도 사람이었다. 마음이 아팠다.곧 절제심을 잃을 것 같자 하준은 벌컥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휘청거리며 차로 들어가 약을 찾아 꺼내 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한 것 같아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 손에 선연한 아픔이 전해지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식당.여름은 엉망진창이 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마에서 식 땀이 흘러내렸다.방금 하준의 시선은 너무 무서웠다.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긴 느낌이었다.‘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확확 바뀌지? 1초마다 천사와 악마를 오가는 것 같아.전에는 왜 최하준이 저렇게 무서운 사람인지 몰랐을까?도망쳐야 해! 최하준과 결혼해서 평생 살 수는 없어.’여름이 돌아서니 이모님이 주방 입구에서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계셨다.여름은 못 본 척하고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모님이 불렀다.“여름 씨, 회장님을 자극하지 말아요.”“네. 다시는 안 그러려고요.”여름은 창백한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이모님은 좀 더 설명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회장님이 일부러 저러시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병이 발작한 것 같아요.’그러나 사실을 말하고 나면 여름이 더 겁을 낼까 싶어서 그냥 그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병원.이주혁은 하준의 손에 붕대를 감아주며 창백한 친구의 얼굴을 가만히
붕대를 감고 났는데 문이 쾅 하고 열렸다.송영식이 뛰어 들어와 하준의 손에 상처를 보더니 화나서 소리쳤다.“야, 너 제정신이야? 여자 하나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꼴이야!”“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야.”하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난 네가 내 형제 같아서 그래.”송영식이 쏘아붙였다.“양하 자식 하는 짓 보라고. 온라인에서 다들 너만 욕해. 이제 아주 온 국민의 욕받이가 됐어. 그렇게 떠받들던 너희 식구들도 이제 너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이제는 최양하만 쳐다보고 있잖아. 진짜 그러고 싶냐?”이주혁이 웃었다.“진정해. 하준이가 어디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인간이냐?”“그래도….”“최양하가 FTT 장악하기기 그리 만만치 않을 거야.”이주혁이 하준을 쳐다봤다.하준이 비죽거렸다.“그래도 네가 날 잘 아네.”송영식은 그래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알겠다.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나 보네. 지난번에 배에서 너한테 한 대 맞아서.”“이 자식….”하준이 빙긋 웃었다.“…….”‘에이씨, 짜증나.’“됐어. 그런 우울한 얘기 그만두고, 지훈이도 네 소식 들어서 동성에서 왔어. 밤에 한 잔 해야지.”하준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뭐 하러 왔대? 도와주러?”“술 마시러 왔지.”이주혁이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한잔하고 다 풀자고.”“.......”*******서경주 네 별장.하준이 여름에게 엄청난 반지를 사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자영은 열이 올라서 거실 화병을 전부 깨버렸다.“최하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우리 유인이가 그렇게 잘했는데, 그딴 애랑 결혼을 한대! 으아아! 강여름! 어쩜 그렇게 지 에미랑 똑같은 짓을 하고 다녀!”“됐어요. 말이 좀 심하구려.”서경주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하여간 정말 도움이 안 돼요, 당신은.”위자영이 더 날뛰었다.“걔가 우리 애를 그렇게 몰아붙이고 괴롭히는데 하나도 안 도와주고, 이제 애랑 지웅이가 구치소 갇혀 있는데 꺼내주지도 못하고, 쓸모도 없어, 정말.”“거 말 좀
