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아….”서경주는 애가 탔다.“꼭 같이 가줬으면 한다. 내가 보이는 데 두고 지켜주고 싶구나. 네 아버지가 나라는 건 오래 못 가 알려질 거다. 나와 네 엄마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많았으니까.”여름이 흠칫 놀랐다정호중이 거들었다.“벨레스는 자산이 상당하단다. 그 집 사람들이 모두 노리고 있지. 서경주 회장의 딸이니 당연히 네게도 상속권이 있어.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둬라.”여름은 화가 나고 어이없었다. 돈, 재산 그런 건 자신도 아쉽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뭐, 서두르지 마십시오. 제가 설득할 테니. 이제 강신희 씨 묘소에 가보시죠.”정호중이 화제를 돌렸다.여름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가는 길에 서경주는 여름에게 강신희와 사귈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하지만 여름은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다만 이런 질문을 던졌다.“그럼 그때 왜 엄마랑 헤어지신 건가요?”“20년 전,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단다. 가족들에게 속아 어쩌다가 지금 아내인 위자영과 관계를 맺게 됐어. 네 엄마는 그걸 알고 바로 떠났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서경주의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났다.“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구나. 위자영이 아이를 가졌고 책임을 지기 위해 난 결혼에 동의했다.”여름은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혐오스러웠다.‘무슨 이런 막장 드라마가 있어? 우리 엄마만 불쌍하잖아.’성묘를 마치고 여름은 일이 있다는 핑계로 먼저 떠났다.서경주는 떠나는 여름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흠, 아무래도 내 딸은 날 인정하기 싫은가 봅니다.”“여름이가 올해 저 집안 식구들 때문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해 그렇습니다.”정호중이 설명해 주었다.“그렇군요. 다 내가 너무 늦은 탓이지. 이제는 꼭 저 아이를 데려가 돌보고 싶습니다.”서경주이 자책하며 말했다.******다음 날 아침, 여름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정호중이 벌써
“그런 말 마세요. 전 그 집 재산에 관심 없어요.”여름의 말투는 피로감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번에 서울은 꼭 갈 거예요. 난….”“가요.”양유진이 여름의 손등을 살짝 덮어 쥐었다.“내 걱정은 말아요. 간병인이 잘 돌봐줄 테니.”“고마워요.”여름은 매우 감동했다. 양유진은 최하진과 너무나 달랐다. 늘 온화하게 자신을 감싸주었다.최하준은 늘 오만하고 멋대로였다. 항상 여름이 양보하거나,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갖은 꾀를 내어 달래고 얼러야만 동의했다.그 사람과 사귈 때는 늘 피곤했다. 사람을 시켜 자신을 감시하는 것도 싫었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지금 상황에 적응이 잘 안 됐다.“무슨 생각 해요?”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돌연 넋이 빠져 있는 걸 보며 양유진은 눈에는 불안감이 스쳤다. 여름을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여름이 다시 정신이 들었다. 어째서 또 최하준 생각을 하고 있을까….“벨레스가 같은 큰 집안은 얼마나 얽히고 설킨 게 많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양유진이 미소지었다.“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함께 서울에 가줄 테니 여름 씨는 혼자가 아니에요. 사실 작년에 막 해외에서 돌아왔을 때 서울에서 사업 확장할 계획을 세웠어요. 2년 전에 신규 산업단지에 우리가 쓰려고 부지도 이미 사두었었습니다.”여름은 놀라며 감탄했다.“그렇게 멀리 내다보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가장 장기적으로 본 건 당신을 좋아하는 일이지만.”양유진이 살짝 웃으며 여름의 코를 꼬집었다. 여름의 몸이 경직됐다. 예전에 하준도 이렇게 꼬집었었지만, 양유진의 스킨십은 어쩐지 부자연스러웠고 거부감이 들었다.“늦었네요, 전 방으로 갈게요.”여름은 담담하게 웃었다.“약 먹고 일찍 쉬세요.”돌아서려다가 양유진이 아직 자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고개를 돌려 양유진의 부드러운 두 눈을 마주했다.“여름 씨, 밤에 그냥 같이 있어 주면 안 될까요?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상처가 안 나아서 건드릴 일은 없어요.”“… 미안해요. 아직 헤어진