“잘 됐지, 뭐. 추성호 생긴 것도 아주 멀끔하고.”위자영은 멍하니 있는 유인을 바라보았다.“마음 접어라. 이제 최하준은 나중에 너에게 그런 모욕을 준 걸 후회하게 될 거야.”서유인은 확 정신이 들었다.‘그래. 최하준은 내내 날 가지고 놀았어. 심지어 그거 때문에 난 구치소까지 들어갔다 왔잖아.사람들 앞에서 내 사랑을 완전히 웃음거리로 만들었어!아아악!이제 최하준이 후회하면서 용서해달라고 무릎 꿇고 빌게 만들겠어!그리고 강여름! 죽도록 괴롭혀 주겠어!’구치소에서 나오니 인터뷰하려고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서유인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기자들이 몰려왔다.“서유인 씨, FTT 자선기금의 밤에 최하준 회장과 내연녀의 불미스러운 현장을 포착하셨다는 게 사실입니까?”“이러지들 마세요.”서유이는 처량하게 웃었다.“저는 최 회장님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회장님을 오래도록 흠모했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정말 기뻤어요. 그냥 제가 사랑을 잘못한 거죠. 하지만 회장님을 탓하지 않아요. 그저 행복하시기만 바랍니다.”“서유인 씨, 정말 아량있으시군요. 최 회장 같은 사람은 서유인 씨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반드시 행복해지실 거예요.”어느 기자가 외쳤다.“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전 지금 너무 피곤하네요. 전 여자들이 자신을 잘 지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특히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요.”******사무실여름은 핸드폰으로 서유인의 그 인터뷰를 보고 인상을 썼다.온 국민에게 동정과 사랑을 받을 것을 노리고 한 인터뷰가 틀림없었다.교양 있고 똑똑한 게 역시나 명문가의 딸이라는 사람도 있고어쩜 저렇게 사람이 진실되고 마음이 넓으냐, 사연을 들으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 서유인에게 최하준 따위 어울리지 않는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며 난리였다.그러나 서유인의 그 멍청한 머리에서 저런 고단수 작전을 짜냈을 리가 없다.일이 뭔가 평소와 다르게 이상하면 뒤에서 수를
여름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넌 내 친구야, 최하준 친구야?”“아이고, 넌 널 위해서 지위도 명예도 다 버리겠다는데 그게 정말 널 사랑하는 게 아니고 뭐야? 난 그런 사람은 멸종인 줄 알았구먼.”“......”평온하던 여름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솔직히 지금의 최하준이랑 비교하면 상원 오빠는 널 사랑한 것도 아닌 것 같다.”“일하러 가야 돼, 끊어.”여름은 점점 더 윤서의 말에 짜증이 올라왔다.8시까지 야근하고 돌아와 보니 하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목욕하고 누워서 핸드폰을 열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추천 검색어에 뜨는 최하준을 눌렀다.누군가가 올린 동영상이 떴다.익숙한 화면이었다. 전에 송영식에게 잡혀 유람선에 끌려갔던 밤이었다.화면을 보니 하준이 여름을 꼭 안고 있는데 누군가가 물었다.“최 회장,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요?”송영식이 나섰다.“하준아, 쟤들은 내가 불렀어. 나하고 얘기해.”최하준이 말했다.“오늘 밤 일에 대해서… 글이던, 사진이던, 동영상이던 관련된 어떤 거 하나라도 밖으로 유출이 된다면, 어느 집 자식이건 집안 전체가 통째로 날아갈 줄 알아!”하준이 여름을 안고 가자 재벌 2세들은 다들 손이 꺾이고 눈물에 콧물을 쏟으며 무릎을 꿇고 비참하게 애원하는 모습이 보였다.조회수가 어마어마했다.-이제야 알겠네. 더러운 것들. 건방지기 짝이 없잖아? 저런 것들은 감옥에 처 넣어야 해.-최하준은 아주 금수저도 개돼지처럼 아나 봐. 어이, 잘나신 금수저들 다 어디 숨었어? 좀 기어 나와보시지?-이 영상 누가 퍼트린 거야? 최하준은 이제 끝났네. 자업자득이지.곧 하영그룹에서 입장을 발표했다. -최하준 회장이 우리 하영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에 대해 한 일에 대해 우리 하영그룹 회장은 최후까지 법적 책임을 물을 예정이다.이진그룹도 바로 이어 입장을 표명했다.-이진그룹의 장 회장도 @하영그룹과 법적 책임을 묻는데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서울의 9개 재벌가에서 줄줄이 비슷한 입장을 표명했다.다 보고