여름은 약간 놀랐다. 아버지가 달리 보였다.“그런 거, 귀찮지… 않으시겠어요?”“그쯤 별일 아니다.”서경주는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혹시나 결혼을 물리게 되더라도 그 사람한테 빚지는 기분은 남지 않을 테니.”“아버지….”정말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이 단어가 튀어나왔다.서경주가 매우 기뻐했다.“한 번 더 불러주겠니?”여름은 난처함에 얼굴을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서경주가 웃었다.“나도 뜨겁게 사랑해 보았단다. 네 엄마랑 잠깐이라도 떨어지게 되면 정말이지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들었어. 그런데 너희들은… 그 사람이 널 좋아하는 건 분명히 느껴지는데, 너는… 아까보다 지금이 훨씬 편해 보이는구나.”여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나를 이렇게 세심하게 관찰할 정도로 관심을 두는구나.’강태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너무나도 좋은 분이었다.이번에 동성에 가면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아버지의 정을 느껴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도착 후 서경주는 바로 여름을 데리고 서명산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갔다.서명산 위에는 큰 정원을 갖춘 저택이 많이 있었다. 크건 작건 모두 진정 파워있는 집안이나 전국에서 손꼽는 재벌들이 사는 곳이었다. 여름이 뭔가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처음 봐서 서경주는 아는 대로 설명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저기가 최하준의 본가란다.”'FTT라….'여름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최하준과 다시는 부딪힐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 사람과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게 될 날이 있을 줄은!‘최하준도 저 집에 사는 걸까? 그 사람은 저 집안에서 어떤 위치일까? 우리가 만나게 될까?관두자, 그만 생각해. 이미 다 지난 일이야.’집에 도착해 차가 멈추자 현관에서 단아하고 우아한 용모의 부인이 나왔다. “왔어요, 여보? 얘가 강여름이군요. 이렇게 예쁠 줄 몰랐네요.”“이쪽은 내 와이프다. “서경주가 온화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여름은 약간 의외였다. 위자영이 차
“네가 이해심이 많구나.”서경주가 대견스럽다는 듯 말했다.여름은 화가 나 죽을 것 같은 서유인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너무 우스웠다. 강여경이 자신에게 쓰던 내숭 수법을 자신이 쓰게 될 날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다. ‘꽤 유용하잖아?’“뒤늦게야 찾은 딸이라고 너무 미안해 하거나 제 편만 들고고 그러지 마세요. 유인이가 편하지 않으면 자매 관계에도 좋지 않을 거고 가족도 화목해질 수가 없잖아요. 제가 왔다고 이미 있는 가정을 흔들고 싶진 않아요.”서경주는 이 말에 너무나 감동을 받았다. 어리광 피우며 자란 유인과 달리 여름은 사람 마음을 잘 헤아렸다.“가자, 네 방 보여주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뭐든 말하려무나.”부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서유인은 약이 올라 죽을 것 같았다.“완전 가증스럽네?”위자영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자란 아이니 맘대로 주무를 수 있겠지 했었다.‘제 어미 똑 닮았네. 만만하지 않겠어.”그때 그 여자를 처치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딸을 지킬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됐다. 진정해. 엄마가 안 겪어본 사람이 있겠니? 저쯤은 아무것도 아니다.”위자영이 서유인을 꽉 붙잡았다.“오늘 최 회장네 파티 준비는 어떻게 됐니?”파티 얘기에 서유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핑크색 드레스랑 목걸이 최고급으로 맞춰놨고 케이한테 방문 메이크업도 예약해 놨어요. 오늘 밤에 내 미모로 다 쓸어버려야지. 그 집 큰아들이 나보고 한눈에 반하게.” 위자영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알아봤는데 그 댁 어르신께서 집이 너무 썰렁하다고 돌려 말하는데 오늘 밤 사실은 큰 손주며느리감 찾으려는 것 같다더라. 서울에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미혼인 아가씨들만 불렀다나 봐. 최 회장이 한동안 일 그만두고 여행 좀 갔다가 연말에 돌아왔대. 올해 결혼시킬 생각인가 보더라.”“엄마, 저 그 사람 좋아요.”서유인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내가 본 사람 중에 그 사람이 제일 잘 생겼어요.
3층 서재.최하준이 한 손에 담배를 끼고 또 한 손은 서류를 넘기며 읽고 있었다. 탁상등의 밝은 불빛이 그의 완벽하기 그지없는 얼굴 위로 번지고 있었다. 주위의 그 모든 떠들썩함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콰당하고 문이 열렸다.장춘자 여사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여기 있었구나. 네 와이프 될 사람 찾으라고 특별히 신경 써서 파티를 열었는데 참 잘하는 짓이다. 방구석에 숨어 있기나 하고, 대체 결혼할 생각이 있니, 없니?”“없습니다.”하준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하준의 할머니는 화가 나 쓰러질 지경이었다.“싫어도 가라. 누가 이 집안 장손으로 태어나랬어? 결혼은 해야 할 거 아니냐? 지안이는 죽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허송세월하고 있을 작정이야?”서류를 넘기던 하준의 기다란 손가락이 잠시 주춤했다.장춘자가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버렸다.“일이야 나중에 하면 되지. 오늘 밤에 마음에 드는 아가씨 안 골라 온다면 내가 그냥 죽어버릴란다.”“할머니….”하준이 맨손 세수를 했다. 이래서 돌아오고 싶지 않았었다. 서른이 다 된 사람에게 아침저녁으로 결혼 이야기라니!‘그래서 여름과 결혼을 해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나 했었는데….’여름이 떠오르자 하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차피 결혼을 해야 한다면 일찍 하든 늦게 하든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냥 할머니가 하란 대로 따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습니다.”하준은 일어나 장춘자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장춘자는 매우 기뻐하며 하준과 함께 이층에서 아래에 있는 아가씨들을 관찰했다. “잘 보렴. 어느 집 딸이 마음에 드니?”하준은 아래를 내려다보자마자 골치가 아팠다. 거기 있는 여자들은 모두 떡칠을 하고 있었다. 화장을 지우고 난 맨얼굴은 분명히 다를 것이었다.여름은 달랐다. 메이크업을 했든 안 했든 깨끗하고 맑았다.하준의 시선이 갑자기 어떤 여인의 얼굴에서 멈췄다.장춘자도 하준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벨레스 서경주 회장 딸
잠을 설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실 분위기가 뭔가 달랐다.서경주는 소파에 앉은 채 꼼짝 않고 있었고 서유인이 서경주의 팔에 매달려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아빠, 어젯밤에 최 회장이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모를걸요? 그 많은 사람 중에 날 딱 찍어서 춤추자고 했다고요. 저녁에 어르신도 저한테 한참 말 거시고… 그 사람 여자친구 하래요.”위자영도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유인이가 복이 있어요. 얘 미모에 재능이면 당연히 괜찮은 신랑감을 만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FTT가 장손과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에요? 우리나라 재벌 중의 재벌이잖아요. FTT도 곧 그 사람 소유가 될 거고요.”“그 집에 최양하도 있잖아.”서경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모녀에게 주의를 주었다.“그 사람이 뭐요? 장손이 잠시 떠나있긴 했었지만, 최양하가 FTT를 장악하긴 무리죠.”서유인이 핏대를 세우고 말했다.“그 사람이 FTT 대표가 못 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전 그 사람 아니면 결혼 안 할래요.”위자영이 웃었다.“아유, 서로 눈맞는다는 게 이런 거지 뭐니? 선남선녀가 만났어.”서경주는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었다.“그러니까 어젯밤 한나절을 공들여 그 집 파티에 간 거냐? 어제 왜 날 속인 거냐? 내가 여름이도 가라고 할까 봐? 참 대단한 모녀군.”서유인이 입을 삐죽였다.“걔는 가라 그래서 뭐 하게요? 그런 데 가본 적도 없을 텐데요. 우리 집 망신이나 시킬까 봐 겁나네요. 그리고 걔는 약혼자 있잖아요? 괜히 잘난 서울 재벌들 만났다가 맘 변해서 약혼자 차버리면 어떡해요?”“뭐라고!”서경주는 화가 나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났다. 그러다 계단 위에 서 있는 여름을 보고는 멈칫했다.“여름아….”“어머, 오해하지 말거라!”위자영이 얼른 웃으며 말했다.“유인이 말은 네가 막 동성에서 와서 그런 파티에 가는 게 익숙하지 않을까 봐 그런 거지. 게다가 그 집안 파티는 또 일반적인 파티랑은 달라서 말이다.”여름의 눈