최근 그런 일이 없었는데 여름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한참을 울린 끝에야 통했다. 그러나 곧 송영식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여름, 정말 문제 있군. 당신이 우리 하준이를 망쳤어!”“하준 씨는요?”좋지 않은 예감이 몰려왔다.“재벌가에서 우르르 몰려와서 조사하겠다고 하준이를 끌고 갔다고.”송영식이 마구 소리 질렀다.“당신만 아니었으면 우리 하준이는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거야!”“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죠? 그날 당신이 날 끌고 가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영상은 찍히지도 않았을 거예요!”여름이 화가 나서 반박했다. 당신 배였으니까 이런 영상이 유출된 건 당신 책임이에요!”송영식은 여름의 공격에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지금 하준이를 무너트리려는 세력이 있어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여름은 전화를 끊고 상혁에게 상황을 물어보려고 했다.1층에서 갑자기 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은 얼른 겉옷을 걸치고 내려갔다. 하준의 본가 집사가 보디가드를 데리고 들어왔다.“강여름 씨, 저희랑 같이 본가로 좀 가주셔야겠습니다.”이모님이 급히 말려보았다.“연 집사님, 나중에 회장님이 돌아오시면...”“회장님은 이미 검찰에 소환됐습니다.”집사가 싸늘한 얼굴을 했다.“이게 다 저 강여름 때문이에요. 오늘 반드시 데려가야겠습니다.”“이모님, 그냥 두세요. 제가 갈게요.”여름은 계단을 내려왔다. 애진작에 본가에서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1시간 뒤.하준의 본가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여름은 두 번째 오는 것이었다. 들어가면서 보니 하준의 식구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다들 분노와 혐오의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그 어마어마한 시선 앞에서도 여름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서울에 와서 정말 별별 일이 다 있었다. 평생 겪은 일보다 더 많은 일이 벌어졌다.여름은 이제 두려운 것이 없어졌다.“생각과 다르게 아주 침착하구나. 하긴, 그러니 하준이를 유혹할 수 있었겠지. 보통이 아니
“그러니까. 이제와서 부끄러워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최정이 입을 비죽거렸다.“이번에는 정말 하준이가 너 때문에 큰일 났어.”“평소에 그렇게 냉정하고 침착한 애가 왜 그랬을까?”최진이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엄마 아버지가 이번에는 골치 좀 아프시겠네.”최대범이 테이블을 ‘탁’ 쳤다.“그냥은 두고 못 본다.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라. 첫째, 비행기 표는 사줄 테니 이 나라를 떠나서 국적을 포기하고 이민을 가거나, 둘째, 여기 남아서 죽도록 힘들게 살아보던가.”여름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국적을 포기하고 이민을 가라고?최하준이 그렇게 괴롭힐 때도 내가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는데 최하준이 날 지키려다가 재벌가의 타겟이 되어 고생 중인데 가버린다면... 내 양심이 버틸 수 있을까?’“하준 씨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습니다.”한참 뒤 여름이 주먹을 꼭 쥐었다.“구해주실 건가요?”“걔가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지. 계속 저러고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 집안에 그런 애 없는 셈치면 그만이다.”최대범이 싸늘하게 뱉었다.“흥! 어쨌든 이제 녀석의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온 재벌가에서 그 애를 못 잡아먹어 난리가 났다. 그 많은 재벌가가 모두 우리 FTT를 압박하고 있는 데다 우리 집안이 100년 넘게 쌓아온 명성을 모두 잃게 만들었으니 이제 하준이 녀석이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여름은 하준의 식구를 돌아보았다. 다들 하준을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엄마라는 최란도 마찬가지였다.갑자기 하준이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서 성격이 그렇게 차갑구나.’“하준 씨는 손자잖아요. 가문의 명예가 혈육보다도 중요한가요?”여름이 몸을 똑바로 펴며 말을 이었다.“하준 씨의 할아버지, 할머니, 낳아준 어머니시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 있나요? 하준 씨가 FTT를 키워서 명예와 부를 가져다줄 때는 다들 그렇게 우러러보다가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을 맞고 있는데 도와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 내친다고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