여름은 사실 벨레스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 그냥 갔다.오후 5시가 되어서야 두 사람은 회사에서 돌아왔다. 집은 이미 화려하게 조명이 밝혀져 있었고 정원은 귀한 식물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청소도 안팎으로 깔끔하게 마친 상태였다.위자영은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기도요.’, ‘저기도요,’ 하며 청소를 지시하고 있었다.서유인은 또 올 시즌 가장 비싼 트위드 재킷에 아래는 치마를 받쳐입고 어깨에는 숄을 걸치고 있었다. 긴 머리도 매우 신경 써서 스타일링했다. 앞머리는 웨이브를 주고 뒤쪽은 머리를 땋아서 그야말로 공주 같았다.“여보, 오늘 여름이 데리고 회사 갔었다면서요?”위자영이 올라와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을 했다.“내가 내 딸 데리고 회사 견학도 못 하나?”서경주가 얼굴을 찡그렸다.“그럴 리가요.”위자영이 짜증을 꾹 참고 웃으며 말했다.“오늘 너 입으라고 명품으로 많이 사 왔다. 동성에서는 못 사는 브랜드일 거야. 올라가 입어보렴. 좀 이따 네 제부 될 사람도 올 텐데 너무 대충 입고 있으면 안 되지.”“가보렴.”그제야 아내를 보는 서경주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여름은 올라가 옷장 문을 열어보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명품 좋아하시네. 다 몇 년 전 재고 아냐? 컬러도 너무 노티 나고. 이런 걸 입고 나갔다간 웃음거리만 되겠네.’하지만 상관없었다. 여름은 자신의 외모에 자신 있었다.20분 후, 여름이 내려갔다.노티 나는 촌뜨기 꼴로 내려올 걸 기대하던 두 모녀는 순간 넋이 나갔다. 여름은 위자영이 사 온 긴 회색 패딩을 입고 있었다. 워낙 루즈한 핏이라 보통 사람이 입었다면 거적때기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름은 지퍼를 연 채 안에 아이보리색 스웨터를 받쳐 입고 아래는 흰색 캐주얼 바지를 입고 있었다.얼굴엔 완전히 민낯에 붉은 립스틱만 살짝 발랐을 뿐인데 열일곱 소녀마냥 맑고 청순해서 너무나 예뻤다.잔뜩 치장한 채 옆에 서 있는 유인이 되레 촌스러워 보였다.여름은 눈웃음을 치며 일부러 이렇게 말
여름은 얼굴빛이 점점 파랗게 질렸다.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욱신거리는 통증이 시작되었다. 가능한 한 평생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하준 씨, 여기에요!”서유인이 얼른 뛰어가 하준의 팔에 착 감겼다. 누가 보면 영락없는 열애 중인 커플의 모습이었다.“아!”하준은 보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뭐야? 어제 춤 한 번 췄다고 애인 행세를 할 셈인가?’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서경주와 위자영이 부랴부랴 다가왔다.“어서 오게”서경주가 온화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하준에게 악수를 청했다.“안녕하십니까? 댁에서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서경주에게 하준은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대했다. 다른 사람들에게처럼 거만하거나 체면을 깎아 내리는 태도가 아니었다.“무슨 소리예요. 최 회장이 이렇게 와주니 우리가 영광이죠.”위자영이 주름이 생길 지경으로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서경주는 한껏 오버하는 아내가 민망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예의를 갖췄다.“안으로 들어와요. 날이 춥지요?”부부가 하준을 위해 길을 터주면서 여름은 얼떨결에 하준과 마주하게 되었다.둘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눈빛이 순식간에 엉키고 있었다. 그 강렬한 눈빛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계속 시선을 마주칠 용기가 나질 않아 여름은 애써 눈길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여름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하준도 여름을 보고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짙은 눈동자가 순간 움찔했다. 하준의 두 눈에는 폭풍우 같은 거센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그러나 하준이 워낙 잘 숨기는 바람에 그 눈빛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지만, 시선은 시종일관 여름을 향했다.서유인은 그 모습에 속이 뒤집혔다. 질투심에 얼른 하준의 팔을 잡아당겨 애교를 떨었다.“하준 씨, 뭘 봐요? 여기는 얼마 전에 우리 아빠가 밖에서 데리고 온 언니에요.”말 속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강여름이 강신희의 딸인 것은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